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구약학회 박사과정 콜로키움[2008.11.7] 전도서연구발표와 논찬

진실과열정 2008. 11. 6. 09:27

전도서의 화자문제에 대한 김기동의 연구발표에 대해서 논찬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연구발표자료와 논찬자료를 실고 있습니다.

 

 

코헬렛이 말을 걸기 시작하다!

- 전 1:3-11의 화자 문제 -


   김기동(이화여대 박사과정)


1. 들어가며


     전도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일인칭 서술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논란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아마도 구약성서 중에서 전도서만큼 독자가 읽기 과정을 통해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경전인데 불구하고 전도서의 내용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의 야웨 신명이 나오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그 시선과 관심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개인 코헬렛, 더 나아가 ‘해 아래’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수한 신분에 대한 관심도 없고, 불신앙에 대한 예언자적 질타나 회개의 촉구도 없다. 죽음의 실제 앞에서 좌절하고 방황할망정, 구원과 생명을 향한 미래를 구하지도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 보이나, 그 삶의 여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험에 대한 결론은 반복하여 ‘헛되고 바람을 좇는 것’이라는 후렴구로 수렴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 안에서 삶의 근거를 회복하는 구약성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전도서 안에서는 하나님 찬양이나 구원대망으로 나아가지 않고 극히 현세적인 기쁨과 향락의 추구로 변질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로마의 시인 Horace의 싯귀에서 전도서 해석에 차용된 그 유명한 ‘carpe diem' 이라는 라틴어문장은 지금도 내일이 아닌 오늘 하루를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명령의 관용구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도서 또한 다른 성서의 책들과는 이질성의 정도를 넘어 읽기에 참 불편하다.

     그런가 하면 전도서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공감은 특히 ‘예루살렘의 왕 다윗의 아들 코헬렛의 말씀’(1:1)이라 명명된 본문이 옛 지혜자의 권위 있는 교훈적 말씀1)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술되는 삶의 다양한 경험 앞에서 당황하고, 고뇌하면서도 때론 절망하고 또 때론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코헬렛의 모습이 결코 독자의 일반적인 삶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는 곧 독자는 전도서를 읽을 때 단순히 교훈 말씀의 수혜자인 것이 아니라, 비록 산뜻하고 정연하게 결합된 형태는 아니라할지라도 전도서 전체에서 완결된 서술로 주어지는 일인칭 화자 ‘나’의 생각, 삶 등을 상상하며 보고 듣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전도서를 이야기로 읽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형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일반적으로 전도서 연구에서 일인칭 서술 형식은 교훈 제시를 위한  문학적 표현 장치일 뿐, 원래의 주제 및 의도와는 관련 없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처음으로 전도서에서의  '나-이야기‘(Ich-Erzählung) 유형을 하나의 문학적 표현 양식으로 설명한 Loretz는 이 일인칭 서술은 다만 교훈을 위한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지 저자의 내적 삶과 연관되는 자서전적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2) 그런가 하면 일인칭 서술의 저자의 사상적 특성을 찾아내고, 그 정체와 연결시키려는 몇몇 노력들도 사실상 일인칭 화자 '나’를 하나의 인물로 보기보다는 내용의 사상적 배경을 찾으려는 것에 다름이 없었다.3) 그 외 최근에 의사소통이론으로서의 내러티브 이해4)를 중심으로 전도서를 새롭게 읽어내려는 연구들이 시도되고 있는데, 즉 전도서는 단순히 교훈말씀들의 모음집인 것이 아니라, 비록 제한적이나마 인물, 사건, 그리고 언어양식이라는 내러티브의 3대 요소를 가진 내러티브 텍스트이며, 특히 각각 독립된 내러티브로 구별 가능한 3인칭 단락과 1인칭 본문 사이의 긴장관계를 의미 창출을 위한 중요한 특징으로 해석한다.5)  

     전도서 본문에 있는 이와 같은 화자6)의 변화는 이미 역사비평에서도 편집적 작업의 결과로 주지되었던 바다. 코헬렛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1:1. 2; 12:8이 화자 변화의 중요한 지점으로 이해되었다. 코헬렛이 문법적 일인칭 화자로 전면에 등장하는 1:12-12:7이 일반적으로 일인칭 본문으로 받아들여진다. 코헬렛의 말, 노력, 업적에 대해 요약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3의 익명의 화자의 말을 전해주는 12:8-14은 일반적으로 전도서의 에필로그로서 일인칭 서술과는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1:3-11은 전도서 전체의 프롤로그로서 1:1-2의 화자의 말로 이해되는 것이 거의 지배적이다.7)

     그런데 1:3-11의 화자와 관련하여 자주 발생하는 오류가 있는데, 즉 이 단락은 화자를 알 수 있는 그 어떤 표시도 갖고 있지 않은데 주석가들은 이 ‘결여’를 곧 부정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일인칭 화자 표시가 없으니 일인칭 화자의 것이 아니며 당연히 앞선 3인칭 서술의 연속이라고 결론 맺는 것이 타당한가? 최근 Salyer는 ‘침묵의 수사학’이라 명명하면서 1:3-11에서의 화자가 일인칭 화자 코헬렛 자신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여지를 남겨두었다.8) 침묵은 부정일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소논문은 내용상으로도 1:3-11은 1:12이하의 일인칭 본문과 하나의 맥락을 이루는 중요한 단락이라는 전제 아래9), 화자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1:8a : 말하기 시작하다!


     명백하게 표제로 제시되는 1:1을 제외한 1:2-11까지의 맥락 설정에 이견이 분분하다.10) 2절 그리고 그와 거의 동일한 어구의 반복으로 전도서 본문을 괄호짓는 12:8은 일인칭 본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문법적 특징과 더불어 전도서 전체의 주제를 드러내는 표어라 한다. 문제는 3절의 직접화법 의문문이 과연 2절에서의 ‘코헬렛이 말했다’라는 주절에 여전히 종속되는 언설이냐는 것이다. 우리 말 성서의 구조로 본다면 코헬렛의 말의 직접 인용으로서 2절은 요약적 표어, 3절은 그에 따른 구체적 주제적 예시라는 해석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인다.

코헬렛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그러나 이렇게 헤벨 결론을 먼저 언급하고(2절) 그에 따른 구체적 예시를 제시하는 듯한(3절이하) 연역적 구조는 일인칭 서술에서의 코헬렛의 언설 형식과 다르고,11) 코헬렛은 이외에 한 번도 헤벨의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코헬렛이 말했다’라는 어구는 뒤에 오는 ‘말들’의 언설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표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코헬렛에 대해 말하는 제3의 소리의 존재를 함축하는 장치가 아니냐는12) 등의 의구심은 2절과 3절의 언설맥락을 쉽게 일치시키기에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문제점을 남긴다. 게다가 뒤바뀐 단어 순서를 가진 히브리어 본문은 이 본문의 성격을 단순히 내용과 구조의 문제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것을 암시해 준다. 

