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연구를 위한
자료들과 방법들
이스라엘의 종교사를 포함해서, 그 어떠한 역사의 질적인 면도 가용할 수 있는 자료의 성격과 한계에 의해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우리는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자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이상 그 어느 것도 실제적으로 알 수는 없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경우에, 명백하게 두 개의 자료들이 있다: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대체로 말하자면, 문서들과 유물들이다.
혹자는 두 개의 자료들 모두가 필수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견을 보일지 모르겠는데, 바로 앞의 것은 신앙을 다루지만, 뒤의 것은 실상을 밝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분은 훌륭한 작업가설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며, 나는 다른 곳에서 그 점을 다룬 바 있다(1994b); 그러나 두 개의 측면을 분리하는 것은 다소간 독단적이다. 신앙은 실상을 알려주고, 실상은 신앙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구분하는 것은 유용하며, 심지어는 분석을 위해서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는 그러한 구분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들(고대인)은 애당초 분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는 단지 “그냥 벌어지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현대인인 우리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추상적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종교는 고대 이스라엘이 행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왜 히브리 성서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그러한 주제(종교)에 명백하게 집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종교”라는 그 어떠한 일반적인 용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인 셈이다.
기록된 자료와 문화유물 자료 모두는 기본적인 것으로, 그러므로 어느 하나가 없이는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고고학자로서, 이론(신학)보다는 실제(제의)에 보다 관심을 두고 진행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고고학적인 정보들을 “첫째 되는” 자료로 여길 것이다. 본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심지어 일반적으로 새로운 연구방식에 열려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내가 히브리 성서를 “이차적” 자료로 낮게 잡는 것에 대해서 틀림없이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 보여주려는 것처럼, 만약 누구라도 내가 민간 종교를 다루는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주로 종교적인 행습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품었을 만한 의구심을 없애지 않는다. 즉, 히브리 성서는 왜 그리고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또 여전히 가치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다르고 대안이 되는 자료들을 개관하게 될 때까지 잠시 유보해둬야 할 것이다(제 4, 8장을 보라).
성서 본문과 그것의 한계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에, 비평학자들은 소위 오경(혹은 “모세의 다섯 권”)과 여호수아에서부터 왕들에 이르기까지 통과하고 있는 위대한 국가적인 서사시가 “자료”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이러한 본문들은, 당시에 목격된 바를 보고하는 것에 기초한, 현대적 개념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단순히 집어 들어서 죽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앞의 책들은(최소한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 후대에, 익명의, 복합적인 “저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서, “모세”라는 사람이 살았을 시대보다 최소한 500 백 년이나 지나서야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서는, 모두가 모세와 관련되어 있는데, 모세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 후기 왕적의 신학적 설교로, 이후에 (다섯 권으로 되면서) 오경과 다른 “역사적인” 작품 모두에 붙게 되었다.
“문서가설” 혹은 “자료비평”으로 널리 알려진, 19세기에 기원을 둔 복합 저작권에 대한 이론이, 본문을 너무 많은 독립 자료들로 쪼개어버리는데, 그것도 임의적이면서도 과신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이론은 상당 부분 수정되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본문 자료의 복합 저작권과 후기 연대설은, 그것의 있는 모습 그대로, 논쟁 밖으로 둘 것인데, 바로 그들의 신학적인 성향을 따라갈 것이다. 문서 가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학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자세한 내용은 참고목록을 보라).
(1) “J” 문서. 이 자료는, “야웨Yahweh”라는 신명에서 나오는 “J”에서 나온 것으로(독일어로는 Jahweh),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출애굽기, 그리고 민수기를 관통한다. 그것은 히브리 성서에서 가장 이른 원역사를 다루고 전통에 대한 “신학적인” 손질을 가해진 것으로 본래 생각되어졌는데, 남쪽 집단에서 이르면 기원전 10 세기경으로 아마도 다윗과 솔로몬 왕정 시대로 연대 설정할 수 있다. 오늘날에 많은 성서학자들(과 의문을 품고 있는 소수의 고고학자들)은 J 문서의 저작을 후대로 보고 있는데, 만약 그것이 참으로 개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원전 8 세기는 아닐지언정 9세기까지 간다고 본다. “J”는 “구원사”라는 거대한 그림을 보여주는데, 창조와 홍수에서부터 시작해서, 족장들과 그 부인들에 대한 구원과 번영의 약속으로 이어지며, 그리고 출애굽기로 이동하여 약속의 땅에 대한 정복을 예견하게 된다. 심지어는 널리 알려지고, “J” 가설에 다소간 급진적인 손질을 가하는 진영에서 조차도, 내가 지금 여기에서 개괄한 기본적인 신학적 성격들에 대해서는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그 주제들을 다시 다룰 것인데, 왜냐하면 혹자는 그것(“J”)이 왕정 시기 동안에 실제적인 종교적 행습들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J의 연대가, “수정주의자들”과 몇 몇의 다른 사람들이 오늘날 공언하는 바와 같이, 설령 포로 후기(기원전 6-5세기)라고 한다면, 이 자료는 “고대인들의 종교”라고 여길 수 있는 그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며, 물론 왕조 시대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이야기가 그 시대 이전에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J”는 단지 후대에 유대인들의 선전문구, 즉 “기원 신화”를 구성한다고 하겠다.
(2) “E” 문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이름인 “엘로힘”이 사용되기 때문에 “E”라고 불리는, 이 자료는 북부의 자료들에 연유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기원전 9세기경에 기원한 듯한데, 그러나 오늘날엔 기원전 8세기가 더 선호되는 경향이다. 그 이유로는 그것이 “에언자적”인 면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E”는 여러 면에서 “J”와 평행하는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몇 몇의 같은 이야기의 다른 판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J/E”라고 여기는)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서 “P”에 섞이게 된다. “E”는 종종 하나님의 계시가 꿈의 형식으로 종종 전달되는데, 특별히 죄와 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강조된다. 그것은 또한 시내산 언약과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충성을 요구하시면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중심 주제도 매우 정교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본래는 독립적인 자료로, 성격상 강력한 설교조인데, 다소간 (아래에서 볼) 신명기적 역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3) “P” 문서. 이 자료는, 익명의 “제사장” 자료에서 따온 것으로, 특별히 레위기에서 나타난다. 누군가에게, “P”는 후대에 다소간 인위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데, 배타적인 유일신론과 제의적 순결로서의 거룩함, 그리고 희생제사에 대단한 강조를 두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제사장적” 관점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역사 이전prehistory 시대로 잡혀있는바, 특별히 광야에서의 방랑의 시대를 보여준다. 후대의 “P” 편집자들은 J와 E를 개정했고, 그 자료들을 통합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세기에서 민수기에 이르는 책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많은 학자들은 P를 후기의 유다 왕조로 놓고 있는데, 물론 다른 이들은 포로 후기로 연대설정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최종적인 개정과 편집 작업이 마무리된 때로 치자면 그러하다. 연대 설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여기에서 “P”가 광야 전승을 선취하고 있으며, 그것의 주요한 관심이 왕조 시대 동안의 민간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한다. 나는 성전과 성전 신학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러한 생각을 옹호할 것이다.
