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하늘누림이야기]

우주를 바꾼 일주일

진실과열정 2012. 4. 6. 19:48

막 11:1-10; 주일에, 주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오르십니다. 당시에 번쩍거리는 승리의 전차를 몰고 로마로 입성했던 전쟁광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돌아오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겉옷과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펴고 메시야를 찬송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돈이드는 꽃이나 귀한 악기들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부였던 겉옷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왕을 환영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거지왕의 탄생, 누군가의 눈에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의 개선, 그리고 누군가의 눈에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분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지만, 그분은 성전에 들어가셨지만, 그곳의 예배에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둘러보시기만 했을뿐... 저문 해를 뒤로하고 다시 베다니로 돌아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에 씁쓸함이 묻어납니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오셨는데, 다만 나를 둘러보시고 다시 돌아가신 것만 같아서; 가장 바쁜 하루를 보냈음에도, 내가 무엇때문에 겉옷을 벗었고 가지들을 펼쳤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아서; 맹목적인 길거리의 난장판과 피튀기는 성전의 싸움판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아무말도 없이 주님만 업고 갔던 새끼나귀 쓰다듬으며 애써 웃음 지으실 것 같아서.

 

 

 

막 11:12-19; 월요일에, 아마 뜬눈으로 지새웠을 첫번째 밤을 보내고, 예수께서 맞이한 예루살렘의 대표적 상징물 무화과나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렘 8:13) 시간과 문명은 계속 앞으로 진보하거늘, 완악한 인간의 본성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니, 겉모양으로 번지르르한 종교의 행위 가운데에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네. 그 이전이나(렘 7:4,11), 그 때나(막 11:17). 때가 되면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열매 없이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를 보셨던 주님의 저주는 이제 기능을 상실한 무화과나무의 파산 선고요, 찬란한 성전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누구나 샬롬을 누릴 수 있겠지만, 강도들의 은신처가 되어버린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진노는 성소의 폐쇄와 다름이 없었다. 모든 것이 역기능으로 작동하지 않은 주의 나라. 때가 아님에도 잎사귀가 무성해서 열매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헛된 무화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서기관, 정치와 권력이 세워놓은 대제사장'들'이 존재하는 이상한 세계; 눈을 감고 기도하는 자 하나 없이, 돈과 이익에만 눈에 불을 밝히는 자들로 북새통인 참단한 공간. 이미 둘러보았지만, 역시 경험하고보니, 답이 나왔다. 주님의 사명은 인간적 성전의 완전한 폐쇄요, 신적 구원의 새로운 길의 초대일 것이라. 다시 성밖으로 가시는 걸음을 밝히는 것은 오로지 붉디 붉은 저녁 노을 뿐이네. 언제부터인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종교의 화석화. 신앙이, 그 역동적이고 순수했고 또 삶으로 표출되었던 치열했던 전투적 신앙이, 종교가 되면서,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보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이라고 꼬리표를 붙이거나 머리나 입술의 표현으로 미화되면서 안정적인 체계가 되면서, 열매를 낼 수 없는 치명적 한계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화려하고 완벽한 이곳에, 지금 주님 오셔서, 한바탕 둘러 엎어주셨으면 하는데. 다시 추스를 수 있게.

 

 

 

