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종교를 위한
고고학적 증거
내가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르면, 신학조차도 종교, 특별히 민간종교를 “체계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종교적 삶의 양태는 조직화된 이론적인 원리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오히려 비조직적인 모든 현상, 즉 인간의 경험에 기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민간 종교에 관해서 얻어낸 고고학적 증거를 조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대부분의 분석가들 역시 인정하고 있는 종교적인 신앙과 행습의 양상을 따라서 분류할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러한 분류가 중요한 것에서부터 덜 중요한 것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아마도 그 반대로), 대중적인 것에서부터 개인적인 것으로 진행하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나는 증거들을 개괄적으로 조직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초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기원전 12-7세기)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종종 사물들을 하나로 묶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변호적일 수 있겠는데, 왜냐하면 민간 종교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것이며 시간을 거치면서 단지 조금만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제 8장에서, 연대기적인 측면을 되집어 볼 것인데, 이것은 결국 고고학에 있어서 기본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자료들을 재-정렬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책의 종교”와 민간 종교 모두에게 있어서의 진전을 보이고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종교적인 삶의 중심지는 그 어떤 장소라도 “거룩하게” 여겨지는데, 바로 신들이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거주하는 곳이며, 그러므로 따로 떨어져 있거나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석을 위해서, 혹자는 작고, 지역적인 성소들인 개방된 “제의적 장소들”과 크고 공공적인 성소들인 기념비적인 성전 사이를 구별할지도 모르겠다(위를 보라).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다소 인위적이라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소들 가운데 그 어떤 곳에서도 신적 존재감이 있는가에 대한 점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건, 우리는 이러한 모든 형식의 거룩한 시설들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과 같은 동등한 그런 것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지역 성소들과 가족 종교
“성소”에 대해서라면, 나는 핵가족, 혹은 기껏해야 친척들이 모여 있는 소규모의 가족이 섬기는 지역의 거룩한 장소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장소들 가운데, 기원전 12세기에서 7세기 시대를 아우르는, 최소한 열 곳 정도의 고고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곳들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이들 중에서 몇 곳을 개괄해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러한 장소에서 무엇이 행해졌었는지에 대한 추측으로 진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만약 제 4장에서 다루었던 성서 본문이, 비록 대부분은 후대일지언정, 그러한 성소들과 민간 종교에 있어서 그 어떠한 신앙과 행습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연대적인 면이 아마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1) 알려진 가장 초기의 가족 성소는, 기원전 12세기에 나사렛 근방 네토파(Netofah) 계곡에 있는 하부 갈릴리 지방 텔 엘-와이야트(Tell el-Wawiyat)의 작은 촌락에 세워진 국내 건축물이다. 제의적 활동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이국적인” 내용들 가운데에는, 낮은 기둥을 둔 바닥이 있고, 장식이 달린 현무암으로 된 삼각 다리를 둔 그릇, 보석과 약간의 금을 가공하기 위한 금형, 그리고 조각난 여성 조각물(Nakhai 2001:173). 그러나 와이야트(그 뜻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철기 시대가 막 시작하는 때에는, 갈릴리의 많은 장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유력한 “가나안” 촌락이었을 것이다(Dever 2003:208-211).
(2) 기원전 12-11세기에, 예루살렘 북동쪽의 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아이(ʿAi) 촌락은 확실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다. 여기에는 독특하게 넓은 방인 “65번 방”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벽을 따라서 낮은 긴 의자가 둘려져 있었다. 내용물들로는 특성화된 자기 그릇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몇 개는 맨 위에 있는 제의적 세움대(stand)에 잘 들어맞는다. 이것은 원통형 세움대로 열린 “창들”이 열을 따라서 둘러있으며, 하부엔 정체불명의 인간의 발 모양을 띤 것들이 역시 둘러있다. 그리고 이곳엔 두 개의 동물 형상이 있었고, 약간의 보석들이 있었다.
(3) 동시대의 것으로 근방지역인, 키르벳 라다나(Kh. Raddana)는 (아마도 성서의 “브에롯”일 것인데) 역시 기원전 12-11세기의 가족 성소였는데, 두 채나 되는 건물이다. 주목할 만한 것이라면, 바닥에는 낮은 “제단” 모양의 돌받침이 있었고, 특별히 독특하면서 커다란 다중 손잡이를 가진 그릇이 있었다. 이는 황소의 머리가 돌출된 형태로, 아마도 술을 따르는 제물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4) 기원전 10세기인 통일왕국 시기에, 이러한 “가나안” 양식의 성소들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히브리 성서의 후대 본문에 따르면 모든 예배가 제사장의 권위 아래에서 예루살렘으로 중앙화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즈르엘 계곡 남부에 해당하는, 므깃도의 두 개의 지층인 VA-IVB에서 나온 건물의 “제의적 모퉁이들”은 특별히 잘 보전되어 있다. “2048번 성소”는 크고도 잘 건축된 건물의 입구 쪽 홀에 있었다. 문간은 인접한 기둥으로 이어져있고, 두 개의 돌기둥을 옆에 끼고 있었다(m������ṣṣēbôt; 위를 보라). 이 방에는 네 개의 뿔이 달린 제단이 한 때 있었다. 본관에서 나온 물건들로는 두 개의 뿔을 가진 다른 제단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돌로 된 제사용 받침대가 세워져있으며 삼각의 절구와 공이가 있었고, 자기로 된 제사용 상에 물항아리와 다른 그릇들이 있었다. 또한 타버린 곡식들이 있었고, 양들과 염소의 복사뼈(마디뼈)를 담아 놓은 대접도 있었다. 다른 장소인 “228번 성소”에는 제사용 대야(basin), 탁자 그리고 긴 의자가 있었고, 다양한 입상석들, 돌로 된 절구와 공이들, 뿔이 달린 제단, 테라코타 모델, 그리고 남자 신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 성소는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듯해 보인다.
(5) 요단 북부 계곡에 있는 텔 르호브(Tel Reḥov)는, 성서의 “르홉”으로, 기원전 10세기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역에 속한다(지층 5). 이 시대에서부터 저지대 도시의 큰 평지에 인접한 작은 성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소와 연관된 것으로는 진흙벽돌로 된 바닥 위에 세워진 돌로 된 제단으로, 네 개의 입석들과 돌로 받쳐진 “제의용 탁자”를 사이에 끼고 있었다. 바닥 주변에는 사방으로 창이 난 제의용 입상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잔들이 있었고, 동물과 여성의 형상물이 있었으며, 다양한 인장과 청동으로 된 황소의 머리가 있었다. 근처의 외각지대에는 “거룩한 음식”을 준비했던 증거들이 나타나는데, 야생 염소 뼈의 큰 무더기가 발견되었다(Mazar 1999; Mazar and Camp 2000).
(6) 서쪽으로 눈을 돌려서, 이즈르엘 계곡에 기원전 10세기의 작은 이스라엘 촌락인 텔 아말(Tel ʿAmal)에는 또 다른 지역 성소의 증거가 나타난다(지층 3). 오랜 역사를 지닌 3방 구조 건물은 봉헌된 그릇들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도기로 된 제사용 입상, 돌로 된 입상, 그리고 여성 형상물들이 있다(Levy and Edelstein 1972).
(7) 북부의 텔 엘-파라(Tell el-Farʿah)는, 아마도 성서에는 디르사로 되어있는데, 북부 사마리아 언덕지대로, 비록 증거들은 흩어져있지만, 기원전 10세기에 해당하는 성소를 발견할 수 있다(지층 VIIb). 발견된 것으로는 신전(naos), 즉 테라코타로 된 성소가 있고 몇 개의 여성 형상물이 있었다.
(8)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는 대부분 왕정 구조물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모두가 성채에 있다. 그러나 “207 E번 중심지”인 잡석으로 된 구덩이에는, 예루살렘의 제 1동굴에서 출토된 제의적 물건들과 도기들과 유사한 수준의 것들이 나왔는데, 이는 그 주변에서 한 때 기원전 8세기에 작은 제의 중심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죽은자를 위한 잔치”(마르제악[marzēaḥ]; 아래를 보라)를 열었던 곳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이 사적인 제의인지 공적인 제의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현장(in situ)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없기 때문이다.
(9) 라기쉬라는 유대 성채에서는, 발굴자들이 기원전 10세기로 보이는 지층 5에서 “49번 제의용 방”을 발견했다. 이것은 작은 방으로 낮고 긴 의자들이 벽을 따라서 둘러 있었다. 방안에는 작고 유형화된 네 개의 뿔 달린 제단이 있었고, 몇 개의 테라코타 제의 입상이 있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제의용 용기들이 있었다.
(10)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은, 아마도 성서에서 “기럇 세벨”(수 15:15-역주)로 나온 곳으로, 사마리아에서 나온 동굴과 유사한 것이 나타났는데(위를 보라), 이는 역시 제사용 음식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Holladay 1987:274,275).
이러한 작은 성소들과 제의용 주변도구들을 통해서 판단해본다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거룩한 장소”라고 하겠는가? 거기에서는 어떤 제의가 이루어졌으며,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신앙이 반영되고 있었는가? 소수의 주석가들조차도 추정하기는 주저하고 있다(그러나 Holladay 1987을 보라). 첫째로, 나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가족 성소로, 하나의 핵가족이 섬겼던 것이거나, 혹은 보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다 큰 확대 가족 구성원들(1장)이 섬겼던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성소들은 사적인 예배를 위한 목적으로, 거기에는 고정된 형식의 예식이 없었고, 그 어떠한 제사장의 관여도 없었으며, 규정된 신학도, 따라야만 할 그 어떠한 것도 필요치 않았다. 가족의 다양한 구성원들은 아마도 날마다 이렇게 가까운 성소에서 간단히 멈추어 섰을 것인데, 그들이 필요가 느껴지는 때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나 그룹을 지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성소들(위를 보라)에서 나온 인공유물의 일관적인 유형은 확실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유형들에는 다음의 목록들의 다양한 결합을 포괄하고 있는데, 어떤 성소에서는 몇 개만을, 다른 성소에서는 많거나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1) 입석(立石)
(2) 제단, 어떤 것은 “뿔이 달렸다”
(3) 돌 탁자와 대야
(4) 제사용 대(臺)
(5) 긴 의자들
(6) 보석류
(7) 자기로 된 대접들, 많은 것들은 “이국적”이다.
(8) 동물의 뼈와 남겨진 음식물
(9) 복사뼈(마디뼈)
(10) 테라코타로 된 여성 형상물
지금까지 민간 종교에 관해서 우리가 다루었던 모든 것에 비추어서 볼 때, 여기에서 무엇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에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일부는 심지어 (4장에서 정리한 것처럼) 보다 “정통적인” 성서 본문들의 이상에도 잘 들어맞는다.
(1) 가족 성소에서의 입상은 분명히 위에서 논의했던 성서의 마체봇(m������ṣṣēbôt)이다. 나는 이 돌기둥(stelae)의 주요한 기능이, 성서 본문에 따라서, 신의 등장을 기념하고 그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돌기둥이-종종 3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은 인상적인 기념비적 입상이기도 하는데-단지 대중적인 성소와 성전에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것들이 거기에만 있는 것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가족 성소와 산당(high place, 아래를 보라)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종종 같은 종류의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것들은 간단하게 보다 작은 형식이라고 하겠는데, 그렇지만 그 작은 크기로 인해서 효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들은 그 능력에 있어서 축소되지 않는다; 그 상징들은 단지 적당한 비율로 작아진 것뿐이었고, 아마도 이것이 보다 “친근해” 보인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옛 가나안 제의의 흔적을 보여주는 입석들은, 결국엔 기원전 7세기에 있었던 개혁운동으로 인해서 금지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들은 민간 종교에서는 항상 사용되어졌었고,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야웨(와 아마도 다른 신들)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집(bēt, “성전”)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었고, 제의적으로 가능한 모든 곳에서 존재했다. 신의 임재에 대해서 가시적이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징보다 가족의 예배의식에 있어서 더욱 근본적인 것은 없었다.