                   לבֶהָ לכֹּהַ םילֶבָחֲ לבֵהֲ תלֶחֶקֹ רמַאָ םילִבָתֲ לבֵהֲ 2

                       שׁמֶשּׁהַ תחַתַּ למֹעֲיַּשֶׁ ֹוֹלמָעֲ־לכָבְּ םדָאָלָ ןוֹרתְיִּ־המַ 3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구절이 코헬렛의 말에 대한 직접 인용으로 주어졌다면 왜 하필 ‘코헬렛이 말했다’라는 3인칭 구절이 그 한 가운데 자리잡고서 그 맥락을 끊고 있는가? 편집의 실수인가? 아니면 Perry가 주장하듯 언설형식의 변화를 추론케 하는 것인가?13) 외형상 2절은 분명 ‘코헬렛이 말했다’라는 언급을 통해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주장의 진정성을  담지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색하게 언설의 한복판에 들어있는 그 3인칭 언급은 곧 제3의 소리의 존재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보고된 언설(reported speech)은 형태상으로 직접화법이지만, 사실상 그것을 전해주고 들려주는 소리는 제3의 화자 즉 ‘코헬렛이 말했다’라고 전해주는 익명의 화자라는 것이다. 사실 비록 전도서 전체 본문을 통하여 이 제3의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14) 여하튼 보다 중요한 것은 Fox가 읽어낸 것 같이 분명 전도서 본문은 구조상 화자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15) 문제는 그 화자의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 어디냐는 것이다. “나 코헬렛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외형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1:12에서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화자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언설은 없는가?

     3-11절 단락에는 그 안에 화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다만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2절 이하와는 다르게 일인칭 용법이 전혀 없고, 내용상으로도 보다 보편적이라는 점을 들어 너무나도 쉽게 이 단락은 1-2절에서 드러나는 제3의 소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또한 3-11절 어디에도 단정적으로 1-2절의 소리와 일치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3인칭 서술과 1인칭 서술 사이에 있는 3-11절에서 잠재적이나마 화자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는 없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언설은 8a절םיעִגֵיְ םירִבָדְּהַ־לכָּ이다. 여기서 ‘םירבדה’은 말씀, 일, 혹은 사건 등을 뜻하는 명사 רבד의 복수형으로 이 절에서는 70인역에서는 말씀을 뜻하는 logos로, 불가타에서는 사물을 뜻하는 res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우리 말 번역과 RSV, KJV 등은 불가타의 전통과 동일하게 לכ과 함께 ‘모든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만물’, ‘all things' 혹은 ’everything'으로 번역하는데 Delitzsch를 비롯하여 최근에 Longman, Whybray, Salyer 등이 이를 따른다. 이들은 이 단어는 곧 4-7절에서 대표적으로 열거된 자연현상들을 지시하는 포괄단어로서 특히 그 대표적 예들을 통해 보여주는 자연의 법칙성에는 자연에 속한 것인 한 예외가 없는 ‘모든’ 것을 함의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와 관련 Whybray는 10절에 나오는 단수 רבד도 이렇게 번역하면서 8절의 םירבד의 한 특수한 예의 지칭이라고 주장한다.16)

     이러한 주장은 우선 다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데 즉 4-7절과 8a절을 하나의 맥락으로 보기에는 그 서술 내용과 분위기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4-7절은 그 어떤 감성이나 가치 판단도 함의하지 않은 채 몇몇 자연 현상들을 단순 병렬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8a절은 서술적 용법으로 사용된 형용사 םיעִגֵיְ이 감성상태의 변화를 내포하는 가치 판단의 근거로, 서술 자체에 부정적 의미를 함의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7)  עגי 는 전 10:15; 12:12과 함께 구약성서에서는 모두 48번 사용되었는데, 형용사형으로는 단지 3번 전1:8, 신25:18, 삼하17:2에서만 나온다. 이 단어는 노동을 통한 신체적 피로를 뜻하는 것으로 8a절에서는 그 의미상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데 그 하나는 weary 즉 ‘지쳐있는’의 뜻으로 묘사적(descriptive) 상태서술이라면,18) 또 다른 하나는 wearisome 즉 ‘지치게 하는’으로서 사역적(causative) 능동성을 내포한다.19) 하지만 지쳐있는 상태이건, 지치게 하는 행위이건 이 두 해석 어느 것도 사실상 4-7절이 열거한 자연 현상들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4-7절에 나오는 그 어느 자연의 존재도 그 끊임없는 순환적 현상 때문에 지쳤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또한 8b이하 서술이 그 초점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이시키고 인간 행위의 반복성 그리고 그로 인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해도 그것이 곧 ‘만물들’이 지치게 만든 것에서 비롯했다는 어떤 함의도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와 같은 번역의 보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רבד는 구약성서에서 한 번도 사물적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는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20)

     그와는 달리 Lauha, Seow 등은 םירבד을 ‘말씀들’로 번역한다. 우선 전도서 본문에서 이 복수형은 언제나 말씀들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씀’으로서의 번역이 좀 더 개연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21) 문제는 그 ‘말씀’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즉 그 지시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의 화자는 이 ‘말씀들’의 언급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라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말해진 것’으로서의 지시항과 함께 또한 ‘말하는 행위’(narration, utterance) 자체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어의 사변적 logos 개념과는 구별된다. ‘םירבדה’의 이와 같은 이중적 함의 즉 ‘말’인 동시에 ‘말하는 행위’를 내포한다는 것을 유의해 볼 때, 일차적으로 이것은 ‘땅, 태양, 바람, 강물’과 같은 앞에서 언급된 자연의 실체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4-7절까지의 언설(narrating) 자체 즉 ‘자연현상에 대한 말들’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해 말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즉 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없이 무한성 안에 함몰되어 있는 자연물 자체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그 무한한 자연 현상만큼이나 지속 되야 하는 반복적인 말/서술-행위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22)

