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해석학] 리쾨르 연구

진실과열정 2008. 8. 2. 13:28
* 2008년 1학기 해석학 세미나(지도교수: 김종걸) 시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리쾨르라는 '거대행성'에 발자국 하나를 남겼을 뿐, 아직도 리쾨르는 감히 넘을 수 없는 거인임에 분명합니다.

제 출 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메타-리쾨르(meta-Ricoeur)에서 미트-리쾨르(meet-Ricoeur)로:

리쾨르에 대한 몇 가지 접근들과 기독교적인 자기변혁의 읽기


Ⅰ. 서론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행 14:12)

    해석학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전통의 권위를 소중히 여기는 학문 자체의 특성이 반영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단순하게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생각해볼 때,[1] 고대 철학자(플라톤)에서부터 현대 학자(가다머)들까지 해석학(Hermeneutics)의 출발점으로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Hermes)를 뽑고 있다. 헤르메스는 신이다. 이 신은 인간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기능으로 요약될 수 없는, 일종의 인간 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의 분신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관계의 복잡다단한 현상들에 대한 설명의 근원으로서, 그리스인들은 특유의 합리성으로 헤르메스라는 신에게 세계와 세계의 만남에서 비롯된 제반 사건들의 기원을 찾았던 셈이다. 이는 유독 그리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히브리인들 역시 인간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신적인 해법을 최고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은 고집스럽게 유일신 야웨에게 모든 것의 원인을 물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나고 있지만 말이다(창 40:8; 사 45:7).[2] 이렇게 볼 때, 해석의 필요성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고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소속된 집단의 특성에 의해서 그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해석학은 세계사와 함께 한다. ‘선’을 향한 인류의 끝없는 고뇌 속에서 배태된 것이 바로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석학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며, 이들은 자신의 시대 속에서 과거를 비판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견해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비교적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어거스틴은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성서의 해석권을 박탈해버리는 선택을 했고, 종교개혁자들은 탈권위적 운동을 통해 이성과 문법 중심의 해석을 제시했다. 이후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는 이성과 언어의 중요성과 함께 현장이 주목되어야 함을 강조하게 되었고, 가다머와 리쾨르에 이르러서는 삶의 터전 속에서 확보된 정당성의 개념이 드러나야 함을 역설했다.

    본 연구에서는 삶의 터전을 고려해야 해석의 기능이 비로소 활동할 수 있음을 주장했던 폴 리쾨르의 해석사적 위치를 점검하려고 한다. 그 방법론으로는 비교적 초기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학적 해석학에 집중하면서, 리쾨르가 제기했던 올바른 해석자의 자리매김을 되 찾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연구자는 일종의 언어유희를 사용한다. 즉, ‘메타-리쾨르’에서부터 ‘미트-리쾨르’로 나아가는 것이다.



Ⅱ. 본론

  1.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

    아마 폴 리쾨르라고 하면, 무엇보다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이란 단어가 떠오르게 된다. 정신분석, 사회학 이론, 역사, 문학 이론, 종교 연구 등 리쾨르의 해석학적 아치(hermeneutical arch)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3] 그러나 리쾨르는 자신의 학문적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간학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삶 자체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사회와 실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기에,[4] ‘간학문적’이라는 것이 그에게 붙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행추종자’와 크게 다르지 않는 차원에서 ‘간학문적’이란 형용사를 리쾨르에게 붙이는 것은 오해이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로 대표되는 기억은 20세기의 지성인들이 세계에 대하여 한걸음 후퇴하게 만들었다. 크리스티앙 들라파캉뉴는 이 시기를, 세계에 대한 변혁의 사명이라는 꿈이 깨어지고 단지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게 했던 시기라고 말한다.[5] 이어서 그는 가다머와 리쾨르로 이어지는 ‘철학적 해석학’과, 반대로 레비-스트로스로 대변되는 ‘과학적 구조주의’가 혼돈을 통과하는 유럽의 두 바퀴였다고 한다.[6] 정작 본인도 그렇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가 프랑수아 도스가 보여주는 리쾨르의 삶과 흔적들은 프랑스인 특유의 낭만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역사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역사에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리쾨르의 대원칙은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7] 그렇기에 그는 모든 역사에 직접 참여한다. 심지어 오랜 포로생활 속에서도 지옥은 천국으로 바꾸었으니, 당시 금서인 후설의 「이념」을 좁은 여백에 번역하면서 생긴 -생각에 잠길 때에 습관적으로 얼굴을 감싸는 바람에- 보랏빛 얼굴로 동료들에게 소박한 웃음을 주었다는 일화는 소설에나 볼만할 정도이다.[8]