(2) 보다 큰 고정된 돌 혹은 진흙으로 된 제단들(성서에서는 mizbēḥôt)은 반드시 동물 희생과 다른 음식번제-신들이 먼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것의 일부를 야웨나 혹은 다른 신들에게 되돌려주는 행위-를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빈약한 발굴 기법과 잘못된 내용을 출판한 것으로 인해서, 동물들과 음식으로 무엇이 바쳐졌으며, 혹은 어떻게 바쳐졌는지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종종 방해를 받고 있다.) 동물들은 촌락과 농부들이 전형적으로 키웠던 것-양, 염소, 그리고 소-들이었으며, 그것들은 증가되기를 희망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다른 음식물들-주로 곡물, 기름, 그리고 포도주-은 역시 곡식을 늘리기 원했던 사람이었다면 그에 해당하는 농경생산물을 번제로 바쳐야만 했다. “신학”이란 것은 상당히 깊지 못했을 것이며, 영적인 고취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했다. 몇 개의 큰 제단에 있는 “뿔들”은 아마도 황소 혹은 “번영”이라는 면을 뜻하는 것이었다(116페이지의 그림을 보라).
45번 혹은 작은 “뿔 달린 제단들”으로 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은 엄청난 연구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그것들은 이러한 지역의 가족 성소 내에서 분명히 번제(burning incense)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비록 후대의 성서 기록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그러한 번제를 금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Gitin 2002). 제단에 향을 피우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동물 사체에서 나는 악취를 숨기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그럴듯한 설명은, (제단 위에서 타는 새의 향기가 올라가는 것처럼; 레 1:17) 달고 매혹적인 향기를 하늘로 둥둥 띄워 보내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은 뿔이 달린 제단들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써, 가옥의 옥상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는데(이는 하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브리 성서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고대 근동 문서에서도 알려져 있는 제의였다(Gitin 2002:100,101).
“뿔”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아마도, “황소 제의”와 관련된 오랜 제의들 가운데 일부가 보존된 상태로 첨가되면서, 이러한 정형화된 뿔이 나중에 향이 태워지는 그릇을 지탱하는 기능적인 도구로 점차 변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역시 작고도, 정방형의 석회함 제단도 있었다. 라기쉬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시대의 제단에는 lbnt, 즉 “유향”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었는데, 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점점 증가하는 향신료 무역의 덕분에, 옛날보다 더 싸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값이 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향은 신을 향한 합당한 선물로 여겨졌었을 것이다. 그들을 즐겁게 하고 달래주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었다(그리고 결국, 정의상 “희생”은 값비싼 것이다).
(3) 일반적으로 성소에서 발견되는 돌로 된 번제용 탁자와 대야들은 일상적인 부엌 용기들은 아니었다. 이러한 기구들은 컸으며, 종종 값나가고 사용하기에도 어려운 검은 현무암(화산암)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창이 나고 삼각 다리를 가진 그릇과 같이, 다양하고 정교한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탁자”는 제단의 용도가 될 수 있었는데, 위에서 기술한 것들과 같이, 그것이 상징하는바 “신들이 식사하는 식탁”이라는 점은 보다 분명하다 하겠다. 이것이 신들을 위한 진수성찬이라는 유일한 상징물은 아니다. 대야, 사발, 절구, 그리고 공이들은 보편적으로 조잡하고 작은 구멍이 많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현무암은 빵이나 과자를 굽기 위한 밀가루를 만들어내려고 곡물을 가는데 있어 이상적인 도구이다. 현무암 그릇의 작은 구멍에 보존되어있던 작은 음식 미립자에 대한 현미경적인 분석의 결과(이 작업은 나의 박사과정 학생들 중에 한 명인 제니 에벨링[Jenny Ebeling]이 실시했다) 그것들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현장(in situ)에서 실제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
(4) 붉은 점토로 된 “제의 입상,” 혹은 보다 간단하게 말해서 “번제용 대”는 많은 작은 성소들에서 일반적인 것인데, 이는 다른 제의적인 상황에서도 그러하다(아래를 보라). 발굴을 통해서 알려진 것들 가운데 수 십 개는, 기원전 12세기에서부터 기원전 6세기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상당히 이상한 점은, 알려진 그 어떠한 희생과 제물을 연결시킨다 하더라도, 히브리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그것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불에 구운 점토로 만들어졌는데, 현란한 밑 부분이 있고, 원통형의 기둥은 높이가 30센티미터에서부터 60센티미터를 넘을 정도이며, 꼭대기에는 도상학적인 형태가 있거나 단지 서로 구별된 제물 그릇을 유지하기 위한 구멍이 있었다. 종종 기둥에는 다양한 향번제를 위한 열린 구멍들이 있었는데, 이는 창문으로 여겨졌으며,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입상을 다-층식으로 된 신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할 정도였다(사실 이러한 신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입상들은, 철기 시대 후반의 것으로 이제는 보다 특성화되어서 “이스라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높고도 가느다란 기둥의 모습으로, 수그러져 있는 “잎들”이 꼭대기를 둘러 있어서 종려나무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는 종종 여신 아세라와 연관되고 있다(아래를 보라). 입상들 가운데 가장 이상한 것이라면 위에서 언급한바 있는 아이(ʿAi)의 성소에서 발굴된 것으로(112페이지의 그림을 보라), 바닥 부분에 불쑥 나온 인간의 발 모양이 한 줄을 이루고 있다. 나는 그것이 야웨의 몸이나 얼굴을 그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에 비해서, 이러한 온건한 “발” 정도는 성소 안에서 상징적으로 그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혹은 발을 맹목적으로 섬기는 것일까?)
그러한 형태의 배경에 있는 심리상태가 무엇이든 간에, 희생제사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때, 입상은 실제적인 방식으로 기능했다. 향은 기둥 아래쪽에서 태워졌을 것이며, 반대로 음식제물은 꼭대기의 판위에 자리를 잡고 그 테두리 안에 있거나 혹은 구멍에 맞는 그릇 안에 놓여 졌을 것이다. 이러한 입상들을 놓고 화학적인 분석을 실시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가 성서 본문에서 언급했었던 조건에 맞는 제물 상당수가, 말하자면, “소규모”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성서 기록자들이 이러한 일반적인 입상들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거나, 혹은 보다 그럴듯한 이유를 들자면, 그것들은 지방의 가정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가정 성소의 담을 둘러싸고 있는 긴 의자들은 격식을 갖춘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들의 자리를 위한 목적과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제물들, 즉 신께 바쳐지는 다양한 선물들을(심지어는 꽃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올려놓는 장소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의 긴 의자들은 성소의 아담한 크기에 잘 들어맞는다.
여기에서 기술했던 번제단들, 탁자들, 대야들, 입상들 그리고 긴 의자들은 모두가 신들을 위한 희생제사와 선물로서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신학적인 정당화와 이론적인 이상이라는 개념에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삶을 위한 실제적인 요구들과도 조화될 수 있다. 예배자들은 신들에게 생명, 건강, 번영 그리고 자손을 간청하면서, 그들이 가진 것을 제물로 바쳤고, 최선을 기대했다.
그러한 지역적인 가족제의에 관해서 “비체제순응주의자들”(nonconformist)에게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들은 지방에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과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전형적으로 공적인 제사장이 한 명도 없으며, 단지 가부장적인 가족(paterfamilias)-혹은, 보다 종종, 가정의 아내와 엄마가 있을 뿐이었다. 형식적인 “예배”를 위해 정례적인 순서 같은 것은 없었다. 규정된 전례의식도 없었고, 확언해야만 하는 신학적인 신조도 없었다. 산당을 논하면서 제 4장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그러한 지역 성소들은 정착 시기와 왕조 초반에 사실상 일반에게 인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신명기적 개혁의 후반부인 시기에, 즉 그들을 억압하고 예루살렘에서 모든 예배를 집중하려는 시도가 내려졌던 시기에 와서야 파문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교조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시골에 와서는, 사람들은 그들이 항상 소유하고 있는 것을 예배했으며, 자신들의 행습들을 “비-야웨주의적”인 것으로는 거의 확실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6) 보석류와 그 부품들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주형들은 희생제사뿐만 아니라 귀중한 물건들까지도 지역성소에서는 신들에게 바쳐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론적인 설명은 같다: “되 돌려주기” 은과 금은 값이 나가는 것이었지만, 태고의 시대로부터 그것들은 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소망 아래에서 신들에게 드려졌었다. 달리 말해서, (물질에 관해서 지나치게 우둔해지지 않고) 부의 증가를 보증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석류, 원석, 그리고 유사한 것들을 현장에서(in situ) 발견하기는 매우 드물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모두 약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건, 지역 성소들은 진정한 부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러한 “기부”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곳에는 보조해야할 지역 제사장들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부유한 보물창고가 되었는데, 이는 처음엔 아시리아와 다음으로 바벨론을 상대로 조세를 바치고 그들의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서 결국 거덜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부”는 상대적인 것이었으며, 농부의 아내가 소유한 황금 귀걸이들은 왕들의 몸값에 해당하는 정도의 가치 있는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7) 도기 그릇들은 가정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어서, 그것들이 성소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특별히 대접들과 음식 제물을 위한 kraters(항아리)가 나타났다. 이러한 성소들에서 발견된 그릇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러나, 보다 특별한 것이었거나 혹은 다소 “이국적인” 것이었다. 어떤 것들은, 물주전자와 juglets처럼, 헌주(獻奏) 제물로 사용되었을 것인데, (성서에서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름이나 포도주를 붓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다른 것들로는, 발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성배(聖杯)와 같이, 음식물과 음료 제물을 바치는데 있어서 편리했을 것이다. 어떤 도기 그릇들은 요리와 진수성찬이 성소에서는 일상적인 활동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요리용 그릇, 크고 작은 접대용 대접들, 그리고 마시는데 사용되는 성배들(아래를 보라). 작은 자기로 된 향로들 역시 알려졌는데, 이는 향을 태우기 위한 용도였다. 그리고 작은 “장신용-대접”(헬라어로 kernoi)은, 우묵한 가장자리와 동물 모양을 띈 주둥이로 액체를 따르는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헌주 제물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성서 본문 상에서 언급되고 있다(비록 이러한 대접들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용어는 없다 하더라도). 또한 아마도 헌주용으로 작은 도기로 된 동물모양의 작은 상(像)-일반적으로 네 발 짐승-이 있었는데, 이것은 속이 빈 몸체에 채우거나/붇기 위한 주둥이가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이전 시기의 가나안 본문에서 마르제악(marzēaḥ)이라고 불리는 제의 숭배 연회를 알고 있다. 이것은 신들과 함께 음식을 상징적으로 나누는 공동체 식사라고 여겨졌었다. 그것은 때때로 “죽은 자들과 함께 잔치하다”라는 개념으로도 연결되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만취한 만찬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예식에서 마르제악과 연속성을 보이는 증거물들은 불충분하고 또한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제의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 두 개의 본문, 암 6:4-7과 렘 16:5-9에서부터 재구성하고 있다. 첫 구절은, 내가 위에서 인용했던 것으로, 사치스러운 연회를 기술하고 있지만, (만취상태를 포함해서) 그것의 낭비에 대해서 예언자가 경멸하고 있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종교적인 암축은 암시되어있기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진술되지 않았다(아모스의 관점에서는, “거짓 종교”일 뿐이다). 예레미야에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인 “초상집”(bêt marzēaḥ)은 잔치를 의심 없이 죽은 자를 위한 예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예레미야는 거기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통상적인” 사회적 교제를 피했던 것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제 8장에서 자세한 것을 보라.)
이러한 구절들은, 애매한 것이기는 하지만, 예식적인 연회들이 때로는 지역 성소에서도 열렸음을 암시하는데, 비록 성서의 기록자들은 그것이 “이교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것들에 대해서 의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승인된 연례적인 많은 축제들에 수반하여 발생했었다고 알려지며(제 4장), 그러한 의식들은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의 관대함을 축하하고 그들이 베푼 선물들을 기뻐하는데 있어, 더 좋은 방법으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혹자는, 물론, 기독교 교회에서 이뤄지는 주의 만찬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것이 상징적인 음식에 그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8) 타버린 뼈들과 남은 음식 유기물들은 때때로 우리가 논의했던 성소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한 유물들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종종 지나치게 무시되어왔거나 혹은 (“쓰레기”로)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재조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여기에서 제의적 식사의 증거(위를 보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9) 복사뼈들은 양이나 염소의 마디뼈로, 일반적으로는 대접 안에 든 비장(秘藏)에서 발견되곤 했는데, 이 대접은 사용함에 있어서 세련되고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정답은 분명히 “마법”에 있다. 즉 특별히 점을 칠 때 사용되었다. 뼈들은 주사위와 같이 흔들렸고, 그런 다음에 탁자나 바닥 위에 던져져서 그것들이 어떠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므로 신의 어떠한 계획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만약 그것이 그렇게 나왔다면, 신들은 말을 한 것이 되는데, 좋은 조짐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거나 였다.