     한편 םירבדה과 결합되어 있는 ‘לכ’ 그리고 정관사 ה의 사용은 그 언설의 주체와 범위가 명시적이진 않지만 한정적이라는 것을 내포한다할 수 있다. 즉 누가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것이 외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누군가 ‘특정인’에 의해 무엇인가 한정적인 언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의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이 뒤따르는 형용사에 의해 서술된다. 누군가에 의해 무엇인가 말해졌는데 그것은 곧 지치는, 혹은 지치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명사 ‘םירבדה־לכ’이 내포하는 화자와 이 문장 전체를 말하는 화자가 동일인인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마치 2절에서 언설행위자로서의 주인공(‘헛되고 헛되다’)과 외적 화자(코헬렛이 말했다)의 다층적 언설상황이 암시되듯이, 여기서도 ‘םירבדה־לכ’에 내포되어 있는 언설행위자와 그에 대해 말하는 외적 서술자의 이중성을 찾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헬렛이 말했다’에 내포된 화자의 소리가 여기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8a절은 어디에서도 2절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언설상황의 이중성을 함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이후 전개될 일인칭 서술의 씨/날 교차 조직 즉 과거의 행위, 인식에 대한 서술 및 재현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을 제공하는 현재적 말하기의 교합23)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지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곳’으로 돌아가고 나오는 자연현상에 대한 서술은 어디서도 ‘지쳐있거나, 지루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치는 것은 그 자연현상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열거하며 일일이 언표하는 인간이다!24) 말해도말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자연의 현상, 오히려 말하기를 통해 자연의 모든 실상을 파악하기 이전, 지치는 것은 한계성을 가진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8a절은 단순한 서술문이 아니라, 화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며 일갈하는 자기표현이다. 1:12에서 코헬렛이 일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무대 전면에 직접 등장한다면, 여기 4-11절까지의 소리는 마치 비어 있는 무대 뒤에 숨어 아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소리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같다. 즉 자기 표현으로서 8a절의 탄식은 3-7절까지 유보되어 있던 화자의 정체가 비로소 드러나는 지점인 것이다.


         ‘휴 말하기 힘들고 지치는구나!’


     12절이하에서 일인칭 화자가 문법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면, 여기서는 함의적으로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8b이하에서는 말하기, 즉 끝없는 자연을 열거하는 것으로는 어떤 의미, 보람(cf.3절)도 찾을 수 없다는 탄식적 어조가 계속된다. 말하는 것만 보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만족이란 없다는 것이다.


3. 1:3 코헬렛의 말

 

     이렇게 3-11절에서 코헬렛은 잠재적 일인칭 화자로서 말하기 시작한다. 직접화법의 질문을 담고 있는 3절은 화자 코헬렛의 나레이션이 자신의 소리로 직접 들리는 첫 지점이다. ‘계획적 질문’(programmatic question)25)으로서, 논리적 사고와 지식의 탐구를 요구하는 질문이 아닐뿐더러 청중으로 하여금 그 대답에 참여하게 하여 즉각적인 부정의 대답의 유도한다는 점에서 수사적26) 기능을 담지한다. 질문은 이제 직접 주어지는 소리로서 청중을 향한다. 코헬렛의 일인칭 서술을 통해 이 질문은 코헬렛 자신에게 제기되고 기억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청중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즉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코헬렛만이 아니라 청중 내지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שׁמֶשּׁהַ תחַתַּ למֹעֲיַּשֶׁ ֹוֹלמָעֲ־לכָבְּ םדָאָלָ ןוֹרתְיִּ־המַ 3

     3절의 질문은 화자 코헬렛이 직면할 문제의 영역을 그 질문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 안에 이미 함축한다. 첫 번째, 의문대명사와 함께 그 질문을 여는 첫 단어 ןורתי은 구약성서 중 전도서에만 등장하는 명사로 모두 10번 나온다.27) 이 단어는 원래 상업상의 이득을 뜻하는 경제 용어에서 유래하며,28) 전도서 본문에서도 몇몇 단락은 그와 같은 경제적 강조점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코헬렛은 이를 경제적 질서관계 안에서 서술하기 위해 차용한 것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용어가 갖는 부가적 가치로서의 상징의미에 관심한다. 즉 이 단어는 한 번도 절대적 의미에서의 이익을 표상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고, 3절에서도 보듯이 그 어떤 대상이 초래하는 유익 혹은 가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쓰인다. Fox는 전치사 ןמ을 통한 비교용법으로서의 ‘유리’(advantage)의 의미와 순수한 경제적 잉여 가치로서의 ‘이득’(profit)의 의미로 양분하여 해석하지만29) 전도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한 번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Ogden 같은 경우 극단적으로 그 어떤 이익(보람)도 해 아래는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30)

     두 번째로, ןורתי은 למע과 밀접한 관계에서 제시된다. למע은 구약성서에서는 모두 55번, 전도서에서만 22번 등장하는 단어로 그 의미의 지평이 넓다. 노동으로서의 기본 의미와 더불어 이것은 그 노동의 수고, 어려움까지도 내포한다.31) 또한 어원상 למע이 이미 그 노동을 통한 결과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ןורתי과의 연관성에 대해 묻는 3절의 질문은 이미 그 질문 안에서 그 관계의 일반화된 당위성에 대한 회의를 전제한다.  코헬렛은 이 질문을 통해 ‘수고’ 및 ‘보람’ 각각에 대한 그 어떤 관념적이거나 철학적 이해나 반성을 유도하지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의 관심은 행위-결과의 당위적 연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수고하면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 정말인가? 무엇이든 노력하면 그 결과는 주어지기 마련이라는 통속적 지혜에 대해 코헬렛은 그것이 과연 참인가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32) 그리고 그는 그의 나레이션을 통해 구체적인 방식으로 탐구해 나가는 여정을 선택한다. 

