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세미나(2008.3.17)
담당교수: 김종걸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제목: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1.어거스틴의 그늘: 역사의 고집과 반성으로 본 해석학의 흐름
헬레니즘 시대의 행복론 비판으로 촉발된 중세로의 진입과 더불어 성서는 ‘해석되어야 하는’ 것에서
가톨릭교회가 정한 해석 기준에 따라 ‘이미 해석되어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1]
변화의 중심에 어거스틴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교회의 행정력을 마음껏 사용하면서까지 ‘쉬우면서-다른’ 해석을 정죄할 수 있었던 418년의 카르타고 공의회 사건 이후, ‘보편적’ 가톨릭교회로 대변되는 중세의 해석학적 풍토를 대표하는 ‘모범적인’ 선례가 되고 말았다.[2] 이제 중세는 구별성이라는 제사장 신학의 구현으로 특징되어졌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철의 장막이 세워졌고, 서방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독선적 우월성이 선언되면서 교회간의 분열이 심화되었으며, 세속 권력의 지지를 업은 교회가 전통적 교리만을 절대시하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실현했다.[3] 간단히 말하자면, 권위자의 말이 곧 해석일 뿐, 그 자리에 헤르메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세로의 변화를 조금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세는 봉건제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는 종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봉건화된 유럽사회의 변화는 교황의 절대 권력에도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자신의 영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짐하듯이 세속의 모든 사람들은 교황과 그 해석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이다.[4] 그 정도였다면 좋았겠지만, 교회는 자신의 영역을 성당 밖으로 내뻗었고, 해석의 권위를 앞세워 세상을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신이 절대적인 해석자가 된 교회는, 세속 역사의 해석자가 되고자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으며, 인간 영혼의 해석자가 되고자 이성을 계시에 복종시키려고 스콜라 철학을 시도했다는 점은,[5] 교회의 오만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된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교회의 오만은 자신이 파놓은 덫에 자기가 걸리면서 추락하게 된다. (중세 사회의 몰락을 짧은 지면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몇 가지 분석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고딕식 건축양식(1140-1420년)으로 대변할 수 있는 중세의 바벨탑은, 본래 바벨탑이 언어로 시작해서 언어로 무너지듯이(창 11:1,7), 스콜라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에 의해서,[6] 그리고 보다 높은 곳까지 성당의 첨탑을 세우기 위한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해서[7]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15세기에 이르러, 견고한 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발휘했던 중세라는 사회는, ‘성의 천적’ 대포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질서의 요구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8] 이제는 혁명의 시대가 온 것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했듯이, 세속 권력의 재편성으로 교회는 절대적인 권위를 계속 고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스콜라에서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자각하게 된 일종의 돌연변이(피터 아벨라드)의 등장으로 중세 교회는 대내외적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맞는데 장사 없다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문제들로 중세의 교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르네상스에서부터 시작해서 계몽사상까지 이어지는 과학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절대 종교로 절대 숭상을 요구했던 중세가 과학의 세상을 해석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나 과거 전통에서 권위를 찾으려했던 교회의 “퇴행적 특징”[9]을 그대로 이어받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가 고대로 눈을 돌리자, 사람들의 이목 역시 점차 교회 밖으로 돌리고 세상을 향했다. 더구나, 이제 새로운 질서에 대놓고 환영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은,[10] 때가 되자, 루터와 칼빈이 시작한 새로운 권력 이동이라는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권력도 해석에 있어서는 옛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 그들 역시 조직의 존재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해석과 개혁에 대해서,[11] ‘다소 협소한 의미’[12]에서 전개된 해석이었다고만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2.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쳐 나아간다: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현세적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3]
한번 돌기 시작한 세상은 조심스럽게 원심력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로 대표되는 17세기의 사상가들이 익명으로 자유사상을 표현하면서, 억압 가운데 “내․외적 의미 구분의 철학자”로 등장했다면,[14]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탈권위적 정서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15] 계몽사상의 대표주자인 이신론은 천 년이 넘게 왕좌를 지키고 있었던 신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성과 계시가 모두 지식의 두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신학의 주장은, 이신론자에게 있어서 어불성설이었고, 오히려 그들은 이성과 계시가 이제는 자기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16] 그렇다고 계몽주의엔 이신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 할례대학의 제믈러(Semler, 1725-1791)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공시적(synchronistic) 해석에서 벗어나 성서의 저자들이 이해했던 바를 이해하기 위한 통시적(diachronic) 해석을 주장하기도 했다.[17]
과학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세계를 낭만주의로 이끌었다. 고대 정신의 포착이라는 목표를 두고, 언어를 통해서 저자의 생각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이 낭만주의적 해석이다.[18]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의 엄격한 검열 아래에서 독일의 낭만주의는 일종의 정치적인 운동으로 나타났으니, 그 방법들 가운데 행간에 쓰면서 언어의 의미를 내․외적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19]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쳐 간다. ‘좌-계몽, 우-낭만’ 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이름은 너무나 낯설며, (우리말 발음으로) 부르기에 쉽지 않았다.