(4) “신명기적 역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는, 왜냐하면 보다 더 역사적이고 전체 왕조의 시기를 담고 있기 때문인데, “신명기적 역사”로 이는 종종 “Dtr”이라고 불려진다. 그것은 신명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 더하여 한 권의 책이 된 것을 “오경”이라고 부른다) 열왕기서에까지 이른다. 주류 학자들은 “Dtr”의 핵심 내용이 열왕기하 22장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성전의 고문서실 안에서 감추어졌던 것이 대제사장 힐기야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열왕기서의 편집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 두루마리일 것이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아래를 보라). 이러한 그럴듯한 설명에 따르면, 그 두루마리-“감추어진 것” 아니라, 아마도 열정적인 야웨주의자들이 몰래 둔 것으로-기원전 7세기 후반에 있었던 요시야의 대대적인 개혁에 기초가 되었다(왕하 23장). 이러한 개혁적인 학파들이 신명기서를 만들었고(“두번째 법”), 그 자체로 광야를 배경으로 모세의 입에 세 개의 긴 설교강화를 집어넣은 모양이 된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 종교의 설립자”인 모세의 말이라는 측면에서, 이 집적물corpus은, 비록 그 문학적 배경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다 역사 후반에 있어서 개혁을 위한 이상적인 골자를 띄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는 기록자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 쓰디 쓴 교훈을 깨달은 때로, 바벨론의 손에 의해서 말 그대로 거의 멸절에 가까운 때였다. 결국, 신명기는 회개를 말한다. 즉, 고집이 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순수함과 그 본래적으로 “순수했던” 종교인 유일신적인 이상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회귀와 명백한 책략은 신명기와 여호수아-열왕기라는 신명기적 역사가 모두, “수정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경건한 허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편집자가 사용할 수 있을 오래된 구전의 “모세 전승”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기록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자료들을 사용하려했던 의도는 존경할 만하며, 심지어는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정도이다. 더군다나, 호대의 역사가나 혹은 종교 개혁가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기록물을 과거의 인물들을 존경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돌리는 것은 고대에서는 통상적인 것이기도 했다. (후기 유대교 문학작품들은 “위경적인” 작품들로 넘쳐나는데, 열두 족장의 증언, 모세의 증언, 솔로몬의 서정시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의 이스라엘 종교 연구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명기가 이스라엘 종교를 위한 잠재적인 자료가 된다는 사실로, 최소한 후기 왕조를 보여준다(비록 포로 후기시기에 최종적인 개작과 편집이 이루어졌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더 중요한 점이라면, 신명기적 학파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보다 이른 본문상의 모든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편집자들은 신명기의 주제들을 취했고, 그것들을 다양한 연대기적인 전승들과 결합시켰는데, 이들 전승들로는 구전적인 것과 기록된 것이 있었으며, 결국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로 일종의 “신정적인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중심 되는 신명기적 신학 주제들에 좌우된다: 한 분 야웨에게만 충성하고 순종할 것; 언약에 대한 요구사항; 야웨가 독점적으로 거주하는 예루살렘 성전; 회개를 향한 예언자적 선포; 그리고 필연적인 신적 응보.
학자들이 신명기적 역사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가 좀처럼 과장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유일한 경전적인 역사를 구성하기 때문이며, 더하거나 빼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신 2:2; 12:32). 저자들과 편집자들이 보여주는 명백하게 신학적인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이스라엘와 왕조 시대의 이 역사는 우리가 히브리 성서에서 얻을 수 있는 실제로 유일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고고학적인 주석이나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신명기적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다른 관찰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우리의 근거는 문자에 구애되거나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성서를 풀어 설명하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독립적이며, 세속적인 역사가 될 것이다(그것이 가능하다고한다면).
(5) 예언자적 문서. 기본적인 성격상 순전히 역사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초기 예언자적 작품들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권위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무엇보다 타당한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종교적인 신앙과 동시에 행습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언자적 신탁과 대중적인 선포들은 “실제 삶”의 배경 하에 이루어졌으며, 그러므로 어떤 부분에서는 일상적인 민간의 활동을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왕정”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있는 열왕기서보다도 더 낫다고 하겠다. 사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가 주로 예언자들이 정죄했던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곡해시키는 일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이 고고학적인 발굴로 인해서 부수적으로 보일 것이다.
내가 주로 의지할 주요한 관찰자로는 8세기 예언자인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가 있고, 7-6세기 예언자인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있다(제 7장을 보라).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이 모든 위대한 성서의 인물들을 비역사적이며 단지 후대의 가공적인 “문학적 창작물”이라고 단정한 어처구니없는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예언자들을, 주류성서 학자들을 따라서, 8-6세기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개혁적인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사경/오경과 신명기적 역사의 초판본을 제작했던 사람들과 동시대인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소한 몇 개의 쓸 만한 목격담을 제공한다. 이러한 보고들은 예언자적인 기사가 공식적인 정책 방침과 다를 때, 그리고 우리가 철기 시대의 고고학 분야에서 이미 인지했던 실제적인 삶의 조건들을 반영하고 있을 때, 특별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6) 마지막 본문 자료는 서정시 혹은 소위 말하는 “헌신 문학”인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 제한적으로 “지혜” 문학인 잠언, 전도서, 그리고 욥기가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그것들이 민간의 경건과 신앙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사용하기가 곤란한데, 심지어 그것들이 이스라엘 종교 역사에 기준으로써 무비판적으로 정기적인 낭독을 해왔음에도 그러하다. 이러한 문학의 상당수는 거의 적합한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배경을 설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시편에 들어있는 다양한 시 작품들은 6세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연장될 수 있다. (종종 “다윗” 혹은 “솔로몬”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허구이다.) 그것들은 명백히 예배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언제, 어떠한 환경 아래에서,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처럼, 전적으로 문학적인 창작물일까? 혹은 일반적인 민간에서는 잘 알려진 지방의 구전 시와 노래에 의한 오래된 전승을 반영하고 있을까? 즉 시리아의 우가릿에서 유래한 14/13세기 가나안 신화와 상당히 평행하다는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처럼(아래를 보라)?
욥기는 심지어 보다 더 문제가 있는데,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신학적으로도 그렇다. 그것은 이상하고, 어떤 측면에서도 정통적이지 않으며, 다른 성서 문학과도 좀처럼 일치시킬 수 없다. 그리고 전도서는 “히브리적”이기보다는 헬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하고 지혜적인 문학이 가지고 있는 몇 몇의 이국적인 특징은, 비록 그것들이 때대로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 무시되고는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한 때 수용되었고 받아들여졌었던 종교적 표현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 제 2장에서 논의했던) “프라이부르그 학파”는 이 문학의 잠재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킬Keel은 시편에 관해서 하나의 완전하면서 풍부한 그림들을 보여주는 책을 출간했다(1997; 초판은 독일어로 1972년).
몇 개의 경고들
이스라엘 종교를 밝혀내는 일에 다양한 성서 본문의 잠재적인 가치가 얼마나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그것들은 비평적으로 가려져야만 한다. 이것은 있을지도 모를 그 어떠한 신뢰할 만한 역사적인 “핵심” 정보를 캐내는데 필요한 것으로, 위에서 개괄했던 다양한 문학 작품들의 일반적인 성격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히브리 성서에서 나오는 본문 자료들은 우리의 목적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나는 종종 아주 거칠게 그렇다고 논쟁한 바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첫째로, 현재 기록된 형태로 되어있는 모든 성서의 본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은 기원전 8세기(“J”와 “E”) 혹은 기원전 7세기(“Dtr,” 가능하다면 “P”; 위를 보라)보다 일찍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포로기와 포로후기에 엄청난 편집과 개작의 과정을 거쳤는데,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이 난 다음에 나온 셈이다. “사사 시대”와 기원전 약 1200년에서 500년에 이르는 왕조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본문은 단지 200년 정도만을 다룰 뿐인데, 이는 1/3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도 왕조의 마지막 절반 정도만을 다룰 뿐이다. 국가의 형성 시기인, 기원전 약 1200-1000년은 그 시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드보라의 노래”(삿 5장)와 같은 몇 개의 고전 히브리 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으로, 몇 몇의 학자들은 기원전 12-11세기에 기원을 둘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또한 출 15; 신 32,33을 보라).
여기에서 취하고 있는 저작과 편집에 대한 후기 연대설정은 주류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단지 다음의 질문만이 남을 뿐인데, 바로 틀림없이 복잡했던 기록 과정의 배경에 오랜 구전 전승뿐만 아니라, (궁정 기록물과 같은) 소수의 확실한 증거물이 있어서, 신뢰할만한 역사적인 정보를 보존하고 전수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며, 심지어는 급진적인 학자들조차도 이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오래된 자료라는 개념을 변호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성서 기록자들조차도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정한 자료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즉, 야살의 책(수 10:13)과 유다 열왕의 연대기(열왕기에서 빈번하게 나옴). 그리고 몇 세대 동안 성서학자들은 “민간 기억들”-영웅무용담, 전설, 그리고 시적 형식으로 된 다양한 종류의 신화들-이 아마도 기록된 문학작품으로 통합되기 전에 몇 세기 동안 대중적인 문화 안으로 전파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왔었다. 고대와 현대의 많은 문화권에서부터 얻은 구전 전승의 인종학적인 증거들은 너무나 설득적이었다.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성서학계의 “수정주의자들”은 어떠한 성서 문학작품이라도 이른 시기에 나왔다는 점을 무작정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성서 본문에 대한 저작(단순한 편집이 아니라)활동이 (기원전 6-4세기인) 페르시아 시대로 놓거나, 혹은 더 나아가 (기원전 3-1세기인) 헬라 시대로 잡고 있다. 극소주의적인 “수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성서 본문도 철기 시대의 그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자료로서 사용되지 않는다. 실로, “성서 이스라엘”과 그 종교는 단지 후대의 문학적인 창작일 뿐으로-헬라화된 팔레스타인에서 동화되고 있는 시대에 절망적으로 자아 정체성을 찾는 유대인 그룹이 꾸며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서는 경건한 날조로, 그것의 “이스라엘”은 단지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최대주의자”도 아니고 “최소주의자”도 아니다. 중간 지대를 향하려고 할 것인데, 이는 어떠한 성서 본문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본문에 대한 그럴듯한 실제의 삶의 정황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고고학 유물들과 연관된 본문이 한 곳으로 모이는 곳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역사적인 배경을 잡을 수 있겠다. 나의 최신작인 「성서의 저자들은 무엇을 알았으며, 그들은 그것을 언제 알았는가?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and When Did They Know It?」(2001)은 상당히 많은 그러한 “수렴”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의 저자들은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일찍 알았다. 그들은 훌륭한 역사가였다고 하겠다. 그들의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다.