      3절에서 드러나는 3번째 중요한 용어인 ‘םדא’은33) 여기서 단순히 문법적 주체 혹은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코헬렛이 제기할 문제의 주제, 궁극적 관심의 주체가 곧 種으로서의 인간 일반에 해당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장치이다.34)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질문을 듣는 청중 누구도 이 질문에서 제외될 수 없다. 직접화법으로 주어진 질문 형식 속에서 현재적 말하기로서의 청중 내지 독자와의 직접적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동시에 이 질문은 이미 처음부터 이 일인칭 내러티브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준다. 이 질문은 이 내러티브의 화자 코헬렛의 문제인 동시에 청중, 독자가 결국에는 스스로 제기해야만 하는 문제다! 마치 이제 12절 이후 등장할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가 이 일인칭 서술 안에서는 코헬렛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입고 있다 해도 궁극적으로 청중과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각자의 ‘나’로 작동하게 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שׁמֶשּׁהַ תחַתַּ’  인데 이것은 구약성서 중 전도서에만 등장하는 관용구로, 모두 29번이나 나온다. 하지만 그 의미와 관련하여 구약성서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용구는 ‘하늘아래’35) 혹은 ‘이 땅위에’36)다. 그런데 Fox와 같이 이것을 제한적 의미를 넘어 포괄적 의미로서 ‘모든 세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거나37) 혹은 그저 ‘땅위에’라는 옛 표상과 동일한 표현으로 본다면38) 왜 코헬렛이 굳이 이 어귀를 사용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쉽지 않다. 전도서 저술 당시 편만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으로 그 당시 유행하는 그리스어 용법 ‘υφ' ηλιου’를 차용한 것이라든가39) 혹은 페니키아의 비문에서의 유비를 통해 그 어법의 셈어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 등은40) 비록 그 저술연대와 관한 한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해도 그 의미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또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관용구의 의미와 관련하여 Michel이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는데 곧 이 표현은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구별되고(Abgegrenzt) 그리고 어느 특정한 범위로 한정된다는(Ausgegrenzt) 이중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41) 먼저 ‘구별’의 언어로서 ‘해 아래’는 구약성서의 보다 관용적인 ‘하늘’, ‘땅’이 갖는 공간적 상징의미를 그 안에 이미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먼저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 위’, 그리고 미지의 영역인 지하세계 즉 ‘땅 아래’와는 구별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서 지상 세계, 인간의 세계 즉 인간이 실존하는 그 공간 내지 환경에 대한 표상이라는 것이다.42) 그런데 이러한 공간적 표상으로 볼 때  ‘해 아래’는 자연을 포함한 전세계를 포함해야 하는데 과연 코헬렛이 전세계, 혹은 삼라만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사용하였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는 사실 이 어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선 이 구절이 처음 등장하는 1:3의 질문에서 ‘인간’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또한 그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을뿐더러 이후 코헬렛의 이야기의 궁극적 관심과 연관시켜 볼 때 ‘해 아래’는 단순히 공간적 의미로서의 구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미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역, 지하영역으로부터의 구별로서, 이러한 구별점을 통하여 ‘해 아래’ 관용구는 이미 내재적으로 이제 전개될 코헬렛의 이야기가 초월적 하나님 내지 사후세계에 대한 그 어떤 상상도 배태하고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는 초월적인 신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내재하는 분으로 코헬렛의 탐구와 인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43)  그런가 하면 지하세계로 표상되는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은 어느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깊은 의문의 근거가 되지만 그것 또한 삶의 영역과의 연관성 내지 연속성과 관련되는 범위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이 관용구의 두 번째 차원 즉 ‘한정됨’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살아있음 곧 생명으로서의 의미다.

     ‘해’는 '빛‘을 상징하는44) 우주적 실체이며, 빛은 곧 생명의 영역이다.45)  이렇게 볼 때 ’해 아래‘는 한정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영역, 즉 삶의 시간적 우주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46)  즉 극복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죽음에 대한 당혹성을 안고 있지만 결국 그 탐구의 영역을 이승의 삶으로 한정시키고,47) 인간 경험의 영역,48) 그 경험이 발생하는 한정된 시간을 상징하는 표상이라는 것이다. 비록 1:3절의 질문이 보편적인 문제제기라 해도 이 한계적 의미에서 ’해 아래‘는 일인칭 서술 안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코헬렛에 의해 각 개인의 개별적 경험의 장으로서의 의미가 훨씬 더 강하게 부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는 ’해 아래‘ 인간이 살고 있다는 보편성을 넘어서 일인칭 서술에서 주인공인 코헬렛의 개인적 삶의 궤적의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4. 나가며

        

     텅 빈 무대에 한 소리가 들려온다. ‘생의 시간 안에서 수고하는 인간에게 무슨 보람이 있는가?’ 이 질문의 화자가 누구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화자의 정체와는 상관없이 질문은 이제 전개될 이야기의 주제 영역을 확실히 밝혀준다: 인간, 삶,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수고. 그런데 서술의 시선은 바로 인간에게 향하지 않고 주변세계를 맴돈다(4-7절). 시간49)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땅은 변함이 없다. 자연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래서 무엇인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해, 바람, 물의 움직임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일 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현상들은 질문이 던져주는 인간의 수고와 보람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들뿐이다. 그러니 화자는 즉각 돌이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질문의 영역인 인간의 삶을 직접 향하지 않고 잠시 시선을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 자연 세계로 돌려 수고와 보람의 비유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비록 명시적으로 ‘헛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해도50) 끝이 나지 않는 한 그것은 틀림없이 보람 없이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4-7절의 열거는 이런 점에서 숨어 있는 화자가 결국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말하기에 지친 화자는 다시 질문의 영역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말하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그 어느 것도 질문이 내포한 최종적 보람을 주는 것은 없다.(8b절) 말하고 보고 듣는 것은 단순한 감각의 표현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수고의 행위들을 은유한다. 9절은 4-8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며 다시 3절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שׁמֶשּׁהַ תחַתַּ שׁדָחָ־לכָּ ןיאֵוְ השֶׂעָיֵּשֶׁ אוּה השָׂעֲנַּשֶּׁ־המַוּ היֶהְיִּשֶׁ אוּה היָהָשֶּׁהמַ 9

     9절에서의 היה 동사와 השׁע 동사는 문제 영역이 인간의 존재와 경험 모두를 포함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3절에서 보람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라는 언설로 단정된다. 이렇게 자연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기대하는 구약의 신앙51)은 같은 성서 안에서 무효화된다. 순환과 반복의 고리에 갇힌 것은 자연뿐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경험 모두 마찬가지다. 9-11에서는 또 하나의 언어유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9절  : 없다 - 해 아래 새 것

        10절 : 있다 - ‘이것이 새 것이다’라고 말하는 רבד

                       이것도52) 이미 우리 앞에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 

        11절 : 없다 - 기억 (앞선 것, 뒤따르는 것, 뒤따를 것에 대한)

9절과 10절 사이에서 논쟁이 주어졌다면, 11절의 선언은 아무런 응답이 없는 채 12절 이하 일인칭 서술로 넘어간다. 새로운 문제가 주어졌는데, 만일 이 문제가 만일 서술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도서 전체의 문제제기 단락으로서 1:3-11은 이미 허무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11절의 단락은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전면에 등장하는 코헬렛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

     1:3-11은 이와 같이 화자가 있고, 인물, 사건(narrating)을 드러내면서 1:12이하의 문법적 일인칭 서술과 연결성을 갖는다. 잠재적 화자 코헬렛은 여기서 탐구할 주제를 부여하고는 직접 보람과 만족을 위한 수고로운 탐구의 여정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53) 그리고 청중 내지 독자 또한 수고와 보람의 연관성, 기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코헬렛의 여정에 동참할 준비를 한다. 이제 그 여정을 통해 그 문제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해결될 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 별첨  1:3-6:12의 서술 구조

