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증명한다는 것(전통주의적 성서해석)에 대한 약간 엄밀한 잣대: -'말놀이로 우기지 말란 말이다!'"
Thomas L. Thompson,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chal Narratives: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Abraham (2002)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적 아브라함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은 본래 1974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접근 방법이나 주장의 강력함은 시대를 초월하는 듯하여, 한 세대가 지나도 읽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브라함 연구'의 고전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대 언어의 능통함을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카드어, 수메르어, 이집트어 등등의 고대 언어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히브리어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독하고, 혹은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새롭게 해석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아브라함과 관련된 다양한 '전통적' 견해들이었다. 창세기에 너무나 자세하게 나타나 있어서, 그리고 방대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게다가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성급한 고고학의 접목으로 더욱 굳건하게 지지되었다고 여겨졌던 족장 내러티브의 역사적인 배경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W.F. 올브라이트가 제시한 '아모리가설'(히브리인의 원류는, 기원전 2천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대거 이집트 이동과 맥을 같이한다는 주장)에 일격을 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겠다(물론, 지극히 보수적인 역사연구서, 예를 들면, 존 브라이트의 역사에는 '아모리 가설'이 주요한 것으로 여전히 주장되고 있지만, 최근 세계적인 학자들이 연구한, 우리말로도 번역된 [히브리 성서와 현대의 해석자들]이란 책에서, 맥스웰 밀러는 단 한줄로, 올브라이트의 아모리가설이 톰슨의 이 연구로 박살이 났다고 평가한 바 있다.)
톰슨의 연구는 방대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족장 내러티브의 역사적 배경을 위해 주로 제기된 바 있는, (1) 기원전 2천년 경의 반유목민 부족이 북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서부셈족의 반유목민집단으로, 이들이 바로 아모리 가설의 주체이다), (2) 기원전 15-14세기의 메소포타미아의 누지 문헌의 발견으로 인해, 비교문헌학적으로 창세기의 족장 내러티브의 역사성을 입증하려는 주장, 그리고 (3) 소위 J로 정리될 수 있는, 벧엘이나 아이 그리고 브엘세바와 같이 고고학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배경 속에서 족장을 찾으려는 주장 모두에 대해서 저자는 꼼꼼하게 평가하고 비평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톰슨은 (1)에 대하여, 초기서부셈족의 이름이(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이스마엘) 그럴듯한 재구성의 근거로 주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이름들이 기원전 2000-1600년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반대논리로 공격한다. 그런 이름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야곱이라는 이름은 고대 바벨론에서부터 초기 기독교시대까지 이를 정도로 팔레스타인에 통상적인 이름이었다. "이름은 특정한 기간에 연관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북부메소포타미아의 서부셈족인들은 성서가 보도하는 것처럼 남부출신이 아니었고, 북부 아라비아 사막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이미 내부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 역시 잘 알려진 것이 되었다. 따라서 올브라이트가 제시하는 이집트어('emw)는 '아무루'로 읽혀서는 안되며, 전형적으로 이방인 그룹을 지칭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부머랭을 던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또한 이들 서부셈족의 침략으로 인해서 이집트가 혼란에 빠졌다라는 역사의 해석 역시 기근 등으로 인해 생겨난 이집트 '내부'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아브라함을 고대의 '대상(caravan)'으로 해석하려고 했던 올브라이트에 대해서, 톰슨은 중기청동기 I시대에 유목민 문화가 설명될 수 없다는 본질적인 주장을 통해서, 과감하게 깨뜨리고 있다.
(2)에 대하여, 즉 스파이서(AB주석의 창세기를 맡은 사람)와 고대어의 대가인 사이러스 고든에 의해서 주장되는, 누지문헌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톰슨은 누지의 풍습이라는 것이 부분적인 점에 대해서 성급하게 확장된 일종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전형임을 보여준다. 이후의 행습들과 대조되며, 이러한 충돌은 성서 전승들과는 위배되는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성서를 설명해주는 누지의 풍습은 겨우 두세개 뿐이다). 따라서, 톰슨은 이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연관된 사건들 배후에 있는 본래적인 사회 구조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고유의 역사에 대한 이후의 전설적인 견해일 뿐이다." 사실 특별하다고 제시된 풍습이란 것은, 고대근동에서 보편적인 것이었고, 그 시기도 고대바벨론에서부터 페르시아 시대에까지 연속성을 보인다. 한동안 ANET가 절대적인 성서의 참고서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객관적으로 ANET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생긴 것이다.
(3)은 어떠한가?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초점이 맞추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성서본문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전설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혹은 기독교적으로, 시대착오적으로 읽어왔던 옛 경험들이 효과적으로 새로워지는 경험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만해도 (톰슨이 자신의 연구를 하고 있는 60-70년대에만 해도) 주요한 오경의 반석과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JEDP에 대해서, 톰슨은 아브람의 실제적인 역사성의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내러티브는 J의 소산이란 말인가?' 이러한 주장의 배경으로는, 창세기의 주요한 지명들(벧엘, 아이, 브엘세바)이 J의 다윗 왕국의 영토와 상당히 오버랩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은 야휘스트의 저작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의 전승 안에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곧 이스라엘 자신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실질적인 기능이라는 점이다.
사실, 저자는 역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단순했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록이 곧 실재라는, 그래서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문자주의의 힘을 '있는 그대로' 써먹고 싶어하였다(사실, 그래서 부시가 이라크를 침략했고, 그것을 단순한 신앙인들이 지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책을 통해서 느낀바로, 인간의 경험/실재/진실됨은 역사적 형식(고백된 역사)을 초월한다. 따라서 일종의 Factism을 극복하는 학문적 노력이 전통적 성서 해석에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편, 톰슨의 최종 주장을 요약한 "역사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소제목의 글에 대한 원문 번역은 다음을 참조하라.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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