    리쾨르는 다독가이면서도[9] 다작가이다.[10]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는 말이 리쾨르에게는 입에 발린 칭찬은 아니었다. 1947년에 처녀작(Karl Jaspers et la Philosophie de l'existence)을 선보인 이후 2001년의 마지막 작품(Le Juste)을 내놓기까지 리쾨르는 쉬지 않았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글을 써내려갔기 때문에, 사상의 변화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프랑수아 도스는, “(리쾨르의) 저작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관통하는 ... 내적 원동력이 있기” 때문에, 리쾨르 철학에 어떠한 단절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 경계령을 내린다.[11] 도스의 말에는 리쾨르에게 던져진 ‘유행추종자’라는 오명을 벗기기 위한 변호적인 의도가 분명히 들어있는 것 같다. 사실 도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쾨르의 학문적 흐름을 집어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초기의 해석학적 현상학과 70년대 이후로 다양하게 나타난 역사의 해석학이 그것이다. 이를 세분하면, 50년대의 현상학적 해석학, 60년대의 상징해석학, 70년대의 은유해석학, 80년대의 행위해석학, 그리고 90년대의 자기해석학으로,[12] 리쾨르의 학문세계는 그 자신이 바로 경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리쾨르의 해박함만을 따라가려 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뱁새짓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그의 책을 읽으려면 최소한 너 댓 가지의 주변 학문을 알아야할 것이다.[13] 그러므로 연구자는 뱁새에게 맞는 적합한 시도를 하려한다. 바로 리쾨르에 ‘관한’ 읽기이다. 이를 ‘메타-리쾨르’로 칭할 수 있겠다.[14] 이것은 리쾨르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 중에서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순간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해석자는 리쾨르에게서 얻어낸 빛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리쾨르의 주요한 기여 중에 하나인 실존적 성서해석과 현상학적 해석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여기에서 인간 본성을 향한 리쾨르의 반성적 탐구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2. 메타-리쾨르(meta-Ricoeur)

   1) 실존적 성서해석

    여기에서는 몇 명의 해석자들이 리쾨르를 이해한 것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15] 그것도 성서의 실존적 해석을 집중하려고 한다. 과연 리쾨르의 성서해석이 어떠하기에 이구동성으로 ‘실존적’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실존적’의 의미와 기능은 무엇일까?

    베르너 진론드(Werner G. Jeanrond)는 리쾨르의 학문여정에서 두드러지는 ‘우회’현상에 주목하면서, 그것은 인간실존에 대한 성찰의 반영이었다고 평가한다. 인간은 한 가지 원리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허가 (그 자체의 의미보다) 텍스트 이면에만 집중했던 것이나, 딜타이가 이해와 설명 사이의 이분법적인 태도로 전자만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나, 그리고 가다머가 보여주었던 반(反)-방법론적인 태도는 리쾨르에게 편협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리쾨르에게 ‘다다익선’은 모토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것은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실존을 위한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물음은 결국 (서구사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 본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존재의 심오성은 곧 성서의 심오성으로 귀착된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리쾨르는 무엇보다도 성서 본문이야말로 실존적 성찰을 가지고 해석되어야하는 대상이어야 한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던 것이다.[16]

    반성택은 「해석의 갈등」을 논의의 대상으로 선택한다. 그는 리쾨르가 구조주의와 정신분석 그리고 현상학을 평가하면서 얻어낸 결과로, “해석학의 첨단 이론을 해석학의 전통적인 과제인 성서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높이 평가한다.[17] 특별히 리쾨르는 현상학으로 성서 해석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데, 그 대상은 바로 원죄 해석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어거스틴의 개념화 대신에 상징이라는 ‘적확한 용어’를 통해서 진리의 세계를 열었다고 본다.[18] 다시 말하면 상징의 렌즈로 볼 때, 아담의 원죄 내러티브는 절대적인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징을 깊이 생각하는 독자의 의미 있는 이해와 해석 활동(실존운동)을 통해서 텍스트의 객관성은 드러난다는 것이다.