1:3-6:12 : 코헬렛의 경험 서술

 

ⅰ. 1:3-2:26  : 코헬렛의 경험에서 오는 hebel A  - < a b c >

         a. 1:3-11 : 문제제기

         b. 1:12-2:2 : 코헬렛의 탐구의 3가지 범주

                12 : 정체의 확인 : 왕     

             α. 13-15 : 하늘아래 되어지는 모든 것               ‘헛되고 바람을 좆는 것’

               β. 16-18 : 지혜                                 - ‘바람을 좆는 것’

                 γ. 2:1-2 : 기쁨                                - ‘헛되다’   

            2:3-2:23 : 구체적 예시들

                 γ. 3-11                                       - ‘헛되고 바람을 좆는 것’

               β. 12-15                                        - ‘헛되다’

             α. 16-17 / β. 18-19 / γ. 20 / 21-23 (구체적 이야기)

         c. 2:24-26 : carpe diem(하나님과의 관계표현 첫번째)  -‘헛되고 바람을 좆는 것’

   

  ⅱ. 3:1-4:16 : 코헬렛의 경험에서 오는 hebel B -    < a c b >

         a`. 3:1-9 : 문제제기

         c'. 3:10-15 : carpe diem (하나님과의 관계표현 두 번째)

         b'. 3:16-4:16 : hebel 상황들

             α. 16-17 : ‘해아래’ 불의의 문제

             β. 18-21 : 앎의 문제 

             γ. 22  : 기쁨의 문제

             α. 4:1-2 : ‘해아래’ : 억압의 상황

             γ. 4-6  : ‘모든 수고’, 행위의 성공                - ‘헛되고 바람을 좆는 것’

             α+γ. 7-8 :  ‘해아래’ + ‘수고함’                  - ‘헛되다, 나쁜 수고’

                  9-12 : ‘혼자 있음’의 폐단

            4:13-16 : ‘왕’됨의 헛됨                           - ‘헛되고 바람을 좆는 것’

 

  ⅲ. 4:17-6:12 : 문제의 전환 -                      < c b c b a >

         c''. 4:17-5:6 : 제의의 맥락 (하나님과의 관계표현 세 번째)

         b''. 5:7-16 : hebel 상황들

         c''. 5:17-19 : carpe diem (하나님과의 관계표현 네 번째)

         b''. 6:1-9   : hebel 진술

         a''.  6:10-12 : 질문의 전환          



 





1) 이는 지혜문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Galling은 통일적 주제가 없이 다양한 27개의 금언(Sentenz)을 수집한 모음집이라고 본다. K. Galling, Der Prediger, HAT, 1; Tübingen, 1969[1940] 그런가 하면 Zimmerli는 다양한 교훈말씀들이 들어있기는 하나 주제에 있어 유기적 연관성을 가진 논문이라고 주장한다.  W. Zimmerli, 'Das Buch Kohelet: Traktat oder Sentenzensamlung?' VT 24(1974), pp. 221-30


2) O. Loretz, Qohelet und der alte Orient: Untersuchungen zu Stil und theologischer            Thematik des Buches Qohelet, Freiburg: Herder, 1964, 145-166쪽 cf) Mowinckel은 에스라서의 일인칭과 3인칭 형식의 구조에 대한 논문에서 그 두 인칭어법의 혼용을 ‘의도적으로 사용된 양식’이라 하면서 일인칭이야말로 이야기된 내용을 현재화하여 경험하게 하고 또한 드라마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실제로 경험하는 이것으로 느끼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S. Mowinckel, 'Ich und Er in der Ezrageschichte‘, in: Verbannung und Heimhehr - W/ Rudolph-Festschrift, Tübingen, 1961, 223쪽. 전도서와 관련하여 이후 Perdue와 Longman이 양식과 내용에 있어서 각각 고대 에집트의 무덤전기와 아카디아의 허구적 자서전에서 드러나는 허구적 왕의 유언 내지 위대한 왕의 허구 자서전으로 저술되어 전해지는 지혜문학과의 비교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은 일인칭 서술 양식을 말씀의 주제와 목적을 잘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Perdue, L., '"I will make a test of pleasure": The Tyranny of God and Qoheleth's Quest for the Good' in L. Perdue, Wisdom and Crea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pp. 193-242,  Longman Ⅲ, T., The Book of Ecclesiastes, NICOT; Grand Rapids: Eerdmanns, 1998


3) Zimmermann은 특히 인물의 정신적 여정에 주목하여 코헬렛을 우울증을 가진 이야기꾼으로, Whybray는 그와는 반대로 코헬렛을 기쁨에 가득찬 설교자요, 그 당시 편만한 헬라철학에 대하여 유대신앙을 변호하는 위대한 신학자로 그런가 하면 Michel은 탐구의 열정을 가진 철학자로 규정하였다. Zimmermann, F., The Inner World of Qoheleth (New York: Ktav, 1973),  Whybray, R. N., 'Qoheleth, Preacher of Joy', JSOT 23(1982), pp. 87-98, 'Qoheleth as a Theologian', in Schoors(ed.) Qoheleth in the Context of Wisdom, pp. 239-266, D. Michel, Qohelet, EF, 268;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8, pp. 103-107.


4) 성서에 들어 있는 내러티브의 의사소통적 역할을 중시하는 이는 Sternberg다.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 안에서 ‘무엇’ ‘어떻게’ 그리고 ‘왜’의 문제들이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M. Sternberg,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Ideological Literature and the Drama of Reading,  ISBL; Br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1쪽,


