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영화관련), 영화가 고대신화에 주목하는 현상에 대해서, 아마도 장차 '길가메쉬'라는 제목의 영화도 나올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신화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다보면 결국 '길가메쉬'로 머무르기 때문이다.
신대원 시절 구약학 엄원식 교수님은 고대근동문학과 성서의 비교연구에 온 정열을 다 바친 물적흔적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ANET라는 책을 소개받고 고대근동의 기록물들을 읽어보면서 창세기의 역사성을 비교문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한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접근 한 책은, 장일선 교수의 [구약세계의 문학]에서 ANET의 짜깁기를 읽어보았지만, 도통 먼 뜻인지...
아마도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ANET가 고대근동의 기록물들을 문자적으로 번역했다면(물론 수많은 각주와 함께), 장일선 교수의 그것은 ANET의 유명한 부분을 한글로 번역한 것 뿐이 아닐까(물론 몇 안되는 미주들과 함께)...
김산해라는 작가는 초면이다. 서문에서 수메르어를 직접 번역한 것을 보니, 고대근동어에 실력을 갖춘 전문가라고 생각된다.
수메를에 관해서 두번째 책을 내면서 저자는 길가메쉬라는 인물에 집중을 했다.
다행인 것은 단순히 고대어(수메르어/아카드어)를 음역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 한글화 했다는 점이다(아마도 새번역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작 수메르인 자신들은 '빌가메쉬(Bilgamesh)'라고 불렀을 그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이다(bil-ga: 늙은이/조상 + mesh: 젊은이/영웅 =>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된다'는 의미로 영생을 추구했지만 결국 죽음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그렸다; p. 69).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과 신의 결합으로 태어난 길가메쉬는 그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절대폭군의 모습으로 외곡시켰다(초야권: 결혼전의 여성의 첫성경험을 독식한다는 의미). 이것은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분화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백성들의 원한에 더 이상 참지못한 신들은 맞수 엔키두를 탄생시켜서(동물들과 동일한 본능의 화육으로 나타남), 결국 종교적 창녀를 통해 인간화 과정을 겪게하여 길가메쉬와 맞서게 한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이 둘은 싸움 끝에 친구가 되어,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된다. 길가메쉬의 두려움을 모르는 철부지 용맹으로 후와와라는 산림나무의 괴수와 하늘의 황소를 죽이고(그러나 그 과정은 영웅의 모습이 사라지고, 겁쟁이와 신적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신들의 노여움만 사게 된다. 결국 친구 엔키두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길가메쉬는 죽음의 두려움을 알고 영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게 된다. 지혜자는 죽음의 힘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하지만, 한가지 기회를 가르쳐준다. 바로 영생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길가메쉬가 힘들게 얻은 영생의 열매는, 아이러니하게도 쉼을 위해 수영하는 도중 뱀이 물고 도망가 버리고 만다. 영생이 날아간 이후 길가메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당당하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저자는 자신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자부심을 마음껏 표시한다. 성서보다 앞서고 성서의 모티프를 제공해 준 것이 바로 자신이 번역한 글을 통해서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가치는 수메르에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종교의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순히 한국인에게 있어서 길가메쉬라는 어려운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있었다. 단순히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끝없는 권력이나 재물에 추구하려는 단세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돌이켜서 삶과 죽음이라는 고대인들의 정신을 통해서 무언가 배워나가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길가메쉬의 경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아직은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메쉬가 겪었던 것 처럼, 우리도 "성인을 향한 통과의례"가 필요한 것 같다(p. 371).
저자는 전통적으로 바벨로니아의 유물로 알려진 12토판을 근거로 제시하는 방법을 대신하여, 작가적 상상력으로 기존의 점토판을 짜집기해서 길가메쉬의 일대기를 이해하기 쉽게 완성했다. 그리고 3부와 4부에서 길가메쉬의 핵심 내용을 잘 요약했고(길가메쉬의 절대적 폭력의 상징이었던 초야권, 맞수 엔키두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여자의 역할, 그리고 서사시의 핵심 '신학'일 죽음),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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