(2) 그것은 성서 본문에 대한 두 번째 한계를 보여준다.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가이지만, 그들은 포함시키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매우 선택적이었다. 그들이 주로 엘리트로, 예루살렘의 궁정이나 제사장 무리에 속했던 지식인 계급이었다는 점이 종종 간과되고 있다. 함께 놓고 보면, 그들은 전체 인구에서 1 퍼센트 정도의 극소수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대중들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않는다. 확실히 몇 명의 예외가 있기는 한데, 바로 자기 자신을 “목자”라고 불렀던 예언자 아모스와 같은 사람이다(1:1). 그는 그 시대에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특권계층을 향해서 욕을 퍼부었다(4:1). 그리고 많은 성서 구절에서, 대부분은 역시 예언자적인 것들로, 기록자들은 “땅의 가난한 자들”을 야웨의 은총에 더욱 가까운 편에 해당한다고 칭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을 전반적으로 시골뜨기 정도로 볼 수만은 없는데, 그들이 썼다고 하는 것들에서 볼 수 있는 고상한 문학적 방식에서부터 판단해보자면 그러하다. 나는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신탁이 본래는 대중에게 전달되어진 “설교”였다고 한다면, 주변부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한 바 있다. 고상한 히브리어와 복잡한 구문들, 정교하게 짜인 문학적 암시, 단어에 대한 난해한 사용들을 생각해보라. 이 모든 것들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 중에서 거의 90 퍼센트를 놓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사람이거나 농부였다. 이사야가 귀족이었다는 것은 귀족 계층의 조언자라는 그의 위치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치하에, 거의 총리Prime Minister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했다(1:1).
또 다른 성서 기록자들은, 주로 신명기적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로, 그들 역시 의심할 바 없이 엘리트 집단으로, 그들이 선택한 관련 주제들과 문체적인 특성 모두에서 엿볼 수 있는 바이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의 “학파”를 구성하게 되는데, 심지어는 대학의 일종으로, 최소한 요시아의 오랜 통치 아래에서(기원전 640-609년) 왕정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들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이었다. 안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열왕기서에 자신들의 서사시적 역사를 만들어나가는데 주요한 소재들 가운데 하나는, 야웨가 거하는 한정된 장소로서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 성전의 중앙화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평생 동안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며, 역시 성전이라는 것을 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야웨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신명기적 역사학파들이 보여주었던 광신적 애국주의적인 민족주의의 놀라운 예는, 국토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철저한 무시에서 엿보이는 것으로, 기원전 701년에 그 유명한 산헤립의 포위에 대한 그들의 보도에 있다. 라기쉬 성읍의 파괴는, 이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128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아시리아 왕이 볼 때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서 장인들로 하여금 거대한 석상에 라기쉬의 포위와 파괴의 그림을 새겨 넣도록 할 정도였다. 그는 그것을 왕궁의 주요한 방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그 벽 사방에 놓아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그것들은 지금은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러나 열왕기서의 편집자들은 라기쉬를 단지 두 번만 언급할 뿐이며(왕하 18;14,17), 산헤립이 거기에 왔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거의 두 장이나 할애하면서까지 예루살렘 포위에 대해서만큼은 비상하게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다(왕하 18:13-19:37).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포위는 기적적으로 일소되었고, 야웨의 성전은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기쉬는, (발굴을 통해서 참혹한 현장이 드러나는 바와 같이) 완전하게 파괴되었고 그 주민들도 살육을 당했기 때문에, 성서 기록자들에게 있어서 전혀 관심이 되지 못했다. 이 경우에 나타나는 그들의 오만한 태도는 단지 그들의 선택력에 있어서의 하나의 예로, 정치적이면서도 신학적인 편견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들은 확실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대해서 “사심이 없고,” 공정하거나 균형을 맞추지 않았다.
(3) 모든 성서 기록자들의 관점은 다른 측면에서는 실용적일 수 있었던 바를 제한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모든 성서 문학-특별히 역사적이며 예언자적 작품들의 경우-이 본질적으로는 “선전문구”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기록자들은 객관성이라는 것도 염두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정통 야웨주의의 주장을 옹호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보는 것만이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왕들이 그러한 것을 수용했다하더라도 그러했다. 그들은 “훌륭한” 개혁자인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을 제외한 모든 왕들을 경멸했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은, 물론, 8-7세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제에서 볼 때 소수파였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내가 조금 알고 있는) 나의 신학적 동지들 가운데 한 명이 즐겨 말하는 바와 같이, “(소수파에 의한) 반대 의견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기록자들은 “스핀 닥터spin doctors-자기 진영에 유리하도록 홍보하는 사람-역주”였다. 그러므로 성서는, 넓은 의미에서, 고대 “수정주의자들의 역사”인 셈이다.
(4)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나는 최후의 요점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그림을 위해서 히브리 성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비평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성서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이상적인” 것으로-있는 그대로의 이스라엘 종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해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그림일 뿐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열심당들이 실제로 관리하고 있었다고만 한다면 일어났었을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편집자들이 심하게 정죄했던 바로 그 “민간 종교”라는 것이, 내가 여기에서 쓰려고 하는 특성들 대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적인 제의를 억압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의 존재를 확언하고 말았다.
정리하자면, 성서 본문을 신뢰할만한 역사적인 증거들로 여길 수 있는 정도는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여렵다고 하겠다. 성서의 “역사성”은 아마도 오늘날 성서 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데, “최소주의자들”과 “최대주의자들”이 논문상으로 한창 전쟁 중에 있다. 나는 이러한 논쟁을 최근 저서를 통해서 길게 다룬바 있으므로(데버Dever 2001), 여기에서 나는 단지 나의 입장을 간결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나는 성서가 전혀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며, 단지 최근에 와서 어떤 이들이 그게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일 뿐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자들”의 단언에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첫 번째 발언은 부주의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어떻게 의미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단지 사실이 아니다. 섬뜩한 회의주의가 최근에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는 보다 자유주의적인 성서학자들조차도, 성서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역사였다고 가정했다. 달리 말해서, 히브리 성서는 현대적인 감각에서 볼 때, 즉 “사심이 없고,” 객관적이며, 균형이 맞추었고, 학문적인 역사는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대부분 주류 성서학계를 따라서, 나는 종종 (항상은 아니지만) 히브리 성서를 “역사화된 허구”-어떠한 순전한 역사적인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로, 그러나 기록자와 편집자들의 이념적인 문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항상 말해지곤 하는 그러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결국엔, 이것은 “역사歷史, history”는 아니며, “역사力詞, his story”이다. 그 이야기는 온통 하나님-그러한 측면에서 종교-에 대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기록자들의 특유한 소견version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와 심지어는 현대의 주석가들조차 성서의 선전문구를 포용해왔던 이유에 대해서 살펴왔으며, 또한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선전문구”가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며, 역시나, 그중 대부분은 최소한 어떠한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5) 이를 통해 우리는 히브리 성서가 역사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깝다는 최종적인 고찰에 이끌게 된다. 오늘날 많은 성서학자들의 전제는 성서를 “문학”으로 보는 것으로, 즉 상당 부분 역사라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과거의 실제적인 사건들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이야기가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야기들이 어찌되었건 전부가 신화(즉, 허구)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고대적이며 현대적인 활용을 위해서는 그것에 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히브리 성서에 접근함에 있어서, 어떠한 특권적인 전문가도 없으며, 옳은 해석도 없으며, 단지 특정한 공동체에게 잘 “팔리는” 것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문학비평과 신역사주의의 강조는 그 자체로 “주변부”, 반-건설적인 지지자들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바로 급진적 좌파; 불평불만이 가득한 정치판; 교리적인 여권주의; 심리학적 비평; 극단적인 제 3세계 해방신학; 녹색운동; 그리고 보다 최근에 와서는 동성애주의자(퀴어 이론queer theory, 자세한 것은 엑슘Exum과 클라인즈Clines 1993; 핸스-피아자Hens-Piazza 2002). 나는 이러한 것들을 “과격파 성향”(radical chic)으로 여긴다. 당연한 예기지만, 성서는 “문학”이며(달리 뭐라 하겠는가?), 특별히 교훈적인 문학으로, 그러므로 “실제 삶”에 대해서보다는 극소수의 창조자들에 의한 문학적인 상상력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학을 전체적으로 믿음직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몇 몇의 실제 사건을 반영하는데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통하는” 이유이다.