    윤철호는 「성서해석에 대한 논문(1980)」을 논한다. 즉, 불트만과 계시관념, 그리고 증언에 대한 리쾨르의 견해를 정리한다. 불트만에 대해서는 신화적 언어 대신에 시적 언어로서의 상징해석학을 주장한 것으로, 계시에 대해서는 말씀사건(케리그마)과 기록된 말씀(성서) 사이의 객관화와 이해의 변증법을 통해 결국 텍스트 앞에서 자기이해로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증언에 대해서는 역사성보다는 텍스트가 어떠한 문학적 장르를 통해서 증언되고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그 텍스트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요약한다.[19]

    백운철은 리쾨르가 철학적 해석학과의 관계 속에서 성서 해석학의 위치를 잡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종교적 직관보다 성서 텍스트와의 만남이 중요하기 때문에, 텍스트 해석을 위한 철학적 해석학의 이론이 성서 해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일종의 공통분모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리쾨르는 주제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지적한다. 즉, 철학의 요청인 ‘희망의 앎’이라는 것이, 성서에서는 ‘악의 상징에서 제기된 인간 실존의 한계가 부활에 대한 희망의 논리’로 극복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20] 이렇게 볼 때,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 해석은 너무나 성급한 나머지 철저한 분석도구를 거치지 못한 ‘가까운 길’에 불과한 셈이 된다.[21] 결국 리쾨르에게 성서 텍스트는 통시적인 접근과 공시적인 접근 모두에게 열려있어야만 하며, 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종착점으로 ‘사회적 실천을 동반하는 증거의 삶이라는 실존적인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22]

    이제는 연구자가 리쾨르의 글을 통해서 실존적 해석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 대상으로 「해석의 갈등」을 선택한다. 이 책은 리쾨르가 대면하고 있었던 학문적 경계선들을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현상학이다. 각 주제들에 대한 리쾨르의 이해가 너무 심오해서 가지가 줄기를 대신할 정도이다. 그런데 사실 리쾨르는 이러한 세 개의 가지들을 적당하게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우선 구조주의는 그 자체로 내면적 존재 방식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대표적 구조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했던 신화 유형(토템 모델로 설명의 방식)만을 일반화시킨 것은 케리그마 유형(뜻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무례인 것이다.[23] 특별히 언어에 있어서, 폐쇄적인 입장을 가진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태도와는 반대로, “개방적이고 열어젖힌 언어”의 의미론적 특징을 강조하면서 랑그와 파롤의 재통합을 주장했던 측면에서 볼 때,[24] 리쾨르는 구조주의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고 하겠다.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경제학 모델의 변용이라고 분석한다. 즉 프로이트의 이론은 환상의 ‘경제학’으로, 충동 단념과 대리 만족 그리고 보상의 균형이라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신의 역할을 규정했다는 점이 프로이트의 독창성이라는 것이다.[25] 또한 발생학 모델로 볼 때, 종교와 개인의 유아기 상황이 상당히 비슷하며,[26] 거기에서부터 모세의 유일신교도 설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참신함에 대해서, 리쾨르는 단순하게 공격한다. 경제학 모델, 발생학 모델이라고? 좋다. ‘그렇다면, 그 모델로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27] 결국 하나의 관점으로 인간 현상, 그리고 문화 현상을 파악하려는 것은 또 하나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다름 아니다.

