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시드기야의 해방선언과 번복
이 장에서는 시드기야의 해방선언과 번복 사건의 배경과 그 의미를 조사한다. 앞 장에서 다루었던 사회․정치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시드기야가 노예해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해방을 선언하면서 실행했던 제의의 방식도 재구성해보면서, 궁극적으로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도 이유를 제시해 보겠다. 이는 여러 주장들이 혼재한 본문 속에서 일관된 의견을 찾는 일종의 역사적 작업이며, 그렇기에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말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도록 하겠다.1) 그러기 위해서 먼저 본문을 확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1. 시드기야에 대한 본문의 문제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서를 통해 Dtr이 언급하고 있는 시드기야와 Non-Dtr에서 나타난 시드기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2)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Dtr의 본문은 렘 21:1,3,7; 24:8; 27:1,3)3,12; 32:1,3-5; 34:8,21; 37:1; 39:1,2,4,5,6,7; 44:30; 52:1,2,3,4,5,8,10,11이다. 이중에서 렘 37:1은 이후의 Non-Dtr의 편집상 추가된 것이며, 렘 44:30은 열방신탁에 해당되고, 렘 39, 52장은 왕하 24:18-25:30과 평행본문이므로 예레미야와의 관계에서 무시해도 좋다. 또한 렘 39:4-13은 LXX에는 없으며, 렘 52:7-16의 요약일 뿐이므로 역시 무시해도 좋다. 따라서 렘 21, 24, 27, 32장과 34:8-22에서 편집된 시드기야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본문에 의하면, 시드기야는 대적들의 손에 붙여져서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렘 21:7),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같이 버려지는 존재로 나타난다(렘 24:8).4) 또한, 거짓 선지자와 복술자, 꿈꾸는 자와 술사, 그리고 요술객의 잘못된 유언비어에 귀가 솔깃하는 불충한 모습들로 그려지고(렘 27:9), 예레미야의 예언에 불순종하고 오히려 그를 가두어 버리는 압제자로 나온다(렘 32:3-5). 마지막으로, 시드기야는 원수의 손에 붙들리는 운명으로 정리된다(렘 34:21).
한편, Non-Dtr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렘 28:1; 29:3; 34:2,4,6; 37:3,17,18,21; 38:5,14,15,16,17,19,24; 51:59. 이중에서 렘 28장은 하나냐와의 관계에서, 렘 29장은 포로들과의 관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렘 34:1-7; 37, 38장이 편집이 안된 시드기야를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된다. 한편, 할러데이는 렘 37-44장이 B.C.E. 588년 봄부터 B.C.E. 587년 가을까지 바룩(Baruch)에 의해서 기록된 것으로, 비교적 완벽한 자료라고 평가한다.5)
이들 본문에 의하면, 시드기야는 평화로운 죽음을 예고 받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애통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렘 34:5). 그리고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생명의 은인으로 나오는데, 이는 토굴 옥 음실에 갇힌 예레미야를 끌어내고, 식량이 부족해지는 상황 가운데서 음식을 공급해 주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렘 37:17,21). 시드기야는 계속해서 야웨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렘 37:3),6) 이 말씀이 지도층들의 이해타산에 맞지 않는 것에 두려워하는 솔직한 사람으로 그려진다(렘 38:14-16).
정리하면, 예레미야서의 Dtr 본문과 Non-Dtr 본문은 시드기야에 대한 서로 상이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렘 21, 24, 27, 32, 34:8-22의 부정적인 어조는 렘 34:1-7; 37, 38장의 보다 선한 이미지와 상충한다. 이는 예레미야서의 편집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7) 시드기야에 대한 부정적인 어조는 Dtr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성이 농후하다.8) 결국 정경상의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B.C.E. 597년 바벨론으로 포로가 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기록자와 그 무리에 관한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9)
2. 시드기야의 해방선언과 번복
1) 시드기야의 정치적 카드
B.C.E. 597년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과 포로압송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군사적․행정적 기능은 완전 마비되었다(왕하 24:14-16).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였던 맛다니야를 선택하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서 왕위에 앉혔다. 시드기야의 모친은 립나(Libnah) 출신 예레미야의 딸인 하무달(Hamutal)이었다(왕하 24:18). 하무달은 B.C.E. 609년 지주(ץראה מע)들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의 모친이기도 했다.10)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11) 립나는 유다의 중요 도시였는데, 대규모의 포로압송 이후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에게 있어서, 시드기야의 선택은 유다의 신흥 지주세력들을 포섭하며, 동시에 형제 살룸(여호아하스)을 잡아간 이집트에 적대적 행보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결정이었을 것이다.12) 하지만 느부갓네살에게 좋은 선택이었지만, 기존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권력가들에게는 악재였다.
