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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Dever, William G.
정가 : USD 20 (한화정가 : 28,820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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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일자 : 2008-07-29 | 페이지수 : 360 | 무게 : 1kg
도서크기 : 0 X 0 X 0 | 책장정코드 : PB
출판사명 : Eerdmans Publishing Co, WM. B.
ISBN : 0802863949
제 7 장
아세라, 여성제의, 그리고 “공식적인 야웨신앙”
전통적인 성서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인들 일부에게 알려졌고 또한 그들의 숭배를 받았던 여신 아세라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주저해왔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히브리 성서에서 아세라라는 단어가 40번이나 넘게 나오는데, 이것은 (종종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단지 어떤 종류의 “상징”을 뜻하는 나무로 된 기둥이나 나무 모양의 물건 정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여기에서의 가정은 모세 시대에는, 즉 가나안 정복과 거주 이전에는, “순수한”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신적으로 계시된) 야웨신앙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개혁들은 여행에 지친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기원이 되는 신앙을 기억하게하려는 시도로, 단지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전진하는 형성기에 나온 실체였다.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면서, 현대의 주석가들은 신명기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왔고 그러므로 가나안의 행습들을 침입해 들어온 것으로 취급했으며, 그것들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정죄했다. 민간 종교는, 만약 그것이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다고 한다면, “혼합주의-정통과 이단적인 신앙과 행습들을 뒤섞인-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물론 잘못된 것으로 보였다.
가나안에서의 (여신) 아세라
그러한 고지식함은 기원전 1400-1300년경으로 연대 설정된 시리아 해안의 우가릿에서 출토된 수백 개의 가나안 신화 본문의 발견으로 인해서 산산이 부숴져야만 한다. 여기에서 여신 아세라는, 거의 수 세기 동안이나 잊혀졌는데, 다시 나타났고 이스라엘 이전 시대의 가나안 만신전에서 주요한 여성 신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우가릿에서 최고 남성신 엘, 즉 “생명의 아버지”의 배우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문은 이것이 다스리는 신의 오랜 짝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이 둘이 더 이상 열정적인 연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엘이 다소 성불구인 듯하다.
한 시에서, 엘은 “두 대양의 윗물”의 보좌에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세라를 보게 된다.
엘이 그녀를 알아채자마자,
그는 입을 벌려 웃었다.
그의 발은 그가 딛은 발판 위에 있었고
그의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다음으로 엘은 자신의 누각으로 아세라를 영접했고 그녀에게 음식물을 대접했다. 그는 선포했다:
보라, 엘 곧 왕의 사랑이 당신을 움직인다.
황소의 애정이 당신을 자극한다.
그러나 “황소” 엘은 약간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노인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빙빙 돌려대면서, 그가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것인 양 성적인 무용담에 관해서 자랑하고 있다. 다른 시에서, 그는 실제로 성교 불능자로 나오는데, 본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막대기(yad, 여기에서는 “손”이 아니라 “성기”)가 “수그러져” 있다. 보다 젊은 여성 신들이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들여보내졌고, 모든 것이 잘 끝났다. (혹자는 다윗의 노년에 그를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침대로 들여보내진 “젊은 처녀”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가 성교 불능자라고 할지다로 말이다; 왕상 1:1-4)
아세라의 이름은, 대부분의 북서 셈족 이름에서와 같이, 동사가 결합된 “문장 이름”이다. 그러므로 아티라투-얌미Athiratu-yammi는 “바다를 걷는/정복하는 여인”이라는 뜻이 되는데, 여기에서 바다는 고대로부터 깊고 신비로우며 무시무시한 힘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녀의 일반적인 직함은 “귀부인 아세라”와 “신들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일종의 덕망 있는 어머니로, 종종 그녀의 남편인 엘과 함께 젊은 신들의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다-특별히 바알과 그의 배우자 아낫이다(이들은 지독한 연인이면서 늙은 연인들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잘 알려진 시에서는, 아세라가 아내로서 엘에게 간청하고 있는데, “폭풍 신” 바알에게 그의 소유로 된 성을 주도록 부탁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바알의 연인인 아낫은 엘에게로 나아가서 만약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의 백발이 된 수염에 피가 흘러내리도록 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가나안의 아낫은, 용맹한 용사이자 고급 창부로, 이스라엘 시대에는 거의 잊혀졌었다. 그러나 귀부인 아세라는, 수유하는 어머니 여신은, 기억되었고 숭배되었으니, 최소한 일부 집단에서 말이다.
히브리 성서에서의 아세라
사실, 성서학자들은 언제나 아세라의 존재를 인식해왔었다. 아세라라는 단어를 (위에서와 같이) 적합한 이름으로 읽어야만 하는 히브리 성서의 몇 구절들이 있다-그리고 만약 그게 유명한 옛 가나안 신인 아세라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겠는가?
신중하게 선택한 한 구절은 열왕기상 16장 32,33절로, 이 구절은 어떻게 아합이 페니키아 공주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그는 가나안-페니키아의 주요한 신인 바알을 위한 성전을 건설하고, 그곳에 바알을 위한 제단을 건설하고 “아세라를 만들었다”(RSV는 후자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북왕국에 의한 이러한 행동들은 열왕기서를 기록한 유다의 저자들을 격분하게 했는데,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당연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들의 보고를 심각하게 여겨야만 하는 그들의 꺼려함 때문이다. 심지어는, 내가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여기에서 나온 아세라는 단지 어떠한 종류의 “제의 형상”이었는데,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도에서 가나안 양식의 성전 안에 서 있었고, 그것은 (여신) 아세라라는 이름의 여신으로 강력한 제의적 존재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세라는 그녀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서, 야웨가 아니라 바알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나온다; 자세한 것은 제8장을 보라.)
열왕기상 18장 20-40절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의 계속되는 이교적인 이야기는 (만약 신화적이라고 해도) 갈멜산에서의 논쟁에 대한 기사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엘리야와 야웨의 예언자들은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400명의 아세라 예언자들”에 맞서게 되는데, 어느 편이 물이 가득한 제단 위로 기적적으로 불을 내릴 수 있는가를 가리는 것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지만, 야웨의 예언자들이 이겼고 그의 정당함은 입증되었다. 바알과 아세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본문은 어떻게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숙청했는지를 기술한다. 그러나 몇 몇의 학자들은 “400명의 아세라 예언자들”에 관한 본문이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본문이 아세라와 어떤 연관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후에 부드럽게 표현된 것일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아세라 예언자들이 처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한다면, 성서 기록자들은 그 사실에 의기양양했었을 것이며 흔쾌히 그것을 자신들의 이야기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세라와 그 예언자들은 아마도 살려두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그녀를 위한 제의가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떤 순결주의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심지어 북왕국의 “공식 종교”라고 한다면 말이다!
아세라, 야웨, 그리고 “혼합주의”
아세라 제의의 많은 증거들이 나왔는데, 놀랍지도 않게도, 바로 성서기록자의 인정을 받았던 단 두 왕의 통치 기간의 유다였다. 그 왕은 기원전 8세기의 히스기야와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요시야이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서, 히스기야는 “산당(바모트)을 제거하고, 기둥들(마체보트)를 파괴했으며, 아세라를 찍어 버렸다”고 보고된다(마지막은 아마도 성전 안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므낫세(“유다를 죄악으로 이끈” 사람으로 기억되는, 최악의 인물로)는 솔로몬 성전에 “부어 만든 아세라 상”을 설치하는데, 이곳은 오직 야웨의 이름만이 영원히 세워져야만 하는 곳이었다(왕하 21:1-7).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중단된 “개혁”은 실패였다. 왜? 분명하게는 그것은 대중의 지지가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왕궁의 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세라는 성전 안에 남아있었으니, 야웨와 짝을 이루어서 자리를 지켰다. 이는 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녀의 자리라고 생각되었다.
열왕기하 23장은 전체에서 가장 적절한 구절이다. 이것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고심한 작품”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수정주의자들의 역사이다: 그들의 영웅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그리고 의심할 바 없는 수호신이기도 한), “선한 왕 요시야”이다. 그의 도상파괴적인 행동들 가운데에서 그는, 그 이전의 히스기야와 같이, 모든 산당을 파괴했고 “아세라”를 성전에서부터 제거하고 그것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더해서, 그는 다른 민간 종교의 양상들도 공격했는데, 이것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스며들었던” 것으로, 성서 기록자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교도적 행습들”을 기술하면서, 그들은 부주의하게도 우리에게 값나가는 세밀한 목격담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왕하 23장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고대 이스라엘인들, 그러니까 왕조 말기에서뿐만 아니라 의심할 바 없이 시작에서부터, 대부분이 지켰던 종교적인 행습이 “목록 작성표”에 낫지 않는다(아세라는 지금까지 내내 성전에서 용납되었다).
여기에 민간 종교의 요소들을 언급한다:
(1) “우상숭배적인” 제사장들
(2) 유다와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도시들, 심지어는 성문에도 있었던 산당(바모트)
(3) 바알에게 바쳐졌던 분향
(4) 입석들(마체보트)
(5) 성전에서 “태양, 달, 그리고 별자리들, 그리고 하늘의 모든 만상들” 숭배
(6) 성전 입구에 있던 태양에게 바쳐졌던 말들과 병거들
(7) 성전의 지붕에 있던 (분향을 위한) 제단들
(8) 성전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하늘의 모든 만상들을 위한 대접들”
(9) 성전에 있는 제의적 매춘 (비록 이것은 사실 의심스럽다; 아래를 보라)
(10) 기드론 계곡 아래에서의 어린이 희생 제사
마지막으로, 다른 하나의 이단적인 활동을 언급해야 겠다: 성전에서 “남자의 제의적 매춘 집”에서 아세라를 위해 “휘장을 짜는” 여인들(왕하 23:7). 본문은 명백하게 어려운 것이며, 성서 주석가들은 “제의적 매춘”과 “휘장”으로 번역했던 용어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서로 다르다. 두 번째 용어는 히브리어로 바팀bāttîm으로, 복수형으로는 일반적으로 “집들”이나 “성전들”을 뜻한다. 나중의 것은 여기에서 해당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성전을 짜다”가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집들”이라는 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다. 후대의 편집자, 번역자들, 그리고 주석가들은 이것과 관련해서 이미 당혹케 되었음이 분명하다. 칠십인경은, 기원전 3-2세기의 헬라어 번역본으로, 다른 헬라어 본문에서와 같이, 바팀이라는 용어를 “의복, 튜니카(고대 그리스·로마 사람의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역주)”로 나타낸다. 그것은 그들의 히브리어 본문이 코트노트kotnôt, 곧 “제사장의 의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왜 일부 영어 번역본이 제의(祭衣, 히브리어 바팀을 받딤baddim, 즉 “흰 속옷”으로 바꾼 것)로 읽었는지를 보여준다. 후대의 어떤 아람어 탈굼(확장된 번역)은 “커튼”을 의미하는 단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최소한 유명한 중세의 유대인 주석가(킴히Qimhi)는 “둘러 쳐진 커튼”으로 읽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본문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나는 두 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첫째는 분명한 “모호성”은 아마도 의도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곧 신명기적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바팀이라는 용어에 혼동하거나 (했거나 혹은 아마도 당혹스러워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완곡어법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2) 다른 가능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금의 히브리어 본문이 맞다는 것인데, 바팀이라는 용어가 “집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막-성소”와 같은(초기의 성막처럼?)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증명될 수는 없지만, 그럴 듯하다. 중동의 고대와 현대 성소들 주변에서는, 걸어놓은 직물로 만들어진 큰 천막을 발견하곤 한다. 이러한 “천막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방문자들이나 순례자들의 피난처, 기념품 판매,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성전을 둘러선 그러한 천막들이 “제의용 매춘”을 위한 집이며(아래를 보라?) 그리고 또한 직물을 “짰던” 여자들을 위한 집이었을까? 그러나 여자들이 만들었던 물건들이 성전 주변의 천막을 위해 “걸렸던 것”인지 혹은 성전 안에 있는 신을 나타내는 인형을 위한 “예복”인지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들은 (여신) 아세라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야웨와 함께 그의 집에 있었다(히브리어 베트bêt, 즉 “집” 혹은 “성전”). 수잔 에커맨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이러한 여인들의 제의가 단지 용납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종종 황후 자신의 후원을 받았으니, 성전에서 “가증한 아세라 상을 만들었던” 마아가의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왕상 15:13; 에커맨 2003:459,450).
