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번역: 마커스 보그의 [처음으로 다시 읽는 성서] - 제 1 장

진실과열정 2007. 11. 10. 10:45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좋은 책을 찾았습니다.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간결하면서 필수적인 내용들로 가득차있는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은 바로, Marcus J. Borg,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Taking the Bible Seriously but Not Literally (New York: HarperSanFrancisco, 2001)로,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한 번 번역해보기로 했습니다. 짬짬히 번역하면서, 영어공부도 되고, 또 저의 성서관에도 중요한 바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다음은 서론과, 제 1 장입니다. (참고로, 각주는 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읽어보시고, 이상한 부분이거나, 혹은 난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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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성서

: 성서를 진지하게 그러나 글자 그대로는 아닌 방식으로 접근하기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 Taking the Bible Seriously but not Literally


마커스 J. 보그(Marcus J. Borg)

trans. 양 지 웅


New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Inc., 2001





서문


성서에 관한 충돌은 오늘날 북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분열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미국 문화에서 기독교인의 중요성 때문에라도, 성서에 관한 충돌은 소위 “문화 전쟁”에 있어서 중심을 자리하고 있다.

   충돌은 성서를 읽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내가 나중에 이 책에서 사용할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성서를 “문자적-사실적(literal-factual)”으로 읽는 방식과 “역사적-은유적(historical-metaphorical)”으로 읽는 방식 사이의 싸움이다. 전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다수의 보수적인-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견해이다. 후자는 금세기의 보다 나은 시대 동안에 주요 교단의 세미나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견해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지난 몇 십 년간, 역사적-은유적 성서 읽기 방식은 주요 교회들의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점차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이 책은 논쟁의 역사적-은유적인 측면을 대변한다. 이 장에서, 나는 내가 몸 담아왔던 두 모임들을 통해서 성서를 보고 읽는 방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로 성서학계와 종교학계라는 학문적인 세계였고, 둘째로 교회에서의 종교적인 세계이다.

   지난 삼십 오년 동안, 나는 성서를 개인적으로나 공공학교,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연구했고 가르쳐왔다. 시작부터, 나의 전공분야는 예수와 복음서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히브리 성서에 흥미를 놓지 않았고 기초과목과 상급과정에서 신약뿐만 아니라 히브리 성서도 가르쳐왔다.

   이 책은 내가 경험에서부터 얻어낸 성서에 관한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번뜩이는 통찰력이 들어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1부(3장)에서는 현재의 충돌을 분석하고 성서에 대한 역사적-은유적 접근을 위한 기반을 갖춘다. 2부와 3부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적용해서 독자들에게 성서의 주요한 부분들을 소개한다. 2부에서, 나는 4장에 걸쳐서 히브리 성서를 다룬다: 창조 이야기, 오경, 예언서, 그리고 지혜 문학이다. 3부에서, 나는 3장에 걸쳐서 신약의 주요 부분을 다룬다: 복음서, 바울, 그리고 계시록이다.

   학부 수준의 강의를 위해서라면 많은 책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 책이 대학 과정에서  매우 적합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독자층도 고려했으며, 이러한 방침이 비기독교 독자들에게 지장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에 언급한 독자들은 종종 기독교 내부적인 대화를 듣고 (그리고 바라기는 이것이 흥미롭다고 여기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기독교와 연관시키려는 나의 바람은 내가 살고 있는 다른 공동체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학원 내에서 살았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동안, 나는 기독교 세계에서 살았었다. 나는 루터교회에서 자랐고 30세까지 루터교인이었다. 그런 다음, 거의 십 년 동안, 나는 어떤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교단에 속하게 된 것은 몇 년 동안 “같은 영성”을 가졌던 장로교단에서였다. 그러한 경험은 매우 소중했지만, 나는 내가 좀 더 예식적이고 성례적인 예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에 나는 감리교회에 들어갔다. 그 교회의 교단과 전통은 내게 너무 맞아서 마치 집에 온 것과 같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 자신을 비문자주의적(nonliteralistic)이며 비배타주의적(nonexclusivistic)인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헌신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말한 기독교 전통이란 지나온 모든 종교적인 전통의 가치를 지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이며 문자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에 더해서, 나는 성서의 종교적인 의미,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미를 찾는 것을 계속해왔다. 이 책에서 나의 중요한 목적들 중에 한 가지는 교회 안에서의 성서에 관한 현재의 충돌을 그려내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성경을 보고 읽는 설득력 있는 방식을 제공해서, 성서를 진지하게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의 방식을 배제한 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역사적-은유적 접근을 발전해 나감에 따라, 나는 성서를 해석해왔던 전통 역시 보여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성서를 보고 읽는 방식으로, 그것은 나의 생애 전체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성서의 학생으로서의 나의 교육, 성서학과 종교학에서 교사로서의 나의 소명,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여정, 그리고 다른 여정들로부터 배웠던 모든 것들.

