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어와 헬라어로 중무장한채 리얼리티의 극한을 보여주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멜 깁슨이
우리의 시선을 남미의 마야문명으로 돌렸다.
여전히 멜 깁슨은 객관적인 정보만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둔탁해 보이는 어휘들의 나열과 감탄사와 의성어로 가득한 것같은, 그래서 어찌보면
원시적인 언어들로 가득해보이는 남미의 세계로 관객은 인도된다.
숨가쁜 사냥과 여유로운 마을의 생활, 예상치 못했던 습격과 절망적인 환경, 그리고 기적같은 탈출
그리고 복수와 회복..
이런 모티프는 멜 깁슨 자신이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 영화들의 잔재들임에 분명하다('브레이브하트'나 '페트리어트').
이러한 영화의 난점은,
과연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혹은 이 영화는 왜 만든 것인가?
제목과 같이, 멜 깁슨 자신의 묵시론적 계시인가?
제목과 처음에 인용된 W. 듀란트의 글(A Great Civilization is not conquered from without until it has destroyed itself from within)에서, 영화는 사회의 충돌로 인한 붕궤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특별히,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로 대칭되는 문명의 충돌에 나름의 대답을 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마야문명이라고 이해되는 다양한 사회 집단들 속에서
거대문명은 바벨탑 이상의 것을 만들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영화속에서 등장한 마야의 왕은 늙어빠졌고, 왕세자는 비둔하다. 오직 제사장만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단순하게 영화 막바지에 등장한 배(그리고 눈이 좋으면 찾을 수 있는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으로 오도될 수 있는 맥락이 충분할 수도 있다.
괴상한 문양들이나 잔학한 살육에 익숙치 못한 우리 문명인들은 분명히 배를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거대문명과 그것을 정복하려는 또 하나의 거대문명 모두를 피한다.
그렇다. 피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존중을 부각시킨다.
영화 내내 주인공 가족의 생존은 큰 줄거리를 차지했다.
수중분만의 장면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영화와 함께
C.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자칭 문명이라는 서구인의 선입견이 자연앞에서 정복되는지를 서정적으로 잘 묘사한,
인류의 반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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