성서학자들은 왕하 23장에 기술되어 있는 “요시야의 개혁”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회의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에서 그 내용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만약 신학적으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유다에서 민간 신앙에 관한 고고학적인 우리의 지식에 근거한다면 말이다(데버 1994a). 지금의 상황에서, 개혁자들이 성공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서 본문은 우리에게 민간 종교를 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해주는데, 보다 가치 있는 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방자들로부터 온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고고학적인 조건들에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아세라 제의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역사서뿐만이 아니라, 기원전 9-7세기 예언자적 본문에서도 나타난다. 호세아서의 충격적인 “성적 이미지”는, 종종 나무들과 연결되고 있는데,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호세아 4장 12,13절은 “나무를 향하여 묻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나무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고, 그러므로 “행음했다.” 야외에서, 혹은 그늘이 있어서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예배를 “행음”이라고 하는 것일까? 대답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여신 아세라가 나무 상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숭배하는 자들은 남성 신인 야웨를 버린 것이니, 그들 스스로가 여성 신과 함께 매춘한 것이었다. 민간 종교에서, 아세라는 그의 배우자였을 수도 있고, 그러므로 그의 귀부인이라는 측면에서 야웨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통적인 신명기적 집단에게는, 그녀는 전적으로 이교적인 신이었을 뿐이다.
호세아 14장 8절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흥미를 자아냈다. 야웨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개역성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evergreen cypress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호 14:8)
본문은 전수과정에서 약간 문제를 겪은 것처럼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두 번째 행을 조금 수정해(바꿔)서 이렇게 읽는다:
나는 그의 아낫이고 그의 아세라이다.
그러한 변화가 가당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그 문맥이 생명을 부여하는 “풍요의 상징”으로서의 나무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유일하게 신뢰할만한 풍성한 나무인 야웨를 떠나버려서 생명을 찾으려는 이스라엘의 배역에 관한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나무와 우상이 포함되어 있는 다른 구절은 예레미야 2장 27절이다. 야웨는 예언자의 언표를 통해서 불평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무(히브리어로 문자적인 의미는 “나무로된 것”)가 아세라와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아세라는 그 상징이 나무로 된 어떤 것이며, 돌은(여기에서 마체바) 종종 아세라 그리고 산당과 연결되는 거룩한 입석과 닮았다(위를 보라).
학자들이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원형이 훼손된 다른 구절은 아모스 8장 14절로, 이 구절은 “사마리아의 아시마Ashimah에게 맹세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의혹은 이후의 편집자들이 본래 자신들의 대적인 아세라를 가리켰던 것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서 본문을 훼손했다는 점이다(제5장). 이것은 실로 그럴듯한데, 열왕기상 16장 33절과 관련해서 볼 때, 즉 사마리아 성전의 아세라(제5장)와 또한 쿤틸렛 아주르드 비문이 “사마리아의 야웨”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
이제 우리는 왜 신명기 16장 21,22절에서 야웨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에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마체바)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아세라, 즉 그녀를 상징하는 나무와, 그리고 나무로 가득한 숲에 있는 산당의 제단은 모두가 전형적인 가나안의 “풍요” 제의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러므로 성서 기록자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왜 이후의 개혁적인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이러한 것들에게 그렇게 소란하게 저주했던 것일까? 만약 그것들이 이스라엘 종교에서 대중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개혁자들은 그들이 항의할 때 무엇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신학적인 편견 때문인가? 고고학은 “장밋빛 안경”을 제거해주며 그리고 이제 그림은 더욱 분명해졌다(비록 누군가에게는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열왕기하 23장에서 나오는 노골적이며 확연하게 드러나는 민간 종교의 그림을 덮어버리기 전에, 이러한 것들이 특별히 아세라와 (다수의) 여자들의 관심에 연관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10가지 점들 가운데 몇 가지만 첨언하도록 하겠다.
(2) 산당(바모트)은 그녀의 상징인 아세라ʾăshērāh와 종종 연결되는데, 이러한 산당은 특별히 여신에게 헌당되는 것처럼 보여지기 까지 한다. 그 점은 왜 그것들이 그렇게 심한 신명기적 역사가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전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자들도 역시 그러한 성소에서 (여신) 아세라를 숭배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산당(바모트)이 민간 종교의 보다 더 의심스러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아세라 제의의 특징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공공의 것으로-보다 가시적이며, 보다 형상타파적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8) “아세라를 위한 그릇들”은 무엇인가? 히브리어 단어(켈림)는 그 어떠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물건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들이 “태워졌다”라는 사실은 그것들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세라ʾăshērāh 나무 기둥은 아니었는데, 그것들이 여기에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이러한 “나무로 된 물건들이” 성전 내에서 나온 가구류일 것이라고 보는데, 아마도 탁자나 긴 의자들로, 그것들이 얼마간 바알과 아세라에게 특별히 향해졌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축소시킨 가구류에 대해서 제5장을 보라.)
(9) 성전 안(혹은 주변)에 있는 “남자 제의 매춘”(왕하 23:7; RSV) 집과 관련된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열띤 논의의 주제였었다. 여기에서는 히브리어로 복수형이 케데심이 사용되었는데, “따로 놓다. 성스럽게 하다”라는 동사 원형의 의미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 명사형은 남성형이나 여성형이 될 수 있다. “최대주의자”의 읽기는 초기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는데, 이들은 가나안 종교의 “번영”이라는 주제에 상당히 강조점을 두었으며, 그래서 그것을 음탕하며, 성적인 난교 파티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러한 편견은 부분적으로는 학자 세대의 고상한 척한 것에서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것의 결과적으로 성에 매혹되어있으며) 그것은 또한 고대인들의 편견에 의해서도 배태되었다.
헤로도토스와 같은 고전 작가들은 바벨론의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아프로디테의 성전에 앉아 남자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도록 강요받았는지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다른 고대 기록자들은 페니키아 종교를 심하게 성적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의 의식에서 행해졌다는 신들의 “성스러운 결혼”이라는 신화나 “제의적 매춘”을 만들었던 신화 모두가 고대와 현대의 이러한 편견에서부터 나왔다(“풍요제의”에 대해서 제8장을 보라).
이러한 생각을 지지해줄 그 어떠한 어원학적인, 문화적인 심지어 역사적인 증거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서 본문을 그렇게 오독하는 것을 뒤엎어버리는데 도움을 주었던 뛰어난 학자들 가운데에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글을 써왔던 여성들이 있었다(이들은 에커맨, 버드, 그리고 프라이머-켄스키이다). 왕하 23:7에 나오는 카데심에 관해서 우리가 실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는, 그것들이 어떠한 성전 예식에 “헌신된” 공무원들이었다는 점과, 그렇지만 개혁가들은 그들을 승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내쫓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성 공무원 계층들과 병행하여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카디쉬투 여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히브리 단어와 동족어이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은, 성전 예식에 “헌신되었다”고 하더라도, 매춘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성 제의 직원의 “평판을 지켜내기 위한” 몇 가지 시도들은 다른 방향으로 너무 나가 버렸다. 프라이머-켄스키는 그들을 “순결한 처녀들”에 견주기까지 했다(1992:201).
여성과 제의 활동에서의 매춘의 한 가지 다른 양상을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겠다. 케럴 반 데 툰(1994)은 서원을 했던 여성이 그것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성전에서 그들 자신을 매춘해서 얻은 값으로 자신들의 서원을 준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라고 하면서, 미덥지 못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그는 신명기 23장 17,18절에 호소하는데, 여기에서는 창녀(조나)라는 일반적인 단어가 남성과 여성형인 카데쉬/카데샤 모두와 평행해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본문은 “창녀의 번 돈”으로 깨어진 서원을 값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매춘을 “서원을 갚는” 용도로 통상적인 이스라엘 여성들이 경험했던 것이라고 할 때, 반 데 툰을 따르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그것은 드물고 혐오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10) 마지막으로, 아이 희생제사 문제를 여기에서 다루어야만 하겠는데, 이것은 특별하게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희생제사는 매우 엄하게 심판을 받았고, 몇 개의 본문들은 그들이 분명하게 금지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레 18:21; 신 18;10-12). 이것은 “민족들”(고임)이나 하는 것이었고(신 12:31); 아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강제이주하면서 들여놓았던 이방인들에 의해서 사마리아로 유입된 것이며(왕하 17:31);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 왕이 했던 것이다(왕하 3:27).
왕하 23:10을 포함해서 여전히 다른 본문들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아이 희생제사를 주저하지 않고 기술하고 있는데, 첫째는 이미 광야의 방랑 기간 동안에 있었던 것이다(시 106:37,38; 그러나 이는 후대의 시 본문이다). 벧엘 사람 히엘이 “그의 장자 아비람의 희생으로” 여리고의 “기초를 세웠고” “그의 말째 아들 스굽의 희생으로 그 문을 세웠다”(왕상 16:34). 이러한 “건축 희생제사”가, 마치 이것이 서원의 결과인양, 히엘이 말했던바 “주의 말씀에 따라서” 행해진 것이라고 기록자가 언급할 정도였다. 심지어 아하스와 므낫세와 같은 유다 왕 조차도, 다른 금지된 제의 활동과 함께, “자신의 아들들을 번제로 바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신명기적 개혁자들의 정죄는 극히 선전문구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두 왕은 그들의 눈에 악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개의 본문들을 세밀히 관찰해 볼 때, 즉 왕하 23:10과 렘 32:35과 같은 본문을 볼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빛을 더해주는 것들이 있다. 이 두 구절들은, 예루살렘에서 아이 희생제사가 성전 언덕 아래의 힌놈 계곡에 있는 “도벳”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번제물로 희생되는 대상이 되는 신은 특별히 “몰렉”이었다. 몰렉으로 불리는 신은 가나안 일부와 특별히 후대의 페니키아 자료에서 연유한 것으로, 후자는 부분적으로 왕조 이스라엘과 같은 시대이다. 페니키아와 이후의 카르타고의 서원 비문들은 실제적으로 물크mulk라고 부르는 어린아이들 희생제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시실리의 디오도루스, 비블로스의 필로, 그리고 클레이타르코스Kleitarchos와 같은 고대의 기록자들은 크로노스Kronos라고 하는, 쭉 내뻗은 팔에 아이를 불사르는 거대한 청동 신상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를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들의 항구에 있는, 기원전 7-4세기의 “도벳” 혹은 무덤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수 천구의 납골함이 발굴되었는데, 이 중에는 타버린 유아의 뼈들도 있었다. 많은 매장물들은 헌신용의 비문이 함께 들어있었는데, 희생제사가 서원을 완성하기 위한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종종 “타니트” 혹은 바알 하몬에게 바쳐졌다. 전자는 아세라의 페니키아 식과 다름 아니다. 희생제사는 그 자체로 통상 물크mulk라고 불렸다.
어떤 학자들은 페니키아의 물크가 히브리어의 “몰렉”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헌신 비문 대부분에서 희생제사가 통상적으로 바알 하몬과/혹은 크로노스(위를 보라)에게 바쳐졌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리고 페니키아의 “바알 하몬”은 가나안의 “크로노스”와 가나안-이스라엘의 “엘”과 동일하다는 점은 오랜 동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엘은 이스라엘의 신을 가리키는 가장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에커맨이 결론 맺기를, 모든 증거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아이 희생제사를 받는 “몰렉”이라는 신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아이 희생제사라는 제의는 어떤 분파들에서 합법적인 야웨 신앙의 표현으로 여겨졌을 뿐이다”(1992:137).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일반적인 것이거나 드문 것이거나 간에, 어떻게 여성들은 아이 희생제사에 반응을 했을까? 그들은 실제로 동참했을까? 남자들이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것일까? 이것들은 전혀 가당치 않다-혹은 이전 세대의 최소한 성서학자들에게서나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류 학자들이 아이 희생제사가 드물기는 하겠지만, 다른 많은 “가나안의” 관습들처럼, 이스라엘 제의 속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히브리 성서가 암시를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뿌리를 “정통” 야웨 신학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서 기록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희생제사라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제단 위에서 이삭을 번제하는 일이 야웨의 본래 의도였거나, 혹은 신적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했던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엔, 아브라함은 그러한 절망적인 행동을 기적적으로 그만 둘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일을 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보다 타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사라가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들인 이삭을, 그 이름도 “(하나님이) 나를 웃게 했다”라는 뜻을 가진 아들을, 죽이는 것을 너그럽게 봐주었을까 라는 질문이다. 어떻게 야웨(혹은 아세라)가, 아주 놀랍게 아이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바로 그가, 그들을 이처럼 변덕스럽게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여신에 대한 도상학적 증거
나는 아세라 여신에 대한 본문 상의 증거를, 히브리 성서와 성서 외적인 비문들 모두에서, 상당 수준으로 조사했다. 단어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림이야말로 “백 마디 말보다 가치가” 있다. 우리는 성서 시대에서 (여성 상과는 별도로) 여신 아세라에 대한 그림들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앞선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영역에서 그림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림들이 지속되었을까? 특별히 만약 우리가 신에 대한 그 어떠한 “새긴 우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금지를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말이다(출 20:4).