    리쾨르는 현상학을 다루면서 하이데거에게서 지속적인 사상인 ‘나는 존재한다’의 해석학을 발견한다.[28] 이러한 자기 존재성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다시금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를 분석하면서(‘이드’의 실재론과 랑그 구조의 실재론의 결합),[29] 존재 규명을 위한 철학적 해석학의 과제를 지적한다. 해석학을 통해서 현상학은 개혁되어야 한다. ‘관념론의 코기토, 주관주의와 유아주의의 환상을 없애고,’[30] 당사자의 그 경험을 확보하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쾨르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성 연구로 진입한다. 존재의 핵심문제는 ‘악’이며, 그것의 나타남은 ‘원죄사상’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의 이면을 살펴보면서, 리쾨르는 원죄의 내용이 아닌 의미를 읽을 것을 지적한다. 즉, ‘개념이 아니라 상징을 봐야 한다.’[31] 그러므로 이 상징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해석자는 상징에 기반하면서도 동시에 상징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2] 그것은 반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반성은 존재하려는 노력과 존재 욕망을 증언하는 작품들을 통하여 그 노력과 욕망을 내 것으로 삼는다.’[33]

    마지막으로 리쾨르는 파롤만을 선택했던 불트만의 오해를 풀어내면서,[34] 진정한 이해란 말하는 자의 의미와 독자의 의미 둘 다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텍스트이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실존 운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형식화된 실존을 극복하기 위해서, ‘텍스트의 뜻이 내 실존과 맞서는 관념적인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내 실존에 전달되는 존재에 속해야 한다.’[35]

    이상과 같이 「해석의 갈등」을 볼 때, 해석은 갈등만의 세계에 있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갈등’이라는 말에는 심리적 어감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말한 해석이 심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새롭게하는 실존적 차원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충돌’과 같은 역동적 어감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해석은 갈등하면서 동시에 충돌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신학적 해석학의 차원에서 볼 때), 한 때 포기되었던 거룩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는 측면에서 리쾨르는 세기말 중요한 이정표임에 분명하다.

    이상의 견해들을 정리해본다면, 기존의 해석이 올바른 인간이해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에 반하여 리쾨르는 통전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적극적인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해서 텍스트 자체의 상징을 실천적 행위를 위해서 읽어내는 것으로 해석의 실존적 의미를 두었다고 하겠다.


   2) 현상학적 해석학

    정승태 교수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과 함께 리쾨르를 소개하면서, 이 둘을 “현상학적 해석학”의 범주에 포함시켰다.[36] 그러면서 이후에 나오는 존재론적 해석학과 비판적 해석학의 매개자로서 리쾨르의 위치를 구축한다. 사실 리쾨르는 존재론적 해석학과 비판적 해석학 모두에 소속될 수 있다.[37] 그럼에도 언어를 통한 존재의 이해야 말로 독자의 현존재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리쾨르는 존재론을 어느 정도 비평하고 있다.[38] 또한 이데올로기를 ‘긍정’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리쾨르는 비판적 해석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39] 그러나 이런 점들이 리쾨르를 현상학적 해석학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상학도 비판하기 때문이다. 리쾨르가 현상학적 해석자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해를 우선적으로 추구했던 순수한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현상의 의미를 좇음에 있어서 본질직관이 아닌 기호의 해석학을 선택함으로(현상학의 극복), 저자로부터 분리된 텍스트의 이해를 추구하게 되고(존재론의 극복), 그 과정에서 희망을 향한 투쟁을 계속하면서(비판론의 극복), 결국 자신이 행동해야할 정당한 근거를 확립해나가는 해석자가 바로 리쾨르였던 셈이다.