1)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3)
슐라이어마허의 시대 이전에도 해석은 실제적인 삶의 문제였다. 예부터 법조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했으며, 비록 많은 사람이 떠나갔어도 목사들은 자신의 양떼를 위해서 성서를 해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석을 해왔으며, 해석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해석을 할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가 그 상황을 주목해서 볼 때, 당시의 치명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전체적인 원칙도 없이 필요한 분야마다 제각각 이루어지던 현장 기술 정도로 머문 수준이었던 것이다.[20] 슐라이어마허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해의 기술인 해석학은 아직 보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수의 특수해석학이 있을 뿐이다.”[21] 보편적인 해석학의 수준으로 학문화하기 위해서,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관념론)를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언어적인 기호를 해독한다는 계몽주의의 해석의 개념을 설명기술, 적용, 이해기술로 나누면서, 슐라이어마허는 이해의 기술만을 해석학의 과제로 삼게 된다. 이로 인해서 해석학은 일종의 기술이 되며, 기술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의 특수성에는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측면에서, 특수해석학을 초월한 보편해석학의 지평은 새롭게 열린다.[22]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해석에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이 함께 작동한다.[23] 달리 말해서 문법적 해석은 보편적 언어체계를 사용한다면, 심리적 해석은 언어 사용자의 개별언어체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24] 예를 들면, “선생님이다!”라는 말은 대상을 지정하는 문법적 의미가 주어졌지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학생과 그냥 볼일을 보는 학생 사이의 심리적 의미는 생과 사의 구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에 대해서, 슐라이어마허는 각각의 해석이 독자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언어 기호’로 이해되면서 언어에 대한 지식의 차원을 말하고, 후자는 ‘정신의 사실’로 이해되면서 저자에 대한 지식의 차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많은 사람들이 체험보다 논리에 약하기 때문에 후자보다 전자에 집중하려는 성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25] 정리하면, 이 둘은 어느 것이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으로 보았으며, 결과적으로 해석학적 순환 이론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연구자들은 그의 해석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 플라톤을 번역하면서 해석의 실제와 반성을 경험했다는 점,[26]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얻어낸 것으로 이후 「변증법」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을 발견했다는 점,[27] 헤겔과 셸링의 형이상학적 사변에 맞서는 동시에 칸트적인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얻어낸 일원론적인 종교적 경험(절대 의존의 감정)의 중요성을 지적했다는 점,[28] 그리고 창작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와 같이 저자의 마음에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이해의 기술적 측면을 인식했다는 점이다.[29] 결국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적 상황이 슐라이어마허를 보편적 해석학을 위한 촉진제 역할을 감당하도록 했다.”[30]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개혁 이후 파벌화된 성서 해석의 현장에서,[31] ‘(언어에 대해서 공평한 자리를 차지한) 감동과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적 세계로서) 대화’의 수사(rhetoric)를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식 모형을 체계화했다는(인식의 순환성) 점이야말로, 슐라이어마허를 ‘개신교 신학의 아버지’이자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절대 감정’의 범신론화를 문제시한 정통신학의 무리한 마녀사냥에 어느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물에 빠진 놈 건졌더니 봇짐 내 놓으라’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 슐라이어마허의 진정한 재평가가 수반되기를 기대한다.
2)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19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자들의 오만은 중세의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객관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다.[32] 그도 그럴 것이, 엑스선의 발견으로 인간 내부를 볼 수 있고, 마취제의 발명으로 맹장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본다면, 인류의 해방자로서의 자연과학의 등장에 반기를 들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33] 승승장구하는 자연과학에 비해서 오히려 갈수록 초라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인문학)이나, (딜타이의 표현대로) ‘정신과학’이었다. 정신과학이 지난 천 년의 세월을 이끌었다면, 나머지 천 년은 자연과학에게 맡겨야할 처지였다. 하지만 인문학 자체의 솔직한 자기반성을 거친 인문학자로서, 딜타이는 일어났고, 그가 손에 든 것은 바로 슐라이어마허였다.