나는 위에서(제5장) 기원전 10세기의 다아낙의 “제의 건축물”을 논의하면서, 그것을 산당(바마)의 한 종류라고 취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가장 특이한 제의적 주변도구 조각들이 나왔는데, 거의 3피트 높이에 이를 정도인, 정방형의 테라코타 제단 대라고 했다(위를 보라). 꼭대기에는 그것을 둘러서 낮은 테두리가 달려 있었는데, 음식이나 음료를 위한 제물 그릇을 받치기 위한 것으로, 그 기둥에는 창이 있었는데, 창문들은 아마도 분향할 때 연기를 내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도상학적인 그림들이 사면에 뚜렷이 나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성전의 네 개의 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 층에는 정면으로 네 발을 가진, 아마도 황소 같은 것이 두 개의 정형화된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데, 그의 등 위로는 날개 달린 태양원반이 달려 있었다. 양쪽에는 두 개의 사자들이 있었다. 다음 아래층에는 아주 익숙한 그림으로 두 마리의 사나운 야생 염소가 나와 있는데, 나무의 아래쪽의 가지들을 갉아 먹고 있다. 다시 양 옆에는 두 마리의 사자들이 있다. 세 번째 아래층에는 두 마리의 사자들이 그 옆얼굴을 앞쪽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날개를 달았고 인간의 머리에 “하솔”의 가발을 썼다. 이는 그것들이 분명히 천사들cherubs임을 나타낸다. 두 천사들 사이에 빈 공간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출입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가장 아래쪽의 층은, 내가 믿기로 우리가 그동안 발견했었던 이스라엘의 도상학적 표현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다시금 두 마리의 사자가 양 옆에 있는데, 그 앞쪽을 향하여 눈을 뜬 채로 응시하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 사이에, 그 귀를 굳게 잡고 있는 여성 상이 있는데, 나체로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특이한 하솔의 불룩한 가발을 쓰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모나리자”와 같은 정체 모를 미소를 보이고 있는, 그녀는 누구일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추측하기조차 꺼려했었지만, 나에게 그 답은 지난 30년간 확실했다. 그 상은 폴 W. 렙Paul W. Lapp이 1960년대에 발굴한 것으로, 오랫동안, 그러니까 내가 미국의 후원을 받았던 예루살렘의 올브라이트 고고학 연구소W.F. Albright Institute of Archaeological Research에서 소장을 맡았을 동안, 다아낙 상은 지하실에 묵혀있었다. 아는 거의 매일 우리의 “다아낙의 귀부인”을 보았다; 나에게, 그녀는 분명히 아세라였다. 나는 오래 전에 그러한 주장을 출간한 바 있는데(데버Dever 1984), 여기에서 나는 이미 문서화된 몇 가지 사실들에 기초했었다. (1) 하솔의 가발은, 즉 암소 여신은, 일반적으로 이집트 신왕조 시대(기원전 1500-1200년)의 여신인 쿠드슈Qudshu, 즉 “거룩한 분”을 나타내는데, 이는 우리가 가나안의 아세라에 대한 이집트의 변형이라고 알고 있다. 윈체스터에 있는 기념판(위를 보라)에서, 그녀는 사자의 등 위를 올라타고 있으며, 거기에 나온 글들은 그녀에 대한 세 가지 이름들을 보여준다: 쿠드슈(아세라), 아낫, 그리고 아스타르트. (2) 그와 동시대의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열 두어 개 정도 되는 진흙과 두어 개의 금과 양은으로 된 기념판들과 장식물들은, 독특한 하솔 가발을 입은 아세라 여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자에 올라탄 그림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3) 마지막으로, 다수의 비문들은, 기원전 3천년에서 천 년대까지 늘려있는데, 근동지역 전반에서 발견되며, “사자 숙녀”가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가장 일반적인 별칭이었으며, 그리고 특별하게 그녀가 가나안에서는 아세라로 체현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해준다. (이와 함께 쿤틸렛 아주르드에서 출토된 기원전 8세기의 저장항아리에 그려진 사자 그림을 보라. 여기에는 히브리어로 그녀의 이름이 야웨와 함께 나와 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배우자를 의미한다; 제5장을 보라.)
다아낙 상에 있는 나체의 여성이 아세라라는 압도적인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매우 극소수의 학자들만이 그것이 동일한 대상이라고 인정했을 뿐이다. 킬과 울링허는, 일반적으로 매우 명민한 학자들로, 비록 아세라가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적인 인물로 특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단지 “동물의 여왕”이라고 보았다. 피르히야 벡Pirhiya Beck은, 탁월한 미술역사가인데, 그녀를 단지 일종의 “풍요 여신”으로 보았다(1990:432). 제비트는, 언제나 대담한 성서학자로, 그녀를 아세라로 보았다(2001:323,324). 다아낙 상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의견을 내놓기를 꺼려하고 있다. 과연 학자들은 왕조 이스라엘에서 아세라 제의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떤 명백한 증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단지 활짝 웃고 있는 그녀가 있다.
도상학적 증거를 보여주는 다른 조각이, 기원전 10세기에서 8세기까지의 것으로 보이는, 소규모의 나오이naoi(단수로 나오스naos), 즉 테라코타로 만든 모형 성전에서 나왔다. 성서에서 디르사라고 언급했던 텔 엘-파라(북부)에서 나온 것은 수년전에 출간되었지만, 다아낙 상과 같이 그것은 최근까지 무시되어져 왔었다. 다리 정도 높이에, 성전의 정면에는, 홈이 새겨진, 정형화된 종려나무 기둥 두개가 있는데, 그 꼭대기는 대접받침을 위해서 잎이 말려진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기둥 사이의 관문을 지나면 플라이아데스Pleiades의 초승달과 별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아세라에 대한 페니키아식 여신인 타니트Tanit와 종종 관련된 신이다. 여기에서 아세라는 “집안에” 있지는 않는데, 즉 그녀의 집 혹은 성전(히브리어 바이트bayit는 둘 모두를 의미한다)의 문에 서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다른 나오이naoi에서, 그녀는 집안에 들어가 있다. 키프로스에서 출토된 (기원전 약 7세기의) 페니키아 신상statue에는, 여신 아세라가 하솔 머리 장식이라는 특별한 표를 걸치고 있으면서, 그녀의 머리 위로 나오스를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출입구에는 하솔 가발을 쓴 또 다른 아세라로 보이는 신상이 서있다. 키프로스의 이달리온Idalion에서 출토된 것은, 나오스naos와 거의 동시대의 것으로, 나체의 여신은 여기에서도 출입구에 서있다. 그러므로 나오이naoi는 아세라/타니트와 관련된 모형 성전이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또 다른 것은, 트랜스요르단에서 출토된 것으로, 아마도 출입구에 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상이 발견되었는데, 또한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 마리의 사자들도 있었다-이는 다아낙 상에서와 같은 조합이기도 하다. 아마도 텔 엘-파라와 다아낙 모두에서의 “비어있는 출입구”는 이스라엘 도상학에 있어서 어떠한 “조심스러움”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이는 제2 계명 때문-메팅거Mettinger(1995)가 “빈 공간 성상파괴주의empty space aniconism”으로 불렀던-으로 보인다. 어떤 페니키아의 나오이naoi에는, 한 쌍의 여성 신들이 열려있는 입구 옆에 있기도 했다.
이제 아세라와 그 제의를 나타내주고, 특별히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었던 나무와의 관련에 대한, 부가적인 도상학적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넌지시 암시했던 것처럼, 성서 본문에서 나무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시종일관 나타났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확증을 위해서 다른 곳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것(성서본문-역주)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40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아세라()라는 용어는 대부분 나무 기둥, 즉 정형화된 양식화된 나무, 혹은 살아있는 나무를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한데, 이 둘 모두는 여신 아세라의 상징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어떤 점에서는, 그것들은 제의에서 그녀를 위한 “대역”으로, 아마도 신 자체를 직접적으로 나타는 것을 금지했던 두 번째 계명 때문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계명은 이스라엘이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복수형으로, 최소한 그러한 가능성을 엿보이는 것에 대해서, 섬기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나무 모양으로 아세라를 표현한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야웨를 대신해서 인격화하고 숭배했던 “우상”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비록 신명기적 역사가가 그것들을 그런 식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생각에서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어수룩하지도 않았다. 예언자들은 종종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놀려댔고, 사람들은 요점을 파악했다. 실제로, 나무와 관련된 구절에서, 예레미야는 놀라울 정도로 신랄한 비유를 질질 끌고 있다: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렘 10:3-5)
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렇게 항변했을 것이다: “우리는 나무들과 나무로 된 기둥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볼 때 우리는 야웨의 임재를 더 잘 상상해낼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달리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둘째로, 위에서 논의했던 산당(바모트bāmôt)은, 종종 산꼭대기의 성소들로, 전형적으로 아세림ʾăshērîm과 또한 아마도 그들의 특징이기도한 살아있는 나무를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라서 음행하고 있다”고 기술하는 한 구절에는 또 다시 이런 표현이 나온다: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기원전 9세기 초반 남왕국의 초대 왕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마체봍maṣṣēbôt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왕상 14:23)
같은 비난이 기원전 8세기의 아하스와(왕하 16:4), 그와 동시대의 북쪽의 왕인 호세아에게서(왕하 17:10) 반복된다. 예언자들은 독립적으로 바로 같은 표현인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를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57:5); 예레미야(2:20; 3:6,13; 17:2); 그리고 에스겔(6:13; 참조. 또한 호 4:12,13). 그리고 신명기 12장 2,3절의 구절은 그 단어가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이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했던 경고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서 기록자의 관점에서, 모세로부터 에스겔까지-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라고 할 수 있는 600년-민간 종교는 “푸른 나무”와 관련된 제의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 제의는 금지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시되었던 것이다. 왜 성서 기록자들은 그렇게도 나무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것은 매우 분명하게 느껴진다: 화려한 푸른 나무는 황폐한 땅에 생명을 부여하는 여신 아세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애리조나 사막에서 살아보았던 사람이라면 왜 나무가 기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지를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산등성이와 꼭대기는, 신과 더욱 가까울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나무들과 일련의 나무 기둥들이 세워지면서 푸른 잎이 무성한 장면과 화려하고 풍부한 분위기를 그녀에게 더하고 있다.
그러한 나무숲으로 된 “산꼭대기 성소들”은 청동기와 철기 시대 지중해 지역 전반에 걸쳐 잘 알려졌고, 그것들은 고전 시대까지도 분명히 융성하면서 지속되었다. 왜 고대 이스라엘은 이러한 보편적인 동양적 “풍요 종교” 문화에 동참하면 안 되었던 것일까? 즉 왜 고대 이스라엘은 자연의 회춘과 지속적인 힘을 경축하면 안 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스라엘의 유별나게 독특한 기여점이라고 한다면, 자연은 야웨, 즉 “만유의 주”로 그 권세야말로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그리고 토양에 생명을 주는 분, 밑으로 복속된 것으로 오랫동안 여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생겨난 것으로, 그것은 바벨론 포로라는 비극에서부터 얻어낸 지혜의 영역에서만 완전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었다(제8장).
나에게는 “나무” 소재가 아세라와 명백히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고대의 주석가들은 혼동했으며, 최근까지 현대 학자들도 그러했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제4장), 기원전 3-2세기의 히브리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했던 사람들은 이미 철기 시대의 실제상황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히브리어 아세라ʾăshērāh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헬라어 알소스ʾalsos, 즉 “작은 숲”이나 덴드론dendron, 즉 “나무”라는 용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라틴어로 기록된 불가타Vulgate 성서(기원후 4세기)는 루쿠스lucus, 즉 “잡목 숲copse; 성스러운 숲”으로 표시하거나, 때로는 네무스nemus, 즉 “삼림”으로 나타내고 있다(라로카-피츠LaRocca-Pitts 2001:255-257;295). RSV는 때때로 아세라ʾăshērāh를 단수형으로 “아세라” 혹은 “그 아세라”라고 번역을 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이미 한정적 관사가 첨가되어 종종 나타나는 히브리어 본문 상의 혼동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RSV는 아세라ʾăshērāh의 복수형인 “아세림”을 여신이라기보다는 상징으로 보고 있다(“아세라 여신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가장 잘된 번역이라고 할지라도 종종 문맥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지도 않으며, 때때로 단지 추측일 뿐이다.