5) Fox와 Christianson이 그 대표적 예다. 또한 내러티브로서는 아니라 해도 전도서 안에서 상반된 의미의 병존 그리고 그 병치를 통한 의미창출에 대한 연구에는 Perry, Loader, 그리고 Salyer가 속한다. Fox, M., 'Frame-Narrative and Composition in the Book of Qohelet', HUCA         48(1977), pp.83-106,  Christianson, E.S., A Time to Tell: Narrative Strategies in Ecclesiastes, JSOTSup. 280: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6) 화자는 내러티브 문학에서의 필수 요소로, 저자와는 구별되는 허구적 구성물이다. 이는 곧 화자를 내러티브내적 캐릭터와 비슷한 범주에 두는 것으로, 다만 다른 캐릭터들이 행위자라면 화자는 이야기를 말하는 캐릭터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인칭 화자일 경우, 조금 더 복잡하다. 그 역할 유형에 따라 다만 말하는 자일 뿐 서술 내용에 합류되지 못하고 다만 진실성을 담지하여 독자들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서술적 기호인 경우도 있는데 전도서의 유형은 이와는 다르다. 전도서의 화자는 서술의 초점인 동시에 스스로 서술의 대상이 된다. 주인공 코헬렛은 보고의 역할을 하는 화자인 동시에 보고되는 말씀사건들 속에서 행위자로서의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자서전과의 유사성을 보기도 한다. Mieke Bal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코헬렛은 ‘Character-bound narrator' 이다, M. Bal, 「서사란 무엇인가?」, 한용환 강덕화 공역, 문예출판사, 1999 cf. 서술이론에서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는 D.M.Gunn and D.N.Fewell, Narrative in the Hebrew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52-63, 한용환, 「소설학사전」, 문예출판사, 2004, 286쪽을 보라.


7) 사실 주석들을 살펴보면 이 단락은 편집층으로서 거의 예외 없이 일인칭 본문의 의미와 주제를 미리 요약하여 제시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 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Lohfink :  1절 표제, 2-3절 서막, 4-11 우주론적 시 : 3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Perry :    1-3절 전도서의 모토와 주제, 4-11 자연에 대한 프롤로그

   Crenshaw :1절 표제, 2-3절 모토와 주제 : 4-11 전도서 전체에 대한 서론

   Whybray : 1절 표제, 2-3절 주제 4-11 자연의 끝없는 반복

   Seow :    1절 표제. 2절 주제진술. 3-8절 서론적 시, 9-11 산문주석


8) Salyer는 여기서 코헬렛의 말로 보이지만, 3인칭의 옷을 입어 객관성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에 있어서는 그가 말하는 ‘모호성’의 주제 만큼이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사실이다. G. Salyer, Vain Rhetoric: Private Insight and Public Debate in Ecclesiastes, JSOTSup. 237, Sheffield Academic Press, 2001, 263-8쪽


9) 필자는 1:3-6:12까지의 본문은 전도서의 의미 해석에서 중요한 언설의 순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순환의 구조는 별첨으로 덧붙였다.


10)   2-11절을 한 단락으로 보는 경우 : Brown, Loader, Longman, Wright 

     3-11절을 한 단락으로 보는 경우 : Lanha, Murphy, Schoors,

     4-11을 한 단락으로 보는 경우 :   Crenshaw, Galling. Lohfink, 


11) 일인칭 서술에서 ‘헛되고 바람을 좇는 것’이라는 선언은 항상 결론으로 제시되었지, 단락을 이끌어내는 주제로 쓰인 적이 없다.


12)  마치 ‘헛되다.....’의 언설의 진정성을 확증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13) Perry는 후반절을 의문문으로 번역하였다. 즉 ‘코헬렛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인가?’ 그런데 왜 논의가 마무리된 12:8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쓰인 것일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물을 것이 남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T.A Perry, Dialogues with Koheleth: The Book of Ecclesiastes, Translation and  Commentary, University Park: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tity Press, 1993, pp.53-55


14) 일인칭 본문 중에도 이와 같은 형태로 또 한 번 드러난다. 7:23


15) Fox는 처음으로 화자의 변화에 주목하며 전도서의 내러티브 차원을 둘로 구별하였는데, 첫 번째 차원은 틀이야기(Frame-Narrative) 안에서 프레임화자가 코헬렛에 대해 말하는 자의 차원이고, 두 번째는 일인칭 서술 부분으로 여기서 ‘나 코헬렛’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1:12이하에서 소개된 헛된 노력의 주인공으로서 ‘경험하는 나’ 즉 ‘구도자 코헬렛’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해 돌아보며 회고하여 말하는 ‘나레이션의 나’ 즉 ‘보고자 코헬렛’이다. Fox, 앞글,


16) R.N. Whybray, Ecclesiastes, Sheffield, JSOT, 1989,  8쪽


17) 감성적 변화, 내적 판단 등은 일인칭 서술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성을 갖는다. 여느 내러티브와는 달리 등장인물은 오직 코헬렛뿐인 일인극 내지 독백의 형태 안에서 코헬렛은 보고 느끼고, 알아내는 내적 행위에 집중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언제나 가치판단과 병행한다. 이러한 일인칭 서술의 특성이 바로 여기서도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8) weary로 해석하는 경우 : Perry, Fox이며 , Seow의 경우는 분사적 의미로 해석한다(wearying). 


19) wearisome으로 해석하는 경우 : Murphy,  Longman,  Loader  등


20) Fox, A Time to tear down and A Time to build up: A Rereading of Ecclesiastes,, Wiliam B. Eerdmanns Publishing Company, 1999, p. 167


21) cf. 1:1, 5:1.2.6, 6:11, 7:21, 9:16, 10:12.13.14


22) Fox는 이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말행위로 이해한다. 그 서술어와 연관하여 ‘너무 약하여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이 지친 말’이라고 해석한다. Fox, 앞책, p. 167


23) Christianson은 특히 1:12-2:26의 형식적 특징을 과거에 대한 스토리텔링 부분과 시제가 불분명한 반성적 결론 부분이 반복하면서 진행된다고 하는데, 비록 이러한 형식에서 지배적인 것은 스토리텔링이라해도, 결론 부분이 독자로 하여금 나레이션/읽기의 현재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즉 과거 사건의 재현과 말하고 읽는 현재적 순간이 함께 교차하며 반복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이에 더하여 대개는 헛됨의 선언과 반성적 결론을 제시하는 부분들은 시제동사가 없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는 과거의 사건이 발생한 시간안에서의 판단 행위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점과 또한 그와 같은 선언은 말하고 듣는 순간의 판단적 나레이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떼어낼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텍스트의 씨/날 교차조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cf. Christianson, 앞책, pp. 206-207  


24) 이에대해 Lauha는 창2:19f에 나오는 아담의 행위와 연결시켜 이해한다. 피조물을 명명하는 말 행위는 결국 목적에 다다르지 못하고 지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함의한다는 것. 그런가 하면 잠언에 나오는 말씀(잠15:23, 24:26, 25:11)과도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Lauha, 앞책, p.35


25) 이 용어는 처음으로 Ogden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작품의 주제가 아니라, 논쟁을 이끌어내는 일차적 주제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Ogden, G., Qoheleth (Readings: A New Biblical Commentary; Sheffield: JSOT Press, 1987, p. 28