딜타이에 의해 슐라이어마허가 부활했다고 할 정도로, 딜타이는 절대적으로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아래 있다.[34] 딜타이의 연구는 슐라이어마허였지만, 그가 선 땅은 위대한 선배의 자리와 달랐다. 선배가 문장의 의미와 저자의 의도가 파악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에 서 있었다면, 딜타이는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에 밀리는 새 시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35] 그러므로 정신과학자인 딜타이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신의 이해였던 것이다. 그토록 정신을 고집했던 이유에 대해서 태생적(목사의 아들)인 면도 생각할 수 있고,[36] 시대 속에서 개인이라는 개별적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삶의 자세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37] 어찌 되었건, 과학세계와 정신세계는 두 세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로, 딜타이에게 있어서 단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방식이라는 것이, 자연과학의 입장에는 유치할 정도겠지만, 체험과 심리적 인식이었다. 중요한 점은, 19세기에 이르면 자연과학은 객관적 지식을 얻는 고유한 방법론을 발전시켰지만 정신과학은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고,[38] 딜타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세계 인식에 도전했던 것이다.
딜타이는 자연과학이 설명하는 것이라면 정신과학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식하는 방법의 차이를 이야기한다.[39] 정신과학도 인식론의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감각을 통한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이 나뉜다(이것이 체험이다). 즉 정신과학에 의하면 우리는 체험 속에서 자각하게 되는데, 이 자각은 칸트의 추상적 인식 주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느끼는 의욕하는 인간이다. 이 때, 내적인 것은 자각 가능한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지만, 개인적인 체험이 외적 감각으로 매개된 것이므로 체험의 대상 자체에 까지 인식을 확신시킬 순 없게 된다. 결국 우리는 표현을 원초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사실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해는 주관적(심리적) 체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역사로부터 경험하는 인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를 소개한 딜타이 자신이, 슐라이어마허의 (이해와 감정의) 상호보완적 접근을 버리고, 주관성만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딜타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성을 주제화했다는 측면에서 하이데거에게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3)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데거가 38세에 쓴 「존재와 시간(1927)」에 대해서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기를,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정도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추적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언어가 개념을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보인 하이데거 자신의 새로운 언어의 창조행위에 기인한 것 같다.[40] 기존의 언어가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명시하면서까지 하이데거가 밝혀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존재이다.[41] 존재 사유의 이유에 대해서, 존재의 물음 없이 앞으로만 나아갔던 과학과 그로인한 비인간화라는, 하이데거가 맞이한 현실이었다는 견해가 있다.[42] 달리 말하자면, “신들이 사라져 버린 몰아세움의 세계”에서 고향을 상실한 존재에 대한 예언자적 호소였다는 것이다.[43]
존재 이해의 방법론으로,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이었다. 하이데거는 현상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사물의 본질적인 성격을 그것의 상황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본질들을 해석학적 활동 속에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현상과 이 현상의 분석자 모두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만이 오직 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44] 이는 현존재의 선이해에서 출발해서 존재를 탐구한다는, 일종의 해석학적 진화이다. 왜냐하면 과거가 인식론에 머물렀다면, 하이데거에 의해서 존재 인식자와 그 대상의 존재 자체의 규명을 통해서, 결국엔 해석학의 길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45] 이렇게 하이데거에 의해서 철학적 해석학은 해석학적 철학(존재론)으로 한 층 성숙케 된다.
요약하면, 슐라이어마허에서 딜타이를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해석자들은 시대의 흐름에 극도로 민감했으며, 거인의 어깨 위에서 흐름을 역행할 수 있는 개척자 정신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들을 따른다면, 해석학자는 결국 본문과 함께 시대를 해석하는 예언자가 아닐까?
끝
미주(endnote)
[1]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슐라이어마허, 딜타이를 중심으로,” 철학아카데미 편, 「현대철학의 모험: 20세기에는 무엇을 사유했는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158.
[2] 실제로 에베소 에큐메니칼 공의회(431년)에서는 신학논쟁에 대해서 토론 없이 정죄하기도 했다(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송인설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241).
[3] 베르너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해석학의 역사와 특성」, 최덕성 역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7), 49.
[4] 브루스 셸리,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박희석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232-3.