“마법”에 관한
마법-즉, 점, 마법, 혹은 주술의 형태-은 히브리 성서에서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전형적인 본문으로 신명기 18장 9-14절이 있는데,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매우 늦게 기록된 것으로, 기원전 7-6세기 신명기적 개혁 운동의 선전문구의 일부였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제 3장).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말하고 있는 전부라는 것은 왕조 말기에, “공식적인” 야웨주의 집단에게 있어서, 마법적인 모든 형태들이 외국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리고 이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인들의 제의로부터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법이 민간 종교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더라고 한다면, 그 마법을 비난하는 것은 요점이라고 볼 수 없다. 도대체 고대근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중적이었던 것이, 왜 여기에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구약 신학이라는 책에서는, (제 2장에서 보았듯이)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마법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심지어는 부인하기까지 해왔다. 그러므로 주도적인 학자였던 게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종교사가는 마법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그것의 부재는 이미 그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종교사에 있어서, 특별히 고대 근동의 종교에 있어서, 꽤 비교할만한 모든 형식들 사이에서 예외적인 위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제퍼스[Jeffers] 1996:7,8에서 인용함). 이것은, 물론, 표준적인 신학적 결론으로, 고대 이스라엘은 “독특”(헸고 또 그래야만) 했다는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없었다. 최근 앤 제퍼스(Ann Jeffers)의 「고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마법과 점Magic and Divination in Ancient Palestine and Syria」(1996)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보다 최근에 나온 이스라엘 종교사들은 약간은 더 실제적이라고 하겠지만, 아직도 그것들은 마법의 중요성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알베르츠(1994)는 “가족 경건”을 다루면서 고고학적인 증거들 얼마를 언급하기는 했지만(아래를 보라), 단지 건강과 잘사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잇을 뿐이다. 그는 그 어떠한 형태의 마법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밀러(2000)는 귀신연구, 점술, 그리고 신탁 예언을 다루었지만, 아무런 실제 고고학 정보들은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한 두 개 정도의 각주에서 마법의 다른 형식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본문만으로 대중적인 종교에서 마법의 형태들을 입증해내려는 것은 반드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신명기 18장은 홀로 서있지 않는다. 열 개가 넘는 마법의 형태들이 본문 상으로 언급되었고, 심지어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는 금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존재는 암암리에 인지되었다. 조직화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더라도(“마법”은 합리성을 무시하지만, 그렇다고 실제적인 이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결국 “성서 세계”에서 다음에 나오는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1) 귀신연구와 축귀(와 어떤 후기의 본문에서는 천사연구)
(2) 점
(3) 신탁 (예언적이거나 다른 종류의)
(4) 점술
(5) 남자 현인과 여자 현인
(6) 마법사
(7) 주술사
(8) 마술사, 요술
(9) 꿈 해몽가
(10) 점성가
(11) 제사장적 “축복과 저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성서의 세계는 기적들과, 얼마나 우리에게 이국적이며 비위에 거슬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상의 경험들의 일부로 여겨졌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는 정경 예언자들까지도, 더 이상 “선견자”나 황홀경에 빠진 사람이 아닌(삼상 9:9) 정치가로서,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사장들도 마찬 가지였는데, 이들은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초래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마법들은 우주론(cosmology)에서 나온 것으로, 즉 세계, 우주, 그리고 “존재하는 힘”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이다. 고대에 근동과 이스라엘에 뿐만 아니라, “셈족 정신”이라고 여겨지는 세계관이라고 하면서, 학자들은 “논리 이전의” 혹은 “신화시대의” 생각이라고 부르면서 특성화했다. 이것은, 물론, “경험주의적-논리” 혹은 현대의 과학적인, 이성의 사고와는 대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 아래에서, 우월성에 대한 감추어지지 않는 암시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의 것이 종교이고, 당신들의 것은 미신이다.” 현대적인 생각은 이성적이므로 명백히 더 나아 보였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1) 첫째로, 고대의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즉, 그것은 “어떻게 사물이 작동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며, 어떻게 신적인 힘이 개인적으로 유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치된 세계관이다. (2) 둘째로, “종교”는 사실상 “마법”인 셈인데, 만약 누군가가 종교를 신학적인 신조로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건, 왕조(와 심지어는 후기 유대교의 무시무시한 “악인의 눈”이라는 것[아래를 보라]이 있었을 때) 전반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종교는 기적과 마법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체계적으로 개관되지 못해왔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걸 한번 해보도록 하자.
(1) 나는 므깃도와 다아낙의 가족 성소에서 발견된 복사뼈들이 점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일찍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또한 얼마 정도의 무엇이 새겨진 토기 그릇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나는 “호의적인 마법”과 관계가 깊은 것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기원전 8세기에 브엘세바에서 발굴된 큰 대접으로 Qōdesh, “거룩”이라고 써있다. 다른 것은 기원전 8세기에 키르벳 엘-콤(Kh. el-Qôm, 성서의 “막게다”)에서 내가 발굴했던 대접으로, 거기에는 ʾēl, “하나님”이라고 읽히는 것이 나왔다. 첫 번째 것은 추정적이지만, 나는 나중의 것에서 나온 명각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수 없는데(“하나님”이 그 대접의 주인이라고 볼 순 없다), 만약 그것이 신적인 호의를 보장받는 마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제물용 대접이었으며, 이미 논의되었던 제의탁자와 같이 사용되었던 종류였을 것이다.
(2) 또 다른 명각 그릇은 기원전 8세기에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ʿAjrûd)의 성채-성소에서 출토된 저장용 항아리로, 그림과 함께 유사한 축복문이 나와있다: “야웨가 당신을 복주고,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과 함께 하기를.” 이것은 아마도 성문의 성소에 놓여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봉헌물” 혹은 (보다 나중에 있어서는) 예배자들에 대한 일종의 “대역”으로 보인다.
(3) 우리는 사사시대부터 내려온(기원전 12-11세기) 무엇인가가 새겨진 청동기 화살촉들도 상당수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것들은 그의 보호신뿐만 아니라 (아마도) 용병의 이름들이 나와 있다. 어떤 것의 내용은 이러하다: “벤 아낫(Ben ʿAnat, 여신 아낫[ʿAnat]의 아들), 사자 여신의 종” (위대한 여신의 별칭으로, 그녀가 번갈아서 쓰는 이름이다). 이러한 화살촉들이 색다른 것으로서 단지 사용자의 이름이거나 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떠한 의미심장한 것이 따라오고-전쟁, 부상 혹은 사망의 가능성-독실한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 축복을 갈구하는 차원에서 금속과 관련된 점을 암시하는 성서 구절은 거의 없는 편이다. 여호수아 8장 18-26절의 이야기에서, 여호수아는 야웨로부터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서” 가나안의 성읍인 아이(ʿAi) 정복을 확신시킬 것을 듣는다. 더욱 요점에 가까운 것이라면 에스겔 21장 22절의 본문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 길의 교차로에 서서, 한 쪽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데, “화살을 흔들어서” 갈 길을 결정하는 “점을 치고” 있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는 “드라빔(한글-우상)에게 묻는 것”과 “간을 살피는 것”(“간검사”)이 연결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마법을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예라고 하겠다(비록 이스라엘 사람이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 기록자가 그러한 방식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미하지는 않고 있다).
(4) 보다 더 분명한 비-성서적 본문 증거로 기드론 계곡 가까이 있는 케티프 힌놈(Ketef Hinnom)이라는, 예루살렘의 무덤에서 발굴된 기원전 7/6세기경의 무엇인가가 새겨진 은으로 된 부적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둘둘 말려져있었으며, 이는 목 주변을 두르고 있는 가죽끈에 입혀진 것으로 보이는 데, 곧 “행운의 부적”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더니, 그 부적은 그 유명한 민수기의 모세가 했던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제사장의 축복기도문”의 또 다른 형태를 보이는 온전히 보존된 히브리어 명각품이었던 것이다:
민수기 6장 24-26절 |
케티프 힌놈 |
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신다. 주는 그 얼굴을 비추사 너를 향하여, 네게 은혜를 주신다: 주는 그의 얼굴을 향하여 드사 너를 향하여, 네게 평강을 주신다. |
야웨께서 너를 복주시기를 그리고 너를 지켜주시기를. 야웨게서 그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비추시기를 그리고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
이렇게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발굴에서 얻어낸 몇 가지 것들은 민간종교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명각품(inscription)-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경구절 조각으로, 이는 사해두루마리의 가장 오래된 것들보다 거의 400년 이상 앞선다-은 우리의 정경적인 성서 본문에 대하여 또 다른, “대중적인” 형식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그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축복문을 결합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10개의 히브리 단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성서의 15개 단어와 비교된다. 그것은 아마도 시편 67편 1절의 “짧은 형식”으로된 같은 축복문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신다.” 케티프 힌놈의 축복문은 그러므로 대중종교의 실제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나는 일전에 형식화된 “문자”가 대중 종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품었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널리 사용된 축복문의 “민간” 형태를 진정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판본에서 정경적인 본문으로의 이동과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부적과 함께 매장된 사람-여성으로, 이는 멋진 보석류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은 그 부적을 그녀의 목에 두르면서 분명히 자신의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요점은 그 글씨들을 “부적”으로 사용하면서, 불행을 쫓아내 버리는 일종의 “마법”을 썼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부적이 실제로 단지 “성구함”과 비슷한 것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반론하고자 한다. 성구함은 작은 상자로 성경구절이 새겨진 종이조각을 넣는다; 그것은 몸에 지닐 수 있으며, 혹은 문설주에 고정시킬 수도 있다(신명기 9장 9절; 11장 20절; “메주자(mezuzah)”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바로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왕조 시대에서 이미 일종의 “마법”-마귀를 쫓는 장치 혹은 “행운의 부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가죽으로 된 성구함들이나 혹은 “테필림”이라는 것이 기도자에게 사용되었었다.)
마지막으로, 케티프 힌놈의 부적은 산간벽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덜 도시화된 사람들이 “미신에 덜 사로 잡혔다는 이유로” 용서를 받는 꼴이 된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중심지에서 나왔으니, 종교적 수도요, 성전으로부터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정통종교”는 여기까지였다.
(5) 대중적인 종교를 입증해주고 있는 다른 무덤들과 분묘의 부장품들이 나왔다. 증거들은 전형적인 기원전 8세기 유다의 벤치형 무덤(bench tomb)에서 출토된 것으로, 내가 1968년에 서부 헤브론에서 작업했던 것이다. 키르벳 엘-콤이라는 장소는 아마도 성서에서는 막게다(Makkedah)로 여겨지는 곳이다. 철기 시대 묘지에서, 열 두 어개 정도의 벤치형 무덤들 중에 한 개에서, 네 줄로 된 히브리어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나는 1969년에 즉시 출간했었지만 학자들은 거의 십년 동안이나 주목하지 않았었다. 비록 언어적인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합의된 읽기는 다음과 같다:
통치자(혹은 부자) 우리야후를 위한, 그의 비문
우리야후는 야웨에게 복을 받았다:
그의 대적들로부터 그는 구원을 받았으니
그의 아세라에 의해서
오니야후가 (쓰다)
나는 이 비문에 대해서는 제 6장에서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세라라는 단어를 “축복을 주는 사물”(나무나 기둥)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여신 아세라의 고유한 이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실제로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이 비문에 대해서 나는 간략하게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즉, 분명히 인간의 손이 새겨진 것 말이다. 그것은 거의 상당히 후대의 이슬람 함자(hamza) 즉 “파티마의 손”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모슬렘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손의 형태는 벽에 “긁은 그림”(graffito)으로, 이는 문간이나 부적에도 나타난다. 혹자는 오른손을 보고서 “행운”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것의 목적은 “악마의 눈”을 쫓아내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내가 발굴한 엘-콤의 손은 도굴되지 않은 기원전 8세기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그것은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 기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축복문”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같은 사람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야웨의 손”으로부터 행운을 얻으려는 소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표현은, 특별히 “축복”이라는 맥락에서, 히브리 성서에서 열두 번도 넘게 나타난다. 그것의 저자는 “축복의 손”에 관해서 기록했다고 한다면, 지방에서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그렸던 것이다. 아마도 야웨 자신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을 그리는 것은 용납될 수 있었다. 혹자는 유명한 듀라-유럽의 회당 벽에 그려진 그림(기원후 3세기), 즉 하늘에서부터 모세를 향해서 야웨가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그의 손만이 나타나고 있다. 상당히 두려운 존재인 “악의 눈”에 대해서, 역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아인 하-라아(ʿayin ha-raʿ)는 후대 유대교에서 눈모양의 부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이를 아람어로는 “마술 사발” 혹은 그와 같은 것이라고 불렀다. 이는 왕조 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인다. 왜 안 되겠는가?