26) Salyer 247쪽 볼 것,  최창모는 이렇게 단호한 언술로 시작하는 수사적 질문은 논쟁의 무게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주의력을 끌고 감으로서 설득력 있는 안출에 주도권을 잡는다. - 논쟁의 전제(화두)를 결정하므로써, 다른 방향으로 논쟁이 나아가지 못하게 함. cf. 3:9, 5:10, 6:12 최창모, '전도서의 수사적 질문과 헤벨의 상징적 기능에 관한 연구', 신학사상104, 1999, 112-145쪽


27) 명사형 10번 : 1:3, 2:11.13(2번), 3:9, 5:8.15, 7:12, 10:10.11,

    yoter  7번 : 2:15, 6:8.11, 7:11.16, 12:9.12 (cf. 에6:6, 삼상15:15

                (이익 + ל 6:11, 7:11; +ןמ 6:8; 형용사 2:15, 7:16; 관계사 12:9)

    motar 1번 : 3:19


28) Dahood는 전도서에 들어있는 일련의 상업적 용어의 하나로서 그 성격을 중시하여 해석하려 했다., 'Canaanite-Phoenician Influence in Qoheleth', Bib33(1952), pp. 30-52, 191-221


29) Fox, 앞책, pp.112-113


30) Ogden, 앞책, pp. 28-29


31) S. Schwertner, 'למע', in. Jenni/Westermann(ed), Theologisches Hand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Bd Ⅱ,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4, pp. 332-335


32) Gese는 이를 이스라엘 지혜의 위기라고 명명했다. H. Gese, The Crisis of Wisdom in Koheleth', in J. Crenshaw(ed.), Theodicy in the Old Testament, tras. L. Grabb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1963], pp. 141-53


33) 전도서에서 49번 나온다.


34) Whybray, 앞책, p.88


35) 이것은 전도서에서도 3번(1:13, 2:3, 3:1) 사용되었다. 다른 구약 본문에서는 9번 등장(창6:17, 7:19, 출17:14, 신2:25, 4:19, 9;14, 25:19, 29:19, 왕하14:27,) Whybray는 이 용어는 지혜 text에서 인용한 본문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둘 사이의 의미상 차이는 없다. Whybray, 앞책, p.38 Seow는 이 둘 사이의 뉴앙스 차이를 말하는데, ‘하늘아래’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 즉 공간적 의미에서의 우주, 코스모스를 뜻하는 것이라면, ‘해 아래’는 삶의 시간적 우주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Seow, 앞책,


36) 전도서에도 5번 나온다 5:1; 7:20; 8:14.16; 11:2


37)  Fox, 앞책, p.165  


38) Lauha, 앞책, p.33


39) N.Lohfink, Kohelet, DNEB; Würzburg: Echter Verlag, 1980, p. 20 Braun


40) Loretz, 앞책, pp.46-47 


41) Michel, 앞책, p. 99


42) Schwienhorst-Schönberger는 특히 1:3에서 이 표상은 우주적 인간론적 문제지평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Ludger Schwienhorst-Schönberger, ‘Nicht im Menschen gründet das Glück(Koh2:24)’ Kohelet im Spannungsfeld jüdischer Weisheit und hellenistischer Philosophie(HBS,2), Freiburg, 1994, p.20 , Michel, 앞책, pp.99-100에서 재인용


43) Michel, 앞책


44) 구약성서에서는 종종 ‘해’가 갖는 범신론적 이미지 때문에 해를 표상할 때 ‘빛’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로 대신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1: 등. Seow, 앞책, pp.105-6,


45) cf. 시49:19, 56:13, 욥3:16.20, 33:28  특히 죽음 가까이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 치유에 대한 비유들에서 쓰인다. ThWAT, M.Soebo ‘רוא’ 84-90, 특히 p.87, cf. J. Hempel, Die Lichtsymbolik im AT, Studium Generale 13, 1960, 352-368,


46) 8:9에서는 ‘해 아래’의 의미가 시간적 의미로 정의되었다 : ‘..... 하는 시간에’  Seow, 앞책, p.104쪽, cf) 9:6에서는 지하세계와 대립되는 의미로서 ‘이 세상’을 뜻한다. 


47) Fox, 앞책, p.165


48) Michel, 앞책


49) רוד를 Longman 등은 인간의 generation으로 번역하지만, 4b의 ץרא와 대조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자연적 시간의 순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5-7절의 해, 바람, 물과 연관된 서술에서도 중요한 것은 움직임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옴의 단어들이다. 끊임없이 움직이지만(시간의 흐름이 필연적) 결국 제자리로 돌아옴(공간의 불변성)이라는 자연의 순환과 반복에 대한 시/공적 표상을 먼저 4절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50) 1:3-11에서 또 하나 염두에 둘 것은 코헬렛이 그렇게 많이 반복하는 ‘헛되다’ 선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1) 사43:18-19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Lauha는 이와 같은 그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에 대해 전도서를 복음의 필요성을 부정적으로 드러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Lauha, 앞책, 37쪽


52) 이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앞의 ‘말’속에 들어있는 새것이라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말 자체인지 분명치 않다.


53) 이런 의미에서 Salyer가 말하는 이 단락의 역할, 생경하고 당황케하는 코헬렛의 세계로 나아가기 전, 미리 독자로 하여금 낯설음을 경험하고(defamilialize) 충격을 완화하여 자연스러운 전이를 돕고자 하는 기능을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Salyer, 앞책, 90쪽


 

 

 


 

 

(논찬)  

한국구약학회 박사과정 콜로키움

논찬자: 양지웅 (대전침례신학대학교 구약학 Ph.D., 2학기)


코헬렛이 말을 걸기 시작하다!