최근의 몇 개의 출판물은 최종적으로 아세라를 나무와 연결시키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다. 획기적인 진전은 1980년대 중반에 나왔다. 어느 날 루스 헤스트린Ruth Hestrin이라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박물관의 관리자로 헌신하고 있는 한 여성이, 나에게 그녀가 출간하려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녀의 비방자가 옳았던 것인지(그들은 “너무 급진적이다”라고 한다)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작품의 단순한 통찰력에 충격을 받았고 흥분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정적으로 그녀를 격려했다; 그리고 1987년 명성 있는 이스라엘 탐사 저널Israel Exploration Journal은 루스의 소논문을 다음과 같이 순진하게 들리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리기쉬 물병과 아세라The Lachish Ewer and the Asherah.” 잠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루스 헤스트린의 혁신적인 견해는 널리 인용되고 있(고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헤스트린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미술에 종종 나타나는 도상학적인 그림은 나무의 낮은 가지를 질근질근 씹고 있는 두 마리의 야생 염소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에 그녀는 1930년대에 라기쉬의 유대인 지역에서 출토된 유명한 “물병”(혹은 봉헌용 항아리)의 그림에 집중했다. 그것은 기원전 13세기의 “해자 제3 성전Fosse Temple III” 근처의 구덩이favissa 혹은 저장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위쪽 어깨 부분에 색칠 된 것은 나무의 가지를 씹고 있는 두 마리의 야생 염소 그림과 유사하다(이 나무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인 메노라menorah와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옛 가나안식 활자로 꼭대기를 빙 둘러서는 헌신용 문구가 들어있다: “마탄Mattan: 나의 숙녀 엘랏Elat을 위한 제물.” “마탄”은 아마도 예배자의 이름일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선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엘랏”은 가나안의 남성 신 엘 이름의 여성형으로, 그것은 또한 위대한 가나안의 어머니 여신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아세라”와 평행하게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의 뼈들이 항아리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여신 엘랏/아세라를 위한 제물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 비문에 대해서 논평을 했는데, 물론 본문을 주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의 어느 누구도 고고학적인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한 제물을, 면밀히 연대가 설정된 것으로, 가나안 여신에게 바쳐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고, 우리는 다음 문에서 그녀의 성전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루스 헤스트린을 제외한 그 누구도 라기쉬 성전의 또 다른 제물 구덩이에서 두 마리의 사나운 야생 염소를 보여주는 비슷한 그림의 받침 달린 술잔이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성의 음부를 뜻하는 삼각형은 일반적인 나무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음부의 삼각형-모은 인류의 임신, 출산 그리고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태고의 상징-과 나무는 서로 바꿀 수 있으니, 즉 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것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때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지식은 잊혀졌음에 분명하고, 오직 “신비로운” 나무 상징만이 남게 되었다.
헤스트린의 관찰은, (많은 천재들의 수완에서처럼) 너무 분명해서 회고하면,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다음을 그녀는 다수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금이나 호박금 장식품에서, 여신 아세라가 매우 양식화된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단지 토르소처럼 몸통만 나왔지만, 현저하게 가슴과 음부가 강조되고 있었다. 그녀가 아세라임은 분명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이집트 암소 여신인 하솔의 잘 알려진 화려한 가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솔은 장식판에 쿠드슈Qudshu, 즉 “거룩한 분”으로 그려지고 이름이 나와 있었다. (윈체스터 장식판에 대하여 위를 보라.) 그러나 헤스트린이 가나안의 장식물에서 보았던 것은 여신의 음부로부터 자라고 있는 나무였다. 이제 그것은 아세라, 즉 여성의 음부 삼각형의 상징과 나무가 가나안의 제의적 도상학에 있어서 전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것이 충분히 확신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헤스트린은 기원전 2천년 경의 색칠된 이집트 무덤 몇 개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풍성한 가지를 단 나무가 여자로 나타나고 있는데, 손을 뻗어 젖가슴을 내밀고는 아이에게 빨리우고 있다. 그러한 그림에 나온 사람은 파라오 투트모세Thutmosis 3세의 아들 말고는 다른 이가 올 수가 없는데, 비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나는 루스 헤스트린의 소논문을 (이는 1991년에 보급되었는데)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종교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단편연구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이제 우리는 전적으로 “나무”에 대한 분야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성서의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이 나무와 “숲”에 그렇게 강경하게 반대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던 사람은 나서지 않고, 비-전문가인 여성이었다. “성스러운 나무들”은 여전히 오늘날 베드윈 족에 의해서 숭배를 받고 있다. 이는 내가 팔미라Palmyra 근처의 시리아 사막에서 보았던 바이다.
일련의 학자들이 헤스트린의 직관을 다소 엉성한 방식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8년에, 오트마르 킬Othmar Keel은, 위에서 언급했던(제2장) 프라이부르그Freibourg 예술사 학교의 고참자로, 완전한 영역의 연구서를 출간했는데, 그 제목은 「여신과 나무, 새달과 야웨: 고대 근동의 미술과 히브리 성서Goddesses and Trees, New Moon and Yahweh: Ancient Near Eastern Art and the Hebrew Bible」였다. 이상하게도, 킬은 자신의 책 시작부분에 이전에 공헌을 했던 학자들을 인용한 각주에서 헤스트린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공헌은 나무-여신의 도상학을 기원전 2천년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잡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는 헤스트린의 실례들에, 그 이후에 발견된 몇 개의 가나안 장식판을 보다 특별한 연결을 두면서 첨가했을 뿐만 아니라, 헤스트린의 “유아에게 젖을 먹이는 나무”와 유사한 이집트의 그림들 몇을 더했다. 그는 더 나아가 여신 아세라를 강조하면서, “나무가, 자연적이거나 그녀를 따라서 정형화되고 이름이 부여된 그 나무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안전하다”고 할 정도였다(1998:38, 상에 대해서 또한 클레터Kletter 1996:76,77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킬은 (비록 모두는 아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수십 개의 철기 시대 상들, 제물 대들, 모형 성전들, 그리고 아세라와 나무 형상을 동일하게 나타내고 있는 인장을 첨가했다. 킬의 1998년도 책의 나머지 반은 “달에 대한 제의”에 집중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곧 다루도록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장과 인장의 그림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사실 이것은 많은 다른 학자들이 무시했던 것으로 킬과 그의 동료들만이 이스라엘 민간 종교 이해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인장 도상학은 특별히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6세기 동안 유행했었는데, 이때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신-아시리아와 신-바벨론의 “천체 예식,” 즉 (이쉬타르Ishtar로서) 아세라와 (아마도 렘 7:18과 44:17-25의 “하늘 황후”인) 아스타르트 숭배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시기이다. 다시금, 만약 이스라엘의 제의가 광대한 고대 근동 세계의 이러한 제의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이미 1992년에 독일어로 출간된 「고대 이스라엘의 신들, 여신들, 그리고 신의 형상들Gods, Goddesses, and Images of God in Ancient Israel」(1998)에서, 킬과 울링허는 기원전 9-7세기의 인장, 인장 그림들, 상아들, 그리고 다른 도상학적 소재를 보여주는 다른 물건들을 상당히 많이 모았다. 그러한 것들의 특징이라면, 황소와 “동물의 주인”으로 황소를 올라타고 있는 신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장에서는 여신이 “의인화되어서” 그려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즉 인간과 같은 해부학적인 특징이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쿤틸렛 아주르드의 저장용 항아리에 그려진 앉은 여성 인물이 아세라라고 했던 나의 주장을 특별하게 거부한 셈이다(1998:223,224). 대신에, 그들은 전반적인 그림에서 단지 “아세라asherah 분위기”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저장 항아리에 전문적인 예배자의 그림이 있다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했다(1998:241,242). 나는 어떻게 후자의 경우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항아리는 깨졌고,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물건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킬과 울링허는 대신에 태양과 천체 형상에 눈을 둘렸는데(1998:248-277), 거기에서 그들은 기원전 9-8세기의 것으로 나무를 포함하고 있는 몇 가지 그림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이를 “야웨를 나타내는 제의적 상징물로, 그의 복이 사람들에게 중재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한다(1998:278). 이것은 쿤틸렛 아주르드가 그 어떠한 면에서도 종교적인 성소가 아니며, 여기와 다른 곳에서 아세라asherah를 여성 신과 관련 맺지 않고 오직 야웨와 연관된 상징으로만 언급했던(위를 보라)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증거와 일반 상식에 거슬리는 것처럼 보이는데-다른 면에서는 그렇게 혁신적이었던 학자들이었기에 그들의 수세적 태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들은 기원전 8-7세기 이스라엘에 태양과 천체를 상징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영향이 있었다고 썼지만, 그들은 실로 이 모든 것들을 남성 신 야웨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다음으로 킬과 울링허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옛 청동기 시대의 나무를 아세라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 “하늘의 권세들의 천체화astralization”와 여신의 부흥에 대한 신호탄이었다고 논증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십 수개의 실례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도상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1998:283-287). 그러나 그것들에 따르면, 표현된 여신은 단지 둘뿐이었는데, 치료의 여신인 굴라Gula, 그리고 이쉬타르Ishtar(아스타르트Astarte)였다. 후자의 경우는 그녀의 문장 때문에 쉽게 인식되었는데, 그 문장은 빛나는 소용돌이 혹은 별로 된 후광이었다. 이에 더해서, 다른 천체의 상징들, 특별히 금성의 여덟 개의 빛을 보이는 별들, 플레이아데스Pleiades의 별들, 그리고 원추형의 달이 더해졌다. 그러한 관점에서, 신과 여신은 밤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1998:292-294; 밤의 괴물 릴리트Lilith는 후기 유대교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아래를 보라).
이들 후대의 인장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나무 그림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는데, 그래서 킬과 울링허는 이제 와서야(기원전 7세기) 아세라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갔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원전 12-8세기의 인장에서 그녀의 나무 모양의 문장이 없다는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 시기에 거의 아무런 인장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침묵의 논증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과 울링허의 전반적인 결론은 다시 언급할 만하다.
천체 상징물이 현저한 것은, 중재자인 초자연적인 보호 세력의 중요성이 점점 상실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아마도 오랜 “가나안” 전통의 동시 다발적인 부흥에 대한 갈등하고 있는, 점점 증가하는 필요와 연결된다고 하겠다 (1998:318).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에서 이후에 아세라(킬과 울링허는 “여신”이라고 부른다)와 연결될 수 있는 추가적인 도상학적 소재들로는 비둘기가 있다. 비둘기들은 종종 여신 타니트Tanit와 연결되는데, 이는 후기 페니키아에서 아세라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나오이naoi, 즉 모형 성전 성소와 같은 물건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킬과 울링허는 수 천 개의 기둥-상(위를 보라)들이, 비록 젖가슴을 제외하면 분명한 상징을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내가 논증한 것처럼, 여신 아세라를 나타내고 있다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더하기 위해서, 그들은 헤스트린이 처음으로 언급했던 “유아에게 젖을 물리는 나무”라는 같은 그림을 지적하기도 한다(1998:331-336). 그러나 그들은 장식이 없는, 원주로 된 하체를 보여주는 이들 여성 상들이 나무줄기를 상당히 닮고 있다고 앞서 주목했던 몇 안 되는 학자들을 인용하지 않고 있다. (루스 헤스트린이 최초라고 할 수 있겠다.)