특히나 여호야긴의 지지 세력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여호야김의 죽음 이후13) 세력을 얻은 예루살렘 권력가들에게 여호야긴의 통치는 너무 짧았던 것이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에 대해서, 느부갓네살 성의 비문은 유다의 왕의 직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14)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여호야긴의 지지자들은 시드기야의 왕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 분명하다. 성서 본문에 의하면, 이들은 혼란된 분위기를 틈타 종교적인 측면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상황으로 인해서,15) 시드기야는 주도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전혀 제공받지 못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잔 에커만(Susan Ackerman)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16) 에커만은 겔 8:1-17의 연구를 통해서,17) 예루살렘 성전 내의 지도층들에 의한 ‘마르제악(marzēah)’ 제의를 다루었는데,18) 이를 통하여 유다 왕국 말기의 혼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제악 제의에 참여한 이들은 ‘왕실 친인척은 물론이고 제사장과 선지자, 행정 관료, 그리고 각종 기능인이 회원으로 포함된’ 집단으로, 일종의 ‘무장(武將)들의 형제단’이었다.19) 이들 권력가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והינזאי)”를 언급하고 있다(겔 8:11). 야아사냐는 B.C.E. 586년 이후 유다 땅에 세워진 그달리야 정부에 가담한 유력자로 등장한다(왕하 25:23; 렘 40:8).20) 한편, 사반은 요시야의 개혁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사반의 조부 므술람(םלּשׁמ, 왕하 22:3) 역시 아몬 왕의 모친 므술레멧(תמלּשׁמ, 왕하 21:19)21)이 등장한 이후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에돔을 배경으로 예루살렘에 권좌를 차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정통적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1차 포로에서 제외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의 빈자리를 차지하기가 그 누구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아무튼, 마르제악 제의에 참여한 예루살렘 권력가들은 가문의 전통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이어가기를 바랐다. 이는 특히 현재 왕권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권력가들이 암암리에 의식을 치루면서22) “야웨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겔 8:12)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재 왕권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드기야를 거부했던 세력으로, 여호야긴의 모친이었던 왕후(רבג) 느후스다의 영향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는 이때까지도 왕후의 힘이 예루살렘에 끼쳤다는 고고학적 근거에서도 뒷받침된다.23) 앗수르의 지배를 받은 이후 급진적으로 아세라 제의가 증가했는데,24) 앗수르가 자국의 종교를 강제하지 않았었기 때문에,25) 이는 결국 유다 왕실의 선택이었을 것이며, 특별히 왕후의 주도적인 영향이 컸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세라는 왕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26) 고대근동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왕후가 ‘왕의 보호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때,27) 유다에서도 왕후와 이를 뒷받침하는 아세라 제의가 충분히 존재했을 것이며, 이는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28) 한편, 아세라는 하늘의 여왕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29) 그러므로 아세라를 비롯한 하늘의 일월성신 제의는 중앙집권을 막는 커다란 장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시야의 주된 개혁의 대상이었다.
렘 19:13에 의하면, “하늘의 만상(םימשׁה אבצ)”에 분향했던 계층이 왕족과 예루살렘에 집을 가지고 있는 부유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엘리트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왕하 21:5).30) 예레미야의 일월성신(םימשׁה אבצ) 제의 비판은 렘 8: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이한 사항은 ‘하늘의 여왕(םימשׁה תכלמ)’으로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렘 7:18; 44:17-25).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왕과 왕후’를 동시에 비판한 것은 쉽게 설명이 된다(렘 13:18).