(6) 나는 위에서 몇 개의 부적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실제로 수 천점의 철기 시대의 부적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유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극소수의 성서학자들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일 뿐이다. 부적들은, 정의상, “마법적인 상징물”이며, 대부분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사용된다(귀신을 내쫓거나, “악한 것을 물러가게 하는 것”). 그것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었을 것으로, 자신들의 가장 귀중한 재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들은 죽은 자와 함께 매장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라면 이집트적인 것으로, “호루스의 눈” 장식판이다. 이는 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특별히 죽은 자를 보호하는 베스(Bes)를 뜻한다. 그리고 다른 광택이 나는 물건들도 있다. 같은 무덤들에서 발견된 모형 기구들은 역시나 마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침대들, 침상들, 의자들은 죽은 자들이 “삶을 지속하도록” 위한 것이었을 것이며, 여전히 “죽은 자들의 집”에서 사용되는 가구로 여겨졌을 것이다(이점에 대해서는, 블록-스미스 1992:86-90.94를 보라).
(7) 고대의 새긴 보석들은, 인장 도장에 그려진 것으로, 예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비록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것들을 과소평가해왔지만, 킬과 울링허는 철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제2장의 “프라이부르그 학파”를 보라), 수백 개의 사례들을 발표했다. 나는 그들이 제공했던 엄청난 증거들을 개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인장을 사용했고, 인장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도상학은 “하늘 세력들의 점성학(astralization)”과 종종 관련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특별히 기원전 7세기 유다에서 널리 유행했었는데, 이는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점성 예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이국적인” 형식의 인장을 소유했던 일반적인 민간인들은 그것들의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사용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들을 단지 “장식”으로만 여기지도 않았었을 것이다. (“하늘황후”에 대해서는 제7장과 233페이지의 그림을 보라.)
공개적인 개방성소(Open-Air Sanctuaries)
가족 성소와 소규모의 사적인 성소들보다 한 단계 위로 나아가다보면(“위”라는 표현은 단지 복잡하다는 뜻이지,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산당” 혹은 바모트(b������môt)라는 것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내가 (제4장에서) 이미 소개했던 본문 상의 증거들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성서와 연관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것이었는가와 상관없이, 고고학적인 실례들에 의해서 보충된다.
(1)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산당(b������m������h)은 기원전 12세기의 개방된 꼭대기 성소로, 1981년에 도단 근처의 에브라임과 므낫세 고지대에서 마자르가 발견했다(나카이 2001:170,171). 그곳은 “황소 유적”이라고 불렸는데, 왜냐하면 주요한 발굴물로, 잘 보존된 아나톨리아의 “등에 혹이 있는 소” 형식의 청동기 황소가 나왔기 때문이다. 성소 자체는 다소 전형적인 산당으로, 격리된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보존된 둘러 싼 (혹은 “테메노스temenos”) 벽과 돌로 포장된 바닥 그리고 거대한 입석(m������ṣṣēb������h)으로 이루어졌다. 발견된 몇 안 되는 것들 중에는 기원전 12세기 도자기의 몇 조각, 테라코타로 된 향을 태우거나 번제용 단의 조각들, 청동과 은으로 된 보석류 몇 개, 조리용 항아리와 그릇들, 동물 뼈들과 부싯돌, 그리고 물론이지만, 청동으로 된 황소(이것은 표면에서 발견되었다)가 있었다.
“황소 유적”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산당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가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공공장소에 있었고, 번제단과 비슷한 바닥이 있었으며, 마체바 형상이 있었고, 희생제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더 나아가, 청동으로 된 황소는 “가나안적”이라는 이유로 산당(bāmôt)을 정죄했던 성서의 기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실, 마자르가 발굴한 철기 I 시대의 청동기 황소는 야딘(Yadin)이 1950년대에 하솔에서 기원전 14세기 “가나안적” 배경에서 발견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 시리아의 우가릿에서 발굴된 기원전 14-13세기의 엘-가나안 만신전에서 최고 신-의 주요한 별칭(혹은 “칭호”)은 바로 “황소 엘” 즉,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광포와 번영을 상징하던 존재였다. “황소 유적”은 성서 기록자들이 산당(bāmôt)과 관련해서 이해했던 것이 실제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초기 이스라엘의 예배에 있어서, 엘은 야웨와 함께 그리고 종종 그 보다도 더 숭배되었는데, 이 야웨는 이론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국가 신이었다(비록 다양한 본문에서는 “엘”과 “야웨” 모두 이스라엘의 국가 신을 지칭하기는 했지만).
(2) 상부 갈릴리의 하솔에서, 1955년부터 58년까지 이갈 야딘에 의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파괴된 가나안 성읍(지층 XI)의 무더기 위로 기원전 1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한 “무단 거주 지역”에는 소규모의 야외의 산당(바마)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소는 개방된 장소로 소규모의 직사각형의 건축물로 되어있는데, 벽을 따라서 얼마 정도의 긴의자들이 둘려 있고, 네 개의 입석이 있는 돌로 깔아 놓은 바닥과 연결되어 있었다. 발견된 것들 중에는 두 개의 깨진 제단대도 있었는데, 바닥 아래쪽에서는 항아리 안에서 청동기로 된 물건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 물건들 중에는 칼, 두 개의 창머리 부분과 밑동, 화살촉, 얼마 정도의 adzes, 자루가 달린 도끼, 잡다한 바늘과 다른 용품들, 그리고 인장이 새겨진 청동기로 된 엘 신 형상으로 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시리아와 가나안에서 출토된 수 백 가지의 형상들과 상당히 유사했다. 야딘은 산당(바마) 자체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그는 이것이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물건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것(즉 초기 시대부터 잔존한 것)이거나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다른 학자들은, 반대로, 엘 형상물은 이스라엘 사람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혼합주의”(아래를 보라)의 증거라고 순진하게 가정해왔었다. 사실은 유사한 모든 엘 형상물은 후기 청동기 시대나 혹은 이스라엘 이전에 알려져 있었다. 오래된 청동기 물건들을 포함하고 있는 항아리들은, “무단 거주자”들에 의해서 폐허로부터 캐낸 것임에 분명한데,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따라서 수집되고 산당(바마)의 바닥에 “서원 제물”로 놓여졌다. 청동기 시대의 시리아에서 거룩한 영역에서 서원을 위해서 이러한 항아리 제물을 드리는 것은 오랜 가나안의 전통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비블로스에서 사실로 드러나는데, 이곳은 수 천 개의 청동기 엘 형상물이 항아리 무더기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하솔의 산당(바마)는 초기 이스라엘 종교가 오랜 가나안의 그것과 강력한 연결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나는 하솔의 설비들을 산당(바마), 즉 사적인 것이 아닌 공공의 사당 혹은 성소라고 여겨왔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방된 장소에서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야딘의 지층 XI 층의 “무단 거주 지역”은 어떠한 집도 없으며, 단지 오두막과 쓰레기 구멍만이 있을 뿐이다.
(3) 시리아 국경의 텔 단에는, 1966년 이래로 이스라엘 탐사원들은 기원전 9-8세기경으로 보이는 건축물과 함께 의심할 바 없는 완전한 바마 즉 산당을 발견해냈다. 거기에 쓰인 것에 대해서는 그 복잡한 내부적인 발전 단계를 다루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면만 출간되었으며 더군다나 확실하지도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Biran 1994를 보라).
연중 끊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수원지 위로 작은 숲으로 이루어진 언덕의 융기된 북쪽 끝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당은 많은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 건물은 3미터의 높이에 18미터의 정방형 단으로 되어있는데, 뛰어난 페니키아 양식(“에슬러ashlar”-모나게 깎은 돌)의 석공 기술(“바마 A-B”)로, 대단히 큰 계단이 붙어 있다. 이것은 최근에 손실된 성전 구조를 위한 엄청난 기반이 아니라, 산당(바마)이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산당은 거대한 야외 제단이다. 그러나 두 개 혹은 세 개의 작은 “제단 영역들”은 단 꼭대기 뒤편에 시간이 지난 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변화들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당(바마)에 나타나게 되었는데(아래를 보라),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한 고대 근동에서 “거룩한 장소의 연속성”이라는 잘 알려진 현상 때문이기도 했다. 바마는 헬라 시대에까지 지속되었다(헬라어로 된 비문에는 “단Dan에 사는 신에게”라고 써있다).
계단 주면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뿔 달린 제단 조각들은, 그러한 제단이, 약 3미터 정도나 되는 높이에 있으면서, 한 때 지면위의 앞마당에 서 있었을 것인데, 분명히 빙 둘러있는 벽에 연결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앞마당은 직각형의 물 웅덩이로 두 개의 계단이 그 아래로 향하게 된다. 보다 작은 “뿔 달린 제단”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발굴자들이 “물-붓는 예식”으로 해석하는 시설들이 나왔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는 올리브 압착기로 보인다. 두 개의 거대한 현무암 판은 누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가운데가 깊이 파여서 모르타르를 발라 놓은 대야와 두 개의 옆구리에 손잡이가 달린 저장통은 바닥에 넘쳐날 정도였는데 여기에서 압착 기름을 수집했을 것이다. 열 두 개의 무거운 돌들은, 각각이 한 쪽 끝에 구멍이 나 있었는데, 이는 나무로 된 봉 끝에 무게를 더해서 벽에 잘 끼워 넣어서 올리브가 들어있는 상자를 눌렀다. 그러한 올리브 압착기는 철기 시대에서는 어디에서나 잘 알려진 것으로, 특별히 기원전 7세기 에그론에서 그러했다. 올리브 압착기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페니키아 양식의 남자상을 띈 파양스 도자기 머리 부분이 발견되었고, 다른 남자상으로는 이집트 양식으로 자리에 앉아서 연꽃을 쥐고 있었다(왕인가?). 그리고 두 개의 조각난 색이 칠해진 번제단이 있었다.
산당의 서쪽에서는, 뜰에서 독립된 지역으로 좁은 길을 따라서, 3부(3방)로 나뉘어진 긴 건물(“2746번 방”)이 있었다. 기원전 7세기에 이차적으로 더해진 것으로, 이것은 성서의 리쉬카(‘방’-한글성서, lishk������h)를 나타내는 것 같은데, 이것은 “다락방”으로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세워진 것으로 기술되었다(렘 35:4; 대하 31:11도 보면, “다락방”은 이미 히스기야 시절에 성전 근처에 세워졌다). 가운데 방(“2844번 방”)의 바닥에는 긴 돌로 된 제단이 있었는데, 위에는 판판한 돌이 있고, 잿불과 타버린 동물 뼈들로 덥혀 있었다. 제단 위의 잿불을 청소하기 위한 잘 보존된 삽이 세 개나 주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 버려진 깨진 저장용 항아리는 분명히 재를 수거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리쉬카 그 자체 안에서는(“2746번 방”) 멋지게 장식된 청동기 그릇이 발견되었고, 이 외에, 끼워 맞추기 위한 청동으로 된 홀의 머리 부분, 페니키아 향식의 광택이 나는 여성상 도자기, 광택이 나는 주사위(한 쌍의 주사위가 있었는가?), 두 개의 작은 이동 가능한 돌제단, 그리고 도장 인장으로 “임마디-요” 즉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다”를 나타낸다.