   명백히 말하자면, 이 책은 나 자신의 주관성을 반영하고 있다. 객관성을 가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혹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만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배경 바깥에서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주관성에 대한 실험은 - 그 주관성이라는 것이 주로 편협하거나, 이기주의적이거나 혹은 심지어 자기도취증일 지라도 - 타인을 납득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 나를 납득시켰던 성서 읽기 방식에 당신을 초대하고자 하며, 당신이 얼마나 납득하게 되었는지를 당신 자신의 분별력을 평가해보도록 격려하고자 한다.

   내가 성서에 관해서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나는 교회에서의 사교모임에 감사를 전한다. 비록 그 모임에서 나는 배웠던 바들을 잊어버려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었지만, 거기에서 나는 성서에 대한 사랑으로 물들 수 있었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 항상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나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 빚을 졌다. 학부 시절, 폴 스퐁하임(Paul Sponheim)과 로드 그루브(Rod Grubb)는 (이 둘은 그 때 미네소타 주 무어헤드의 컨콜디아 대학의 교수였다) 내가 성년이 되어서 종교와 성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 대학원 시절에, 옥스퍼드에서 나의 주교수였던 조지 B. 케어드(George B. Caird)는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분이었다.

   나는 또한 지난 몇 세기를 거슬러 성서학 분야에 책을 쓴 저자들과 대학 조직 내 동료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 어떤 이는 각주를 통해서 알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난 30년 세월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내가 전하려는 그 많은 통찰력들의 기원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다. 사실상 모든 경우에, 나는 누군가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완전하게 독창적인 통찰력이란 거의 없지 않겠는가. 공헌했던 각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없음에 사과하고자 한다.

   (상세한 감사의 내용은 번역하지 않겠다.)







제 1 부 : 기초


제 1장. 렌즈읽기: 성서를 다시 보기


이 책 제목-처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성서-의 핵심 단어는 “다시”이다. 이 말은 나의 핵심 주장을 잘 보여준다. 지난 세기 동안 성서를 읽어왔던 낡은 방식은 수 백 만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요청은 새롭게 성서를 읽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읽기와 보기는 함께 간다. 한 편에서, 우리가 읽는 것에 의해서 우리는 보게 된다. 다른 편에서, 나의 당면 목적에 더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가 읽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가 어떠한 본문이나 문헌을 읽게 만드는 그 무엇이 우리가 읽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 모두는, 안경을 쓰건 혹은 쓰지 않건 간에, 렌즈를 통해서 읽는다.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읽어갈 새로운 종류의 렌즈가 필요하게 되었다. 옛 것은, 근대 시대의 기반을 두고 통용된 것으로, 더 이상 수 백 만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들 렌즈는 교체될 필요가 있다. 성서를 보고 읽는 옛 방식은, 내가 곧 설명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가 믿을 수 없고 당치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교회를 등져야했던 수 백 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생동안 교회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렌즈의 필요성은 교회 자체 내에서 존재한다. 옛 렌즈는 이전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성서가 그들의 발을 비추는 등불과 같아서, 기독교인의 길을 인도하는 빛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옛 렌즈는 광택이 사라져 버렸고 그 결과 길을 막아버리는 장애물로 성서를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아직 모두는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렌즈의 필요성에 동감하고 있다. 옛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당면한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성서의 진실이나 기독교 차체가 아니었다.