비성서적 본문
19세기 중반에 와서 고고학이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서의 세계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기 전까지, 히브리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즉, 철기 시대의 이스라엘)에서 나온 단 하나의 살아있는 문학작품이었다. 그것은 조용한 파수꾼과 같이, 매혹적이지만 불가해한 과거-우리가 그것을 맥락 안에서 평가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비교 작품들이 없는 과거-에 대해서 증인으로 홀로 서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다른 문서들의 발견되기 시작하고 또한 지금도 계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늘날 비성서적 문학작품은 정경문학보다도 더 커졌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 대부분은 “세속적”인 것으로, 그 중 몇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필적하는 빛을 비쳐주기까지 한다.
가용할만한 문헌 자료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1) 이집트 본문; (2) 시리아 해안에 위치한 우가릿에서 출토된 가나안 본문; (3) 엄청난 양의 신아시리아와 신바벨론 기록물; (4) 아람과 모압의 왕궁 비문 몇 개; (5) 히브리어로 된 기념비문 몇 조각; (6) 8-6세기경인 수백 수천의 히브리어 도편(도기에 새겨졌다), 새겨진 물건들, 낙서들, 그리고 심지어는 소수의 훼손되지 않은 무덤비문; 그리고 (7) 수천 개의 인장과 인장인쇄물(데이비스Davies 1991; 맥카터McCarter 1996; 새스와 울링허Sass and Uehlinger 1993을 보라). 이러한 광대한 기록물들 가운데 어떤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과 행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래에 그 그림을 보여줄 생각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적인 증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며,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성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비록 그것 역시 다른 편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종교와 역사에 있어서
“일차자료”로서 고고학
본문상의 유물과는 별도로, 고고학을 통해서 빛을 본 물질문화 유물 혹은 비-기록물적인 증거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를 밝히는데 있어서 주요한 또 하나의 자료가 된다. 그것은 명백한 것이어야만 하며, 내가 지금 언급하려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명백하지만은 않다.
다른 곳에서 나는 시리아-팔레스타인 혹은 “성서” 고고학의 성격, 방법, 목적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다양한 연구들을 발표한 바 있다(참고문헌). 여기에는 몇 개의 일반적인 언급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고고학은 하는 사람에 따라서 많은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단순하게 훌륭한 고고학자가 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혹은, 내가 선호하는 것처럼, “고고학은 물질문화에 대한 과학”으로, 사물에서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한 방식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고학은 과거를 조망하는데 있어 명백히 본문에 필적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의 목표는 같다: 가능한 한 그 세대의 언어로 과거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에서 논의하려는 바이다. 실로, 고고학이 본문에 대해서 어떠한 개선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동등하거나 혹은 심지어 더욱 우세한 정보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이는 대담한 선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본문들이 “일차자료”라고 (실제로는 유일한 자료) 오랫동안 주장했던 성서학자들의 가정에 도전하는 꼴이다. 그러므로 내가 고고학적인 자료를 일차자료, 혹은 종종 실로 우월한 자료로 보는 나의 관점을 변호해보겠다.
(1)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이미 모든 성서 본문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정경적인 성서 본문은 정적이며, “닫힌 책”이며, 멈춰진 시간이며, 거기에는 더 이상의 첨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동적이며, 날마다 새로운 발굴로 인해서 혁신적인 일들이 가능하며, 개방적이며open-ended, 이론적으로 그 가능성에 있어서만큼은 거의 제한이 없다. 나는 고고학이 우리에게 있어서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순전히 새로운 정보 자료가 될 것이라고 논하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는 똑같은 본문에 대해서, 비록 독창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끝없이 재해석을 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은 해석을 더할 뿐으로, 새로운 사실은 없다. 물론, 고고학적인 사실들은, 본문에서와 같이,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실들은 더 많은 것을 한다.
(2) 둘째로, 고고학적인 자료는 성서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전형적인 자료 종류들보다 더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성서 문학의 많은 장르에도 불구하고, 모든 본문 자료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의도적인 선별이라는 것에 걸려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며, 그것을 보존시켰던 인간적이거나 자연적인 요인들(“고고학적 기록에 대한 형성 과정”)을 제외하기만 한다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리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선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공유물들은 히브리 성서가 거의 독보적으로 집중하고 또한 승인하고 있는 성스러운 개념들과 관습에서뿐 만아니라, 있을 법한 모든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보편적인 사람들의 “세속적인” 활동 영역 전반에서부터 출토된다. 성서 본문은 처음부터 곧장 다량으로 편집되었고, 이천년을 넘는 동안 회당과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재해석되어져왔다. 그러나 우리가 “고고학적 기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편집되지 않았다. 인공유물들은, 그러므로, 본문보다는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소한 현대의 해석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하겠다. 확실히 그러한 편견이 없는 자료들은 성서 본문이 하는 것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삶이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보다 더 그럴듯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지금까지 몇 세대 동안, 성서학자들은 그들이 삶의 자리Sitz im Leben 혹은 본문의 “실제 삶의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해왔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은 내가 문학의 자리Sitz im Literature-본문의 문학적 맥락-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재구성”에 있어서 고고학의 목적은 보다 넓은 차원에서 문화적이며 참으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3) 나는 이미 성서 본문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는데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늦게 연대설정을 한 바 있다. 즉 이스라엘 역사의 늦은 1/3에 제한되며, 단지 바로 그 시기 동안에만 “목격자의 증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인공유물들은, 대부분이 단명한 것으로, 우리가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대에 성격상 동시대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소수의 설명이 필요한 품목들curated items을 제외하면 사실이다. 아직은 이것들이 재사용된 곳에서 맥락을 발견하는 수준이지만, 그것의 본래적인 사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은 이제는 이차적인 사용기간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성서학자들은 인공유물, 전체 일괄유물들 그리고 층(層)의 연대설정에 있어서, 고고학자들이 상대적으로 확신을 품고 있다는 점-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오차범위를 ± 50년 이상을 잡지 않곤 한다-에 대해서 종종 회의적이다. (층이란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물질들의 단층을 일컫는다.) 그러나 주류 고고학 학자들조차, 탄소 14를 이용한 연대설정과 같이 점점 과학적인 방법들을 포함해서, 현대적인 연대설정 방법들 덕분에, 그렇게 많이 불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는 반면, 성서학자들은 주요한 성서 본문에 대해서 거의 몇 세기에 걸쳐서 불일치하고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더 심하다; 그들은 페르시아-헬라시대의 연대를 선택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모든 본문을 사건 뒤에 일어난 것으로 해결해버리고 있다. 우리 고고학자들은 연대기를 확실하게 고정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고고학적 자료들의 상황은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4) 나는 성서 본문이, 소규모의 식자층인 엘리트 집단 내에서 제작되었다고 주장했었다. 아직도 고고학적 자료들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본질상 “대중적인 성향populist”이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이라는 매우 넓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모든 직업, 그리고 특별히 여성들로, 본문에서는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본문은 특별한 이익집단을 반영하고 있다면, 인공유물은 통속적인 문화를 반영한다.