한편, 포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렘 29:1-9), 거짓 예언자들이 여호야긴의 편에서 왕권의 회복을 선포하며 선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B.C.E. 595년 엘람과 바벨론 간의 전쟁으로, 바벨론 내의 유대인들은 큰 동요를 하게 되었고,31)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다(렘 29:21).32) 여기에 거짓 예언자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렘 29:15). 예레미야는 국제적 정세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합당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헛된 기대를 버리라고 선포했지만,33) 이는 예루살렘 내에서 예언자간에 갈등만을 야기할 뿐이었다. 하나냐와의 대결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헛된 기대를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렘 28:1-17).34)
어쨌든 국제적 정세는 시드기야와 주변의 나라들에도 흔들어 놓았다. B.C.E. 594년 암몬과 모암, 그리고 에돔은 사신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사태를 주시했다. 사실, 이는 여호야긴의 지지자들에 의해 떠밀려 반란 음모에 참여한 것이었다.35) 그러나 이후에 별다른 행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36) 예레미야의 반대 선포가 시드기야에게 통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렘 27:3-9). 아마도 예레미야는 기존의 기득권층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시드기야와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하나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신적권위를 확인받고 시드기야에게 참 예언자로 인정받았었을 것이다(신 18:19-22). 이렇게 볼 때, 시드기야에게 있어서 예레미야의 위치는 상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세력에 의한 쿠데타를 두려워했다(렘 38:14-23).37) 왕은 조금도 그들을 거스를 수 없었다(렘 38:5).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와 함께 백성을 지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졌다’38)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를 상당히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39) 즉, 렘 22장에서부터 시작한 역대 왕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신탁이, 23장으로 이어져서 시드기야의 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렘 23:1-6). “야웨 우리의 공의(YHWH נכדצ)”라는 구절은(렘 23:6) 분명히 시드기야의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40) 특별히 시드기야 이전의 왕들을 “양 떼를 명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라고 평가하는 반면(렘 23:1), 새로 세워진 왕을 “그들을 기르는 목자”라고 언급하는 것(렘 23:4)은, 고대근동의 경우와 같이, 정의의 실행자로서의 왕권을 나타내는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개 새로 왕이 즉위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노예를 해방하는 것처럼, 시드기야에게 정의를 실행하라고 예레미야는 요구했을 것이다(렘 34:4). 그러나 시드기야는 정의를 실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의 견제세력을 규합해야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행여나 그들의 눈에 벗어나는 일을 시도하다가는 그 역시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렘 38:5). 하지만 시드기야는 다른 누구보다 예레미야에게 속내를 내보일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렘 37:17; 38:16), 시드기야는 눈앞에 보이는 정략적인 이익보다는 야웨의 정의에 순종해야만 했다.41)
이것은 궁극적으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면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렘 38:17). 즉,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정책 결정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지도자들을 꼽았으며(렘 37:19), 이들의 힘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임을 자각했을 것이다(렘 38:5). 결국, 시드기야는 노예해방이라는 정치적 카드를 선택하면서, 바벨론의 포위 상황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외형적으로 종교적인 면(렘 34:18-19)이 부각된 의도로 지도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경제적인 속박을 풀어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Realpolitik)이 들어있었다.42)
2) 해방선언의 형식
B.C.E. 591년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바벨론의 위기를 놓치지 않고 북으로 진군했다. 기존의 바벨론의 지배를 받았던 팔레스타인의 작은 국가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시드기야도 다른 속국들처럼 이집트의 편으로 돌아서야만 했다(겔 17:15).43) 느부갓네살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바벨론의 대대적인 침략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올라 모든 것을 파괴했다.44) B.C.E. 588년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렘 39:1). 한편,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최소한 18개월이나 많게는 30개월까지 걸렸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45) 노예해방의 정확한 시기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세밀한 연구들은 이미 주어졌다.46) 그러므로 연구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선언의 형식에 대해서만 논의를 진행해 가겠다.