산당과 다락방의 남서쪽 부분에는 “건물 9245번”이 있는데, 이는 발굴자의 추정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임마디-요”의 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아마도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가내수공업으로 제작된 도자기들로 가득했으며, 현무암 그릇, 그리고 황소 머리상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지역들의 복잡한 양상을 여기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충 윤곽을 잡을 수는 있겠다. “산당 A”(기원전 9-8세기로 지층 4-3층에 해당함)와 “B”(기원전 8세기로 지층 2층에 해당함)로 명명된 상당히 많은 변경이 있었던 건물들은, 연관된 야외의 시설과 “가옥 9235번”과 함께 모두, 기원전 732년에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을 때 파괴되었다. 다락방(리쉬카)은 기원전 7세기경에 건축되었으며(지층 1층) 거룩한 장소로서 특정한 기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소 일반화시켜보고, 단 성소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는 그곳에서 어떠한 전형적인 종교적 제의가 일어났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a) 앞마당의 거대한 뿔 달린 제단은 동물 희생이나 다른 음식물 제사를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며, 이것은 다락방의 한 방에서 작은 이동 가능한 제단에서도 같은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가운데 방의 낮은 돌 제단은 동물 희생에서 사용되었고, 이는 재와 타버린 뼈들 그리고 삽을 볼 때 알 수 있다. 큰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작은 뿔 달린 제단은 향을 태우기 위한 목적임에 분명한데, 이는 위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과 같다. 희생을 위한 이러한 증거들 중에 상당수는 성서의 이상-제단을 청소하기 위해서 철로 된 삽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세심한 부분은 히브리 성서의 성전을 위한 비치품을 언급하는 것(왕상 7:40,45; 왕하 25:14; 렘 52:18)-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요점은 신명기적 개혁가에 의하면, 이것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여기에(리쉬카-역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으며,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있어야 했다(여전히 그들은 분명하게 단의 시설들을 언급하고 있다; 왕상 12:30,31).
(b) 다른 형태의 희생제사는 보다 큰 원통형의 제단대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분향과 음식제물에 사용되었다(꼭대기에는 대접이 놓여지는데, 우리는 청동기로 된 대접을 발견했다). 단에서 나온 대들은 진기하게도 채색되어있었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멀리 북쪽 지방으로 추측하고 (그리고 실로 우리가 다른 물건들에서 보유하고 ) 있는 페니키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번제단들은, 매우 일반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에서는 그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단(과 다른 곳)에서 실시되고 있던 “이단적인” 제의의 또 다른 증거가 된다.
(c) 올리브기름 설비-분명히 비상업적이며 성스러운 구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는 놀라운 것은 아닌데, 심지어는 그와 유사한 것들이 다른 지역에서는 드문 것이지만 말이다. 성서 본문에서는 제사장(출 29:4-7; 레 8:6-12)과 왕(사울; 삼상 10:1)을 임명하기 위해서 기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용된 기름은 통제 관리 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을 것이다. 단 성소를 섬기고 있는 지방 제사장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지역 내에서의 올리브기름 생산 설비는 굉장히 실용적이었을 것이다.
(d) 바깥뜰에 있는 “샘물터”는, 근처에 큰 욕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의적인 불제(lustration)나 순결 의식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게 가장 적합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단은 요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력한 샘물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시리아에 있는 헬몬산의 경사를 따라 녹아내린 눈이 이 요단강으로 들어간다. 고대 근동의 성소들은 종종 샘물 주변에 자리를 잡곤 했다. 그리고 신들은 종종 깊은 바다나 신선한 수원지와 연결되곤 한다. 가나안의 최고 신인 엘은 “홍수의 근원”이 되는 자폰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들 한다. 이곳은 “두 바다”의 상류로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제의적 순결”은 히브리 성서의 거룩이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것으로(최소한 “P”와 같은 후대의 자료에서; 위를 보라), 이것은 물로 씻겨질 때에 확실하게 순결해졌다고 여겨질 수 있다. 성서의 어떤 규정에 따르면 목욕재계까지도 구체화하고 있는데, 신선하고 심지어는 흐르는 물에서 씻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체를 만진 사람일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반드시 자기 자신과 발 그리고 그들의 소유들을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한다(민 19:16-19). 문둥병 환자들도 역시 흐르는 물에 자신을 씻어야만 했다(레 14:1-9).
많은 다른 형태의 “부정한 것”은 반드시 물로 씻어야만 했는데, 예를 들면 월경이나(레 15:19-32), 유출병(레 15:19-32), 정액을 흘린 사람과 접촉한 경우(레 22:4-8),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들로 인한 오염(민 31:21-24)의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든 구절들은 후대의 것으로, 아마도 포로후기 자료(“P”)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물로 정화하는 풍습들은 “현저한 정도이며” 매우 고대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정통 유대교에서 아직도 계속되는 것으로, 남자와 여자 모두가 매달 미크베 즉 “제의적 욕조”에 들어가거나, 모든 개심자들이 물속에서 완전히 가라앉게 되는 것(이것은 초기 기독교 침례에서 계속되는 것이다)을 필요로 한다.
(e) 리쉬카의 남쪽 방(“2770번 방”)에서 발견된 광택이 나는 고급 주사위는 특별히 중요한데, 비록 다른 주석가들이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던지는 제비”-주사위를 던지는 것-와 관련있는데, 신적인 어떤 것에게 던지면서, 징조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점치는 한 방법으로, 복사뼈를 내 던지는 것과 같은 목적으로 사용된다(위를 보라; 그리고 또한 다아낙을 참고하라). 그것이 전적으로 “마법”에 관한 것으로, 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으로 모든 고대 종교의 근본적인 면이라고 하겠다. 전문가로서 제사장이 이러한 점술 제의에서 문의를 받았는지, 혹은 보통 사람이 그들 스스로 제의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소에 왔었는지는, 확실치 않다(제사장의 기능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f) 단 성소 지역에서 발견된 몇 개의 입상들도 역시 매우 중요한데-특별히 다섯 개 중에서 네 개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여성 입상은, 리쉬카의 바닥 아래 북쪽 방(“9024번”)에서 발견 것으로, 확실하게 페니키아 양식을 보이고 있다. 수입된 것인지 혹은 지방의 모조품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북쪽 방에 있다. 단은 페니키아 해안의 두로 바로 동편으로 단지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성서 기자들은 북왕국의 종교적 행습을 “이교적,” 즉 유다의 성서적인 이상에 비추어서 이국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만약 극단적으로 판단해본다면) 이는 정확하다고 하겠다. 입상이 누구를 표현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신일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봉헌용일 것이다(제6장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참고하라).
세 개의 남자 모양의 고급 입상들은 올리브 압착시설 측면의 현무암 석판들 중에 하나에 인접해 있는 푹 들어간 저장 항아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두 개는 머리가 달려 있지 않았지만, 한 개는 연꽃을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페니키아 신(또는 왕?)을 나타내는 것 같다. 세 번째 것은 머리만 있는데, 이집트 신인 오시리스의 흰 왕관을 닮은 것 같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미술 양식이 “이집트화 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입상 역시 페니키아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하고, 아마도 왕을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남자 입상은, 역시 페니키아 양식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기원전 10/9세기의 “산당 A” 꼭대기의 “제단 방들”(혹은 벽감) 중에 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깨어진 머리 조각은 매우 큰 것으로-거의 10센티미터로-이 “입상”은 아마도 거대한 분향단의 일부였을 것이다. 제의실에서는 그것과 함께 몇 개의 키프로-페니키아 도자기와 바닥에 세 부분으로 파여 있는 페니키아 양식의 멋진 대접들이 있었다.
성소에서 네 개의 남자 입상들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집어볼 수 있겠다: (1) 남자 입상은 기원전 10-6세기의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어디에서도 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약 3,000개의 이스라엘의 입상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 네 개를 제외하면 그 어느 것도 명백하게 남성이 아니다(극소수의 것들은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조각나있거나 입증하기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2) 올리브 압착 시설 주변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것은 신-팔레스타인의 에그론에서 설명이 될 수 있는 점을 찾게 되는데, 이곳은 기원전 7세기경 모든 올리브 압착기들에는 같은 방에 작은 뿔 달린 제단이 있었고, 작은 벽감 안에 종종 눈에 띄게 자리를 잡고 있다. 에그론의 올리브기름 산업은 산업적인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종교와 산업”이 잘 어울린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하겠다. 고대인들의 이성이라고 해도 신비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신들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축복이 그 어떠한 거대한 분야나 위험한 사업에 영향을 끼치기를 기원했던 점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는 단에서도 역시 “페니키아인의” 신들의 축복이 기름을 압착할 때 청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특별히 생산물이 제의적인 용도로 의도되었다고 한다면 말이다(위를 보라).
(g) 나는 단과 같은 훌륭하고, 공공의 제의 중심지 몇몇 장소에서 제사장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해왔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이미 논의한 바 있는 세련된 청동기 홀이다. 그것은 약 10센티미터 길이로, 원통형의 몸체로 연꽃으로 보이는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기둥을 따라서 장식되어 있다. 부식된 사자의 머리로 보이는 것이 나무 자루에 끼워 맞춰지기 위해서 꼭대기에는 고리가 달려있고 몸체는 비어 있었다. 기원전 8세기 것으로 보이는 페니키아의 상아로 된 홀의 머리 부분은 돌(Dor) 해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석류 무늬 장식의 머리와 상아로 된 지팡이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잘 평행이 되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상아로 된 홀의 머리로 석류 형태를 취하는 것인데, 이것은 암시장에서 팔려온 것으로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의 유물로 보인다. 머리를 중심으로 히브리어로 쓰인 비문이 있다: “(야)웨의 성전 소유물. 제사장을 위해서 성별/거룩.” 제사장(혹은 신이나 왕)이 운반하는 홀은 권위의 상징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예외적으로 단 성소에서 출토된 세련된 주조된 청동 홀 머리는 그곳에서 제사장의 권위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몇몇의 대중적인 활동들은 위에서 추정한 바 있는데-희생, 번제, 올리브기름 생산, 그리고 점술-이는 추정에 잘 들어맞는다.
우리가 단 제의 시설에서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고고학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그 어떠한 증거들도 성서 본문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로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비록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게 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첫째로, 단의 형상들은 다소 현저하게 성서 전승을 반영하는 듯한데, 특별히 제의와 관련해서 그러하다. 미가와 그의 제사장 아들들의 성소는, 이는 위에서 우리가 논의한 적이 있는데, 그 도시가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 단으로 바뀌었으며, 사사 시대에 재건되었다(삿 18). 본문은 특별히 “새긴 형상”이 단 지파와 “그 땅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즉, 기원전 722/721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삿 18:30,31) 그곳에서 섬겼던 모세 계열의 제사장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연관점을 살펴본다면, 아모스 8장 13,14절은 후대의 심각한 파괴를 예견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래의 것에 맹세를 했다:
사마리아의 아시마(Ashimah)에 (맹세를 하다) 그리고 말한다,
“오 단아! 네 신의 살아계심을 따라서” 그리고
“브엘세바의 생존의 길을 따라서,”
그들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시마”와 관련해서(한글성서는 “죄된 우상”), 이는 명백히 여신으로, 다소 혼동스러운데, 왜냐하면 그러한 신의 이름은 단지 고대 아라비아에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의 자음의 변화를 주게 된다면, 즉 히브리어 단어인 아시마(ʾ������shîm������h)에서 ‘멤’을 ‘레쉬’로 바꾼다면, 우리는 아세라(ʾăshērāh) 곧 유명한 여신인 “아세라”라고 읽을 수 있게 된다. 초기 히브리어의 ‘멤’의 형태는 이고, 초기 히브리어의 ‘레쉬’의 형태는 였다. 이는 단순히 서기관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혐오스러운 여신 아세라의 이름을 없애기 위한 숙련된 솜씨였을까?
“아시마”의 히브리어 어근이 아샴(ʾāshām), 곧 “수치”였다는 것은 편집자가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아세라”로 읽혀지기를 원하지 않고, 대신에 “사마리아의 수치”로 읽혀지기를 원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에 힘을 더해본다면, 우리는 현재 쿤틸렛 아즈루드(아래를 보라)에 있는 기원전 8세기 성소에서 출토된 비문에서 “사마리아의 아세라”라는 어구를 실제로 가지고 있음을 들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열왕기상 12장 25-33절에 있다. 이 구절은 어떻게 여로보암 I세-솔로몬의 시종 중에 한 사람으로, 솔로몬의 죽음 이후에 떨어져 나가서 기원전 10세기 후반에 북왕국을 분리시켜서 세웠다-가 자신의 수도로 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 황금송아지-이는 물론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교라는 과거를 연상시킨다-를 세웠는데,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종교 중심지로 대담하게 공언하게 된다. 그는 또한 “산당에 집을 만들었다”(베트 바모트; 왕상 12:31). 내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집(베트)은 일반적으로 “성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바모트는 여기에서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높은 곳”을 뜻한다. 여기에서 구문론은 “구문 연계형”으로 불리는 것으로, 또는 소유 연계형으로, 이는 이 구문이 “높은 곳의 집” 즉 전혀 아무 뜻도 되지 않는 것이거나, 혹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성전/성소”로 읽혀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후자의 경우는 분명하게 우리가 단에서 발견한 것이다: “산당” 건축물의 필수적인 부분들로 몇 가지의 성스러운 시설들. 나는 여기에서 본문과 유물 사이에 수렴이 이루어지는 것을 옛 방식의 “성서를 증명하는” 성서 고고학(이는 내가 30년 전에 거부했던 바다)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고 강력히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두 개의 정보 자료에 대한 독립적인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온당한 의심까지도 뛰어 넘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간단히 지적한다고 하겠다. 즉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합당한 역사적인 방법의 일부인 셈이다.