    오토 푀겔러(Otto Pöggeler)는 이보다 훨씬 전에 리쾨르를 현상학적 해석자로 분류했다.[40]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후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41] 해석에 관한 리쾨르의 짧은 글에서, 푀겔러는 리쾨르가 언어의 무한한 힘을 발견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서 주석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해석전통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전자는 어떤 것에 대한 어떤 것의 진술이라는 차원에서 의미의 일원성/공동성을 묻는 반면, 후자는 교회라는 탁월한 권위를 등에 업고, 유비를 통한 상징과의 결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42] 다의적인 의미로 나아간다는 측면에서는 성서주석이 탁월했지만, 교회의 권위 자체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후 스피노자에서부터 시작된 해석의 자유(문서해석이 아닌 자연해석[43])는 곧 프로이트와 니체를 겪으면서 중구난방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의미의 회복 즉 “회의의 반대로의 믿음”을 찾는 것이 리쾨르의 선택이었다. 믿음을 위한 이해, 그러한 이해를 위해서 현상학은 적합한 수단이 되었다.[44] 특별히 언어에 대한 신뢰를 품고서, “상징의 현상학”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먼저 대상에 강조점을 두고, 그 다음 상징의 풍부성을 역설하여, 결국 근원적인 언어의 발견적인 힘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45] 그리고 이것은 리쾨르가 언어를 중심으로, 텍스트 자체와의 실존적 만남이라는 이후의 해석학적 변화를 예측하게 한다.[46]

    그렇다면,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철학자의 고뇌가 다른 것이 아닌 자기반성으로 출발점을 삼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현실의 문제에 참여하기를 누구보다도 앞서 했던 리쾨르에게 있어서, 행위의 원초적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자기반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리쾨르의 자기반성은 끝없이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무한퇴진’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중요한 대상점을 향해서 전진하는 자기반성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말씀이었다.[47] 그러므로 리쾨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결과로 “소박한 자기의식을 깨뜨리고 다시 하나의 전체적 존재자로서의 나를 형성하는” 것, 즉 자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도전을 의식하는 것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48] 다시 말해서 오용득의 자기쇄신은 피곤한 긴장의 연속이다.[49] 리쾨르에게 중요한 열쇠인 말씀, 즉 기독교가 없으면 그 만남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쾨르를 기독교적으로 만나는 선택이 필요하다.


  3. 미트-리쾨르(meet-Ricoeur)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필요하며, 학문은 진리를 위해서 존재한다. 기독교가 이미 진리 안에서 존재하며, 그러므로 반성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고백적 명제이다. 그러나 진리 자체에 대한 반감과 회의를 표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가운데에서 이러한 명제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특별히 리처드 도킨스(Richard Dokins)의 ‘밈(meme)’안에서 존재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도전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50] 그러므로 연구자는 리쾨르와의 만남을 통한 기독교적 ‘마음’의 발견이야말로 시대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 리쾨르를 만나야 한다.


   1) 기독교인 리쾨르

    김종걸 교수는 기독교의 렌즈로 리쾨르를 읽는 것이 적합하다는 점을 주장한다.[51] 사실 많은 부분에서 리쾨르의 사상은 기독교적 개념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52] 리쾨르에게 있어서 성서가 보여주는 바울의 갈등은, 철학적으로도 갈등과 욕망 속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그것이었다.[53] 그러므로 인간의 오류와 그 상징적 나타남으로서의 악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충분히 제시될 수 있는 부분이다. 대신 리쾨르의 혁명이라면 하나님을 등장시킨 것이다.[54] 기독교의 종말론만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다는 리쾨르의 주장, 그리고 그러한 리쾨르의 주장에서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는 일이 바로 리쾨르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55]

    그러므로 반성에 그치지 않는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은 리쾨르를 통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했던 그레고리 래퍼리(Gregory J. Laughery)의 시도에서 연장선을 찾을 수 있겠다.[56] 다시 말해서 해석은 낭만과 회의 사이에서 길을 잊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배경’에 집중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문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리쾨르는 본문의 세계에 집중한다. 리쾨르는 발화 행동/사건과 기록된 본문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와 유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본문은 발화된 말이 되어서, 저자와 독자 그리고 본문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57] 하지만 레퍼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이러한 리쾨르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리쾨르가 해석적인 이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이 성서 이해에도 도움을 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리쾨르는 이해(이를 ‘전형상화’[prefiguration]라고 칭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설명(이를 ‘형상화’[configuration]이라고 칭함)을 거쳐, 결국 새로운 이해(이를 ‘재형상화’[refiguration]이라고 칭함)에 이르고 있다고 분석한다.[58] 그러므로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성서 본문 역시, 본문과 그 독자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해야만 하며, 독자의 세계 안에서 활용될 수 있는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본문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될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59] 초점은 본문에서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이다. 공은 이제 우리에게 넘겨졌다. 본문 안에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불확신의 시대에서 기독교인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2) 성서 해석자 리쾨르