막 11:20-13:37; 화요일에, 예수님은 길고 긴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십니다. 전날 불시의 공격을 받고, 이제는 있는대로 세력을 규합한 성전세력들과의 진검승부. 뿌리까지 마른 무화과나무에서 이미 승리는 예견되었지만, 주님의 입에선 "하나님을 믿으라"는 진정한 신앙의 첫단추를 알려주시죠.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는 논쟁들은(11:27-12:40), 인간의 지혜로 세워놓은 모든 종교의 허상을 처참하게 무너뜨리신 예수님의 완승으로 요약됩니다: 사람의 권세를 하나님의 권세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들은 참권세의 근원을 깨달을 수 없으며; 하극상을 벌인 탐욕스러운 소작인들(성전세력)은 형벌을 받게될 것이지만, 버린돌을 머릿돌로 삼을 수 있는 자들만이 포도원을 받게되니, 곧 죽임당할 예수를 신앙의 시작으로 삼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그들은 볼수가 없으며; 주춤거린 무리들이 내놓은 히든카드 '토라' 앞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잘도 바치면서 (토라가 말하는, 출19:5) 하나님의 것은 바치지 못하는 자들의 토라를, 자기들이 믿고싶어하는 선별된 말씀으로 모든 것을 고집스럽게 재단했던 유치한 귀족들의 토라를, '목숨' 빼먹고 '지혜'로운 사랑을 말하기에 예수님도 "그래 너도 (들어온건 아니고) 멀지는 않았어~"라는 말을 들어야했던 헛똑똑이의 토라를, 바로 그들이 세워놓은 종교의 허상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립니다. 인간의 머리가 만든 종교앞에 주눅들지마라, '그 앞에서 통쾌하게 웃어버리기'를 마가는 원했던 것은 아닐까요(12:37). 그럼, 화요일에 있었던 길고 긴 종말의 가르침은(13장), 인간의 힘으로 세웠던 모든 종교의 실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하나님의 시간표라고 요약할 수 있겠네요. 가장 큰 돌이 500톤에 해당할 정도로 건물의 위용을 자랑했던 헤롯성전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실상. 장차 임할 (진정한 실체) 하나님의 나라는 성전에 있지않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리를 분별하여 미혹당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민감하여 종된 마음으로 항상 깨어있는 자들에게, 바로 그런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 미래(not yet)의 하나님 나라보다, 지금 현재(already)의 삶 역시 중요한 것이라고 마가는 진정 원했던 것은 아닐까요(13:14).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신앙의 첫단추는, 무너진 종교의 허상과 실상을 뒤로하고, 그 중심에서 위대한 마지막 단추로 채워집니다. 바로 무명의 한 과부가 넣은 삶의 전부(12:41-44). 마치 과녁의 중심처럼, 참신앙은 헛똑똑이도 아니고 예배당도 아님을 가리킵니다. 어떠한 논쟁도 굴복시킬 수 있는 싸움닭보다, 안개같은 내일을 당당히 헤쳐가는 천리안보다, 주님이 묵묵히 지켜보시며, 또 나에게 보여주신 신앙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막 14:1-11; 수요일에, 예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무리들은 꼬리내린 개들처럼 굴속에 숨어들었고, 이제 전략을 바꾸었다. 그물을 치고 기다리고 기다리자(시 10:7-9). 유월절을 기다리는 종교인들의 생각 속에 똥이 가득한데, 그 똥통에 발을 딛고만 가룟 유다. 허나, 예수의 죽음은 종교인들의 계략때문도 아니요(3:6), 유다의 배신때문도 아니다(3:19). 이미 도상에서 3번이나 가르치신 것이, 인자의 죽음과 부활이니(8:31-3; 9:31; 10:32-4), 그분은 모든 것을 알았고 보았고, 기다렸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에서 처음으로 조명되었다면(사 45:13),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양되심은 인류의 귀환으로 완성되는 역사이다.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를 살리셨다. 자기 영광을 버리고서 이땅에 몸을 입고 오셨다. 죽으면 살 것이고, 최고가 되려면 종이 되어라. 최고의 역설. 신비로운 지혜. 십자가에 고정된 예수의 시선. 종교인들과 유다가 이 지혜를 모르고,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며 눈치만 보고 있으며, 반대로 아무런 눈치도 없는 제자들은 상석에 앉아 먹고 마시기에만 여념이 없는데, 대속물로 오신 주님을 알아주는 자 하나 없네. 단 한명만 빼고. 한 여자. 이름없는 한여인만 예수님 바라보시는 곳을 같이보고, 자기 전부 깨뜨리네. 똥으로 가득한 수요일이 나드 향기로 바뀌었다. 산발하고 떡진 머리 위로 값진 기름 흘러내릴때, 메시야는 미래를 본다. 예수님을 위한 섬김에 허비란 없으며, 같잖은 책망 따윈 뒤로 넘기라. 온 천하에 이 여인의 행위가 기념될 것이다. 유일하게 내가 본 것을 같이 본 여인이기에. 마가는 "기회를 찾는 수요일"을 그린다. 예수를 죽일 기회를 찾는 종교인들, 예수를 넘길 기회를 찾는 유다, 그리고 예수를 섬길 기회를 찾았던 한 여인. 오늘 하루,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나는 최고의 날을 보낸 것이다.