이쉬타르/아스타르트를 나타내고 있는 인장들에 대한 보다 최근의 연구로, 이스라엘 미술 역사가인 탈레이 오르난Tallay Ornan의 것이 있다(2001).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기원전 8-7세기의 인장 여섯 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들 중에 어떤 것에는 여신 이쉬타르가 왕관을 쓰고 있고 원형의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징을 보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예술품에는 유사한 인장들과 다른 예술적인 표현물들이 있었는데, 이쉬타르처럼 보이는 인물이 비문에 나온다. 많은 경우에 원형의 모양은, 불쑥 나와 있다는 점이 강조된, 번쩍이는 별처럼 보인다. 라기쉬의 유대인 지역의 지표면에서 발견된 인장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녀 옆에 나무가 나타나 있고, 그녀의 손이 자신의 젖가슴을 받치고 있다-이 둘 모두는 “풍요”를 상징한다. 이쉬타르는 “전쟁의 여신”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여신이기도 하다. 그러한 서로 용납하지 않는 정반대의 성향을 표현한 것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것이다. 가나안 여신 아낫ʿAnat은(아래를 보라) 두려운 사냥꾼이며 전사로 자신의 연인인 바알Baʿal의 대적들을 거침없이 살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임신은 하지만, 출산은 하지 않는,” 영속적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힘을 가진 위대한 여신이기도 하다. 오르난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인장들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하늘 황후 이미지에 대한 아시리아의 영향이 있었고, 그녀를 위한 제의가 이쉬타르의 그것과도 닮았다는 생각에 힘을 더한다”고 결론을 맺는다(2001:252).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예레미야 7장 18절과 44장 17-25절에 나오는 “하늘 황후”를 이쉬타르Ishtar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혹은 그녀는 서쪽 지역에서 보다 더 일반적으로 아스타르트Astarte로 알려졌다고 여겨졌는데, 특별히 에커맨Ackerman의 유다 말기와 포로기 시절의 민간 종교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서가 그러하다(1992). 아스타르트는 위에서 논의했던 우가릿 본문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3명의 여성 신 가운데 하나의 이름으로, 그와 함께 아세라와 아낫이 있고, 특별히 여기에서 그녀의 다산(多産)의 역할은 확실했다. 그녀는 또한 윈체스터 장식판에 나온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쿠드슈Qudshu/아세라Asherah 그리고 아낫ʿAnat과 동일한 대상이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에서, 아스타르트는 아세라와 비교해서 보다 중요치 않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비록 몇 몇 본문들에서 그녀에게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말이다(삿 2:13; 10:6; 삼상 7:4; 12:10에는 “바알”과 평행해서 나오는 본문이며; 왕상 11:5; 왕하 23:13는 “시돈 사람들” 혹은 페니키아인들과 연결되고 있다).
에커맨은 기원전 2천년과 천년기의 상당한 양의 언어적인 증거가 아스타르트를 하늘의 여왕이자 신의 배우자를 가리키고 있다면서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이후의 페니키아와 헬라어 자료에서, 그녀는 성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되었다. 비록 에커맨이 킬과 울링허 그리고 오르난이 언급했던 인장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에커맨의 책은 이들의 것들보다 앞서 출간되었다), 도상학은 그녀가 기술한 아스타르트의 역할을 강력하게 지지해준다. 그녀가 썼던 왕관은 왕비의 그것이었고, 별들은 그녀의 하늘처럼 높은 자리라는 생각을 강화시켜준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측면은 위에서 논의한 바 있는 예레미야서의 두 구절에서 언급된 “하늘 황후”가 특별히 아스타르트Astarte와 동일한 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즉, 후기 유다 왕조 시대의 민간 종교에서 숭배되었던 또 하나의 “가나안” 어머니 여신이라는 가능성이다. 자세한 한 구절은 특별히 충격적이다. 그녀를 위해 구운 “과자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인 카와님kawwānîm-이는 이들 두 구절에서만 나타난다-은 “과자”를 뜻하는 메소포타미아어 카마누kamānu에서 빌려온 단어이다. 몇 몇 메소포타미아 본문들은 이쉬타르를 위해 이러한 과자들을 굽는다고 기술한다(에커맨Ackerman 1992:31을 인용한다):
오 이쉬타르, 자비의 여신이여, 나는 당신을 뵙기 위해 왔나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했나이다, 순전한 젖,
재 가운데서 구워낸(카만 툼리kamān tumri) 순수한 과자,
나는 당신을 위해서 전제를 위한 대접을 들고 섰나이다,
나를 들으시고 나에게 호의를 베푸소서!
예레미야서의 구절에서, “하늘 황후”(이쉬타르/아스타르트)를 위해 구워낸 과자들은 “그녀의 모양”을 본떴다. 몇 몇의 학자들은 유프라테스의 마리에서 발견된 이천 년대 초반기에 점토로 된 주형틀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러한 연관성을 설명해왔었다. 이들 중 어떤 것들은 자신의 젖가슴을 붙잡고 있는 펑퍼짐한 엉덩이의 여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들은 과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주형틀이라는 것이 제일 그럴듯한 설명으로, 아마도 여신에게 제의용 선물을 바치기 위한 과자였을 것이다. 만약 그게 맞는다면, 이 해석은 예레미야서에서 “하늘 황후를 위해 과자를 굽는 것”과 관련해서 아주 밀접히 평행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물론이지만, 굽는 일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초기 철기 시대 여성 상들의 가슴에 붙어있는 물건을 관찰함에 있어서, 그것이 틀북frame-drum이 아니라(위를 보라), 틀에 넣어 만든 과자였다는 (비록 다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부 학자들의 생각에 따라가도록 해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러나, 그 누구도 젖가슴에 있는 둥근 물건위에 방사형으로 퍼져있는 “살들spokes”이, 인장에서 이쉬타르를 둘러싼 방사형의 별들을 보여주는 그림과 상당히 닮았다는 점은 지적하지는 못했다.
아세라와 함께 고대 이스라엘에서 숭배되었던 두 번째 “어머니 여신”의 증거는, 비록 주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당황케 하거나, 심지어는 모순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다 사람들에 의해서 숭배되었던 또 다른 여신에 대한 증거가 여전히 존재한다. 예언자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담무스Tmamuz를 위해서 애곡하는 부녀들”(겔 8;14)에 대해서 보고한다. “담무스”는 3천 년대 수메르 신 두무지Dumuzi가 변한 이름이다. 그는 계절에 따라서 “죽고 다시 사는” 신으로, 그의 배우자는 이쉬타르(수메르의 인안나Inanna)였다. 서부 셈족 세계에서 가나안의 바알처럼, 두무지는 비가 그치는 매년 초여름에 죽고, 그런 다음 죽은 자가 그러는 것처럼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이쉬타르는 그가 간 것을 놓고 애곡을 하지만, 가을이 되면 그는 그가 다시 생명을 얻어 돌아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들은 성적으로 연합해서 재결합을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자연은 사랑, 죽음, 그리고 재결합이라는 끝나지 않는 주기 안에서 비옥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담무스 제의는 거의 여자들의 분야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과부” 이쉬타르에 연민을 느끼고, 그의 죽음을 제의적으로 슬퍼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알과 아낫, 그리고 담무스와 이쉬타르라는 범-지중해 계절적 신화가 유다의 일부 집단에서, 특별히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대중적이었다는 점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 같다(에커맨Ackerman 1992:79-80).
히브리 성서에서 다른 남성 신을 위한 애곡하는 예식도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의 유명한 싸움에서, 바알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몸에 제의적으로 깊이 상처를 냄으로써 사망한 식물의 신인 바알을 부르려고 시도하는데(왕상 18:28), 이는 전형적으로 장례 예식이었다. 바알은 또한 그의 다른 이름인 하닫Hadad로도 알려졌고, 스가랴 12장 10,11절에서는 “므깃도 골짜기의 하다드-림몬Hadad-Rimmon을 위한 애곡”에 대한 언급이 있다. 호세아 7장 14절도 역시 같은 의식과 연관되는 것 같은데, 이 구절은 “바알에게 돌아간”(히브리어는 확실치 않다) 자들을 저주하는데, 이들은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그리고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냈다.”
혼동케 할 정도로 많은 여성(과 남성) 신들이 과연 무엇인지와, 그리고 제의적 유물이 어떤 것에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에 앞서,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지중해 동부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지역의 신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남성과 여성으로, 이들은 아마도 보다 우주적인 상위 신들의 특별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서, 우리는 “비블로스의” 바알랏Baʿalat이라는 (바알의 상대적인 여성형의) 이름을 갖는 본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남성 신 바알은 가나안 본문에서 바알 자폰Baʿal Zephon, 즉 “북쪽의 바알”로 나타난다. 바알은 히브리 성서에서 “바알 하솔(하솔의 바알)”; “바알 헬몬(헬몬의 바알)”; “바알 므온(므온의 바알)”; “바알 브올(브올의 바알)”; 그리고 “바알 다말(다말의 바알)”로 나타난다. 위에서 논의했던 쿤틸렛 아주르드 본문에서, 우리는 “사마리아의 야웨”와 “데만(예멘)의 야웨”라는 언급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일군의 학자들은 최고 신이나 여신이 특별히 지역의 제의에서, 종종 하이픈으로 연결된 이름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경향에 주목할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일종의 신들의 “확산diffusion”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신들은 일종의 “융합된” 신들이 되어서 서로 다른 조건 아래 다시 결합할 수 있었다. 결과는 이름과 그 정체에 있어서 엄청난 혼동이었다. 예를 들면, 오랜 시간을 거친 본문상의 증거들의 긴 연결은 다음과 같은 연속적인 방정식을 만들고 말았다: 바알-하닫 = 바알-샤멘(“하늘의”) = 제우스 헬리오 = 헬리오폴리탄 제우스. 이러한 모든 이름들은, 그러나, 서부 셈족의 위대한 최고신 바알, 즉 “하늘/태양의 주”를 반영하는 것이다(바알에 대한 헬라어의 동의어로 제우스와 헬리오스helios, 즉 “태양”이라고 한 것은 당연하다). 같은 방식으로 가나안의 아낫은 헬라의 아테나Athena, 즉 아테네의 호전적인 보호신이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이스라엘의 아세라는 이후에 헬라의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로마의 비너스Venus로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역시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성적인 기쁨의 여신이기도 하다. 유사점은 명료하기까지 하다: 아세라와 아프로디테는 둘 다 바다와 연결되며, 비둘기가 이들의 상징이다. 아프로디테의 연인인 아도니스Adonis는 분명히 보다 이른 페니키아-히브리 단어인 아돈ʾādōn, 즉 “주”를 보존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숭배되었던 여성 신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나의 스승인 프랭크 크로스Frank Cross와 그의 학생들의 책을 살펴보아야만 된다. 그들은 우가릿의 위대한 3명의 여신-아세라, 아낫 그리고 아스타르트-들은 모두 실제적으로 가나안의 위대한 우주적 여신의 “실체화hypostatization”였다고 주장했다. 즉, 이 여신들은 모두가 같은 역할을 담당하지만, 각각은 특별한 지역적인 표현으로, 전통으로, 그리고 제의에서 숭배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것인가? 로마 가톨릭의 경건에서, 특별히 일상적이며, 천진난만한 예배자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많은 “마리아들”-“우리의 과달루페Guadalupe 귀부인”; “우리의 루르드Lourdes 귀부인”; 등-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이 다른 “마리아”가 아닐까? 혹은 많은 모습들guises 가운데 하나가 있단 말인가?
민간 종교는 종종 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성들은 아마도 철기 시대부터 존재했던 가나안의 위대한 어머니에 대해서 자신들의 특별한 관심을 두었을 것인데, 그들이 그녀를 “아세라,” 즉 “하늘의 여왕”으로 알던, 혹은 “이쉬타르”나 “아스타르트”로 알고 있거나 그것은 상관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남성 신 야웨의 배우자로 정확히 인식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녀를 단지 야웨의 보다 “여성적인” 속성이 인격화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아세라와 여성들의 제의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종교에서 여성 신-특별히 주요한 여신인 아세라-들의 기능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가 강조했던 점들은 잘못된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식에 벗어난 사람들”이 단지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남자들은 히브리 성서에서 참 종교를 높이는데 바빴던 것이고. 그러나 내가 예레미야 7장 16-20절과 44장 15-19절을 해석했던 방식이, 내가 남자들도 역시 정경적인 성서 기록자들이 승인하지 않았던 종교적 행습에도 참여했다는 나의 믿음을 분명히 해야만 하겠다. 사실, 양 성 모두에 의해서 실시된 민간 종교가 히브리 성서에서 저주를 받은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금지된 활동들의 목록은 길고 복잡하며, 대부분은 신명기적이며 예언적 기록물들에서 나온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다.
1. 종종 지역 성소들(바모트bāmôt)을 방문함
2. 입석들(마체보트maṣṣēbôt)을 세움
3. 다양한 신의 형상을 제작함
4. 여신을 숭배함
5. 향을 태움
6. “하늘 황후”를 위해 과자 굽기
7. 서원을 함
8. “담무즈를 위한 애곡”
9. 유아나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제의를 수행하기
10. 마르제악marzĕaḥ 축제를 열기
11. 장례 예식을 집전하기; “죽은 자들을 공양하기”
12. 성스러운 장소와 성인들의 축일에 순례여행을 하기
13. 다양한 형식의 천체와 태양 숭배를 하기
14. 제사장의 도움이 없이 점을 보기 그리고 “마법”을 하기
15. 어린아이를 희생제사하기(?)