    성서를 다르게 읽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매력이다. 문제는 우후죽순인데, 리쾨르는 군계일학이다. 기독교인 철학자 리쾨르는 수많은 성서해석의 실제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철학자이면서도 기독교인으로서, 리쾨르의 성서관을 만나는 것 역시 매우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리쾨르의 풍부한 성서해석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 사전」(Dictionary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소개된 글[60]과 이후에 선보인 「성서의 새로운 이해」[61]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마크 왈리스(Mark. I. Wallace)는 성서해석과 관련해서 리쾨르의 세 가지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악의 상징」(The Symbolism of Evil[1960]), “성서 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1975]), 그리고 “해석적인 내러티브”(Interpretative Narrative[1990])가 성서해석과 관련한 리쾨르의 총체적인 경험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62] 「악의 상징」에서는 악의 현상에 대하여 철학적인 입장에서 주석적 읽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인간은 그들 자신들보다 더 큰 ‘적’(adversary)에 불가항력적으로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아담 신화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상징으로서의 신화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신화와 상징의 힘을 인간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해석활동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63] 두 번째로, “성서 해석학”이란 글은 예수의 비유를 분석하고 있는데, 비유가 독자들의 선이해를 뒤집어엎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내러티브 중심으로 잡혀있다고 여겨지는 성서본문 자체가 비유라는 다른 양식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창조하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해석적인 내러티브”라는 글은 후기구조주의적인 관심이 반영되어 있는데, 특별히 마가복음의 비밀 모티프에 집중하면서 서로 상대되는 내러티브상의 강조점들이 마가복음의 분열을 조장하지 않고 오히려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응집력을 살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왈리스의 리쾨르 요약은 연구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을 마치면서, 왈리스는 리쾨르의 공헌을 과거에 묻히지 않는 해석자의 부단한 노력의 자세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성서 해석이 자신들만의 방법론으로 모든 본문을 풀어보려는 잘못된 우월감에 빠져있었던 점에 대해서, 리쾨르는 동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유용한 해석학적 훈련(기법)들에 매진함으로써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64]

    「성서의 새로운 이해」는 스펙트럼이 너무 길어서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함께 읽어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확실히 탁월하다(brilliant).[65] 여기에서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구약학자인 라콕의 ‘역사비평적 접근’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리쾨르의 해설은 상당히 다르게 들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라콕은 성서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는 전승들을 분석함으로서 성서 자체의 역사성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면,[66] 리쾨르는 그러한 성서 본문 자체를 읽어나갔던 해석자들의 인식을 평가하면서 현존재자로서 본문의 현재성을 계속해서 추구한다.[67]

    예를 들면 살인에 관한 주석자와 해석자의 차이를 볼 수 있다(출 20:13). 주석자는 제 6계명을 고대근동의 율법적 상황과 이스라엘의 부족 지혜 문맥과의 연대성을 추적하면서 과거를 정당화하고 있다면,[68] 해석자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과감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결국 사랑으로 압축한다. 더 나아가 해석자는 ‘사랑의 순종’이 창조주와의 관계 아래에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감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들의 백합화를 최고의 윤리’로 보았던 예수야말로 제 6계명의 완벽한 해석자라는 것이다.[69] 이것이야말로 해석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Ⅲ. 결론: 리쾨르를 보내며

    사실, 리쾨르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것도 역사비평적인 입장을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리쾨르가 본문 자체와의 만남에서 의미를 창조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 연구자에게 아직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안토니 씨슬튼(Anthony C. Thiselton)이 리쾨르의 해석학을 분석하면서, 그의 해석학적 기여라는 독특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문 중심적인 경향성이 지적되고 있음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겠다.[70] 다시 말해서 본문의 이데올로기적 왜곡에 대한 적당한 경계로서 역사비평은 그 기여점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쾨르는 너무나 지나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71] 역사라는 것 자체가 회의의 대상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볼 때 역사는 본문 이해에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캐빈 밴후저(Kevin J. Vanhoozer)는 리쾨르가 너무나 성급하게 개념을 추상화한 나머지 그 결과 성서 강화의 본래 형식 자체를 파괴했다고 밴후저는 지적한다.[72]

