"제사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최근 성서학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순수 문학적 기능은 물론, 실제 과거속에서도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비평이전의 맹목적인 '성과 속'의 구분은, 새로운 빛의 조명 아래, 그것이 사실 자기중심적해석의 유치한 변형이었음을 고발한다. 공관복음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나사렛이라는 두축이 예수안에서 통합되는 것을 보여준다. 혹은 (N.T. Wright를 따라서) '메시야' 나사렛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복기로 읽어낼 수 있다.
역사적 착오에도 불구하고(눅 2:2) 누가는 예수를 로마제국 안의 예루살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누가의 세계를 주목해야 함을 의미한다(눅 3:23-38; 행 1:7-8). 갈릴리 나사렛의 예수는(눅 2:39)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정하면서 복음서의 위대한 전환점을 찍는다(9:51). 이후의 사정은, 각성 각촌을 방문하며(13:22), 예수로 인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10:18; 11:2, 20, 32; 12:32; 14:24; 16:16). 그 과정에서 안식일과 정결/부정이라는 '종교적' 성과 속의 충돌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특별히 15장).
그러므로 17장(11-19절)은 유독 장소로 대변된 성과 속의 '역전'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메시야 예수가 위치한다. 네러티브는 예수의 '이동'의 목적지를 예루살렘이라고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제일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언급하면서 '불편함'을 숨겨놓는다(11절-예수는 말그대로 불결의 '메손[중심]'에 위치한 셈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11-12절에 3번이나 등장)' 예수는 '정지'하게 된다. 열명의 문둥병자는, 행여나 (거룩한!) 독자를 안심시키려고나 한듯, "(그들은) 먼 거리를 두고 멈추어" 있었다.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외침은 의외이다: "위대한 예수여!" ('선생'으로 번역된 이 단어[에피스타타]는 갈릴리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발견하고 외쳤던 '주여!'이다[5:5; 8:24,45; 9:33,49]. 이후에 이 본문에서만 등장하고 있음은 주목할만 하다.)
오랜 전통을 가진, 부정함의 대명사 '문둥병'은 그들의 인생을 멈추었다(레 13:45f). 질병으로 인해 그들의 시간과 공간은 '격리'되고 말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가라'고 명하신다(14절).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점이 나온다. 과연 제사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로 가야만 했(다고 교육받았)을까?
물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곳에 제사장들이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들은 정결함을 선언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격리시켰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해방을 선언받기 위해서.
여기에서 반전이 나온다. 한 사람이, 예수의 명령대로 따르지 않(거나 혹은 그 무엇인가를 깨닫)고 예수께 돌아온 것이다. 공간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반전은 그의 정체인데, 짓궃게도 헬라어는 제일 마지막 단어로 '사마리테스'를 표기한다(16절). 거룩한(!) 독자들은 예수의 아쉬움에 얼굴이 달아올라야만 한다(17절의 마지막 단어인 '어디에?'에서!).
(N.T. Wright를 따르면) 메시야는 성전을 회복하는 자이다. 일찌기 누가는 3장에서 제사장 제도의 파멸을 선언하였다: 두명의 대제사장이 있는 성전(2절)에서; 죄사함/정결함의 침례가 성전이 아닌 요단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서(3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기"(9절) 때문이다.
치유된 사마리아인의 깨달음은 메시야의 인식으로 이어진다. 참 제사장은 어디인가? 나를 진정 정결케하는 분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다. 그분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계신 나사렛 예수니까. 그는, 네비게이션과 같이, '돌아옴'의 주소를 명확하게 알았다. 'home'을 잘 찍은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믿음이다. 그에게 예수는 진정한 해방을 선언하신다(19절). 시간과 공간, 영원한 세계의 문이 '사마리아'인에게 열렸다. (그러므로 이후의 20f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중(among)에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편협함에 갇힌 독자들을 각성시킨다.)
이러한 성과 속의 역전은 야곱에게도 발견된다(창 28장). 그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에서 우리는 어색하게 위치하고 있는 19절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물론 주목할만한 점들은 수두룩하다. 순수한 본문 읽기를 통해서라면, 무작위적으로 등장하는 '여호와/야훼'와 '하나님' 이란 단어에 무덤덤하겠지만, 그리고 두번 잠을 깨는(16,18절) 야곱의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또한 베개가 '기둥'(마체바)로 세워질 수도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자료(역사)비평은 이에 대하여 흥미롭고 타당한 설명을 제시한다.
내러티브는 오히려 다른 질문을 유도한다: "야곱은 왜 야외취침을 했을까?" 19절의 '루스'가 '속임'(deception)이라고 알게 될때, '성과 속'의 관점에서 네러티브는 앞의 누가의 사건과 평행점을 발견한다. 그는 성 밖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발꿈치 야곱'(창 25:26)에서 '속이는 자'로(27:36) 확실하게 설정된 야곱의 아이덴티티에 따르면, 그는 맨바닥에서 잠을 잘 지언정, '눈감으면 코베어가는 곳' 루스라는 성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두를 속일 수 있는, 거짓의 화신 야곱이 자신의 세계에 '폐쇄의 경계'를 정하는 순간에, 보다 경건한 전승에 의하면(E), '하나님의 사자'는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하고, 보다 인간적인 전승에 의하면(J), '야훼께서' 그 위에 서 계셨다(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로, 야곱의 깨달음은 자아가 깨어지는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었다. "야훼가 여기에!"(16절) 고립의 장소에 찾아오신 야훼는 야곱을 변화시키어, 그로 '하나님의 집(벧엘)'을 재발견하게 하며, 그가 자신의 입술로 '서원'하게 만들었다. "야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1절의 난제는 신앙의 신비지만, 신구약은 변함없이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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