이러한 모든 것들은, 대부분 위에서 논의했던 것으로, 히브리 성서의 남자 기록자들에 의해서 “우상 숭배”라고, 즉 비-야웨신앙이라고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포함시킨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단지 쉽게 무시되는 소수가 아니라, 그것들을 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기로는, 가정의 환경에서 그것들을 주로 실시했는데, 여기에서 여자들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나는 또한 이 모든 것들은, 최소한 기원전 7세기 개혁이 시도되기 전까지. 부분적으로 “야웨신앙”이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결국,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다른 절반을 길러냈다. 공공에서는 (그리고 특별히 성서 기록자들의 관점에서는) 거의 주변부로 밀려났던 반면, 여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가정의 삶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따뜻한 가정의 종교”의 주요한 관리자였다. 즉 가정은 “공식적인” 제의와 정경적인 성경 신학이 했던 것보다 더 잘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행습을 형성했던 실체였던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일부의 여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자들의 예식들”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학자들 가운데 예외적인 사람들로, 그들 대부분도 (여성 운동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제9장) 역시나 남성의 지배체제를 전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필리스 버드Phylis Bird는, 가렛Garrett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1991년에 “이스라엘의 종교와 이스라엘 딸들의 신앙: 성과 종교적 정의에 대한 반영Israelite Religion and the Faith of Israel's Daughters: Reflections on Gender and Religious Definition”라는 제목으로 신중한 논문집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다른 근대-이전의 사회에서 여자들과 종교에 대한 인종학적 비교연구를 진행했다. 그녀는 어떻게 여자들이 문학적인 전통 내에서 “감추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지를,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일반적인 순환적인 삶과 또한 절박한 삶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 그들 자신들만의 독특한 종교적 행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991:115). 버드의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국가적인 야웨 예식 내에서 종교적 다원주의에 관한 모든 질문은, 이스라엘의 야웨신앙 안에서 기능하는 상징으로의 아세라를 위한 증거와 관련되어, 그 탐구가 막 시작되고 있다. 여자들의 종교는 여신 숭배와 같다고 생각될 수 없으며, 오히려 여자들의 종교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다양한 다른 형식들과 관련해서 연구되어져야만 하는 야웨신앙 안에서, 중요하게 다른 종교적 표현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이스라엘 딸들의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아주 최소한으로 우리가 재구성한 종교의 경계들을 재조사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었던 것보다 훨씬 다른 형태의 경건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역할과 직책에 있어서 성적으로 차별된 구조 안에서 권력의 위계질서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1991:107,108).
듀트 대학의 캐롤 메이어스Carol Meyers는, 성서학자이면서 동시에 실전이 풍부한 고고학자로, 이스라엘 종교에서, 특별히 가족의 삶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글을 썼다. 연속적인 출간에서(1988; 1991b; 1997; 2000; 2002; 2003a; 2003b), 그녀는 일부 여성주의자들보다는 다소 완화된 의제들을 내 놓았다. 그녀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러나 중요하고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즉, 어쨌든 “어머니의 집”은 깊이 논의되었던 “아버지의 집”(혹은 가부장적)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이어스는 “남성 쇼비니즘”이라고 하면서 비난했던 어떠한 흐름에는 반대했는데, 기록자들은 그들 자신의 시간과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성서 기록자들을 변호했던 것이다.
메이어스의 독특한 공헌은 이스라엘 여성들, 특별히 비도시적인 농촌 공동체, 즉 (여기에서 나처럼) 그녀가 최소한 인구의 90퍼센트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격식 없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여전히 여성주의자들 가운데에서조차, “여성에 의해서 형성되는 다양하고, 종종 상당히 평이한, 가정 외적인 것들과의 연결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2003a:187). 다른 측면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은 많은 가정적인 일에 함께 참여하는데,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엄격한 “개인적 대(對) 공적”이라는 이분법은 실제성이 떨어지며 고대의 가족적 삶의 실제적인 역동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생산적이지도 않다(이 부분에서 나는 약간의 염려가 있다). 그리고 가부장적 사회라는 거대한 뼈대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어떤 교조주의적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력하지 않다. 그들이 항상 “피해자”는 아닌 것이다.
메이어스는, 버드와 같이, 또한 사회-인류학적인 이론과 인종학적 배경을 사용해서, “이스라엘 촌락에서 여자들의 스스럼없는 연결망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라면 의심할 바 없이 종교와 제의적 활동에서의 그들의 역할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003a:199). 이러한 “생활사life-cycle”적인 제의들 대부분은 여성의 생리학적인 과정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므로 “일군의 촌락 여성들이 남자들은 할 수 없는 전문가적인 성스러운 전통적 활동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2003a:199). 여자들의 역할들 가운데에는 가족 성소와 절기들을 관장하고, 조상들의 무덤을 관리하며, 서원을 하고, 그와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메이어스는, 비록 자신이 할 수 있었을지라도(2003b에서처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메이어스의 최근 나온 소논문들 중에 하나인, “가정에서 야웨의 집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들의 종교 문화From Household to House of Yahweh: Women's Religious Culture in Ancient Israel”(2002)는, 성서 본문과 현대의 사회학적 연구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은(참고문헌은 화려할 정도다) 고고학만의 특유한 공헌점들을 균형 있게 평가하면서, 여성주의 관심에 대한 성숙하고 사려 깊은 반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제에 대한 남성 혹은 여성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학자들과는 달리, 메이어스는 성서-후기 유대교를 연구했으며, 이스라엘 종교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기도 했던 “마법적 제의”의 연속성도 탐구하고 있다.
나는 메이어스의 책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만 의견이 다른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이스라엘 유적지의 인공유물은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다(2002:297). 만약 그것들이 실제로 그러했다고 한다면(정말로 침묵하고 있다면-역주), 이 책은 절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예식에 대한 고고학적 상호관계
만약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여자들의 (그리고 민간의) 의식들의 특성들에 대한 “고고학적 상호관계”를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성공을 마주하게 된다. (1) 나는 특색 있는 바모트bāmôt, 즉 지역의 성소들을, 고고학적 증거들을 인용하면서, 그 성격과 주변도구들, 그리고 제의들에 관해서 이미 조사한바 있다. 이러한 성소들에서는 남자들이 주도적이었다고 믿을만한 그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기도와 서원, 희생제사와 제의들은 “바른 신학correct theology”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가족의 삶이라는 매일의 거친 실제들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여자들의 목소리들은 확실히 들리며 또한 존중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방의 성소들이고 공식적인 성전은 아니기 때문에, 여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었다.
(2) 입석들(마체보트māṣṣēbôt)은, 위에서 다루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지역 성소들에서 발견되었으며, 그곳에서 그것들은 익숙하면서도, 신과 여신의 임재에 대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징임에 분명했다. 그것들이 지역 신들-(최소한 왕조 후기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 억압적인 성직자들로부터 제거되기는커녕-의 표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그것들에게서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랏 성소에서와 같이, 이러한 입석들이 쌍을 이루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아세라를 나타낸다고 한다면, 여자들은 특별히 그것과 함께 공명했었을 것이다.
(3)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히브리 성서에서 저주받았던 것으로, 지역 성소에서만 이루어졌던 독특한 국면이었으며(다아낙에서 그것들을 만들기 위한 주형틀을 참조하라; 위를 보라),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은 가내 생산물이기도 했다. 양식화된 여성 아세라 테라코타 상들을 제작하는 것은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주형틀과 점토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형태의 가옥들에서 종종 나타났다는 것은 실제로 모든 여자들이 하나는 (혹은 그 이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가족 성소에서 아마도 탁월한 가구였다. 어떤 것들은 가족의 가보가 되기도 했으며, 죽은 자와 함께 묻히기도 했는데, 이는 어떻게든 저승에서의 삶에 아세라의 축복을 지속시키고자 했던 이유에서였다.
(4) 나는 아세라가 가족 예식과 민간 종교에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하여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논의한 바 있다. 그녀와 관련 있는 수 백 개의 여성 상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신을 나타내고 있는 다양한 도상학적 그림들은, 여자들이 “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실제로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반응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심지어 그들이 다소간 남성 신인 야웨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5) “향을 태우는 것”은 문제를 유발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에서 합당한 행위로 보였기 때문이다(위를 보라). 그러나 여전히 또 다시 말하지만, 신명기적 기록자들과 예언자들은 이러한 행습들을 저주했다. 왜? 대답은 명백하다. “향을 태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1) 용납될 수 없는 “가나안”의 행습들과 관련이 있는 산당(바모트bāmôt)에서 분향 제물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2) 야웨가 아닌 다른 신들에게 바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뿔이 달린 제단위에서) 향을 태우는 것에 대한 가장 최근에 그리고 가장 철저한 고고학적 증거들의 연구는 세이무어 지틴Seymour Gitin이 했다(2002). 지틴은 결론을 맺기를, 그것이 공식 종교와 민간 종교 모두에 포함되었다고 했는데, 그 때는 특별히 기원전 7/6세기로, 대부분의 성서 본문이 생겨났던 시기였다. 그러나 만약 분향 제물이 집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자들이 그것을 관장하는 사실상의 비공식적인 “제사장들”이었던 셈이 된다.
(6) “하늘 황후를 위해 과자를 굽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위에서 자세하게 논의하면서, 어떤 여성 상들이 그러한 행습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여기에서 단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러한 풍습이 여성들의 예식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첨언할 수 있을 뿐이다(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그러한 과자를 만들기 위한 주형틀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나무였다고 한다면, 주형틀은 고고학적인 자료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굽는 일은 성적으로 구별된 것이며, 전형적으로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임에 분명하다.
(7) “서원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두로 되는 것이므로, 유일한 고고학적인 증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서원을 구체화시키려고 바쳐진 봉헌 물건에서 그 증거를 찾아야만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위에서 논의했었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증거는 불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 중에서, 반 데 툰van der Toorn(1994)과 베르리너블라우Berlinerblau(1996)는 서원이 여성 제의의 특징적인 부분이었다고 지적했다(그리고 나는 남자 제의도 역시 해당된다고 첨가코자 한다).
(8) “담무즈를 위한 애곡”은, 또 하나의 구두적인 표현으로, 위에서 제시했던 도상학적인 자료에 의해서 단지 고고학적으로만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압도적으로 여자의 활동일 것이며, 담무즈의 연인인 이쉬타르의 죽음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면서 애곡했던 것이다.
(9) 우리는 “의례적인 구절”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제의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례들-물론 가족적인 제의들과 특별히 “종교적인” 것으로-은 다음과 같은 생활사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임신; 출산; 수유기; 할례; 사춘기; 약혼; 결혼; 분만; 건강, 복지, 그리고 번영; 노후의 시작; 죽음; 그리고 장사. 그러나 여성 상들은 거의 확실히 임신과 안전한 출산, 그리고 유아기 내내 아기에게 수유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여자들의 기도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또한 신들이 일반적으로 번영을 축복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호소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의 경우에, 우리는 물질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고학자들이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단한 돌로 된 칼과 말라버린 피부껍질 조각인가?).
(10-11) 1920년대 시리아의 우가릿에서 가나안 신화 본문들이 발견된 이래, 학자들은 마르제악marzēaḥ이라고 알려진 축제의 윤곽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죽은 자를 위한 연회로, 이승에 남아 있는 그들의 영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가나안에서 이러한 축제는 특정한 신과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예식적인 의식과 함께 음식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종종 과식과 과음의 특징을 보인다. 그것들은 죽은 자-본문에서 “르바임Rephaim”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지하세계에 거주하는 자들-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들은 참여를 위해 호출되며, 반드시 지속적으로 공급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마르제악에 대한 본문상의 증거는, 그러나, 모호해서, 가나안 종교에서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제의”가 어느 정도로 존재했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다른 하나의 의식은, 오랫동안 당연시 여겨져 왔는데, “죽은 자들을 먹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가릿에서 작업했던 프랑스 발굴자들의 생각에 기초한 것으로, 이들은 우가릿의 지하의 매장용 방에 지표면에서부터 아래로 “관을 넣어서” “헌주 제물”을 바쳤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에는 이것은 의문시되었고, 이러한 구멍들은 다른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해서 전향적인 생각을 취하기도 한다(1989:97,98).