렌즈의 충돌

성서를 어떻게 보고 읽는가에 대한 충돌은 오늘날 북 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분열의 한쪽 편은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다. 다른 편은 온건한 자유주의 기독교인으로,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에 속해있다. 이 들 두 그룹을 나누는 기준은 성서에 관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에서 나온다: 그 기원에 대하여, 그 권위에 대하여,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한 질문이다.

   첫 번째 그룹, 즉 자신 스스로를 “성서를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성서를 하나님의 무오하고 무류(無謬)한 말씀으로 본다. 이러한 확신은 그들이 성서의 기원을 보는 방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다른 책들은 그렇지 않다. 신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이고, 그리고 그 신적 기원이 권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범퍼 스티커에 붙여있는 과감한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말했고, 나는 믿습니다. 그것으로 만사해결이다.” 이 스티커가 아마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파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옹호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반대자들의 솜씨가 아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문자적으로 해석되는데, 만약 특정한 부분에서 명백하게 은유적인 언어가 사용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비문자적 해석방식을 인정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설명하기 어렵게 해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해석을 하게하는 문을 여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성서를 극도로 조심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며, 온건한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성서의 효력을 약화시켜서 그 권위를 없애려 한다고 종종 비판한다. 그들은 역시 그들 자신을 “옛 시대의 종교” 즉 근대 이전의 기독교를 수호하는 사람들로 여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그들의 접근이라 함은 그 자체로 근대적이며, 거의 다가 19세기와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특정한 형태의 산물이다. 더군다나 성서의 전체 목소리를 따르기보다, 그들의 접근은 실제로는 엄격한 신학적 구조 내에서 성서를 제한하고 있다.

   두 번째 기독교 그룹은, 대부분 주요 교회에 소속되어있는데, 성서를 어떻게 보면 안 될 것인가 보다 성서를 어떻게 것인가에 관해서 덜 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서의 많은 부분을 문자적으로, 즉 역사적인 허구로 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확신한다. 이러한 결론까지 다다르게 된 어떤 사람들은, 당연한 예기지만,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고 문자주의적인 성서해석을 넘어 설득적이고 자명한 의미의 세계로 나아가는 성서읽기 방법을 찾고 있다.

   그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주요 기독교 교파 사이에서 현대의 성서 학풍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까지 강력했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보다 더 역사적이고 은유적인 성서읽기를 열심히 그리고 단호하게 보여준다. 주요 교회의 일반 대중의 단계에서, 성서에 대한 주요한 탈-문자주의가 진행 중이다. 

   비록 이들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성서적 문자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럼 그들이 성서의 기원과 권위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그리 확실하지는 않다. 그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종종 불분명하다. 비록 그들이 성서의 무류성의 권위를 거부한다지만, “성서의 권위”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심지어 주요 교단들 사이에서 어떻게 성서를 보고 읽을 것인가에 대한 충돌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들 대부분의 교단은 성서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항변하는 소수의 목소리도 있다. 지역적인 차원에서, 어떤 모임은 성서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격렬하게 분리되기도 한다. 또한 충돌은 가족을 나누기도 한다. 많은 수의 보수적 기독교 가정들에서,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구성원이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진보적인 교회에 소속되고 있다. 그 역도 역시 사실이다: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 가정에서도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구성원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가정들은 이러한 충돌을 은혜롭게 대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수에 있어서, 그것(성서를 보는 방식)은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슬픔을, 그리고 심지어는 절망적인 상황까지도 야기한다.