    리쾨르를 보내면서 상대적으로 나의 위치가 지나치게 역사비평적이라는 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리쾨르는 방법론 자체에 의해서 좌우되는 해석자가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론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포용의 해석자라는 것을 마음에 남기게 되었다. 리쾨르의 해석의 출발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그 인간은 유한하고 오류가능성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자기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는 사유를 통해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73] 한계는 우리를 새로운 실존의 장소로 이끈다. 핵무기비축을 비롯한 냉전체제라는 힘의 세계에서 리쾨르는 세계를 반성케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리쾨르는 실존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몇 안 되는 해석자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미주>

1) 정기철, 「설교자를 위한 성서해석학입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320. 각주 4.

2) 야웨에 대한 성서의 고백이 시간과 공간(창세기가 이집트의 제도에 대하여, 제 2이사야가 페르시아의 제도에 대하여)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었다는 점을 주지할 때, 히브리인들의 해석의 고집은 더욱 부각된다(C. Westermann, Genesis 37-50: A Commentary, tr. John J. Scullion S.J.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6], 70; J. J. 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385).

3) Kevin J. Vanhoozer, “Ricoeur, Paul,” Kevin J. Vanhoozer ed., Dictionary for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Grand Rapids: Baker Academics, 2005), 692. 이 신학해석사전에 개인으로 소개된 사람은 단 5명인데(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존 칼빈, 칼 바르트), 거기에 바로 폴 리쾨르가 들어있다.

4) François Dosse, 「폴 리쾨르-삶의 의미들」, 이봉지 외 3인 공역 (서울: 동문선, 2005). 특별히 리쾨르는 야스퍼스의 영향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Ibid., 146): “타자의 중개에 의해 나 자신이 된다.”

5) Christian Delacampagne,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 조현진․유서연 역 (서울: 이제이북스, 2006), 374.

6) Ibid., 374-97. 그러나 사실 저자는 구조주의의 신비로움에 빠져있는 것 같다. 철학적 해석학에는 6페이지를 할당한 반면, 구조주의는 무려 17페이지를 쓰면서 많은 학자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7) Dosse, 「폴 리쾨르」, 70.

8) Ibid., 94, 110.

9) Ibid., 24.

10) 리쾨르의 저작에 대해서는 http://ricoeur.iaf.ac.at/FR/index.htm를 참조하라.

11) Ibid., 27. 도스가 말한 내적 원동력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도스가 볼 때, 리쾨르는 분명히 “행동하는” 철학자였다(242).

12) 정기철,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서울: 문예출판사, 2002), 9-10.

13) 그 대표적인 예가 「해석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연구자는 책을 읽으면서 제목으로 「해석들의 충돌」이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데, 리쾨르가 시도한 것이 기존의 주요한 해석들(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을 비평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리쾨르를 읽기 위해서는 그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를 정확하게 읽고 있는가에서 시작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리쾨르 연구자에게 엄청난 짐이 아닐 수 없다.

14) 메타(meta)라는 말은 헬라어 μετά에서 기원한 것으로 “후에,” “넘어서,” “함께”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인식론적으로는 “정확하게 그 범주에 관한(on)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한(about)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http://en.wikipedia.org/wiki/Meta를 참조하라.

15) Werner G. Jeanrond, 「신학적 해석학」, 최덕성 역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7), 108-18; 반성택, “가다머와 리쾨르, 20세기 해석학을 정초,” 철학아카데미 편, 「현대철학의 모험: 20세기에는 무엇을 사유했는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142-51; 윤철호, 「신뢰와 의혹」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349-83; 백운철, “리쾨르의 성서해석학,” 가톨릭신학과사상 60호 (2007 겨울), 11-54.

16) Jeanrond, 「신학적 해석학」, 118.

17) 반성택, “가다머와 리쾨르,” 143.

18) Ibid., 147.