(5) 성서 본문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상주의적” 관점이라는 신학적인 편견은, 그들이 고대의 편집자적인 결정을 반영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러므로 그들이 현대의 해석적인 선택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 “사건들”은 언제나 논쟁 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올브라이트Albright가 오래 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고고학적 혁명”의 시작에서부터, 우리가 발견한 것은 실물realia이었다. 그것들은 실체적인 유물이고 땅에서 캐낸 것들로, 종종 해석적인 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나는 수백 수천의 그러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나열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세대마다 바뀌고야마는 “성서학자들의 확신에 찬 결과들”과는 다르다. 인공유물들도 당연히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항아리들은 딱지가 붙여진 상태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한 용기들은 요리할 때 사용되는 그릇이라고 확실히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는 “읽히는 본문”에 필적하는 것으로, 내가 “객관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제 곧 보여줄 것이기도 하다.
(6) 마지막으로, 히브리 성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광범위하게 “신정론적인 역사”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것이 제기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드러낸다. 고고학은, 이와는 반대로, 내가 논하려고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세속적인 역사”를 만들어주는데, 이는 좀 더 실제적이고, 좀 더 포괄적이며, 보다 더 균형을 맞추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보다 더 만족스럽다. 민간 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만큼은 그것은 확실히 그러하다.
고고학을 평가절하하다: 누가 그리고 왜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식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잠재적으로 강력한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이전에 주류 작품들을 비평했던 성서학자들 가운데 태만히 여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심각하게 여기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이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성서학자들은 고고학이 얼마 정도의 다듬지 않은 자료들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을 형식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해석이 가지고 있는 “주관성”이란 것 때문에 그 어떠한 쓸 만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곤 한다. 발굴은 “확정적이지 않거나 별개의 사건들을 별것 아니게 한다”고 공언한다(크놉퍼스Knoppers 1999:211).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니디취Niditch의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Ancient Israelite Religion」에서는 고고학적 정보가 “단편적이며, 신앙과 세계관에 대해서 아무런 실제 상황을 보여주지 않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에 관한 복잡한 질문들에 대해서 아무런 객관적인 대답도 못한다”고 단언한다(1997:25). 최근에 나온 스미스Smith의 주요 저서에서도 1990년 이래 경향을 개괄하는 차원에서 고고학을 언급할 뿐이다(그것도 몇 명의 고고학자들만). 그는 이스라엘 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데, 바로 고고학은 해석이 요구되며 “난해한 것들 가운데 몇 개만을 다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2002a:xxiii). 심지어는 보수적인 학자들도, 이들은 고고학이 “성서를 증명한다”면서 일반적으로 지지를 표하고 있는데, 오늘에 와서는 다소 회의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K. 로손 영거K. Lawson Younger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은 (많은 경우에 성서 자체에 배경을 둔 가정들을 포함해서) 그 자체로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적이며, 철학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다양한 주관적인 가정들로 가득 차있다”고 선언한다(1999:201).
보다 중요한 것으로는, 최근에 나온 논문집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록될 수 있는가?Can a “History of Israel” Be Written?」(그라베Grabbe 1997)는 자료로서의 고고학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소논문을 담고 있다. 그라베는 “인공유물과 다른 증거들에 대한 엄청난 양의 해석들이 성서 본문에서 발견된 정보들에 직접적으로 의존해왔었다”라고 의견을 개진한다(1998:24).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사실이 아니다. 캐롤Carroll은 “고고학이 성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최근의 집착”이라고 하면서, 결국 “고고학은 단지 ‘가짜 역사’를 만들어낼 뿐이다”라고 신랄하게 무시한다(1997:90,93). 니에르Niehr는 고고학적 자료가 “기록된 일차 자료와 비교할 때, 이 증거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자료들을 해독하는 것은 기록된 자료들에 대한 경우에서보다도 더욱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라고 선언한다(1997:159).
이스라엘 종교를 전체적으로 다루었던 가장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은, 바로 알베르츠Albertz(1994)와 밀러Miller(2000)로, 훌륭한 정도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다(위를 보라). 그러나 이 둘 역시 종교적인 신앙과 행습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데 주저하고 있다. 즉, 이들은 행동에 관하여 추론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고고학자들이 항상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밀러는, 예를 들면, 고고학에 대해서 “해석적인 작업이 기록 유물만큼 혹은 그 보다 더하다”라고 표현하면서 많은 다른 사람들이 퍼트렸던 낭설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공유물에 관한 우리의 판단은 문학작품, 그러니까 성서와 성서외적인 것 둘 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나온다”(2000:xvi).
성서학계의 “수정주의자들”은, 이들은 허무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그 어떤 것에 대해서 혹은 모든 면에 대해서 회의적인데, 여기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히브리 성서 전체를 자료로서 여기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역사가”로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다른 가용 자료로써 필요할 때에만 고고학을 의지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톰슨Thompson과 같이, 고고학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희화화하는데, 그럼으로써 사실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의 「신화적 과거: 성서 고고학과 이스라엘의 신화The Mythic Past: Biblical Archaeology and the Myth of Israel」(1999)이 그러하다. 휘틀렘Whitelam의 「이스라엘의 발명: 팔레스타인의 침묵의 역사The Invention of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1996)은 고고학과 고고학자들을 비방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나가고 있다. 렘케Lemche는 덜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도 역시 고고학적 자료들을 기록물이 없다면 대게 “아무 말도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1998:30). 데이비스Davies의 「“고대 이스라엘”을 찾아서In Search of “Ancient Israel”」(1992)는 고고학이 완전히 당치 않은 것이라며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있다. 최소한 이 말이 가장 정직한 것 같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데, “프라이부르그Freibourg” 예술사 학파(위를 보라)의 최근 저작들은 고고학을 상당히 중대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그것도 전문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킬과 울링허Keel and Uehlinger의 도상학iconographic 연구가 있는데, 이들은 고고학이 “퍼즐의 잃어버린 조각”을 보충하는데 있어서 “일차 자료”가 된다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1998:2,5). 「단지 한 하나님?Only one God?」(베킹과 다른 사람들Becking and others 2001)이란 책의 여러 소논문들은, 비록 그것들은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발표한 것이기는 하지만,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특별히 프리첸Vriezen이 상세하게 조사한 “고대 이스라엘 예식에 관한 고고학적 흔적들”(2001:45-80)을 들 수 있다. 아세라를 다루었던 하들리Hadley의 작품 역시, 본문 상의 자료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자료도 의존하고 있다(비록 그녀 역시 근원적으로는 성서학자이기는 하지만). 첨언하자면, 아세라 제의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로서 「단지 한 하나님?」의 저자들과 하들리가 가졌던 감성은 필리스 버드Phyllis Bird와 케롤 메이어스Carol Meyers뿐 아니라(제 2장) 다른 여성 학자들의 작품들에서도 나타나는 여권주의 학자들의 기록물들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예견할 뿐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점차적으로 민간 종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몇 몇 다른 학자들은 고고학의 잠재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개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반 데 툰van der Toorn은 자신의 첫 번째 작품에서 그러한 자료들을 최소한 도로 사용했을 뿐이다(1994). 그러나 이후로 그는 “책의 종교”의 한계를 강조해나가면서 그러한 자료들에 대해서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1997; 위의 제 2장). 다른 측면에서, 베르리네르블라우Berlinerblau는, 노골적으로 민간 종교라는 주제를 접근했던 첫 번째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비록 용어를 비평하는 것에 그치지만; 위를 보라),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서 희망적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즉각적인 것이거나 풍부한 것이거나 곧 출간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1996:170). 오늘날 그는, 오히려, “새로운 접근”이라는 것을 주창하고 있다. 나는 최소한 도로 그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나는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무인식의 원인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데 기인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학자들”에게 변명이 될 수 없다. 어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성서학자들-역주) 영역을 읽고 있다. 대화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와 다른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한 세대 동안이나 풍성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관심을 이끌어왔었다. 다방면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몇 권의 최근 논문집들에 더해서(제 2장에서 비평했던 작품들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지만), 거기에는 최근 몇 년간 이루어진 몇 개의 주기적인 “최신 기법”에 대한 개관이 나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지난 20여 년간 이런 것들과 관련된 수 십 편의 글을 써왔는데(특별히 1985; 1992; 2000), 여기에는 특별히 이스라엘 종교 연구에 대한 고고학과의 관련성에 보다 집중한바 있다. 사실, 내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세라 제의”에 관해서, 새로운 고고학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최초로 논의했다(1984). 그것은 20년 전만 해도 이단적인 것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어디에서 그러한 착상이 떠올랐는지에 대해서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주류 학회지, 심포지엄 판, 그리고 표준이 되는 성서사전과 백과사전에 기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자료들 가운에 그 어떠한 것도 인용하려들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서 논의하고 있는 출판물 대부분은 단지 내가 언급했던 키르벳 엘-콤Kh. el-Qôm 비문에 관한 글만을(아래를 보라) 인용할 뿐, 나의 많은 이론적이며, 방법론적이며, 그리고 체계적인 소논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1973년 이래로) 내가 고고학과 성서학계 사이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점에 관해서라면, 사실상 그 어떠한 성서학자들도 그러한 절실한 요구desideratum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할펀Halpern(1997)과 킬과 울링허(1998:4,5)만이 예외라고 하겠다.