 

 

 

막 14:12-72; 목요일에, 가장 긴 하루가 드디어 시작하였다. 원체 잠없으신 예수님 그의 퀭한 눈엔 약해빠진 제자들이 밟힌다. 잘무수셨소 한마디 묻는이 없고, 오로지 먹는 생각뿐이라 어데서 양고기 먹을깝쇼? 먹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물을 먹은 꽃은 꿀을 만들고, 같은 물을 먹은 뱀은 독을 내놓듯이, 동고동락하던 열둘 중 하나에게는 예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최후의 식탁은, 배은망덕한 인간에게는 근심과 배신의 장소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감사와 축복의 장소가 되었으니, 죄인된 우리를 위해 몸과 피를 남김없이 내어주셨던 사랑의 식탁이었기 때문이라.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몸소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이제, 죽음의 입맞춤을 기다리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자리를 바꾸신다. 유독 구약의 말씀들과 오버랩이 많은 (18절[시 41:9], 22-8절[슥 9-14장], 41절[사 53:6], 62절[단 7:13]) 이 장면들은, "성경을 이루시려고"(49절)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예수님의 충성을 말한다. 이 충성은 간단명료하지 않다. 참신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 앞에 십자가는 절대로 간단명료한 대답이 아니다. 그는 "공포와 번민에" 쌓였다(33절, 공동번역). 아마도 일찌기 예수님의 분노(3:5) 앞에 혼동했던 마태와 누가는 그분의 공포(에크땀베이스타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의 입술이 열리고,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 하실때(34절), 우리의 온전부가 무너져내린다. '나'라는 '독으로 가득한 잔'을 앞에 두고, ...그는 처절하게 간구하셨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이라면, 정녕 아버지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나를 마셨고, 나의 빈잔을 그분의 보혈로 채우셨다. 결국 그분이 "팔리실[파라디도미]"(41절) 때, 위대한 예언은 절정의 시작을 알린다(사 53:6):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파라디도미]시키셨도다." 예수님은 거짓증인들의 말도 안되는 법정의 횡포로 억울한 사형을 언도받은 것도 아니요, 예수님은 사그라진 모닥불의 열기처럼 죽음 앞에 용기 내지 못한 제자들의 무능력 때문에 외롭게 죽임당한 것도 아니다. 침을 뱉으라, 나를 찔러라, 나를 때리고, 나에게 채찍을 내려라. 그래야 너희가 평화를 누리고, 그래야 너희가 산다. 내가 깨어있었다면, 그래서 유다가 몰래 딴짓거리 못하도록 내가 깨어있었다면, 내가 깨어있었다면, 그래서 귀가 아니라 머리를 베어버렸다면, 내가 깨어있었다면, 그래서 조소하는 여종앞에 불속에라도 나를 던져서 나의 주님 살릴수 있었더라면... 아, 아, 엉엉, 내가 그래지 못해서 주저앉은 것이 아니고, 나의 죄악 때문이라, 오로지 그 때문이라 주저앉아 일어날줄 모르고 펑펑 운다.

 

 

 