마르제악이라는 용어는 히브리 성서에서 단 두 번 나온다. 아모스 6장 7절에서 그것은 “기지개 켜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술 취해서 허위적 거리는 사람”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어떠한 어원학적 용어에 기초한다. 여기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회는 멸망에 빠지고 있는 반면에,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게으르게 누워있는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혹평하고 있다. 이러한 못이 박힌 술잔치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혀 갈” 것이다. 두 가지 요점을 지적해야겠다: (1) 여기에서는 장례 예식과 관련해서 그 어떤 점도 주장할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2) 장면은 술 취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이는 어떠한 축제에서건 성서 기록자들에 의해서 용납되어졌다), 상류층의 자기만족과 자부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연관해서 논의되었던 다른 본문은 예레미야 16장 5-9절이다. 이 구절은 특별하게 죽은 자를 위한 다양한 의식들과 관련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예레미야는 야웨로부터 곧 멸망하고야말 유다 왕국을 위해서 애곡하는 그 어떠한 활동도 하지 말 것을 명령받는다. 그것들은 “초상집”에 가는 것을 포함한다; 슬픔으로 “과자를 굽는” 모임에 앉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친척들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살을 베거나 머리털을 밀기까지 한다. 그것은 가나안의 마르제악과 같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아일랜드의 철야와 같이 들리기도 한다. 사실은 그러한 애곡 제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며, 고대와 현대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한 “애곡 제의”가, 의심할 것 없이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종교에서 실시되었던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 했었겠는가 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내세”를 믿는 신앙의 암시가 있는데, 후대의 어떤 본문들에서 “스올”이란 개념으로, 죽은 영이 가는 저승 세계를 가리킨다(잠 9:18). 죽은 자는 종종 엘로힘ʾēlōhîm, 즉 “신들”로 불리기도 하는데, 마치 죽은 자가 이제는 다른 곳에서 신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없었으며, 이는 단지 후기 유대교의 어떤 분파에서만 나타났던 것이다(그들 가운데는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헬라적 사고인) “영혼 불멸”이라는 관념도 매우 후대의 것으로, 단지 다니엘 12장 3절에 의롭게 죽은 자가 천국에서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모호하게 나타난다(아마도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죽은 자들은 “잠을 잔다”; 다니엘을 다시 인용하자면(12:2), 우리는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비록 여기에서 그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의 빛으로 본 이스라엘과 유다의 장례 풍습은 단지 최근에 와서야 탐구되어졌는데, 엘리자베스 블록-스미스Elizabeth Bloch-Smith의 포괄적인 책인 「유다의 장례 행습들과 죽은 자들에 관한 신앙들Judahite Burial Practices and Beliefs about the Dead」(1992)이 그것이다. 그녀는 본문상의 증거들을 전체적으로 개괄하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바와 같이, 죽음은 삶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예식에서도 그러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 “성스러움”과 “속됨”을 구별하는 현대적인 관념은, 누군가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인 양, 상상할 수 없다.) 다음으로 블록-스미스는 고고학저거 정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여기에서 그녀의 개관은 너무나 잘되 있어서 여기에서 그녀의 논지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매일의 종교적 활동들은 고고학적 기록물 가운데서 그리 흔적을 남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과 관계된 제의들은 (우리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상당한 수준의 증거를 남겨놓는데, 왜냐하면 무덤들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어지럽게 그리고 종종 파괴된 가정의 창고들에서보다 완전한 물건들을 더 잘 보존하기 때문이다. 블록-스미스가 논의했던 품목들 가운데 어떤 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역시 다루었던 것으로, 지하의 “긴 의자 무덤들”안에서 발견되었다:
자기 대접들(대부분은 일상적으로 가정에서 쓰인다)
보석류
부적들, “도박용 조각들”
“모형” 가정용 가구들
점토로 만든 “딸랑이”
다양한 개인적 물건들, 삶의 흔적들
도구들
남은 음식들
(비록 드물지만) 여성 상들
동물 모양의 상들 (대부분이 말들)
이러한 목록들에 더해서, 예루살렘의 바위를 깎아 만든 어떤 “왕실의” 무덤은 매장되지 않은 묘비 혹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가지고 있다. 매우 극소수의 무덤들에는 히브리어 비문이 나와 있기도 하다. 예루살렘에 한 곳에는 이사야 22장 15-25절에 언급되고 있는 기원전 8세기 왕실의 관리 책임자인 “셉나Shebnah”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그 무덤은 오늘도 여전히 볼 수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다:
이것은 (세브니-) 야후의 무덤으로,
이는 “집을 관리하는” 자이다. 여기에는
은이나 금이 없고, 단지 그의
유골들과 그 종 된 아내의 유골만이
그와 함께 있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이 무덤을 여는 자에게 (블록-스미스 1992:210에서 인용함)
위에서 논의했던 나의 동시대의 키르벳 엘-콤 무덤의 비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완전한 히브리 무덤 비문들 중에 몇 안 되는 확실한 것들 중에 하나이며, 이것은 죽은 자들에게 안녕을 구하는 기도이다.
죽음과 장사를 포함하는 다양한 의식들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 종교의 제의들의 집합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삶에서 주요한 관리자인 이상,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숙련된 여성 애곡자들”은 예레미야 9장 17절에 나온다. 남자들도 역시 애곡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중요한 것을 하는데 필요하며, 그들의 행동들은 무덤 제사에서 분명했다. 전반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무덤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죽은 자가 기억되고, 기념되며, 여전히 “영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서 본문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점쟁이로서 소환되기도 한다. “그림자” 혹은 영들(“르바임,” 즉 치료자)은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으며, 그들이 묻힌 가족의 무덤은 세대를 거쳐서 재사용되며 종종 방문을 받는다. 죽음이 “조상들과 연합한다”라는 성서의 개념(창 25:8; 35:29; 민 20:24; 삿 2:10)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고고학적 증명은, 무덤의 긴 의자 중에 하나 아래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보관함이다. 여기에서 이전의 많은 매장지의 유골들은 새로운 몸이 긴 의자에 안치되기 전에 수집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과 고고학적 증거들 사이에 꼭 “들어맞음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단지 한 개의 질문만이 남아있게 된다. 성서 기록자들은 왜 그러한 예식들을 “죽은 자를 먹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지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 행습을 거부하지 않았고, 단지 음식이 처음에 희생제사로 바쳐질 때, 그리고 “십일조”가 포함될 때(신 26:14); 점술이 행해졌을 때(신 18:10,11; 레 20:6,27); 혹은 “정결”법이 침해될 위험에 빠졌을 때(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이; 민 19:11,16).
(12) “성인”으로 인정받은 자들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은, 보다 확대된 “순례 장소” 여행에서와 같이, 고대의 모든 종교에서처럼, 가족 예식의 일부분이었다. 무덤은 일반적으로 숭배되었고(위를 보라), “거룩한 사람”의 무덤들은 특별한 그러했다. 오늘날 중동의 무슬림 민간 종교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데, 지방에 흩어져 있는 성인들의 웰리(우물-역주)wêlis 혹은 무덤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독보적으로 촌락의 여성이다. 많은 경우에, 그곳에 묻혔다고 알려진 “성인”은 익명의 사람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허구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건의 행동 그 자체이다; 그곳에서 기도와 서원이 엄숙히 선언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롤 메이어스가 기술했던 “여자들의 인간관계”가 상당할 정도로 나타나있다(위를 보라).
메이어스와 필리스 버드 모두는 현대 중세 세계의 여성 제의에 대하여 인종학적인 사례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아리조나 대학의 나의 동료 앤 베터리즈Ann Betteridge도 그러하다. 이들 학자들은 모두가 같은 현상을 다루었다. 읽고 쓸 수 없고, “정통신학적이지 않으며,” 배타적인 여성 집단들과 그들의 행동들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종교적인 관심들을 표현해주고 있다-특별히 거의 읽고 쓸 수 없는 여성들로,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여성들을 현대적인 차원의 대응이 된다. 무슬림 여성들은, 가디들gadis와 이맘들imams의 관할 아래 공식적인 예배에서 제외되며, 그들 스스로는 코란을 읽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위한 종교적이며 깊은 경건의 삶을 이끌 수 있는 “대안적” 방법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전형적으로, 소규모의 촌락과 시골의 여성들은 형식도 없고 비정규적으로 모여서, 음식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지역의 웰리wêli, 즉 전통적인 거룩한 사람 혹은 성인의 무덤(아마도 실제나 가상의 여성도 있었을 것이다)을 방문했었다. 그곳은, 남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보편적인 일상의 삶의 제한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곳이어서, 여성들은 먹고 마시면서, 서로 교제를 즐기면서, 떠들썩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면서, 그리고 종종 북이나 피리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것들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흥겹고도 해방된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들이 서구인들에게는 단순한 가족 소풍 정도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무슬림 여성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필요와 열망에 대한 진정한 표현이며, 남자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거부된, 특별히 무슬림 성직자들과 “공식적” 이슬람에 의해서 거부된 여성들의 종교적 필요와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 과연 “더 나은” 무슬림일까?
나는 그러한 여자들의 예식을 직접 본 일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세파르디Sephardic(동양적) 여성들 중에서였다. 1967년에 예루살렘 전쟁이 발발되기 전에, 예루살렘 서부에서 일군의 경건한 유대인 여성들이, 1948년 이래로 유대인에게는 제한구역이 되어버린 요르단 구역의 베들레헴 근처의 “라헬의 무덤”에 가기 위해서, 악착같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반항했었다. 무슬림의 웰리wêli는 그곳에서 중세 시대보다 앞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성서의 라헬이 묻혔던 장소와는(창 35:19,20), 실제로든지 상상에 의한 것이든지 간에, 그 어떤 관련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십중팔구는 무슬림 성인의 무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유대인 여자들은 아이를 낳다가 숨진 라헬에게 아기를 얻기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 그곳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통했던 것이다! 약 아홉 달 뒤에,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지는 갑자기 출생률이 증가했음을 보도했다. 물론, “실제로” 발생한 것이라면 의기양양한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라헬의 무덤까지 가서 기도하고 살아와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신들의 어리벙벙한 남편들에게 자신들의 흥분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자연의 섭리인 셈이다. “미신”이야말로 “실제” 종교는 아닐까? (자세한 사항은 아래를 보라.)
기념비적인 매장지 성소들에 대한 고고학적인 확인은 오래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지하의 무덤이 그랬던 것과 같이, 그것들이 노출되어 버려졌고 또한 많은 파괴적인 과정에서 취약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무슬림의 웰리들wêlis은 모두가 매우 후대의 것으로, 그것들이 “성서적”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베들레헴 근처 “라헬의 무덤”; 나블루스Nablus 근처 “요셉의 무덤”; 헤브론의 “족장들의 무덤”; 그리고 많은 다른 거룩한 장소들). 이러한 유대인이나 무슬림의 “거룩한 장소들” 중에 그 어느 것도 믿을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정말 모두가 후대의 것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최소한 하나의 “있을 법한 순례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예루살렘과 매년 마다 그곳에 순례를 가야만 한다는 본문 상의 증거는 제외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고고학적으로 최근까지 확증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계속해서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나이 사막 동쪽에 아인 엘-쿠데이랏ʿAin el-Qudeirat라는 샘 근처에, 오늘날 성서의 가데스-바네아라고 알려진 작은 오아시스 언덕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시나이 광야에서 불순종한 결과로 약 4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고 말들 한다(민 13,14). 그 장소는 1950년대와 다시 1972-1982년에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그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성채들은 그 연대가 기원전 10-6세기의 것으로, 그 모퉁이 탑은 네게브-시나이에 있는 다른 성채들과 닮았다.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것은 그 장소에서 발견된 것이 없었으며, 실로 일반인들의 장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러했으며, 몇 번의 집중적인 탐사를 했어도 찾은 것은 없었다. 성채에는 “가정적인” 거주의 흔적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작은 막사 부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가장 최근의 요새에서는 다른 것들 가운데 제대offering stand와 조각난 동물 모양의 상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해당하는 그 어떠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출애굽”의 연대를 통상적으로 기원전 13세기로 잡는 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거주 형태는 가데스-바네아가 상당히 후에 “순례 장소”가 되었다는 제안을 지지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은, 오경이 점점 모양을 잡혀가는 과정에서 이제 “시나이 계약” 전통이 신성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기원전 8-7세기), 이렇게 멀리 떨어진 시나이 경계지점까지 종종 들렀을 것이다.