성서학자들이 고고학을 유치하며, 순진한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로, 몇 몇의 사례에서 볼 때, “수정주의자들” 가운데에서처럼, 우리는 단순히 무시당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 꾸며낸 적대감을 맞닥뜨린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념적으로 치우친 이들 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발명된” 자신들만의 이스라엘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려지게 된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실제의, 고고학적인 이스라엘과 생생한 종교에 대한 그 증거가 그들의 이론을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울듯하다. 소수의 본문에 집중하고 있는 학자들, 주류 성서학자들에 관해서라면, 나는,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이 방어적이며, 자신들의 환영받지 못한 침입자들을 상대로 처리해야만 하는 “전문영역”을 방어하는 것 같다. (만약 고고학이 정말로 “일차 자료”였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일부 강경한 신학자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종교야말로 고상한 지적 과정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번잡한 실제들로 그들을 성가시게 하지는 말아야 겠다.
(고고학적) 자료들을 나열하기
여기에서 논의한 바 있는 회의주의자들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의심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말한다면, 고고학에 대한 “최소주의자들”의 견해에 어떠한 정당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그 무엇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고고학에 관해서 그 누구라도 첫 번째 것(발굴물-역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 처음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고고학은 희화화되었는데, 특별히 “수정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이는 주로 그들의 목표가 오래 전에 고고학 학계에서 폐기된 바 있는 성서를 증명하는prove-the-Bible “성서 고고학”이라는 옛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30년이나 더 지나서, 예를 들면, 나는 전통적인 “성서 고고학”의 죽음을 주목했고, 그 사망기사를 쓴바있다(데버Dever 2000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서 1973, 1985). 그 뒤를 이어서, 근본주의자들과 심지어는 소수의 주류 성서학자들이 함께 그들이 생각했던 바가 성서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항변하면서, 얼마 동안의 논쟁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했다; 그리고 결국엔, 극소수만이 성서학계의 한 가지였던, 고고학과는 관련 없는, 아마추어적인 계획이 끝이 나버리는 것에 대해서 슬퍼했다. 최소한 지난 20년간,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 이제는 통상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처럼, 독립되고, 전문화되고, 세속적인 학문분야가 되었는데, 결국엔 성서학자들과의 대화를 이끌어나가는데 자유롭게 되었고, 더 이상 일방적인 독백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는 이제는 고고학과 성서연구 사이의 대화로만 인식되고 있으며, 고고학의 “원숙기coming of age”가 문서화되고 있기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이제는 관련분야가 되어버린 학문적 진전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톰슨의 「신화적 과거: 성서 고고학과 이스라엘의 신화The Mythic Past: Biblical Archaeology and the Myth of Israel」(1999)에서와 같이 비방을 불러일으키는 무식함이 바로 이런 종류라고 하겠다. 이 책은 고고학과는 그 어떠한 관련도 맺고 있지 않으며, 최소한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사용하는 방식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휘틀렘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1996)은 보다 훨씬 터무니없다 하겠는데, 이 책은 이스라엘인 고고학자들과 그들의 미국 동료들을 “시온주의자”라고 하면서 중상모략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 (휘틀렘의 이념적인 주제는 빤히 들여다보인다, 이는 데버Dever 2001에서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들을 스스로 선동가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두 명의 학자들은 비주류이다.
(2) 고고학에 대해서 통상적인 비평가들은, 인공유물들이 본문과 같이 “해석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한 고고학자들에게는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 둘이 매우 섬세한 비교 방법론적으로 읽혀야 되는 “본문”이라는 점을 밝혀낸 이래로, 두 개의 자료 종류 모두에게 있어서 “해석학적인(혹은 해석적인) 과정”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제 2장과 데버Dever 1997a)..
(3) 고고학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 나는 위에서 그것이 잘못 알려졌고 터무니없는 개념이라고 밝힌바 있다. 고고학적 자료가 침묵하는 것은 방음장치 때문이다. 인공유물은 성서본문과 최소한은 같은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보다 다양하고, 보다 “실제 삶”을 더 반영해준다. 실제적인 문제는 역사-기록을 위해서 전해지는 정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자가 원하는 역사의 종류라고 하겠다. 히브리 성서는 주로 신정론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신학의 역사, 즉 “정치사,” 혹은 이따금씩 내러티브 역사를 쓰면서 이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다른 종류의 역사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다른 종류의 역사들 가운데 몇 개만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1) “정치사”: 주로 “영웅” 보도와 그들의 공적인 행적들; 일반적으로 호전적 애국주의적이며, 에피소드적이고, 선전문구적이다. (2) “내러티브 역사”: 연속되는 사건의 역사로, 주로 서술적이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선택적이며, 그리 설명적이지는 않다. (3) “사회-경제적 역사”: 사회와 그것의 경제적 근간을 포함해서 사회 제도에 관한 역사; 가족, 시족, 사회적 계층,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처럼) “생산방식,” 국가에 집중한다. (4) “지성사”: 개념, 그것의 정황, 그 변화, 특별히 이념적이면서 종교적인 관념들에 관한 역사; 이는 주로 본문의 역사로, 문학적인 전승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5) “문화사”: 보다 포괄적이며, 상황적이며, 모두를 포함하는 발달 사회사; 그것은 정착 유형과 확산, 인구학, 생존방식, 사회-경제적 구조 등에 집중한다; 정치적 구조와 최종적으로는 “인종 특유의 것”으로 나아간다. (6) “기술의 역사”: 환경에 대한 인간의 조작과 변용에 관한 역사로,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서 자연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을 추적한다; “문명화의 조건”이라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진다. (7) “자연사”: 자연세계, 환경, 생태학적인 “적응”의 차원에서 문화라는 지리학적인 역사; 플리니(Pliny)의 「박물지Historia naturalis」가 있다. (8) “물질사”: “활동에 관련된 것”으로서 인공유물에 대한 연구: “사물에서부터 기록된 역사.”
고고학자들이 역사가이며, 오랜 시간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도 된다라는 점은 분명한데, 바로 그들 스스로가 물질적인 문화 유물에 주로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면 본문도 배제될 순 없겠다. 왜냐하면 이것들 역시 인공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위에서 나열한 모든 종류의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고고학자들은 위의 두 번째 범주에 잘 드러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3,5,6,7번 그리고 8번 범주에도 해당될 수 있다. 단지 1번과 4번 범주-정치사와 지성사-만이 본문에 집중하는 역사에 비해서 고고학자들에게는 불리하다 하겠다. 만약 이 모든 “종류”의 역사-기록이 순전한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그렇다고 한다면, 성서학자들은 반드시 장래에 고고학자들과 대화에 나서야만 할 것이다.
고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지금까지 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혹은 그 종교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성서본문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써왔다. 그리고 나는 고고학의 “긍정적인” 면과, (많은 성서학자들을 포함해서) 혹자가 설득적이지 않다고 할지 모르는 고고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비평이 이미 주어졌는데, 그것은 나의 의견이 고고학이라는 학문분야에 있어서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으며, 일종의 “극단적 객관주의hard objectivism”라는 것이다(영거Younger 1999:201). 그러나 나는 고고학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단지 그 자료에 대한 해석이 본문 해석보다, 혹은 다른 어떠한 사회과학 분야가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도, 더 주관적이지는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고고학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형식에 보다 가깝다는 주장이 종종 있어왔다. 여전히, 나는 고고학은 조직적일 수 있으며, 학문적일 수 있으며, 그 가설과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에 있어서 명쾌할 수 있으며, “확률the balance of probability”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도 충분히 확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기록에 있어서 다른 분야에서도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객관성”이라는 문제는 실로 모든 연관된 역사 분야에서 걸리는 것으로, 이제는 이전 보다 더 그러한데,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자들”의 도전 때문이라고 하겠다.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같이, 이 학파에 속하는 성서학자의 근본적인 입장은 “모든 거대담론metanarratives에 대한 불신”이다. 분명히 히브리 성서는 서구 문화 전통에 있어서 엄청난 거대담론이며, 그 전통에 그럴듯한 우월성과 우주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성서 “수정주의자들”이 거부하는 점이다.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에서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관한 어떠한 진술도 단지 “사회적인 고안품,” 즉 허구라는 것이다. 그들의 저작물 대부분에서 단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은 신화이다; 그것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의해서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한 뒤틀린 방식으로서 “발병”되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과거를 살펴볼 때 그 어떠한 객관성도 가능하지 않다는 “수정주의자들”의 단언이다. 우리는, 주관주의자들로서, 예민하게 관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구성을 결정하는 것은 고대의 사실이 아니라(어떤 사실도 없다), 우리의 현대적인 자의식이며, 우리의 오늘날의 필요이며,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이다. 참으로,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문에 대한 모든 읽기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다-인종, 성, 계급, 권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객관성,” 밖으로 드러나는 실제 세계, 진리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우리의 지각만을 가지고서, 항상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거가 실제로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이는 우리 보다 앞선 세대의 학자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바와 같다(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러했다).