   성서에 관한 충돌은 세 가지 주제에 대한 토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첫째로, 어떤 기독교 모임에서, “창조와 진화”는 성서에 대한 충성도를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리트머스 종이이다. 두 번째는 동성이이다: 실제로 게이와 레즈비언이 교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는가? 게이와 레즈비언 간의 결혼을 축복할 수 있는가?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성직을 맡길 수 있는가? 이러한 논쟁은 종종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모양새로 끝이 나버리곤 한다.

   충돌을 일으키는 세 번째 피뢰침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이다. 지난 십년간, 역사적 예수 연구는 광범위한 매체들과 대중적인 흥미, 특별히 주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주목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적-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강력한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들에 관점에 의하면, 복음서의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기독교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충돌의 뿌리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적-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화나있는 복음주의자”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보수적-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는 아니며, 예를 들면 성서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문자적 사실성이나 예수의 것으로 알려진 모든 말씀들에 대한 완벽한 역사적인 정확성을 보호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성서의 기원에 있어서의 권위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그 자체로 - 그것이 기독교이건 유대교이건 혹은 모슬렘이건 상관없이 - 현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대 문화에 대한 반응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에서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종교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19세기 하반세기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성서의 무류성과 무오성에 강조를 두는데, 특별히 다윈의 진화론과 소위 말하는 “고등비평”에 반대한다(고등비평은 주로 19세기 독일에서 발전한 것으로 학문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이해의 뿌리는 더 오래되었는데,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교회 전통의 권위를 오직 성서의 권위로 바꾸어놓았다. 존 칼빈과 마틴 루터, 이 둘은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했던 지도자로, 성서의 권위에 대해서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서의 무류성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주장되었던 것은 종교개혁이 있고난 후 2세대 혹은 3세대의 일이었다. “절대적인 영감성” - 성서의 단어들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실수가 전혀 없다는 개념 - 은 이들 후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던 바다.

   이들이 발전이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근본주의자들과 몇 몇의 보수적-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성서가 무오하고 무류하다는 뚜렷한 서술은 고대적이며 전통적인 교회의 목소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그리고 그러므로 오류가 없는) 성서라는 개념 둘 다는 그들의 뿌리를 오래된, 오랫동안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공유하고 있는 성서를 보는 관습적인 방식에 있었다.



성서를 보는 옛 방식

상대적으로 최근까지 보통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다. 약 오백년 전까지는, 성서는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 즉 라틴어, 그리스어, 혹은 히브리어를 알고 있거나, 제작비가 너무 비싸서 상대적으로 희귀한 사본들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두 개의 기술개발로 이것은 바뀌게 되었다. 1400년대 중반에, 인쇄기가 발명되었다. 이후 천년도 안 되어, 종교개혁의 발생으로 인해서 성서가 고대의 “성스러운” 언어에서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서를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축복이었지만 거기에는 혼란도 있었다. 긍정적으로는, 그것은 기독교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성서의 보고(寶庫)는 더 이상 교육받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부정적인 결과도 야기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성서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성서해석은 종교개혁에 의해서 성서에 주어진 고양된 지위와 함께, 기독교를 분열시켜서 서로가 다른 성서해석에 기반을 둔 다양한 교단과 분파주의 운동을 양산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인쇄기의 개발이 있기 전에는, 사실상 어느 누구도 단 권으로 묶여진 성서를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성서는 일반적으로 따로 떨어진 사본들의 묶음으로 나왔었다. 정말로, 고대와 중세 시대 동안에, 성서는 복수형인 “경전(經典)”으로 여겨졌는데, 여기에서 경전이란 책들의 묶음을 뜻한다. 일단 성서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이게 되면, 그 한 권에 단일 저자(즉, 하나님)가 붙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후 최근까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특별히 개신교인들) 성서를 보고 읽는 데 공통의 렌즈를 공유하게 되었다. 참으로, 이렇게 보는 방법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심지어 렌즈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이다.