(13-15) 태양과 천체 숭배, 마법, 그리고 아이 희생제사는 위에서 논의한 바 있다. 처음 것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주로 도상학적인 것으로, 인장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다나악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제대와 나오이naoi에서 표현되는 것들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마법의 사용은 많은 부적들, 복사뼈들,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잘 나타나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 희생제사는 아마도 발생했을 것으로, 그러나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떠한 고고학적인 흔적을 남겨두지 않는다(그것은 카르타고와 같은 페니키아 사람들의 장소에서와 같은 원리이다).
그 밖의 인종학적인 평행적 부분들
이스라엘의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수잔 세레드Susan Sered의 최근에 출간된 인종학적 연구서인 「제의 전문가로서의 여자들: 예루살렘의 나이든 유대 여성들의 종교적 삶Women as Ritual Experts: The Religious Lives of Elderly Jewish Women in Jerusalem」(1992)는 여자들의 예식에 대하여 통상적인 관찰 이상의 보다 자세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에서, 나는 세레드가 우리에게 고대 이스라엘의 여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종교적인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창문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레드가 면접조사를 했던 동양의 여자들은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예멘족의 이주민들로) 가난에 찌든 사회의 하층민 부류로 사방에서부터 온 자들로(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본래 고향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긴밀히 맺어진 민족 공동체 안에서 삶을 계속했다.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읽고 쓸 수 없는 상태로 더욱 심하게 고립되었다. 많은 이들이 과부이거나, 소원해진 남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과 손자들, 그리고 다른 혈연적인 친척들로 구성된 대가족 사회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세계”이다.
여자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만나는 그 어떠한 개별 군인들에게 자비로운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학과 대중적인 삶이라는 보다 거대한 세계라는 것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그들은 그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들의 “애국주의”는 그들 스스로를 과거, 현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 간의 연결로 이해될 뿐이다. 그들은 “전통 가치의 관리인”이 됨으로써 이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자들이 그들이 숙련가로서 활동하고, 자신들의 경건을 구성하는 제의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들의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난에 찌든 일상의 삶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세레드는, 내가 여기에서 논의했던 것에 완전히 동의하는 훈련된 민족지학자의 기술과 결합해서, 내부적으로 이 공동체가 종교적인 행습들을 기본적으로 가르쳐왔었다는 연구를 제안한다. 그녀는 이전의 남자-중심적 학자들을 고발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들은 여성을 주체로 보기보다는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딧 바쉬킨Judith Bashkin을 인용하는데, 이 사람은 “랍비적 유대교가 남성이 중심에 있는, 남성의 세계를 상상했던 현자 집단에 의해서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다”라고 인지했다(세레드Sered 1992:138). 세레드의 목적은 그의 경건한 유대의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성, 거룩함, 그리고 인간의 영성으로서 그러한 선입견적인 관념에 도전하려” 했다(1992:3).
나는 여성 동료들(캐롤 메이어스Carol Meyers와 벧 나크하이Beth Nakhai)을 통해서 세레드의 책을 발견하였는데, 나의 책이 타자본으로 나온 이후였다. 그러나 현대 종교를 재조사하는데 있어서 세레드의 관건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재고하려는 나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그녀는 가부장적인 사회와 “규범적인 종교”를 모셔 받드는 문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번영했던 “가정적 경건domestic piety”(1992:26-33; 90-102)에 집중한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관념 세계에 있는 종교성과 도덕성의 서로 다른 의미들을 비교한다. 남자들의 미츠보트mitzvot(계명들)는 회당에 가는 것, 토라를 연구하고 준수하는 것, 기도와 신비적인 반향-모든 문자 그대로의 실천-으로 구성된다. 여자들의 미츠보트mitzvot는, 이와는 달리, 전통 가옥을 지키는 것, 안식일과 모든 축제일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 핵가족과 대가족 사이에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건강과 치유 그리고 그들 자신의 행운을 위한 기도와 서원을 하는 것, 관대한 활동들(자선), 노래와 이야기들 그리고 기적들을 보존하는 것, 성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 명예로운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가정적 종교”로, 남자들에 의해서 판에 박히게 무시되어지거나 평가 절하되어왔던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그 안에서 “제의 전문가”로서 재인식되어졌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세레드는 전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과거의 학문적 종교 연구가 “기껏해야 자민족 중심주의”였을 뿐이라고 웅변적으로 사례를 제시한다. 남자들의 경건 행위들과 그 동기를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중요하고, 참된 것”으로 여기려던 경향들은, 반대로 여자들의 그것에 대해서는 모자라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은, 심지어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세레드는 “거룩함을 경험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촛불을 밝히는 여자보다 예시바yeshiva의 랍비가 더 즉각적일 수 있다고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라고 선언한다(1992:33). 그것이 바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경건을 고려하고 있는 이 책의 주요한 논지인 셈이다. 성서학자들은, 남성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신앙적인) 히브리 성서를 기록했던 남성들의 종교를 합법화하고 “영성화하는데” 힘을 실어왔었다. 그 반면에 여자들의 (거의 실제적인) 종교는 무시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고대의 민간 종교를 복원함에 있어서, 존중하는 자리에서 균형을 맞추기를 희망한다. 바로 여자들과 동시에 남자들을 위해서.
세레드가 도움을 받은 쿠르드족 유대인 여자 정보제공자가 제공한 독특한 제의들 중에 몇 몇은 여기에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우리의 탐구와 연관되고 있는데, 그것이 가족의 생명에 관한 것으로 집중되고 있는 측면에서, 특별히 촌락 지역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여자들의 의식들은 단순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외부인에게는 거의 모호한 것이다. (1) 첫 번째는 정성들여 준비한 가족의 식사로, 특별히 안식일 식사-“돌봄의 요리”-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그러므로 이것은 도덕적인 준수임과 동시에 심히 경건한 행동이다. (2) 다음으로 다른 여자들, 다른 아이들, 그리고 확대 가족에서의 친척들과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사회화하기”의 차원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족의 결속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3) 많은 제의들은 기적을 통해서 신앙과 관련을 맺게 되는데,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실제적인 지식이다: 임신, 출산, 건강과 안녕, 물질적인 축복. 그러므로 여자들은, 물론 경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실제적인 일상적 경험에서 얻은 민간 지혜에 기초해서, “불운Evil Eye”을 내쫓는 자신만의 주문을 가지고 있다. “마법”으로서 종교인가? 물론이다!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4) 하나님과의 접촉(여자들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한 많은 제의들에 첨가해서, 이들 여자들은 지속적으로 그들 자신의 직관적인 기도를 읊조리며, 종종 서원을 서약하고, 토라와 회당의 전례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읽을 수도 없었고 또한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금요일 밤에 초는 밝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적인 축복문을 암송하지도 못할 정도로 히브리어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자들에게나 라비들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전형적으로 “우리는 뭘 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음을 주목하라; 내가 논의했던 바와 같이, 남자들은 이론화하고 싶어 하고, 반면에 여자들은 종교에 관한 무엇인가를 직접 하기를 원한다.) 세레드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여자들의 기도와 서원은 종종 말 보다는 “신체 언어”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회당에서 (남자들만 출석 요구를 받았지만, 여자들도 결국 함께 가게 되었을 때) 남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토라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토라 두루마리가 의식적으로 펴지게 될 때, 여자들은 그것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눈을 하늘을 향하여 들어 올리며, 침묵으로 소원을 빈다. (5) 마지막으로, 성인들의 무덤과 축제일에 정례적인 순례여행을 하는 것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한데, 특별히 많은 종교 전통들의 여성들에게 그러하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들은 경전을 암송할 것이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따로 모여서 기념비에 입을 맞추고, 전통 민요를 노래하며, 그들 자신의 기도를 읊조린다(대게의 경우 기적을 간구한다). 다른 경우에, 일군의 여자들과 아이들 그룹이 따로, 잘 준비된 소풍을 떠나서, 하루 종일 들 판위에 앉아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자기들 인생의 (종종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곤 한다. 그리고 때때로 노래와, 박수, 그리고 떠들썩하게 춤을 추고, 남자들과 그들의 제약을 받지도 않게 된다.
위의 내용은 전혀 “세속적인” 활동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들이 단지 “미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토라 유대교의 “위대한 전승”에서처럼, 종교적으로 깊이 있는 제의이며, 합법적이며 실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작은 전승”의 일부분인 것이다. 세레드는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1969)에 찬성하며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종교적으로 복잡해지려고 이론적인 면으로 스스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 . . 누군가의 도덕적 통찰력이 다른 이의 도덕적 경험에 비추어 불편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걱정스러운 생각은 소위 “원시” 종교의 단계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소위 말하는 “문명화된” 것에서도 같다고 하겠다(기어츠 1969:22; 세레드 1992:49에서 인용).
짧게 말하자면, “도덕”과 “마법”을 나란히 놓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으로, 이는 “신앙” 대(對) “행습” 혹은 “신학 대(對) 제의”를 나누는 것과 같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최선의 상태로, 경건과 도덕 모두가 결합되어 있으며, 균형을 맞추고 있다. 비록 내가 보다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자로써 후자에 보다 더 강조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세레드는 (그리고 나는) 여자들의 경건-그들의 “영성”-이 “열렬하면서도 분명치 않은 감정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와는 반대로 가족의 안녕이라는 관심을 넘어서는 그 어떠한 도덕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전혀 결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들만의 세계이며, 그 세계 안에서 올바른 관계는 이들 여자들이 책임을 지는 전부라고 하겠다. 그들에게는 공공의 삶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라는 것은 없었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소규모의 집단 안에서 지켜지는 가족 제의와 자비심을 도덕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미츠보트mitzvot(계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상당히 많은 시간을 토라에 코를 박으면서 보내고 그들 가족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는 남자들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길 정도이다. 그들의 제의적 도구라는 것들은 부엌의 조리도구이며 양초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은 그것들을 복을 빌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레드가 언급한 여자들의 제의들 상당수는, 만일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내가 위에서 제안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고고학적 정보라고 부르는 것으로 추적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다. 신체 언어, 저속한 기도, 민간 설화, 자선하기, (우리는 램프를 발견했지만) 초에 불을 밝히기, 혹은 심지어는 성인의 무덤들을 방문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이 모든 것들과 달린 연관된 많은 의식들-대부분은 “제의적 전문가”로서 여자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은 고대 이스라엘 에서 일반적인 가정 종교의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인공유물의 자료들이 히브리 성서의 본문상의 기록과 함께 상상적으로 그리고 마음이 통하면서 읽혀지기만 한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은 극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민간 종교에 대한 관련된 고고학적 정보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단지 적당히 이용되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세레드가 말하는 현대의 유대 여자들과 그들의 독특한 경건의 표현을, 내가 믿기로는 역시 독특한 것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여자들과 그들의 경건을 강력하게 조명해줄 수 있는 “사례 연구”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두 공동체 사이의 유사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이 둘 모두의 여성 집단은 가난하고, 읽고 쓸 수도 없으며, 거의가 무시되어지거나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2류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과 행습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러한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 분명하다-그러므로 그들이 창조한 것은 “작은 전승”이었다. 내가 위에서 한 비교는, 여자들과 그들의 종교적 전승이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그것과 그들의 “위대한 전승”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실제로 모든 여자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이다. 민간 종교, 즉 우리가 여기에서 재구성하려고 애를 쓰는 “대중 종교”는, 그것의 주요한 강조가 여자들의 예식들과 가족 제의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에 강조를 두고 있는 반면, 거의 모든 남자들의 종교에서도 역시 같다고 하겠다. 최소한 그것은 성서를 기록했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1% 남자들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들(일반의 남자들-역주)도 역시 “민간”에 속했던 셈이다.
만약 종교적 활동에 관하여 위에서 다루었던 모든 양상들이 가족의 예식의 일부분에 해당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즉 주도적인 역할은 아닐지라도 여자들이 전반적으로 중요한 일에 활동하는 그런 가정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수호신인 아세라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을 것이다. 남성 신인 야웨는 머나 먼 하늘-전쟁을 좋아하는 신으로, 종종 화를 내고 복수심에 불타며, 그리고 심지어는 잘해도 접근하기가 어려운-로 떨어져 있다. 아마도 성서를 썼던 남자들은 야웨를 “당신을 도울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 즉 당신에게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줄 수 있는 분으로 기술했을 것이다(창 49:25). 그러나 젖과 태를 가진 여자들은 그 대상을 어머니로 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결국 신들은 짝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래야만 어떠한 선택을 항상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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