어지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극단적으로 회의적이지도 않고 근본주의자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 논의를 통해서 단의 제의 시설이 실로 성서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물론 자신들을 이를 저주했음은 분명하지만) 바마를 말하면서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라는 점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위에서 논의된 종교연구 중에서(제2장) 극소수만이 단 건축물을 언급할 뿐이다. 그 어느 것도 그곳을 내가 여기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성서 본문과는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심지어 다른 고고학자들조차도). 제비트(2001:180-196과 다른 곳에서) 홀로 예외인데, 이는 예견할 수 있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만이 고고학을 심각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텔 단에는 중요한 제의 중심지”가 있었다고 결론을 맺는다(2001:181; 그러나 제비트 조차도 직접적으로 성서 본문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단 지역의 공공 제의 시설 중에서 다른 곳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이곳은 소규모의 바마로 성문의 벽으로 된 안쪽 뜰에 세워진 것이다. 그것은 다섯 개의 작은 민무늬의 입석(마체봍)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략 30-45센티미터 높이로 줄을 지어 세워졌다. 그것들 앞에는 낮은 돌 제단이 있는데, 오른편은 벽에 접해있고 왼편은 장식된 돌이 있었다. 근처에는 많은 그릇들을 포함해서, 대접들, 접시들, 컵, 향로, 발이 달린 성배, 그리고 기름등잔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대접들을 바마, 즉 우리가 다른 곳에서 알고 있는 “문 성소” 양식(아래를 보라; 그리고 또한 왕하 23:8에서 예루살렘에 언급된 것을 보라)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4) 기원전 10세기 다아낙의 “제의 건축물”은 아마도 단순히 가정 성소라기보다는 바마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는 (단에서와 같이; 위를 보라) 거대한 올리브 압착 시설이 있었고, 한 사발을 넘칠 정도의 복사뼈들이 있었으며, 철로 된 칼들, 도자기 그릇들, 여성 상을 만들기 위한 주형, 그리고 두 개의 주목할 만한 테라코타 입상으로 도상학적인 소재로, 그 중에 어떤 것은 내가 가나안-이스라엘 여신인 “아세라, 사자 여인”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제6,7장을 보라). 거대한 기념비적인 번제용 입상과, 특별히 다수의 상들을 만들기 위한 주형을 볼 때, 다아낙의 “제의 건축물”은 공공으로 사용되었던 바마였을 것이며, 심지어 입석과 제단과 같은 당연히 예상되는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5) 텔 엘 파라(북쪽)는 기원전 10-8세기 도시 성문 바로 안쪽에 위치한 성소로, 단 산당(바마)의 두 가지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거대한 입석과(마체봍) 관유를 위한 올리브기름을 위해서거나 혹은 깨끗이 하기 위한 물을 담으려는 대야이다. 이러한 “성문의 성소”는 분명히 공공을 위한 것이다.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거나 혹은 무사귀환에 감사하기 위한 장소로 보는 것은 사리에 맞는다. 이러한 공공의 성문 성소들은 다른 곳에서도 알려져 있다(단에 관해서라면 위를 보라; 쿤틸렛 아주르드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그리고 성서 본문 역시 그것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사울이 방문했던 바마는 삼상 9:13에 있다).
(6)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에서 발굴된 두 곳은 아마도 마모트라고 여길 수 있겠다(왕하 23:5-10에서 저주하고 있는 것에 더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없다). 첫 번째 장소는 “동굴 1”로 성전 언덕에서 남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으로, 1960년대에 케년(Kenyon)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 거대한 동굴은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수 십 개의 깨어진 동물 모양과 여성 모양 상들을 쏟아냈다. 또한 그 동굴 안에는 1200여개의 토기 그릇들과, 스물 한 개의 “말과 기수” 상들과, 한 개의 “딸랑이”(rattle), 몇 개의 일반적인 침상들, 두 개의 작은 돌로 된 분향단, 그리고 한 개의 제대가 있었다. 동굴 입구 주변에는 몇 개의 완전한 그릇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동물 뼈들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건축되었거나 최소한 확장된 것으로 보이는 후방은 위로 올라간 “돔 형태” 지역을 만들기 위해서 벽으로 둘러쳐졌다. 이곳이 장사를 위한 동굴이라는 점을 지시할만한 그 어떠한 인간의 뼈는 없었다(할러데이 1987:259,260). 그곳은 확실히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제의적인 주변 도구들에 관해서라면 아래를 보라), 토기의 거대한 크기와 다른 물건들을 볼 때 가족성서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동굴 1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바마라고 한다면(비록 개방형은 아닐지언정), 왕하 23:5에서 나오는 몇 가지 연관들은 흥미를 자아낸다: “예루살렘 주변의 산당들”, “바알을 위한 분향단”, “하늘의 황후를 위한” 예배. 내가 논의한 바와 같이 마지막의 것을 “태양전차”와 “태양을 위한 말들”(11절)과 연결시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말과 기수” 상과 연결될 수 있다. 고대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은 “구름을 타는 자”로, 자신의 전차를 타고 날마다 하늘을 가로 지르며 타고 다니는 날씨의 신이며, 바람과 날씨를 다스리는 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 형상들은, 대부분은 기수가 없는데, 바알과 그의 하늘의 말을 탄 전차의 상징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성전 밖으로 “말들과 전차들”을 내버렸다는 것은 말이 된다. 그것은, 비록 주저스럽지만, 케년의 동굴 저장소 안의 형상들이 요시야가 성전 정화의 실제적인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시대가 잘 들어맞는다. 전반적인 증거들은, 그렇지만, 만약 동굴 1이 단지 친근한 지역 바마(산당)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을 경우에 보다 더 잘 설명된다. (이는 요시야의 개혁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믿을 만한 다른 이유가 된다; 아래를 보라.)
예루살렘 지역에서 가능한 다른 산당(바마)은 예루살렘 서쪽 변두리 언덕에 있는 거대한 20 여개의 (돌무더기)로 이루어졌다. 그곳은 부분적으로 1923년에 발굴되었고, 다음엔 1953년에 재조사되었다. 이 복잡한 건축물과 관련해서 경계를 이루는 벽, 거대한 바닥, 바닥이 포장된 지역, 몇 개의 구덩이, 그리고 타버린 동물 뼈로 가득 찬 구역이 있었다. 발굴된 소수의 돌무더기에서는 기원전 8-7세기 도자기 상당수가 나왔는데, 특별히 요리용 항아리와 그릇들이 나왔다. 이러한 돌무더기는 제의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어떤 종류의 금식과 연관이었을 것이며, 장례 의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마지막 경우(장례의식-역주)가 맞다고 한다면, 돌무더기는 상징적인 “장례용 기념비적 돌무덤”일 수 있으며 혹은 귀족이나 왕가를 위한 기념비일 수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바케이(Gabriel Barkay, 2003)는 이러한 돌무더기를 조사했고, 그것들이 유다 왕이 죽은 다음에 일어났던 “태워버림”과 관련해서 호기심을 끄는 실마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렘 34:5; 대하 16:14). 아나톨이아와 키프로스에서는 비슷한 황실의 기념비의 증거가 있다. (나는 아래에서 “죽은 자를 위한 제의”에 대한 의문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논의의 다른 부분을 생각해보자면, 우리는 바모트가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연결되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을 가진 셈이 된다(위를 보라). 그리고 요시야의 개혁 중에서 예루살렘의 “아세림” (혹은 여신 아세라?)을 파괴하는 것과 인간의 뼈로 그 이전 장소들을 못쓰게 만들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왕하 23:14).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까?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7) 성서의 경계선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되어있다. 우리는 위에서 한 때 단 제의 건물에서 세워졌었던 기념비적인 뿔 달린 제단 조각들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다. 아주 이상한 점이라고 한다면, 그와 비슷한 제단 확실히 다른 등장이 브엘세바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곳은 아하로니가 또 다른 그러한 제단을 발견했던 곳으로, 거의 동일한 크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깨어진 조각이 이차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발견되었을 뿐이다. 즉 성문 근처의 후대의 창고 벽을 만드는데 사용된 건축 벽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아하로니는 그 제단이 한 때 지금은 손실된 성전과 같은 건축물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그것이 언덕의 돌출한 지역에 있는 헬라적인 제의 건축물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기초 건물”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는 상부구조가 기초면 아래에서 파괴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단은 의도적으로 조각나 버렸고 내 동댕이쳐졌으며-이후에 건축 벽돌로 사용되었다.
아하로니는 이러한 가설적인 “제의적 개혁”을 기원전 8세기의 히스기야시대로 연대설정했다. 그러나 아하로니가 대체로 “이른 연대설”을 재고한다면, 일어난 사건들은 기원전 7세기에 발생했던 것으로 보는 게 훨씬 더 낫다. 이 경우에, 요시야의 개혁이 정황에 잘 들어맞는데, 왜냐하면 그가 “제사장이 분향했던 산당(바모트)을 게바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황폐시켰기” 때문이다(왕하 23:8).
많은 학자들은 아하로니의 결론이 “성서 고고학”에 있어서 (그들 중에는 야딘도 있는데) 최악의 남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그 운동에 그리고 그것이 “성서를 증명하려고 하는” 유치한 시도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도 품고 있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아하로니의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여기고자 한다. 내가 최근의 책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데버 2001), 성서 기록자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비틀기”를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때때로 그들은 상당 부분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요시야의 개혁”은 종종 성서학자들에게 무시되어졌고, 그것들은 아마도 매우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왕하 23장의 맥락은, “민간 종교”에 반대하는 그 논쟁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고고학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잘 설명될 수 있게 된다. 요시야가 브엘세바에서 거대한 바마를 파괴했다는 점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은 없다. (또한 아랏 성전의 경우에 대해서 아래를 보라. 그리고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서는 제7장에서 자세한 사항을 보라.)
(8) 단과 비교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소가 시내 광야 동부의 쿤틸렛 아주르드에 있는 기원전 8세기경의 제의 건축물이다. 그곳은 제에브 메셀(Ze'ev Meshel)에 의해서 수행된 폐물 수집 작업이 있었던 1975-1976년에 발굴되었고, 그 장소는 단지 예비적인 보고서 수준으로 출간되었을 뿐이다(메셀 197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왔는데, 왜냐하면 그곳에서 발굴된 특별한 유물 때문이었다. 그 장소는 전형적으로 중동의 “큰 여관”으로 단기 체재를 위한 역으로, 지중해와 사해 사이의 동부 시나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들 중에 하나였다. 그곳은 주변에 작은 우물들이 있는 고립된 언덕 위에 있었는데, 여전히 베드윈 족이 이용하고 있다.
쿤틸렛 아주르드는 기본적으로 한 때 사용되었던 장소로, 기원전 9세기 중반에서 8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거주되었었다. 도자기는 연대를 설정해줄 뿐만 아니라, 비록 이 장소가 멀다고 하더라도 이곳이 북쪽과 남쪽(혹은 유다)이 접촉했었던 “이스라엘 사람의” 장소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뚝 솟은 꼭대기의 주요한 건물은 다소 전형적인 철기 시대 유대 사막 요새로 보이는데, 직각형의 구조에 장갑 장벽으로 된 (두 겹의) 벽으로 둘려 있고, 모퉁이에는 정방형의 탑들이 있었고, 중앙에는 개방된 바깥뜰이 있었다. 지하에는 음식 저장소와 요리시설들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가서 윗 층으로 나가게 되는데, 의심할 바 없이 잠을 청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건축물은 아마도 소규모의 거주 군인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많은 사막의 여행가와 무역가들에게 피난처와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쿤틸렛 아주르드가 “요새,” “종교적 중심지,” 혹은 심지어는 “서기관 학교”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나는 이러한 논의가 요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장소는 요새이다. 그러나 그곳은 또한 “여인숙”의 한 종류로 상당히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은, 다른 장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위를 보라), 논의의 여지없이 “성문 성소”이기도 하다. 성소는 두 개로 된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회반죽으로 된 바깥 광장에서부터 안뜰 안으로 들어오면서 갈라진 입구에 접해 있었다. 여기에는 낮은 긴 의자들이 방을 이루고 있는 벽을 둘러서 놓여 있었고, 각각은 부분적으로 구덩이(favissa)를 만들기 위한 뒷벽을 가로 질러서 구획 잡혀있었는데, 이 구덩이는 일상적인 사용으로 인해서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서 버려진 제의 용품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두 개의 옆방들에 있던 벽들과 긴 의자들은 회반죽으로 발라졌고, 이는 다른 거대한 건축물에서도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 방의 목적은 분명하다. 오고가는 누구라도 거룩한 장소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광장 멀리에는 두 개의 깨어진 변경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성문 성소는 전체 건축물의 중심지였다.