   성서를 보는 데 있어 이러한 옛 방식은 “순수 문자주의(natural literalism)”로 불렀다. 순수 문자주의의 상태에서는, 성서는 힘들이지 않고 문자적으로 읽히며 받아들여진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순수 문자주의는 “의식적인 문자주의”와는 엄연하게 다르다. “의식적인 문자주의”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데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읽기를 고집하는 태도로 일종의 문자주의의 현대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순수 문자주의가 힘들이지 않는데 반해, 의식적인 문자주의는 수고스럽다. 그것은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믿기 힘든 어떤 것을 믿어야만 하는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순수 문자주의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렇게 하는데 따로 “믿음”이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의식적인 문자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서를 보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순수 문자주의와의 상당 수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서를 순수 문자주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본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성서의 기원과 권위 그리고 해석에 관한 아래의 결론들을 따라가도록 이끄는데, 이 결론들이란 의식적인 문자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1. 기원: 성서는 신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지난 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어떻게 불러왔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에 영감을 받았다; 성스러운 경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며, 다른 어떤 책이 할 수 없던 방법으로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2. 권위: 그러므로 성서는 진실하며 권위가 있다. 성서의 진리와 권위는 그 기원에서 비롯된다. 신적 작품으로서, 진실하다는 신적 보증이 있으며,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지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로서 신중하게 여겨져야만 한다.


3. 해석: 성서는 역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진실하다. 순수 문자주의의 상태에서, 성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예외가 있다면, 명백하게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로, 예를 들면 “산들이 기뻐서 그 손으로 박수를 칩니다”와 같다. 순수 문자주의자들도 은유를 인식하고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성서가 발생했던 어떤 사건을 보고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그것은 발생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성서에서 사실성을 믿는 것은 그 어떤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수 문자주의 단계에서 달리 믿을 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성서를 이런 식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점은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익숙함은 부분적으로 관습적인 상태에서 비롯한 것으로 최근까지 기독교를 좌우하고 있다. 우리들 보다 앞선 2, 3세대 대부분은 순수 문자주의자들이었다. 우리들 중에 나이가 많다면, 아마도 우리의 부모님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이러한 전통에 흠뻑 빠져 자라왔다. 나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중반 동안 루터 교회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들어왔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진지하게 여겨야 했음은 분명했다.

   주일학교에서, 우리는 십계명을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성서에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예수 사랑하심은”을 불렀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성경에 써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 루터교인들은 성서가 믿음과 도덕에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그 당시에 라틴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 “오직 성경”은 종교 개혁의 슬로건 중에 하나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멜로디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주 말씀은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요,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시니;

대대로 그 빛을 전파할 것이며

최선을 다해서.

평생토록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니,

죽음은 우리의 잠깐이요;

주께서 허락하시니, 세상이 허용할 동안만,

우리는 그 가르침을 순전히 지키리니,

모든 세대에서.


   나의 가족과 회중은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순수 문자주의자였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온화한 문자주의”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우리는,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여섯 날 동안의 창조를 여섯 번의 지질 연대로 읽는 것이 더 고상했다. 우리는 공룡의 존재나 화석 유물을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화한 문자주의자”로서, 우리는 성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기록되어있는 그대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출애굽 시절에 바다는 정말 나뉘었으며 그 사이를 고대 히브리 인들이 정말로 지나갔다. 예수가 정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정말 물위를 걸었으며, 정말 빵을 넘치게 했고, 계속 그런 식이다. 이것인 바로 내가 “온화한 문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성서를 보는 이런 오랜 방식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오랜 방식과 병행한다. 연결점이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성서는 시대를 거쳐 기독교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성서를 어떻게 보는가와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기독교를 보는 오랜 방식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이해는 전통적인 기독교로 이는 지난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를 여섯 개의 형용사를 써서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첫째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를 보는데 이런 오랜 방식이란 문자에 집작하는 것이다(형식에 있어 엄밀하건 부드럽건 간에).

