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2007)]

진실과열정 2007. 9. 21. 13:59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이한음 역. 서울: 김영사, 2007

 

전쟁은 내가 준비된 상태에서 진행되기 마련일 것이다. 상대만 준비되었다면 그 전쟁은 비극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너무나 탄탄한 준비를 해 온 것 같다. 여러 선전포고가 끝나고 드디어 스위치를 눌렀다: The God Delusion(2006)

 

저자는 21세기의 지구촌 사람들에게 원시적인 신의 망상('부츠카', 574)에서 벗어나 자연선택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다윈주의(다윗주의가 아니다!)라는 '과학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독자들을 '각성'시킨다. <= 이렇게 어려운 개념을, 저자는 굉장히 쉽게 전달한다. 왜냐하면 유독 금기시되는 부분을 건드리면 사람들은 높은 집중도를 보인다는 것을 저자는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나라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신론자'의 서러움을 적극적인 논쟁으로 승화시킨다. 바로 종교, 다름아닌 기독교의 뇌관을 해체하면서 말이다.

 

서의 역사성을 의문시하고(150f, 사실 '역사성'의 개념은 또 다른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비유로 보는 접근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432, 이는 Marcus Borg:2001에서 얻은 통찰이다.].), 그러한 의문을 과감히 던질 수 있는 엘리트야 말로 바람직한 21세기형 인간형이라고 소개한다(159f, 162, 348). (내가 엘리트가 아니라서 오해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대다수의 비엘리트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의할 것인데) 저자의 논지를 단순화시키면, 무신론자일수록 엘리트라는 논리가 된다. 그리고 조금만 삐딱한 독자라면 머뭇거리지 않고 저자가 혹시 인종주의자인가(255, 다행히 그는 분명하게 부인한다[400]) 혹은 엘리트들만이 살아남아야 하는 호모사피엔스의 자연선택을 조장하는 것인가(449, 516)를 의심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지속적으로 논지를 진행한다. 무지의 경외심(물론 종교)보다는 이해의 경외심(역시 과학:진화)을 선택해야 한다(181, 196f). 이것은 종교가 가려놓았던 신비가 풀어지는 (다시 강조하지만, 224) '각성'을 통해서 이다. 이것은 현재가 '비개연성'을 잣대로 볼 때, 지적설계(신의 또 다른 명칭)보다는 자연선택에 좌우된다는 고백이며(187ff), 이것은 흥미로운 '여섯개의 손잡이'에서 탁월하게 제시된다(244ff).

 

종교, 도덕, 혹은 죽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린다. 다윈주의 안에서 모든 것은 밝혀지기 때문이다(여기에서는 마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를 보는 것 같은 스릴이 느껴진다). 종교는 밈(번역자가 영어로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몇안되는 아쉬움)이라는 복합체 내에서 생존할 수 있는데(306, 314f), 내게는 단지 "종교는 계몽주의 이후에는 통용되지 않는 구식일 뿐이며(265), 아이들의 것이며(287), 유식한 말로 '빈커현상'일 뿐이니(534),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조롱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도덕 역시 이타주의의 진화로(332f), 보편도덕문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달관적 자세를 보인다(340f).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간통죄폐지론자임에 분명하다(399). (대부분이 그렇지않겠지만) 의사들이 환자를 온전한 몸(You)으로 보기보다 '대상(It)'으로 보는 것처럼, 저자도 죽음은 그것일 뿐이다(552).

 

그러나 그는 (말은 안했지만) 윤리적이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554). 왜냐하면 종교보다 더 좋은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557). 도킨스는 신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믿으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569). 이렇게 과학은 신의 망상을 대체하는 각성이며 진화의 완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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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탁월한 무기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반사'이다(콧물을 흘리며 노는 아이들이 공격을 받으면 '반사'하는 놀이). 저자는 정반대의 논리로 승부를 건다. 다시 말하면 논리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상대방의 콧물에 역겨워하는 스타일이다(131). 그러므로 어떤 독자(나같은 독자)는 단순한 '지적 익살'로 일관하는 도킨스의 자세에 게의치 않는다(133). 저자의 방식은 둘째로 치고, 저자의 타겟 역시 모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엇을 공격하는 것인가? 종교인가? 종교인인가? 신인가? 사람인가? 내가 만약, 도킨스의 학생이라면 모두가 마땅히 A+을 받고 지구촌을 위해서 엄청난 공헌을 했고/하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약인가? 만약 그 훌륭한 도킨스의, 그 훌륭해야할 학생이 (물론 나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반인륜적인 행동을 했다면, 내가 누구를 비난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도킨스를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킨스는 종교인과 사람을 들먹거리면서, 종교와 신을 싸잡아 비난한다. 도킨스의 학생의 잘못은 도킨스 자신의 형벌이다. 도킨스 솔직해지자. 결국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대한 불만인다. 이들은 정치가에서부터(321f, 386ff, 392, 446, 486), 종교적싸이코까지(319-23, 445, 452, 464, 509) 다양하다. 이것을 '종교'로 매도하는 것은 비약이다(453). 더구나 기독교를 공격한다고 하지만, 그의 미사일은 가끔 엉뚱한 곳에 떨어지기도 한다(253, 548).

 

독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내가 저자에게 동의하는 것은 '근본주의'는 신의 유일한 뜻이 아니라는 것이며(저자가 바트 어만에게서 공감했다는 점은, 반대로 기독교 교육을 되돌아보게 한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자세이다. 저자는 각성의 가치를 높였다. 중요한 가치이다. 다윈주의 자체의 깨달음은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아쉬운 점은 단지 다윈주의의 진행(과거)을 밝혀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윈주의 자체를 평가할 수 있어야 겠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다윈주의가 필요한 것 같다. 이는 다윈주의의 선택이론 자체를 밝혀냈다면, 그것 자체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이론이 전부라면, 소위말하는 '엘리트 아리안족'만이 살아남아야 한단 말인가? 약자를 보호하는 역설이 종교인/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종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과거를 멸시만하지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서로 노력하는 것이, 내 생각엔, 자연선택의 방향이 아닐까?

 

최근에 신학계는 과학과의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물론 너무 늦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이 책으로 종교가 마치 과학과 견원지간으로 매도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일 것이다. 종교인들 역시 '분발하라는 따끔한 충고'로 받아들이며, 과학자들을 정죄(무엇을 가지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킨스'(Dawkins) 때문에 '던킨'(Dunkin) 도너츠 불매운동을 벌리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2007.9.21

진실과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