해방에 대한 본문은 본래 상황만을 묘사하는 간략한 언급에서 시작했을 것이다(렘 34:8b-11).47) 아마도 앞선 짧은 본문은 서기관 바룩의 것이었고, 12절부터 시작되는 의미상 반복은 후대의 편집자들의 솜씨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 부분 확장된 구절들은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48) 특별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49) 보다 이전의 편집본인 LXX은 18절의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라는 부분이 없다. 단지 “나는 (유다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송아지처럼 만들 것이다”라고 되어있을 뿐이다.50) 그러므로 J자료(창 15:10)를 알고 있던 편집자가 LXX의 히브리어 본문을 확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JE자료(출 32장)가 말하는 송아지 숭배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 것도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많은 연구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8절의 ‘계약을 맺다(תירב תרכ)’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즉, 원어의 의미 그대로 ‘사이를 자르다’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LXX의 히브리어 본문은 ‘계약을 세우다(תירבה םוק)’로 되어있다.51) 따라서 송아지를 자르는 것은 18-19절에서 들어있지 않은 그림인 셈이다. 그렇다면, 18-19절은 어떠한 상황일까? 연구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52)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일어나는 혼합주의적 제의와 관련이 있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므깃도 남부에 위치한 타아낙(Ta'anach)에서 발굴된 제의용 입상(cult stand)은, 비록 연대차이는 있지만, 팔레스타인 문화에서 송아지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즉, 타아낙 입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송아지는 아세라와 함께 등장하는 신적 존재이다.53) 이러한 인식은 계속되었다. 특별히 철기 II 시대의 것으로 텔 엘-파라(Tell el-Fara'ah), 아크레(Acre), 텔 케이산(Tell Keisan), 텔 엔-나스베(Tell en-Nasbeh), 라기쉬(Lachish) 그리고 므깃도에서 발굴된 인장 유물에서는 스핑크스와 송아지가 야웨의 신성을 상징하고 있다.54)
비록 쿤틸렛-아주르드(Kuntillet 'Ajrud)에서 발굴된 히브리어 축복문이 언급하고 있는 ‘야웨와 그의 아세라’의 그림을 해석함에 있어서, 소(bovine)의 특징보다는 이집트의 난쟁이 신 베스(Bes)라는 주장 때문에, 야웨가 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반대의 의견도 제시된다.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얀의 주장이 맞다면, 남왕국에서도 아세라 제의는 일반적으로 합법화되었을 것이고,56)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아세라와 함께 송아지 형상도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아세라 숭배가 일반적이었을 만큼 팽배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사람들의 이름에 신명이 반영되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세라 제의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고대근동의 비교자료를 통한 논증은 사람의 이름과 신명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이 제시된바 있다.57) 결국, 렘 34:18-19을 창 15:10에서 이해하기보다는 당시의 종교적 풍습에서 생각해볼 때,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송아지는 아세라와 함께 있는 제의용 입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야웨의 현현으로서의 송아지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8절의 “내 앞에서(ינפל)”라는 표현은 단지 신학적인 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송아지 형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Dtr에 의해서 편집된 현재의 본문은 왜 아브라함의 전승을 끌어들였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아세라 제의를 부정하는 신학적 의도 때문일 것이다(왕하 21:3,7). 그러나 다른 면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이를 통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조사해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절은 “나는 (유다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송아지처럼 만들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이 구절만을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운명인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JE전승은 송아지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가 되어’ 물에 뿌려진 상태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마시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D전승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려져서’ 그 가루가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려졌다고 말한다. 이는 아세라를 타파하는 요시야의 개혁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다(왕하 23:6). 그렇다면 Dtr에게 송아지는 외형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조각난(רתב)’ 송아지라는 공통점을 가졌을지 모르지만,58) 내면적으로는 출애굽기와 신명기로 이어지는 심판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편, 크로스는 출 32장을 연구하면서, 실로와 놉을 기반으로 하는 무쉬계열이, 아론과 벧엘과의 연관성을 통해서(왕상 12:31이하; 삿 20:26-8), 벧엘 전승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59) 다시 말하면, 이교도적 제의의 건립자로 북왕국을 뿌리로 두고 있는 아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60) Dtr에게 북왕국의 제의가 비판의 대상이며, 그 주동자로 아론과 그의 후손 제사장들을 비판하고 있다면, 반대로 Dtr의 옹호자들은 누구일까?
출 32:26-29은 레위 자손이 금송아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 33:8-11과 무관하지 않다.61) 신 33:8-11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제사장의 활동을 감당하는 복을 받는다. 즉, 신탁과 토라의 교육, 그리고 제사를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62) 특별히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라는 언급은 레위인들이 새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레위인들은 사장들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하는 계층으로 등장한다.63) 이는 레위인이 신명기적 개혁에 동참한 세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반면(신 17:18-20), 북왕국의 전승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존의 제사장들을 경멸하는 Dtr의 의도였던 것이다.
