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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페이건,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2007)]

진실과열정 2007. 10. 25. 09:56

 

브라이언 페이건,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제목: 오늘, 하늘을 보다.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과학적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아마도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계절풍의 변화를 미리 알고 대승을 거둔 것과 반대로 나폴레옹 군대의 특유의 기동성이 전날 내린 비로 발이 묶임으로 대패를 거둔 것처럼 회자될 뿐이 아닐까?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건의 ‘숨은 공신’ 혹은 ‘발등 찍은 도끼’처럼 말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과학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기후는 역사에 본질적일 수 있다는 주장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역사라는 것이 전지구적인 움직임의 일부라는 해석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톡톡히 과학의 덕을 본 것이 아닐까? 그러한 주장에 위대한 선사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은 지난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기원전 20,000년 전부터 살펴본 지구의 역사는, 근본적인 지구의 움직임(이심률, 기울기, 축의 세차운동, 54, 105)으로 인해 생겨난 기후의 온도변화에 따라서, ‘적응과 실패의 결과’로서의 문명의 역사였다.


   수렵-채집 생활의 장점(!)이었던 유연성과 소규모가, 촌락의 등장으로 잠재적인 취약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반(反)문명적’ 해석과(98, 138), 기원전 1만 년 전 ‘크로마뇽인’으로 명명된 원시인류가 동굴 안에 남겨 놓은 겹겹의 그림이라는 것이 빙하기의 산물이며, 이는 반대로 빙하기가 끝남과 동시에 동굴의 역사는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졌다는 해석(118)은 통찰력이 돋보인다. 그는 계속해서 탁월한 견해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기원전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대가뭄과 뒤이은 온난화로 인해, 인류는 식량 생산 자체가 아니라 땅에 적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고, 홍수와 가뭄의 주기를 기억하는 것이 인류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165). 하지만 기원전 5600년경, 인류는 최대의 재앙을 만나고 만다. 바로 지중해의 상승으로 에욱시네 호수가 흑해로 변해버린 사건이다. 이것은 조약한 문헌적인 근거들이나(174!) 첨단 과학적 근거에 힘을 얻었다(171).


   대홍수의 기억은 인류에게 더욱 땅과 물에 적응하도록 만들었고, 기원전 3800년경 갑자기 건조해진 기후변화에 대해서 땅의 사람들은 관개시설을 다스리기 시작했고(200), 최초의 문명사회인 수메르 문명이 그들의 창조설화에 언제나 물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205). 그럼에도 재앙은 그치지 않았고, 이번에는 불이었다. 화산은 지역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재앙이었기에, 기원전 2200년경 지구는 약 300년간 심한 가뭄에 몸살을 앓고 만다(213). 이집트의 왕조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는 것은 다른 일반 고대근동 역사책에서 언급하지 못하는 탁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점차 문명세계가 자리를 잡아가던 기원전 1200년경, 한 차례의 광범위한 가뭄과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현상으로(기원전 1159년 헤클라 화산, 286), 문명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266-7): 히타이트, 미케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해상민족’의 등장은 신화적인 망상은 아니었다.


   이렇게 저자는 기후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인류가 어떻게 화려하면서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철저하게 기후의 선물이었다: “기후는 문명의 형성을 돕지만 자비로운 방식으로 돕지는 않는다.”(362) 10만년의 대주기(33만 5천, 24만 5천, 13만 5천, 1만 8천)와 그 안에서 4만년의 소주기가 일종의 지구의 흐름이었다(55)라는 자료 분석은 인류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며, 그러므로 온난화가 직접적으로 산업화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현세대의 지적과오를 지적하는 부분도 높은 산에 올라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혜안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선사시대를 다룸에 있어서 문외한인 대부분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부록으로 어휘설명을 실어주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다음은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대근동의 일면이다: 기원전 3000년 경 자연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인류는 도시라는 안전장치를 고안하게 된다.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28). 여리고는 교역망의 연결점으로 역사상 중요한 위치였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간의 사회화 현상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이었다(160). 농경과 관련해서 이집트는 황소의 의미를 체득하기에 이르렀다. “황소는 남자다운 리더십의 상징이자 중요한 족장의 상징이 되었다. ... 소는 재산이며 왕권 자체였다.”(235) 황소 모티프로 상징화된 제국의 등장과 그 이후 왕권 강화로 ‘개혁’된 종교의 기능과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다. 고고학적인 발굴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소의 기능을 보여준다(238). 특별히 정복자 이미지는 반대로 민족의 이동을 반증하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238, 243).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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