막 15:1-47; 금요일에, 온우주가 숨죽이며 지켜보던 날: 참인간으로 침례받던 날 하늘이 "갈라졌고"(1:10),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며(1:11),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 문을 열었던(1:15) 예수님이, 어떻게 복음의 사역을 완수하는지보라. 그러나 눈멀고 귀막힌 무리들로 가득했던 그곳은 가장 시끄러웠다. 마가는 담담하게 '창조자의 죽음'이라는 역설의 12시간을 기록한다. AM 6시, "새벽"부터(1-24절) 온성이 시끄럽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방방곡곡에서 속속들이 모여든 사람들의 피곤한 잠을 깨우는 소란이 온성에 가득하다. 나사렛의 목수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서 결박을 당하고 로마의 심판을 받는다는 소식에 모두가 모여들었다. 얼마전 저 사나이가 준 떡을 나도 먹었는데, 얼마전 내가 아는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지고 나았지. 그러나 결박당해 초췌한 예수앞에서 그 기억들은 저만치 사라져가고, 나사렛의 유대인의 왕은 한낱 죄인이 되어 군병들에게 넘겨졌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낡디 낡은 그의 옷을 가지려 제비를 뽑는 사이(시 22:18), 벌거벗긴 예수의 몸엔 떨어져나간 살점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가 멈출 생각을 않는다. AM 9시, "제삼시"(25-32절)에 예수님의 손과 발엔 못이 박힌다. 벌거벗긴 예수를 가리는건 오직 주홍같은 붉은 피. 사방이 예수를 모욕한다. 지나가는 자들의 모욕(시 22: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희롱,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욕.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혼자다. 십자가에서 동참은 존재하지 않는다. AM 12시, "제육시"(33절)에 땅은 흑암으로 뒤덮였다. 가장 밝아야할 시간에 하늘은 그 빛을 잃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민 6:25)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는 분. 마가의 담담한 기록 안에, 곳곳에 숨어있는 시편 22편은 무엇을 기대하게 하는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는"(시 22:24) 분. 그럼에도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은 얼굴을 돌려 그 빛을 비추지 않으셨다. 우주의 저주가 한곳에 모였다. PM 3시, "제구시"(34-41절)에 예수님은 단 한번 입을 여신다. "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째서 나를버리십니까!"(시 22:1) 등을 돌리신 하나님의 시선엔 내가 있다. 쟬살리려 널버린다. 죄로물든 내손 잡으려, 예수님 놓으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 사랑에 멈췄던 내 심장이 다시 뛴다. 그 사랑에 멀었던 내 눈이 열렸다. 그 사랑에 방황했던 내 걸음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복음은 완수되었다. 휘장은 "찢어졌고"(38절),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며(39절),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준비되었다(43절). PM 6시, "저물때"(42-47절) 노을보다 더 붉은 예수의 시체가 내려진다. 지나가는 들개의 밥이 되었던 십자가 사형수의 저주스러운 운명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돌함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수를 주시오!" 얼마나 울었을까. 떡이 된 피를 닦아내던 요셉은. 얼마나 울었을까. 멀리서 바라보던 참제자 여인네들은. 얼마나 우셨을까. 하나님 마음은. 

 

 

막 16:1; 토요일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유대인의 계산법엔 성인남자를 제외하고 머릿수에 들지 않기에, 그곳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 맞다. 사도들은 없었다. 제자들도 없었다. 오직 여자들만 있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난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의 시간관념상, 토요일 아침부터 여기저기 움직일수없다. 토요일의 해가 지기 시작해야 안식일이 지나니, 그때까지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분주했을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예수의 둔 곳에 가있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시 활기를 찾은 거리에, 가장 바삐 움직였던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들 삼총사는 3번이나 등장한다(15:40, 47; 16:1). 아마도 마가는 조심스럽게(앞의 3본문에 변화를 주면서) 예수의 어머니를 가운데 배치시키고, 특별히 이들의 지난 일들이 '사도적'이었음을 밝힌다(15: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베드로처럼(1:18) 이들도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주를 좇았지만, 이들은 자랑하지 않았다(10:28). 갈릴리의 다른 말이기도 한 '막달라', (고대사회에 자신의 씨족의 반경을 벗어날 수 없었던 환경에서) 한 여자가 주님을 따라 묵묵히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또 하나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아니었을까? 이들이라면 밤새워 예수의 손을 붙잡고 겟세마네를 지켜내지 않았을까? 이들이라면 자신의 심장을 갈라 예수를 지켜내지 않았을까? 분명 그래서 예수는 이들을 멀리했을 것이리라. 이들이라면 안식일을 뜬눈으로 보냈으리라. 멀리서 지켜보았던 처절한 십자가가 눈앞에 계속 아른거려서, 예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던 절규가 여린 마음들을 이저리도 강하게 파고들어서. '좀 더 좋은 항유로 주시오.' 어둑한 토요일 밤길을 걷는 여인들의 눈빛이 영롱하다못해 찬란하다. 가장 짧았던 날. 가장 조용했던 날. 그러나 어떤 신앙전통은 이날에 지옥의 해방이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벧전 3:18-19).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를 위해 준비하는 이들의 손과 발이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