   둘째로, 교리적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 내용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를 정기적으로 활용하는 교회에서, 만약 당신이 손가락을 가리키지도 않고 어떤 부분에서 침묵하지 않고도 사도신경을 외울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너무 도덕주의적이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두 가지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것은 (정의라는 협의의 매우 특정한 조항이거나 보다 광의의 황금률 혹은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반 원리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된 성서의 윤리적인 가르침에 일치하며 살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보는 옛 방식에서 이해되는 도덕주의의 두 번째 모습은 우리가 착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러한 옛 방식은 죄와 죄책감 그리고 용서의 역학 상태를 중심으로 한다. 정말, 얼마나 죄와 용서가 이러한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한 방식에서 중심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예배는 죄의 고백을 포함하는데, 대부분의 성찬식에는 (이것은 미사나 주의 만찬 즉 성찬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 죄, 속죄기도 그리고 용서가 있다. 심지어 상당 수준의 자유 교회에서도 죄와 용서는 강조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 한 주 동안의 자유주의 기독교에서 있었던 협의회에서 이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매 아침 예배시간은 죄 고백으로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아침 9시인데, 우린 벌써 나쁜 놈이 되어버렸네”라고 생각했다.

   넷째로, 기독교를 보는 옛 방식은 가부장적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을 지칭하는데 현저히 남성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족에서 조차 남성 중심적 계층을 합법화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그것은 배타적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 배타주의는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단언에 불편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한다면 비기독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지하는 좀 더 부드러운 형태도 있기는 있다.

  여섯째이자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옛 방식은 내세-중심적이다. 기독교인으로써, 나는 어릴 때부터 구원의 근본적인 의미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실로, 천국이란 것은 너무도 중요해서, 만약 당신이 내가 열두 살 때 천국은 없다고 확신시킬 수 있었더라면,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전혀 갖지 않았었을 것이다. 그만큼 천국은 그 자체로 전부인 셈이다.

   정리해보면, 이러한 옛 이해를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나중에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약간의 수정만으로 같은 말을 표현할 수 있다: “나중에 천국에 가려면, 지금 기독교를 믿으세요.” 그리고 강조는 “믿다”에 둔다. 즉, 진실해지기 위해 이런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서구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에 당연했던 문자주의적 태도는 참아낼 수 없었는데, 이는 우리 선조 대부분이 가졌던 그 자연적인 문자주의가 대부분 사라졌던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의식적인 문자주의는, 물론,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부가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옛 시각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이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 모두에게, 종종 전통적 기독교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이러한 옛 방식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지난 수 세기의 상황으로 빚어진 (성서를 포함한)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역사적으로 조종되어진 방식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독교 전통을 지키느냐 혹은 버리느냐에 있지 않고, 이해하는 방식의 전환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전체로 보고 읽을 수 있는 렌즈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보기: 우리의 문화적 맥락

성서를 보고 읽는 이러한 옛 방식이 왜 설득력을 잃어버렸을까? 왜 옛 렌즈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은 것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우리”에 대해서, 나는 21세기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현대 서구 사회에 있는 우리들 대부분을 의미한다. 나는 다음 네 가지의 문장으로 우리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기술하려고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기술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문장들은 우리가 성서와 기독교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던 네 가지 요소들을 가리킨다.


종교적 다원주의

우리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 있어서, 심지어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종교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정도와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하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 대학의 종교 과목을 통해서, 혹은 우리 스스로의 독서를 통해서, 혹은 연기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과 후스톤 스미스(Huston Smith)가 나오는 텔레비전 시리즈를 통해서, 혹은 다른 전통에 있는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너무 쉽게 지구촌에 사는 우리의 의식의 일부분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 다수는 기독교 전통의 배타적인 주장을 수용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일반상식이라는 이유와 기독교 신학이라는 이유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전 우주의 창조자가 단지 하나의 종교 전통에서만 알려진다는 것이 과연 사리에 맞겠는가? 그것도 (다행스럽게도) 단지 우리 자신들의 것만을?

  더 나아가,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은혜의 구심성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자체로 필요조건인 셈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은혜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된다.