[5] Ibid., 241. 한편, 진론드(「신학적 해석학」, 55)는 스콜라의 역할이 ‘성스로운 책’에 난외주를 다는 것으로 제한되면서, 해석이 교리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6] 셸리, 「교회사」, 256. 한편, 이러한 측면에 맥락에 대하여, 이경재(「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서울: 도서출판 살림, 2003])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예로 들면서, 스콜라적 사유의 결과로 절대적 신이 다스리고 있음이 선언되었기에, (무한영역인)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개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음의 시기였다고 주장한다(58,68,71,72).
[7] 린 화이트 주니어,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강일휴 역 (서울: 지식의풍경사, 2006)를 보라. 봉건사회의 기술적 배경으로 저자는, 기병대를 가능케 한 ‘등자’의 도입(55), 중질토를 극복했던 무거운 쟁기기술(99), 결국 1260년에 한 기술자는 “가축 없이 달리는 마차, 새처럼 나는 기계, 바다 밑에 다니는 기계가 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였고, 그 기술자는 당시 중세기술의 견해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155).
[8] 만프레트 라이츠, 「중세산책」, 이현정 역 (서울: 플레닛미디어, 2006), 29, 343, 344.
[9] 한스 큉,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이종한 역 (왜관: 분도출판사, 2002), 594.
[10] 유스토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서영일 역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5), 15.
[11] 정수영, 「역사와 신학」 (대전: 도서출판 명현, 2000), 351-2, 362-3.
[12] 정승태, 「그까이꺼 해석학! 폼나게 풀어보자」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125.
[13]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정도영․차명수 역 (서울: 한길사, 1998), 416.
[14]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어마허 연구」 (서울: 한들출판사, 2004), 96.
[15] 홉스봄(「혁명의 시대」, 416, 419)은 프랑스의 경우 1789-1848년에 비종교화의 경향이 대단했으며, 그것은 실제로 언어, 상징, 복장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로 보건대 반대로 비종교화를 제재하려는 프로이센의 검열(1749-1840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김승철, 「슐라이어마허 연구」, 167).
[16] 에드워드 윌슨, 「통섭」, 최재천․장대익 역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5), 79.
[17]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68.
[18] 정승태, 「그까이꺼 해석학! 폼나게 풀어보자」, 136.
[19]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어마허 연구」, 165.
[20]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166.
[21] 슐라이어마허, 「해석학과 비평」, 최신한 역 (서울: 철학과현실사, 2000), 17.
[22] 최신한, 「슐라이어마허: 감동과 대화의 사상가」 (서울: 도서출판 살림, 2003), 110-1.
[23]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75.
[24] 최신한, 「슐라이어마허」, 117.
[25]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168-9.
[26] 최신한, 「슐라이어마허」, 68.
[27]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어마허 연구」, 200, 205.
[28] 최신한, 「슐라이어마허」, 207.
[29] 오용득, 「자기쇄신의 학으로서의 철학적 해석학」 (부산: 책펴냄열린사, 2005), 25.
[30] 정승태, 「그까이꺼 해석학! 폼나게 풀어보자」, 137.
[31] 이러한 측면에서 반성택(“해석학 전통의 형성,” 160)의 시대이해는 약간의 거리차를 보인다.
[32]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83.
[33]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175.
[34] 빌헬름 딜타이, 「체험․표현․이해」, 이한우 역 (서울: 책세상, 2005), 122-34.
[35] 정승태, 「그까이꺼 해석학! 폼나게 풀어보자」, 151.
[36]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177.
[37] 한스 인하이헨,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 오트프리트 회페 편, 「철학의 거장들: 근대편 II 칸트에서 딜타이까지」, 최소인 역 (서울: 한길사, 2001), 397.
[38] 오용득, 「자기쇄신의 학으로서의 철학적 해석학」, 44.
[39] 인하이헨,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 402-10.
[40] P.H. 쾨스터스, “하이데거의 삶과 철학,” 이기상 편,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울: 서광사, 1993), 23.
[41] 발터 비멜(「하이데거」, 신상희 역 [서울: 한길사, 1997], 46-48)은 존재와 진리(알레테이아)라고 주장한다.
[42] 쾨스터스, “하이데거의 삶과 철학,” 24.
[43] 박찬국, “하이데거: 존재와 현재론,” 철학아카데미 편, 「현대철학의 모험: 20세기에는 무엇을 사유했는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207-12.
[44]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95.
[45] 반성택, “해석학 전통의 형성,”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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