- 전 1:3-11의 화자 문제 -

김기동 (이화여대 박사과정)


1. 내용 요약


    저자는 전도서를 일인칭 서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역사비평 연구 결과로 제시되었던 인칭의 불일치 문제와 기존의 일인칭 서술형식에 대한 기존 학계의 해석들에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역사비평은 1인칭과 3인칭의 (그리 크지는 않은) 혼동을 지적하고 있으며(1:1,2; 12:8),1) 문학비평도 그 문학적 기법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1인칭의 표현을 (1) 교훈 제시를 위한 고대의 문학적 표현 양식이라는 해석(Loretz, Mowinckel, Perdue, Longman III)과, (2) 화자의 개인(인격)적 존재보다는 독특한 사상적 특징에 집중하는 해석(Zimmermann[우울증의 이야기꾼], Whybray[기쁨의 설교자], Michel[탐구하는 철학자]), 그리고 (3) 인칭의 변화는 문학적 긴장관계를 표출해내는 내러티브 읽기 전략이라는 해석(Fox, Christianson)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서 저자는 특별히 1:3-11을 다루면서, (일인칭인) 화자가 의도적으로 침묵되고 있으며, 그 침묵이 오히려 반대로 일인칭의 화자를 드러내주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크게 두 본문에 집중한다. 바로 (1) 1:8a(“말하기 시작하다!”)과 (2) 1:3(코헬렛의 말)이다. (1) 우선 저자는 한글성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1:2과 1:3의 연결(일종의 문맥상 오역?)을 끊어놓는다. 1:2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그렇게 읽는 것이 전도서의 표현형식에 있어서 보다 합당한 읽기이기 때문이다(12:8과 짝을 이루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3-11절은 앞의 구절과 구별되었다. 이제 1:2의 “코헬렛이 말하다”(תלחק רמא)라는 3인칭 언급이 1:12의 명백한 일인칭(ינא) 이전에 즉, 1:3-11에서 과연 화자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저자는 8a절(םיעגי םירבדּה־לכ)에서 그 변화를 찾는다. 즉, 이 구절이 4-7절의 만물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개역개정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 오히려 숨은 특정(정관사 ה) 화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종의 “일갈”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① עגי는 앞선 절들을 받는 것으로 어울리지 않고, ② רבד는 사물을 대상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③ םירבד을 “말씀들”로 이해해서 앞선 4-7절의 무한한 자연현상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불가능하다는 점을 호소하는 맥락으로 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a절에서 (12절의 일인칭화자를 예견하는?) “함의적인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이제 저자는 (2) 1:3을 단어해석을 통해서 분석하는데, 일종의 실존주의적인 자기 각성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즉, ① ןורתי은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의 차원(보람?)을 가리키고, ② למע은 실제적인 노동이 아니라 이득(ןורתי)을 담보하고 있는 수고의 상징이며, ③ םדא은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청중(바로 나)이고, ④ שׁמשׁה תחתּ는 당시에 독특하게 사용된 공간을 가리키는 관용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한정적 삶을 가리키는 시간적 우주를 뜻한다. 그러므로 1:3은 저자의 해석에 의해서 특수한 ‘상황’의 옷을 벗고 보편적인 ‘의미’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논리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1:3의 질문이 보편적인 세계일뿐만 아니라, “일인칭 서술에서 주인공인 코헬렛의 개인적 삶”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글을 정리하며 저자는 (3) 9절을 언급한다. 즉, 앞선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9절은 “해아래 새 것은 없다”라는 단언으로 “구약의 신앙”을 무효화한다. 하지만 9절(없다)과 10절(있다)의 논쟁으로 전도서 전체의 문을 열게 된 이후, 11절은 이후에 전면에 등장하는 코헬렛을 예고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1:3-11에서 ‘잠재적 화자’를 발굴해내서 1:12이하의 본문과 연결을 맺어주었다. 1:3-11에서, 저자는 말을 걸기 ‘시작하고’ 있는 코헬렛을 소개하고 있다.


    

2. 평가와 질문


 1) 저자는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새로운 접근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즉, 1:3-11이 이하의 일인칭 본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거기에 한글성서가 가지고 있는 의미상의 오류(오역?)도 지적하고 있는 공헌이 있다. 특별히 8a절을 집중하면서 ‘함의된 화자’를 이끌어내는 점은 탁월하다고 하겠다(“휴 말하기 힘들고 지치는구나!”).


 2) 그러나 연구목적과 연구방법을 명쾌하게 발견할 수 없던 점이 아쉽다(저자는 무엇을 의도했던 것인지 묻고 싶다). 저자는 연구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를 문학비평으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제목이 ‘화자’를 다루고 있는바, 그리고 각주 6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미 내러티브 안에서 기능하는 존재로서의 ‘화자’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비평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은 출발이 잘못된 것 같다(역사비평 접근에서는 ‘자료’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는 자신의 중요한 논점을 이미 전제로 삼고 있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첫 문장을 “전도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일인칭 서술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정말 그러한가? 오히려 carpe diem을 극복하려는 극소수의 본문에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려는 신학자들의 고충이 전도서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이는 저자가 연구를 통해서 규명해야할 부분이지 계속적으로 기술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보충적인 차원에서, 최근에 출간된 퍼듀(Leo G. Perdue)의 지혜서 연구(The Sword and the Stylus: An Introduction to Wisdom in the Age of Empires [Eerdmans, 2008], 219-39)는 그동안 ‘무시간적 지혜’에 대한 학문적 나태를 새롭게 각성시켜주는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3) 저자의 핵심논의는 8a절에 있는 것 같다. 저자는 םיעגי םירבדה־לכ을 ‘말하기 피곤할 정도이다’로 해석하면서 ‘함의된 화자’를 발굴해 냈다. 그런데, 7절과 8절의 평행관계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םיכלה םילחנה־לכ과 םיעגי םירבדה־לכ, 그리고 אלמ ונניא와 אלמת־אל). 그러므로 8절을 4-7절에 대한 반응으로 볼 것이 아니라, 4-8절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며 맥락에 있어서도 더욱 낫다고 생각한다.2) 이는 저자가 새로운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휴 ‘논증이란!’ 말하기 힘들고 지치는구나!”).


 4) 1:3을 해석한 것이 저자의 논지에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주석의 방향이 1:12의 연결점을 찾는 일에 기능하지 않고, 단지 보편적인 (혹은 실존적인) 존재의 의미만을 묻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의 단어(와 개념)들이 이후의 본문(1:12이하)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후의 본문에 대해서 중요한 선점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5) 전반적으로 평가해볼 때, 훌륭한 글을 읽어서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으며 차후에 전도서 연구에 탁월한 기여를 하게 될 발표자를 생각해볼 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허벌나게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con 1:18).


1) 이와 함께, 2:5의 페르시아어(파라다이스)에서 유래한 סדרפ(개역: ‘과원’), 12:9-14의 후기(epilogue)를 이해하는 문제(12-14절을 이차적인 후기로 볼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서의 충돌하는 목소리의 문제(3:17↔11:9; 전도자는 세상의 성공을 위해 바람을 좇는 삶의 헛됨에 대한 반성적 차원[정통지혜에 대한 반발; 7:15; 8:14; 9:11]에서 인생의 소박한 유희[carpe diem]를 주장했지만[11:9a], 이후의 편집자가 (또 다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12:13!)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교정한 것인가[11:9b]) 등이 있을 수 있겠다.

 

2) Thomas Krüger, Qoheleth: A Commentar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