역사-문화적 상대성

우리는 역사-문화적 상대성을 인식하고 있다. 약간의 단어만 바꿔서 말한다면, 우리는 역사-문화적인 조절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계층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의해서, 어떻게 형성되는 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것은 오래된 세대와 머나먼 장소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우리의 관념, 형상, 언어, 지식, 신념-심지어 우리 자신들의 사고 과정까지도-은 모두가 문화에 의해서 깊은 곳까지 형성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와 장소와 관련해서 조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침 전체의 어떤 내용이 전적으로 진리이거나 혹은 유일한 진리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성서나 우리들 세대에서의 종교적인 가르침들과 같은) 이러한 범주에서부터 어떤 것을 제외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대성

우리는 현대인이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현대”라고 알려진 서구 문화의 역사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간단히 의미를 둔다. 현대성은 17세기 계몽주의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되어온 문화적인 사고방식(mind-set)이다. 현대성은 복잡한 현상으로, 물론, 감동적인 성취와 동시에 그럴듯한 한계를 모두 품고 있다. 우리의 목적상, 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만을 언급할 것인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 현대성은 과학적인 이해방식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실로, 현대 과학의 탄생은 현대성의 탄생이다. 현대 과학과 함께 새로운 인식론(즉,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는가에 대한 이론)이 등장했다: 이전 세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실험과 입증을 통해서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째로, 현대성은 종종 “현대 세계관” 혹은 “뉴턴적 세계관”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두드러진다. 세계관은 실재에 대한 형상으로, 무엇이 실제적이고 또 무엇이 가능한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세계관은 과학적인 지식 습득 방식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실재하는 것은 과학의 방법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어야만 한다. 인식론(우리가 어떻게 아는가)은 존재론(무엇이 실재하는가)이 된 셈이다.

  현대 세계관은 실재에 대해서 유물론적 이해를 수반한다. 실재한다는 것은 사물과 에너지의 시-공간적 세계이다. 실재는 작은 부분들과 “조각(stuff)”들로 이루어졌으니, 그것들 모두는 “자연법칙”에 조화롭게 상호 작용한다. 그 결과는 원인과 결과라는 닫힌 체계라는 우주를 그려낸다. 비록 이러한 세계관이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는 이미 폐기된바 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성은 대단한 가치들을 만들어냈다. 가장 극명한 성취물이라면 과학, 기술, 그리고 의약분야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성취는 그러한 영역을 뛰어넘어서 정부 형태나 인간의 권리, 과거에 대한 연구나 다른 문화와의 공감대, 그리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나는 현대성에 깊이 감사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종교에게 그리고 특별하게는 기독교와 성서에게,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 두 가지 점들을 지금 언급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영향에서 첫째는, 현대성은 우리가 영적 실체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만든다. 현대성이 가지고 있는 실제에 대한 물질주의적 이해는 하나님의 실재성이라는 것이 우리들 중 많은 이들에게 문제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죽음” 신학이 현대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세계관을 절대화한 논리적 귀결이다.

  둘째로, 현대성은 우리가 사실-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사실-에 열중하도록 이끈다. 실로, 현대의 서구 문화는 진리가 사실과 동일시되는 인류 역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적 근본주의자들”이다: 만약 어떤 문장이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사실적이지 못할 때, 그것은 참이 아니다.