성문 성소는 다양한 제의 활동에 있어서 중심지였다. 긴 의자가 있는 두 개의 방 안에서, 구덩이들(favissae) 안에서, 그리고 근처의 바깥 틀에서, 회반죽으로 된 벽들에 그려진 몇 개의 비문들이 발견되었고, 두 개의 거대한 저장용 항아리에 그려지고 새겨진 것에서 발견되었고, 상당수의 도자기들에서 발견되었다. 건축물의 다른 곳에서는 다른 그려진 회반죽 비문들과 그림들이 있었으며, 거대하고 무거운 돌로 된 그릇들에도 그 목을 주변으로 “아드나의 아들, 오바댜의 것으로, 야웨에 의해서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이 새겨져 있어서 확실히 봉헌용으로 보인다.
많은 히브리어 비문 조각들이 쿤틸렛 아주르드에서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럴듯한 사진이나 요람이 출간되지 못했다. 제비트의 번역이,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직접 관찰한 바를 기초로, 가장 최고라고 하겠다(2001:372-404). 여기에서 특별한 관심은 히브리어 비문 조각들이 분명하게 최소한 네 신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야웨, 엘, 바알 그리고 아세라. 이들 유명한 신들의 이름은 짝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이 등장하는 곳은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자 산의 이름이 (히브리어 문맥에서 전형적인 특색인) “평행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그들이 동등한 평가를 받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전(쟁)의 날에 바알을 칭송하기를,
전(쟁)의 날에 엘의 이름을 위하여
보다 의미 있는 것이라면, “야웨”와 “아세라”라는 이름이 몇 몇 비문에서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성소의 긴 의자가 있는 방에서 나온 벽에 써진 비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데만(예멘)의 (야)웨에게 그리고 그의 아세(라)에게.
거대한 저장용 항아리 한 개(“Pithos A”)는 다음으로 끝나는 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나는 사마리아의 야웨로 인하여(혹은 ‘에게’) 그리고 그의 아세라로 인하여 당신을 (축)복한다.” 두 번째 저장용 항아리(“Pithos B”)는 유사하지만 다음과 같이 잃힌다: “데만의 야웨와 그의 아세라.” 쿤틸렛 아주르드에서 나온 이와 같은 “야웨와 그의 아세라”라는 비문은, 물론이지만, 매우 비슷하게 읽히는 동시대의 키르벳 엘-콤 무덤 비문과 비교해야만 한다(제6장). 이들 항아리 모두는 정교하고 다소 “이국적인” 색이 칠해진 그림을 가지고 있다. “항아리 A”는 암소와 젖먹이 송아지라는 잘 알려진 페니키아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이는 기원전 9-8세기 상아에 새겨진 그림 소재와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항아리에는)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고(다소 남근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마리의 사나운 야생 염소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가나안 도상학에서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또한 거대한 사자가 있고, 수소처럼 보이는 것도 있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 개의 서있는 남성(?) 형상이 서로 팔을 연결한 채 나타나고 있으며, 그 오른편으로 자리에 앉은 여성 형상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양식은 유사하며, 만약 우리가 “혼합주의적인” 민간 종교를 다루고자 한다고 한다면, 바로 여기가 확실하다고 할 정도로, 그것들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 명의 형상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이는 히브리 예술에서도 희귀한 것으로 이것들은 우리가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본대대로의 사례라고 한다면 말이다(다른 것들은 같은 항아리에 그려져 있다; 아래를 보라)?
내가 25년 전에 메셀과 함께 이러한 채색된 항아리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깜작 놀랐는데, 그 그림을 보고 놀랐고 그 위에 있는 히브리어 비문을 보고 놀랐다. 나는 곧 두 개의 소논문을 쓰면서(1982년에는 히브리어로; 1984년), 왼쪽편에 있는 두 개의 그림이 이집트의 난쟁이 신 베스(Bes)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신은 종종 굽힌 다리를 가지고 나타내고 있는데, 사자 머리에 왕관을 썼고, 표범 가죽의 반점을 입고 있다. 왼쪽 편에 그림은 확실히 남성으로, 다리 사이에 흔들거리는 것은 남근이거나 혹은 표범의 꼬리로 보인다. 오른편의 상은, 그러나, 여성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가슴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타난 것만으로 이상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별다른 문제를 보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베스는 자웅동체의 신으로 남성이나 여성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베스는 축귀의 신으로, 불행을 “되돌리는” 존재이며, 특별하게 제의에서 음악, 춤 그리고 축전에서 연관되어 있다. 그는 매우 유명한 존재로, 이집트와 레반트를 통틀어서 그러하다(심지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다). 작은 고급스러운 베스 부적들이 기원전 8-7세기 유다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데, 그러므로 그의 등장이 쿤틸렛 아주르드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나보다 더 나아가서 이 둘을 베스의 현현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다른 본문들에서 읽었던 것과 같은 “야웨와 그의 아세라”로 이해하려고 한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여성 형상이야말로 더욱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우리의 아주르드 숙녀”인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1982년에 그녀를 여신 아세라라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물론 그 이름은 그림의 윗부분에 히브리어 본문으로 확실히 기록되어 있다. 나의 주장의 근거로는 첫째로 이러한 반-나체의 가슴을 내비치고 있는 여성은 일상적인 유다의 주부 혹은 예배자라고 볼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 여사제나 왕비로도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떠한 사람 여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형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자 보좌”에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의자의 측면이 아니다. 바깥쪽으로 벌려진, 발톱과 같은 발 모양에 주목해보라. 색동으로 장식된 측면을 보라. 약간 기울어진 뒷부분, 그리고 형상의 발이 공중에 흔들거리고 있어서 아마도 발판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주목해보라.
이제 이와 같은 “사자 보좌”가 고대 근동 미술과 도상학에서, 쿤틸렛 아주르드가 있기 이전에 수 백 년을 거슬러서 매우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바와 같이, “사자 보좌”는 항상 신이나 왕에게 연결되어 있다-절대로 일상적인 인간 존재와는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자가, 사나움의 상징으로, 그 등에 보좌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성스러운” 사자는 종종 천사(cherubs)들로도 나타나고 있는데-신적 현현과 능력의 그럴 듯한 상징으로-즉, 날개를 달고서 말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경우에서, 보좌의 앞에는 낮은 발판이 있게 마련이다.
사자 보좌의 다양한 평행적인 사례들 가운데에서, 나는 기원전 약 1200년경으로 보이는 새겨진 상아 그림에 가나안 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것은 아히람 왕의 왕궁 석관에 있는 것으로 지금은 르부르 박물관에 있다(비록 이것은 솔로몬의 동시대 사람인 “두로의 왕, 히람”은 아니다). 그리고 시리아 해안의 우가릿에서 출토된 것으로 호박 장식의 거의 유사한 그림이 있다. 이는 기원전 약 1300년경으로 연대설정된다. 쿤틸렛 아주르드의 “민간 예술”은 원시적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당연한 것으로, 그러므로 사자의 발은 다소 어색하게 보이고, 날개라는 것도 옆쪽에 매우 정형화되어 있고, 의자 등판(꼬리)도 약간 기울어져있으며, 그리고 재미있는 것으로, 예술가는 발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라도 “사자 보좌”의 긴 역사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예술가는 그것을 염두해 놓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하겠다(만약 우리가 그/그녀에게 이 사실을 지적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여성 상이라고 한다면, 제의 중심지에서 거의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오직 아세라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규명하기 위한 증거로, 아마도 추정적으로 보일 것인데, 무엇보다 여신이 위의 비문에 실제적인 이름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그것이 같은 사람에 의한 것인지, 조금 이르거나 후대에 표현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둘째로, 우리는 철기 시대 레반트 지역에서 출토된 엄청난 양의 비문 증거들에서 종종 여신 아세라가 “사자 숙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히브리 성서(혹은 일반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한다면 바로 아세라이다(위를 보라). 이른 가나안에서, 위대한 여신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주적 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아세라, 아낫, 아스타롯, 혹은 바알랏 혹은 엘랏 (이는 “바알”과 “엘”의 여성형 표현이다). 때대로 그녀는 특정한 제의와 연결되었고 그러므로 지역에서는 “비블로스의 바알랏” 혹은 그와 같은 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대에서는, 오직 아세라라는 이름만이 어찌된 이유인지 모르지만 살아남았다. 아스다롯(“이쉬타르”)은 히브리 성서에서 매우 드물게 등장한다. 그리고 아낫은 단지 개인 이름 “아낫의 아들 삼갈”에서 등장할 뿐이다(삿 3:31). 그리고 장소를 가리킬 때 “벧-아낫”에서 두 번 등장할 뿐이다(수 19:38; 삿 1:33).
그러므로 만약 쿤틸렛 아주르드의 여성 상이 여신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옛 가나안의 어머니 여신인 아세라와 동일 인물로 봐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본문은 그녀가 “야웨의 아세라”라고 특별화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녀가 야웨의 숙녀, 그의 배우자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아세라가 가나안 종교에서 엘의 배우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아세라는 어떤 집단에서는 신적인 배우자로 생각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러나 그녀는 성서 기록자에 의해서 버려졌고, 편집자에 의해서 바알과 짝을 이루는 존재가 되었다. (옛 가나안 만신전에서, 아낫은 젊은 신 바알의 배우자로, 반면에 아세라는 엘의 배우자로, “신들의 어머니”로 알려져있다.)
모든 학자들이 앉아 있는 여성과 그와 관련된 비문에 대한 나의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1982-1984년 이래로 야웨의 “배우자”라고 감히 주장했던 사람은 나 혼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비문에 대해서라면, 여기에는 문법적인 문제가 있기도 하다. 성서 히브리어에서, “아세라”와 같은 합당한 이름은 일반적으로 “그 남자의”라는 소유격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가 고대 가나안 언어와 또한 고대 히브리어 아람에서 발견되곤 한다. 어찌 되었건, 일부 학자들은 자음 ‘a-sh-r를 (여신) “아세라”로 읽지 않고, 단지 나무 모양의 여신을 상징하는 “아세라”로 읽기도 한다. 그들은 내가 키르벳 엘-콤 비문(아래를 보라)에서 그와 같은 방식을 따라서 읽으면서, 그러므로 “X는 아웨와 그의 ’나무‘에게서 복을 받으로서”라고 읽는다. 나는 다소 절망적인 점을 발견했는데, 바로 많은 성서학자들조차도 야웨가 여성 배우자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는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점차적으로 히브리어 단어인 아세라가 때때로 (여신) “아세라”로 읽어야만 함을 지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여신이 왕조 시대 상당 부분에 걸쳐서 섬김의 대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야웨의 배우자는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고대 근동의 다른 모든 중요한 신들은 그 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독특하다”라고 언제까지 고집해야만 할 것인가? 나는 아세라와 그 제의를 제6장에서 다룰 것이다. 바로 민간 종교에서 여성의 역할을 논하면서 말이다.