19) 윤철호, 「신뢰와 의혹」, 377-82.

20) 백운철, “리쾨르의 성서해석학,” 16-7.

21) Ibid., 24.

22) Ibid., 53.

23) Paul Ricoeur, 「해석의 갈등」, 양명수 역 (서울: 아카넷, 2001), 63.

24) Ibid., 94, 106,

25) Ibid., 142.

26) Ibid., 146.

27) Ibid., 155.

28) Ibid., 252.

29) Ibid., 281-4.

30) Ibid., 285.

31) Ibid., 302.

32) Ibid., 324.

33) Ibid., 358.

34) Ibid., 434.

35) Ibid., 435.

36) 정승태, 「그까이꺼 해석학! 폼나게 풀어보자!」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171-210.

37) Ibid., 199, 203.

38) Ibid., 194. “의미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의미를 리쾨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랑그(사건)와 파롤(의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리쾨르는 무게추를 랑그 쪽에 실고 있음을 알게 된다.

39) Ibid., 203.

40) Paul Ricoeur, “리쾨르의 현상학적 해석학,” Otto Pöggeler 편, 「해석학의 철학」, 박순영 역 (서울: 서광사, 1993), 325-350. 이 글은 리쾨르의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eud(1965)를 독일어로 편집하고 번역한 Die Interpretation(1969)에 실린 글로, 소제목은 “해석학의 갈등”으로 되어있다.

41) Ibid., 373.

42) Ibid., 330-1.

43) Ibid., 332.

44) Ibid., 335.

45) Ibid., 340.

46) 정기철,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11-27.

47) Dosse, 「폴 리쾨르」, 252.

48) 오용득, 「자기쇄신의 학으로서의 철학적 해석학」 (부산: 책펴냄열린사, 2005), 149, 157.

49)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으로서의 반성은 현재의 ‘나’의 의식이 항상 허위의식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항상 새롭게 나타나는 상징들을 통해 의식을 해석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Ibid., 158).”

50) Richard Dokins, 「만들어진 신」, 이한음 역 (서울: 김영사, 2007), 306, 314-5.

51) 김종걸, 「리꾀르의 해석학적 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3), 22-4.

52) Ibid., 46, 93, 120, 176.

53) Ibid., 61.

54) Ibid., 164.

55) Ibid., 194.

56) Gregory J. Laughery, Living Hermeneutics in Motion: An Analysis and Evaluation of Paul Ricoeur's Contribution to Biblical Hermeneutics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2), 11-12.

57) Ibid., 33-43.

58) ‘전형상화, 형상화, 재형상화’라는 개념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59) Ibid., 133-48.

60) Mark I. Wallace, “Ricoeur, Paul,” John H. Hayes, ed., Dictiona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K-Z (Nashville: Abingdon Press, 1999), 403-5.

61) André LaCocque and Paul Ricoeur, 「성서의 새로운 이해」, 김창주 역 (서울: 살림, 2006)

62) “성서 해석학”은 SBL 산하에 있는 Semeia라는 잡지에 기고되었으며(4호 27-148), 학교에서 ATLA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해석적인 내러티브”는 Gegina Schwartz ed., The Book and the Text: The Bible and Literary Theory (Massachusetts: Basil Blackwell, 1990), 237-257에 나와 있으며, 역시 학교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다.

63) 이를 “제2의 아이”(second naïvete)라고 표현한다.

64) Wallace, “Ricoeur, Paul,” 404.

65) Se������n E. McEvenue, “Thinking Biblically: exegetical and hermeneutical studies,” Theological Studies 60 (1999), 539-41.

66) LaCocque and Ricoeur, 「성서의 새로운 이해」, 58.

67) Ibid., 107.

68) Ibid., 140.

69) Ibid., 192.

70) Anthony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forming Biblical Reading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2), 368-9.

71) 윤철호, 「신뢰와 의혹」, 382.

72) Vanhoozer, “Ricoeur, Paul,” 692.

73) 김종걸, “리꾀르의 인간학적 해석학,” 한국해석학회 편, 「해석과 이해」 (서울: 지평문화사, 1996),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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