  교회 내부에서, 성서적 근본주의들과 기독교 자유주의자들 모두는 종종 사실적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전자에 대해서, 성서는 결국 참이 되기 위해서 사실적으로 참이 되어야만 했다(그러므로 그들은 성서 본문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을 강조한다). 후자는 다른 전략을 따르려고 시도해왔는데, 즉 불 속에서 몇 개 정도의 사실들만을 구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한 결 같이 공통인 점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실성에 대한 현대의 관심사는 우리가 어떻게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가에 대해서 깊숙하면서도 왜곡된 영향을 끼쳐왔다.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과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은 (엄격하거나 온건한 형태로) 문자주의와 환원주의라는 두 개의 빈약한 주장들 사이에서 선택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서와 기독교의 사실적인 정확성과 독특성을 옹호하려고 했다. 두 번째는 성서와 기독교가 현대 세계관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에 비해서 격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둘 다 모두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더 깊은 결과가 발생한다: 현대 시대의 기독교는 믿음 혹은 불신이라는 역학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불확실한 것(iffy)”을 믿는 것은 참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의미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그것은 황당한 경우-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사실적으로 참이라고 하는 매우 문제 있는 문장들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들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신앙의 관념에 대한 전반적인 현대적 특성은, 중세 기독교 시대에서 신앙이 의미했던 바와 비교해볼 때 잘 드러난다. 그 세기 동안,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의 모든 사람들은 성서가 정확하다 생각했다. 그들은 달리 생각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성서의 이야기는 창조에서부터 세계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판에 박힌 지혜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성서가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한 유무에 달려있지 않아야만 했다.


포스트모던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경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단순하게 현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첨가해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적 역사 시대의 분기점내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새 시대의 중심적이고 특징적인 모습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단하게 그것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다음에 다룰 주제이다.

  현대와 같이, 포스트모던은 거대하고 복잡한 현상이다. 더 나아가, 어떤 포스트모던 운동은, 내가 볼 때, 다 끝난 것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자세한 기술이나 정의를 내리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우리의 목적에 맞게 중요한 핵심 특성 세 가지만을 간단히 강조할 것이다.

  첫째, 포스트모던은 현대성 그 자체가 문화적으로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역사적 생성물이라는 인식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현대 세계관은 더 이상 실재에 관한 최종적인 단어가 아니며, 이는 그 이전 세계관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던은 언젠가는 뉴턴적 세계관이 마치 천동설적 세계관처럼 이상하고 낡은 것으로 여겨질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들 중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일종의 발전이다.

  둘째, 포스트모던은 경험으로의 전환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전통적인 종교적 가르침에 의심을 느꼈던 시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험으로의 전환은 주류 교회들 사이에서 영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성은 종교의 경험적 차원이다.

  셋째로, 포스트모던은 사실적 근본주의를 넘어 이야기가 문자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참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의 움직임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상당수의 현대 신학이 은유적인 신학에 강조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의 시기 동안에 종종 잊혀져왔던 관점이다: 은유와 은유적 내러티브는 설령 그것이 문자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정확하지 않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참일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앞으로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하게 될 성서를 보고 읽는 방법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말했다면, 우리의 시대에 적실한 필요들 중에 하나는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보는 것(re-visioning)이라고 하겠다. 나는 의도적으로 “다시-보기(re-vision)”라고 하이픈을 넣어서 표현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하이픈 없이) “개정(revision)”이 의미하는 것과 차별성을 두기 위함이다. 우리는 종종 뒤에 있는 단어(개정-역주)를 예전엔 서투르게 이루어진 어떤 것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기술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정식 출판물로 나오기 전의 인쇄물이거나 학기말 리포트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의미한 바가 아니다.

  오히려, 다시-보기란 “다시 보기(to see again)”를 의미한다. 강조는 “다시 보는 것”이며, 이는 또한 우리에게 기독교의 오랜 형태가 “전통적인 기독교”로서가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 전승을 보는 오래된 방식이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충분히 중요하고 정당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에서 내가 기술하게 될 성서를 보고 읽는 방식은 단지 믿는 것에는 거의 관련을 두지 않는 식으로의 기독교인이 되는 길을 열 것이다. 대신에, 앞으로 등장하게 될 것은 기독교적 삶에 대한 상대적이며 신성한 이해가 될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는 내가 장차 논의할 주제로, 성서를 믿는다거나 혹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에 달려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관계에 관한 것으로, 이 하나님은 바로 성서가 초점을 두고 있는 대상이고, 기독교 전통을 성스러움을 극진히 존중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자세에 있다.




제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