나는 지식에 대한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오류와 성서 “수정주의자들”의 취미fad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길게, 그리고 특별히 그들이 고고학을 오용했던 점과 관련해서, 논평한바있다(데버Dever 2001). 약간의 언급만 있으면 되겠다. (1) 첫째로, “이데올로기”는, 거의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할 만큼, 열광적으로 회의적인 세대에서나 통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왜 이것이 그래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통적인 가치와 신앙을 부인하는 일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구상하는 듯한 유토피아에서 어떻게 안내역을 맡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거기에는 전혀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2) “수정주의자들”과는 반대로, 내가 알고 있는 어떠한 학교에서든지, 성서비평은 “객관성”을 절대로 요구하지 않는다. 옥스퍼드의 탁월한 석좌 교수인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그것을(객관성-역주) 서투른 모방caricature이라고 지적했다(2000:50-53). 그리고 19세기 “실증주의”의 죽음 이래로 그 어떠한 존경할 만한 역사가도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훌륭한 역사가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바로 우리는 전반적으로 객관적이 되도록 시도해야만 한다는 점이며, 이는 바가 말한 바와 같이, 얼마 정도의 객관성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겠다.
(3)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수정주의자들”에 의해서 언제나 부정적인 면으로 사용되어왔다-피할 수 없으며, 그러나 나쁜 것으로, 이상적으로는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전형적으로 마르크스의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으로 이것이 실제에 기반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의 사회를 지탱하고 조직하며 제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바에 대한 환영illusion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가 과연 무엇일까? 만약 알려진 사실이 아무 것도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왜 “수정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것이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4) 어찌 되었건, 이데올로기는 그 극단-즉, “광신”-적인 표현에서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 잘못된 것도 아니다. 첫째로, 나는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데, 이는 어떤 현상이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접근하는 하나의 개념 체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데올로기 주창자들로 만들지는 않는다. 유명한 인류학자인 클리포트 기어츠Cliifford Geertz는 이러한 견해를 효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희화화했다: “나는 사회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브레틀러Brettler 1995:194에서 인용). 두 번째로, 이데올로기는, 만약 그것이 신앙 체계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떤 신앙은 다른 것보다 더 진짜일 수 있는데, 즉, 보다 더 사실에 근간을 둘 수 있다. 다른 것들은, 만약 사회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최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자신의 세계에 대한 실체가 반영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 모두는 우리가 “실제 세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여기에서 특별한 주제는 고고학이, 하나의 역사적 학문분야로써, 객관적일 수 있는가 혹은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즉 현대의 이데올로기가 과거에 대한 탐구를 불가피하게 타협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이데올로기-그들의 세계관, 그들의 종교적 신앙과 행습-에 대한 우리의 관찰은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환영이 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은 거의 종교를 다루지 않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고고학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은, 내가 위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역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따라서 달려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정의 중에 하나는 독일 역사인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의 것이다: “역사란 어떠한 문명이 과거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지적인 형태이다”(브레틀러Brettler 1995:11에서 인용함).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역사가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필요에 관한 것이라는 암시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역사는, 적당히 균형을 맞춘 것으로서, 이 둘 모두에 관한 것이라고 여기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길 것이다. 바로 프랑스 역사가인 조지 더비George Duby의 생각처럼 말이다:
어떠한 사회 내에서 역사적인 역할이 존재하거나 혹은 부여해주는 (이미지, 신화, 생각이나 개념들과 같은) 표현의 (그 자신의 논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체계(Brettler 1995:13에서 인용함).
만약 종교가, 제의적 활동으로서 실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남겨둘 것인데, 왜냐하면 나의 이데올로기는 기술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것은 또한 역사적인 작업으로, 만약 고대 종교를 기술하는 것이 단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이 어떠하기를 원하는 그런 것일 수 있다. 이는 내가 여기에서 나열했던 자료들뿐만 아니라, 방법 그리고 개별적인 기록자의 동기(혹은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도 불러일으킨다(아래를 보라). 그 어떠한 역사의 결과라 하더라도, 심지어는 대부분에 있어서조차, 이러한 변수에 의해서 결정되게 될 것이지, 이용할 만한 “사실들”에 의해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고고학자로서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 역사편찬 모델은 “법리학적jurisprudence”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상당 부분 영국의 관념론적 역사철학자인 R.G. 콜링우드R.G. Collingwood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그의 고전적인 저서인 「역사의 관념The Idea of History」(1946)을 보라). 역사기록에 대한 이 모델의 핵심적인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1) 역사가는 우선은 탐정으로, 그리고는 선언을 숙고하는 배심원으로 여겨져야 한다.
(2) 기본적인 작업은 모든 직/간접적인 증거들을 평가하는 것이다.
(3) 배심원은 그 자신과 그의 동등한 상대, 즉 반드시 납득되어야만 하는 독자로 구성된다.
(4) 재판은 증인들, 즉 본문과 인공유물, 그리고 대리인을 기소하고 변호하는 일 모두를 해내는 역사가의 활동을 심문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5) 판사는 역사 그 자체로, 다음 세대이다.
(6) 판결은 절대적인 진리를 선언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재판에 해당되는 그것, 즉 “과거”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정의, 즉 “올바른 독해”는 “증거 상의 우위,” 그러니깐 “타당한 의심까지도 초월해서” 지속될 수 있는 판단에 대체로 근거한 판결로 이루어진다.
법리학적 모델을 사용하면서, 나는 우리가 과거를 재-창조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온당하고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과거를 이해하는 데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방어할 수 있으면서도, 비평에는 개방적인 그러한 역사 말이다(자세한 것은 브레틀러Brettler 1995:142-44를 보라).
나는 지금 여기에서 고고학이 특별히 손에 잡히는, 실제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고고학적 인공유물이 보다 “객관적이며,” 그러므로 종종 성서와 다른 본문들에 대한 해석보다 더 신뢰할만하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일상의 생활을 재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두 개의 자료들의 “사실성factuality”을 평가하는 실질적인 실험을 해보도록 하겠다.