기념비적인 성전들
여기에서 논의했던 거룩한 장소들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계층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념비적인 성전들일 것인데, 특별히 (최소한 신명기적인 이상에 따르자면) 왕궁 성소와 국가 제의 중심지로서 담당했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그런 성전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이스라엘 시대에 매우 극소수의 실제적인 것들만 발견해왔을 뿐인데, 그러나 후대의 기록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외하고 그 어디에도 성전이 없었다는 성서의 생각에 의문을 품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1) 우리가 얻어낸 가장 이른 이스라엘의 기념비적인 성전은, 사마리아 중앙의 옛 부족 중심지인, 세겜 5지역의 믹달 성전으로, 전승에 의하면 조상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이다(창 12:1-7). 인상적인 건물은 1930년대에 독일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굴되었다가 1960년대에 에른스트 라이트(G. Ernest Wright)와 미국인 팀(이는 1962년에 내가 처음으로 현장조사를 한 것으로; 나는 이후에 1973년의 탐사를 지휘하기도 했다)에 의해서 재발굴되었다. 건물은 “믹달”(히브리어로 “성채”) 성전으로 불리우곤 했는데, 그 이유는 거대한 성벽이 4.5미터 두께에 이를 정도이며, 입구에는 두 개의 탑이 있고, 그리고 2층이나 더 나아가 3층에 해당할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원전 1650년경인 청동기 중기 시대에 가나안 성전으로 처음 건축되었다가, 다음에 기원전 1400-1300년경인 청동기 후기 시대에 약간의 개조가 더해져서 재사용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인 철기 초기 시대에는 약간의 개조가 있었는데, 거대한 마체봍 즉 입석들과 앞마당에 제단이 첨가되었다(1성전). 그 이후에 곧 바로, 그 건물은 파괴되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2성전) 단지 곡물창고 수준으로 재사용되었다(Stager 2003).
라이트는 5지역 성전을 성서 전통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호수아 24장의 이야기와 연결시켰다. 가나안 정복이 끝나갈 무렵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모든 부족을 불러 모아서, “하나님의 위대한 모든 행적들”을 이야기 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백성들이 야웨의 모든 명령들에 순종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계약 갱신 예식을 집전했다. 이 언약의 증거로서, 여호수아는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미크다쉬)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수 24:26). 라이트는 5지역 성전을 가리키면서, 거기에 있는 새로 세워진 마체바와 함께, 이것이 바로 그 “성소”라고 말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족장 시대의 옛 가나안 성전은(창 12:6에서 아브라함의 “상수리나무”을 여기에 있는 “상수리나무”와 비교하면서) 기원전 1200년 어간의 어떤 시대에 이스라엘의 성소로서 다시 성스럽게 여겨졌다. (Wright, 「세겜: 성서의 도시의 역사Shechem: Biography of a Biblical City」, 1965).
다음으로 라이트는 후기 사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비멜렉이 자기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협조를 얻기 위해(그의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었다”) 세겜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는 사사기 9장의 본문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겜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 가서 세겜에 있는 기둥(무짜브; 마체바의 다른 형태)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았다”(삿 9:6). 그러나 요담 혼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이스라엘엔 야웨외엔 그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 삼년간의 혹정이 있고 나서, 세겜 사람들은 반역했으나, 그들은 곧 아비멜렉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아비멜렉은 그들은 “세겜의 탑(믹달)” 안에 가두고 태워버렸다. 본문은 또한 이 건축물을 처음에는 “바알브릿의 성전”과 바알과 “언약한” 성전이라고 불렸다가, 다음에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엘브릿의 성전” 엘과 “언약한” 성전으로 불렸다(참고 삿 9:4; 9:46). 라이트는 여기에서 바알에게 헌당된 옛 가나안 성전이, 이스라엘인 야웨의 고대적 이름들 가운데 하나인 엘에게 다시 헌당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그곳이 (사사시대에서 두 어 세대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언약 갱신 의식을 위한 제의 중심지로 숭배되었다고 주장했다.
라이트의 견해는 대부분의 학계에서 비판을 받게 되었고, 특별히 유럽의 성서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악의 “성서 고고학”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동안 “성서 고고학을 지지하는” 옛 방식에 대해서 강경하게 반대해왔던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세겜에서 처음부터 작업했었던 고고학자로서, 나는 (라이트의 견해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 없다. 세겜의 “믹달 성전”은 확실히 초기 이스라엘 대중들의 성소로 숭배되어져 왔었음이 분명하며-특별히 1960년대 이래로 우리가 가나안 종교와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배워왔던 모든 점들에 비추어볼 때 그러하다고 하겠다(제8장). 일반상식이 필요 없을 정도 너무나도 빨리, 회의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성서 기록자들은 이 성전을 진짜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으로 기억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솔로몬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신명기적인 이상을 충족시켜야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왕조 시대에 완성된 이스라엘의 유일한 성전이 1960년대에 요하난 아하로니(Yohanan Aharoni)에 의해서 브엘세바 동쪽의 아랏(Arad)에서 발굴되었다. 이 건물은 그 발굴 순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성전”이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어떠한 것도 그곳에 있었다고 여길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사막의 “예배당”일 뿐이라고 여겼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성전과 같은 종류일 수 있다고 가정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연대도 기원전 10세기에서부터 기원전 7세기에 이르는 모든 시대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여태까지 그 어떠한 결정적인 출간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 유물들에 대한 재검토 결과, 문제들이 상당 부분 명확하게 되었고, 특별히 연대 문제에 있어서 그러했다(Herzog 2001).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기원전 8세기일 수밖에 없음에 동의하고 있는데, 즉 대략 2세기가 지난 솔로몬 이후의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4 혹은 5층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층 10-9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개정된 연대기에 의하면 아랏 성전은 성서의 역사와 연결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셈이었다.
철기 시대 아랏은, 네게브 사막에 인접한 유대 국경에 위치한, 브엘세바 동부의 작은 요새였다. 건축물은 대략 정방형으로, 두꺼운 요철형 벽으로 둘러싸였다. 성전은 거의 내부공간만 1/4을 차지했고,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했다. 그것은 요새 내에서 가장 잘 보전된 부분이기도 했다. 다른 장소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주둔지의 군대를 위한 생활 장소와 저장 공간으로, 이는 매우 작았던 것임에 분명했다. 깨어진 도자기 조각위에 잉크로 기록된 문서들인 오스트라카들이 100개가 넘을 정도로 발견된 것으로 비추어보아, 요새의 크기와 기능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지적해준다. 대부분의 것들은 지급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은 성서에 나오는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것은(18번) “야웨의 성전”과 연관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아랏에 있는 지역 성전으로 해석하고자 한다(이는 아하로니와 다른 사람들에 반대되는 것이다).
직각 모양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중앙의 축을 따라서 세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은, 중심을 벗어난 입구 쪽에 붙어있었는데, 한 쪽 벽에 거대한 돌로 된 제단이 있고 그 뒤로 복도 혹은 저장 공간(구덩이favissa?)이 있는 개방된 뜰이었다. 한 쪽 면에 벽으로 따로 구획된 제단 근처에는 이동시킬 수 있는 그릇들과 거대한 기름 등불과 함께 제단대가 발견되었다. 가까이에서, 작은 청동으로 된 웅크리고 있는 사자 모양의 물건이 나왔다.
다음 방은 얕지만 넓었다. 그곳에는 아마도 낮은 돌들과 진흙으로 된 긴 의자들이 벽을 둘러쌌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형편없이 보전되었을 뿐이다. 그것 다음으로, 세 번째 “방”은 단지 작은 벽감(niche)으로(1.8미터 폭에 1미터 넓이), 한 걸음이면 다다를 정도였다. 입구에는 한 때 2 스퀘어 크기의 멋지게 모양이 새겨진 뿔이 달린 제단이 있었는데, 이는 그 꼭대기에는 “생명체”를 태운 흔적들이 남아있었다(불행하게도 그것은 분석되지 못했다). 커튼이 이러한 “내부 성소”(히브리어로 데비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려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뒤쪽 벽에는 분명히 두 개의 거대한 장식되어있지 않은 입석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컸고, 하나는 빨간 색으로 칠해진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마체봍는, 내가 거기에서 발견했던 바와 같이, 현장에서는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후대의 회반죽 바닥 아래에서 (1/3정도만 나온 상태로) 발견되었는데(지층8?), 위에서 언급했던 두 개의 제단과 함께 발견되었다(예비 보고서에는 몇 개의 혼동스러운 점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Zevit 2001:166,167을 보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교체를 히스기야나 요시야에 의해서 시도된 개혁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이는 아하로니가 취했던 것으로 보다 자세한 것은 제8장을 보라).
1960년대에는 거의 모두가 일상적이었던 서툰 발굴 기법과, 불충분한 출간으로 인해서, 아랏 성전과 그 주변 기기들은 학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여겨지지 못했다. 심지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도 말이다. 원년 멤버였던 제에브 헤르조그(Ze'ev Herzog, 2001)에 의한 최근의 연구는, 작업의 오류들을 지각했고, 구조되어야만 할 정보들을 바로 잡았다. 헤르조그는 성전의 계획적이며 주의 깊은 성상 구조물(즉, 중앙의 제의를 위한 방)의 파괴에 대해서 동의했는데, 이는 제단과 마체봍 그리고 그것을 지층 8의 회반죽 바닥 아래로 감춘 것과 함께, 이 모든 것을 기원전 8세기 후반의 히스기야의 개혁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다. 열왕기하 18장 4절은 히스기야가 “여러 산당(마모트)을 제하며 주상(마체봍)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었다”고 상술하고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일세기 이후 요시야의 개혁을 언급했던 것을 따라서(왕하 23장), 단지 신명기적인 선전문구라고 여겨왔다. 이들 두 명의 “개혁가들”은 단지 이들 기록자들이 승인했던 유일한 유다의 왕들이었다. 이상적인 개혁가들이 성공적이었든지 그렇지 않았는지, 그러한 일들이 심지어 실제적으로 발생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는 문제이다. 성서의 기록자들의 민간 종교에 대한 지식은, 비록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확한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아랏에 있는 “비합법적인” 성전과 그 분향단과 마체봍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특별히 이곳이 유다의 왕궁 성채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곳은 도상학적인 개혁을 위한 명백한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추정적인 것일지는 몰라도,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의도적인 성전 파괴와 그것을 다른 건축물로 바꿔놓은 일은 고고학적인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서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본다(자세한 사항은 제8장을 보라).
나는 아랏 성전에 관하여 몇 개의 다른 관찰들을 언급하고자 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루면서 말이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청동으로 된 사자상은, 심지어 그것이 비록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켈 정도의 무게로 주물로 된 청동기 동물 형상물이라는 것은 극히 드물었고, 번제를 위해 그것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정확하지 않다. 단지 여기에서 나온 사자라는 것이 “사자 숙녀”인 아세라의 일반적인 별칭이라는 점으로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겠다(위를 보라). 다양한 신들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는 양, 성전의 성상 안치소 내에는 두 개의 마체봍가 있었는데, 한 개는 다른 것보다 작았다. 만약 마체봍이 신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성서 증언이 만장일치 하에 확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위를 보라), 우리는 아랏 성전에서 최소한 두 신이 숭배되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랏 성전의 상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탁월한 것으로, 실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컸고, 유다 왕궁 성채의 일부분이었다(오스트라카가 이를 분명히 해준다). 만약 내가 발견들에 대해서 정확한 해석을 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병영 군인들-일상적인 민간에 해당하는-의 종교가 “공식적인” 국가 제의와 종종 양립했었다는 증거들을 가진 셈이 된다. 몇 개의 오스트라카가 성전을 위한 공급과 제사장의 몫을 할당하는 것에 대하여 관련되어 있는 듯 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은 레위 계열 제사장 가문으로 잘 알려진 “코라의 (후손) 자녀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바깥뜰의 거대한 제단 아래쪽에서 발견된 두 개의 큰 접시(번호 102,103번)에는 축약형으로 보이는 코프-카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코데쉬 코하님으로, “제사장의 거룩한 물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들에 의하면, 아랏 성전이 독특하다거나 혹은 심지어 예외적인 것으로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아마도 두루 퍼진 현상의 한 예로서 지역 성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바로, 비록 멀리 떨어진 전진기지에서 조차도, 기원전 8세기 중반의 “야웨 유일신 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이 되기 전까지는(제8장), “혼합주의적인” 행습들로 여겨지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었던 그런 곳이다. 여전히 극소수의 성서학자들만이 아랏 성전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예외로는 알스트룀 1982; 알베르츠 1994; 그리고 제비트 2001:156-171의 명쾌한 논의를 보라).
민간 종교에 빛을 비추기 위해 충분한 정도의 고고학적인 자료수집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가장 두드러진 면들 가운데 하나인, 아세라 제의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나는 실제적인 종교적인 신앙과 행습들이 성서가 말하는 “책의 종교”의 이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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