기원전 8세기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리용 도기와 그 사용에 대한 본문을 상상해서 재구성해보도록 하자. 그것의 주인 혹은 “저자”는 이런 것들을 기록할 것이다. 즉, 예를 들면, (1) 요리용 도기 그 자체로, 그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또한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 그가 혹은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가; (3) 그 도기에서 요리되는 음식들과 그것을 어떻게 준비하는가; (4) 화덕은 어떻게 생겼으며 요리를 위해 얼마나 걸리는가; (5) 음식을 차리고 먹는 방식. 그러나 그러한 본문이 실제로 믿을 만하며,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저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그 어느 것도 실제로 증거 하지 못하며, 단순히 상상에 의한 문학적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심지어 만약 기본적으로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기록자의 입장에 대해서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그가 혹은 그녀가 이 요리를 전적으로 좋아했을까? 마지막으로, 이 내러티브는 전혀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며, 오히려 (성서의 비유와 같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영혼의 자양물”이라고 하듯 말이다. 짧게 말해서, 이 본문은,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객관적인 실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본문을 읽는 것은 사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식과 해석-고대와 현재-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자신의 해석학적인 원칙상으로 크게 확신하고 있는 많은 본문 학자들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주관적인” 해석의 원리에 반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제는 비교를 위해서, 이론적인 것 말고 실제적이며 손에 잡히는 그런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 8세기의 실제 요리용 도기로,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증거 말이다.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의문을 제쳐놓고, 우리가 고대의 요리와 식문화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인 증거들로부터 무엇을 실제로 배울 수가 있을까? 나는 이 경우에 상당히-과학적인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다음의 것들을 알 수 있다고 논증하고자 한다: 이 그릇은 “용리용 도기”이다; 그것은 오랜 원형과 닮았는데, 우리가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찰흙은 지역의 진흙층에서 나온 것이다; 도기는 회전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가마에서 적당한 온도로 구워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종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촌락의 작업장에서 여성이 만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특정 음식을 위해서 사용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혹은 유다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한정된 기간의 것으로 연대설정할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는 조리용 단지가 그 자체의 경제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고고학자들이 “양식화된 화석type-fossil”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식은 모두가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경험적인 면에 기초한 것이지, 단지 추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논의했던 역사를 기록하는 “법리학적” 모델을 확증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례 연구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본문의 생성과 해석에 있어서 그 어떠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공유물과 그것의 분석에 대하여 언제나 어떠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의 요리용 도기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는다. 제작자는 의심할 바 없이 고고학자들이 “정신적 형판mental template”이라고 부르는 것을 염두하고 있었다. 즉, 8세기 요리용 도기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통용된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기준에 대한 관념은 조금도 색다르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사실 실제reality이며, 그 안에서 그것은 단지 “사회적 구성물”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거쳐서 맹목적으로 모방되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보다 이전의 실제적인 대접들과 원형에 의존한다. 그것은 비교 도기 원형학comparative ceramic typology이라고 부르는 것-현대 고고학의 중요한 방법-이며, 본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전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고의 유형학”보다는 훨씬 더 “과학적”이다. 그것은 실재realia, 즉 때때로 객관적일 수 있는 해석인 것이다.
여기에 본문과 인공유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신중한 견해가 있다. 성서 본문 그 자체가 “이야기,” 즉 실제로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해석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실제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처럼 사실적인 사건의 정확한 기록이 아니다(일단 그것들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므로 그 어떠한 이후의 해석-고대이건 현대이건; 유대인이건 기독교인이건 혹은 다른 이들이건-은 해석에 대한 해석이다. 결과는 이중의 주관적인 해석 과정으로 고민스러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요리용 도기는 발굴되었을 때 그 자체로 원래의 것으로, 이론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구체화하면 된다: 즉, 기원전 8세기 요리용 도기라는 표준적인 형식. 우리의 이해는, 일단 우리가 요리용 도기를 파내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기만 한다면, 진정으로 해석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것은 직접적으로, 현대의 보다 정량화된 법칙에 달려있다. 우리는 단지 고대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배후를 관통해서 어느 정도 본래의 실제까지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자들은 그 실제에 대해서 알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들의 계획적이거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가장하고 있다.
왜 또 하나의 역사인가?
이데올로기와 객관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다른, 연관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아마도 보다 근본적인 면이다: 동기라는 측면이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조사하는 데 있어 생각지 못했던 함정들을 모두 제시했다고 할 때, 왜 사람들은 심히 걱정하는 것일까? 달리 말해서, 누가 그러한 역사를 썼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매우 적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은 모두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사안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초적인 사실들은 분명하고 논쟁 밖에 있다. (1) 지난 2세기 동안의 모든 “구약 신학들”은 정의상 기독교인 남성의 구약 학자가 쓴 것으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목사직을 맡고 있으며, 그들 중에 대부분은 신학교의 교수이거나 신학 대학과 종교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단지 소수의 로마 가톨릭 작가들이 있으며, 그것도 전부가 주변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유대인 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몇 몇의 저명한 유대인 학자들이 어떠한 “성서 신학”에 대하여 특별히 거부했으며, 그 전체 운동을 날카롭게 비평했는데, 그러한 학자로 하버드의 존 레밴슨Jon Levenson이 자신의 소논문인 “왜 유대인은 성서 신학에 흥미를 품지 않는가?Why Jews Are Not Interested in Biblical Theology”(1993)이 있다. 그의 요점은 여기에서 나의 것과 같다: (1) 이것은 그 시작부터 기독교의 변증적인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2) 히브리 성서에 대한 그러한 접근은 (원문 그대로) “신학적”이거나 혹은 “역사적”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즉 전적으로 역사적일 수는 없다. 그러한 입장은 전형적으로 유대적인 것으로, 홀로 의견을 달리하는 목소리로 이스라엘 학자인 모세 고센-고테스타인Moshe Goshen-Gottestein이 있는데, 그는 유대인에게 “타나크Thnakh 신학”이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타나크”는 히브리 성서에 대한 통상적인 유대식의 용어이다).
(2) “종교사”와 사회학적 접근에 있어서, 다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들이다; 소수만이 비종교적인 사람들이다. 1935-55년 동안 예헤츠켈 카우프만Yehezkel Kaufmann이 현대 히브리어로 쓴 여러 권의 책을 제외하면, 인용될 수 있는 완전한 차원의 유대교 역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책은 1960년대에 모세 그린버그에 의해서 단권의 영어 번역본으로 요약되었는데, 그 제목은 「이스라엘의 종교The Religion of Israel」였다. “보수적”인 반면에, 이것은 많은 이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유대교 정통파Orthodox로서 취급을 받지는 못했다. 카우프만은 종교적이지 않았는데, 신학적인 논쟁들을 피하면서, 현대의 비평적 학풍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고대 이스라엘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유일신론주의를 보였다고 주장했다(아래를 보라). 여자들은 수잔 에커맨Susan Ackerman(1992)과 수잔 니디취Susan Niditch(1997; 그러나 「유대인 스터디 바이블Jewish Study Bible」(2000-2005)을 보라).
(3) 민간 종교에 대해서 보다 최근의 기록에서, 나는 베르리너블라우Berlinerblau(1996)를 제외하면 그 어떠한 유대인 학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는 비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라파엘 파타이Raphael Patai의 「히브리 여신The Hebrew Goddess」(1967/1990)은 매우 놀라운 초기 작품이었다(아래를 보라).
(4) 그 어떠한 고고학자들-이스라엘인이건, 유럽인이건, 혹은 미국인이건-도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내가 제5장에서 다루고자하는 약간의 발굴물에 대한 서술적인 표현을 출판했을 뿐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은 종교라는 주제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완전한 비종교적인 사람들로,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모든 고고학적인 활동들을 멈추게 하려는 유대교 정통 종교 지배체제의 시도에 대해서 싸워왔다. 라즈 클레터Raz Kletter의 여성 상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1996) 주목할 만한 예외라고 하겠다. 이스라엘의 여성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조차도 거의 나타내주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루스 헤스트린Ruth Hestrin 1987; 1991를 보라; 아래 제7장을 보라). 오직 소수의 미국의 보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유대인 고고학자들만이 우리의 주제에 대해서 약간의 흥미를 보여줄 뿐이다(그들 가운데 캐롤 메이어스Carol Meyers가 있다).
여기에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경향”이라는 것이 있는가?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적 편견들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이라도 있는가? 나는 단지 몇 가지 가능성만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이다. (1) 하나는 그러한 역사 연구에서 기독교인들과 보수주의적인 관심이 압도적인 것은 계시와 “성서적 신앙”-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 그리고 그 결과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 제도, 그리고 경전의 근원이었다는 확신에서 기인한 듯하다. 유대 정통파의 전통 바깥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러한 억측에 매여 있지 않는다. 그리고 비종교주의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혹은 이러한 억측을 완강하게 거절한다.
(2) 고고학자들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 자들은, 그들은 이제 기초적인 정보들만을 다루는 자들로, 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나는 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관심한 이유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나의 세대에 있었던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성서 고고학” 운동에서부터 나왔던 사람들로, 즉, 이들은 성서와 심지어는 목사라는 배경에서부터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다. 나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여전히 원리적으로는 기술자technicians라고 이론을 세울 수는 있다-기초적인 발굴 작업, 기록, 그리고 원천 정보들을 출간하는데 있어서 점차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가로서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역사 철학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무거운 질문Big Questions”은 처리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따라서, 온당하며 예비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개척적인 작업이라고 고려되는 것을 나는 왜 시도하려는 것일까? 왜냐하면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독특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서론을 보라). 나는 목사의 주교관miter를 쓸 수 있다; 혹은 어떤 모자도 전혀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민간 종교를 위한 증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견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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