3) 해방선언 번복의 배경
바벨론이 이집트의 출정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포위를 풀게 되자, 시드기야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64) 유다의 사회는 기간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어 고립된 형국이었기 때문에(렘 34:7), 그리고 바벨론의 포위로 인해서 식량까지 떨어진 상태에서(렘 37:21; 38:9) 경제적 자산을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시 채무노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신 15:14), 노예를 자유하게 하면서 얼마 동안은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상당량의 재산을 주도록 명령하고 있지만, 실제로 행해지기는 어려웠다.65) 시드기야가 권력을 획득할 수 없는 유다의 총체적인 사회구조는 한바탕 쇼를 보여준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시드기야의 해방선언 번복에는 사회경제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조셉 A. 테인터(Joseph A. Tainter)는 복잡한 사회의 붕궤라는 주제를 다루면서,66) 사회의 메커니즘으로 다음의 원리를 제시한다:
(1) 인간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이다.
(2) 사회정치적 체제는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유지된다.
(3) 복잡성이 증가하면 단위 비용도 증가한다.
(4)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으로서 사회정치적 복잡성에 대한 투자를 하면 한계 수익이 감소하는 시점에 봉착한다.67)
테인터의 주장에 따르면 시드기야의 해방선언은 이미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깨진 독에 불붙기’였던 셈이다. 즉, (1) 시드기야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약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유다라는 작은 사회를 가동시켜서 노예해방이라는 과감한 계약을 맺게 했다. (2) 자유인이 되어버린 동족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자금을 받아야만 했다(에너지 투입). (3)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신명기 법과 같은 이상적인 조항들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침략으로 토지는 황폐화되었고,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서 현재 생활 자체를 유지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부유층들만이 일락을 누릴 수 있었다. 남유다는 토라의 이상만을 가지고 살 수 없는 복잡한 여건들로 가득 차 버렸다. (4) 자유인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야만 했다. 수요에 비해서 공급이 과도하게 넘쳐나게 되었다. 결국 자유인들은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3. 정리
이 장에서는 시드기야의 노예해방 선언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본분 상으로는 해방 선언의 이유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하게 추측해 볼 수 있지만, 연구자는 정치적인 면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자신의 입지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제 정의라는 명목을 가지고, 지배 세력들의 권력을 축소함으로써 현실을 타개하려는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별히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있는 여호야긴과 왕후의 세력이 시드기야의 주된 목표였다. 이는 의로운 시드기야를 바랐던 예레미야의 요청에 대한 왜곡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예해방 선언의 방식은 본문 자체가 자세한 보도를 생략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보편적인 아세라와 소의 입상(stand)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이 전수, 편집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브라함과 야웨의 계약으로 변환되었고, 우상화된 부분들이 과감하게 편집되었다. 이러한 편집 작업을 한 Dtr은 그러한 책임이 북왕국의 전승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결국 얼마 안가서 선언은 번복되었다.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시드기야는 그 무엇도 얻지 못했다. 이는 남유다 사회 전반에 들어있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
1) R. D. Miller II, “Yahweh and His Clio: Critical Theory and the Historical Criticism of the Hebrew Bible,” CBR 4 (2006), 161.
2) 잭 R. 런드범은 시드기야의 통치시기에 해당하는 본문을 초기(B.C.E. 597-594년)와 말기(B.C.E. 586년 어간)로 나누어 제안한다(Jack R. Lundbom, Jeremiah 37-52 [AB 21C; New York: Doubleday, 2004], 584). 즉, 초기의 본문들은4:9-10; 5:10-13; 12:14-17; 23:5-6,7-8,13-15,16-17,18,21-22,23-24,25-32,33-40; 27:1-22; 28:1-17; 37:1-2; 49:1-2,3-6,7-11,12-18,19-22;50:1-3,4-5,6-7,8-10,11-13,14-15,16,17a,18-20,21-28,29-30,31-32,33-34,35-38a,38b-40,41-43,44-46;51:1-5,6-10,11a,12ab,13-14,25-26,27-33,34-45,47-51,52-57,58,59-64a이고, 말기의 본문들은 3:16b-18; 4:11-12,18; 21:1-7,8-10; 23:19-20(=30:23-24); 30:5-7,10-11 (=46:27-28),12-15,16-17; 31:31-34; 32:1-44; 33:1-3,4-9; 34:1-22; 37:3-11,12-16,17-21; 38:1-6,7-13,14-28; 39:15-18이다.
3) 여호야김은 시드기야로 수정해야 한다(Holladay, Jeremiah 2, 112).
4) 특별히 24:8에 의하면, Dtr은 B.C.E. 587년의 2차 강제이주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Dtr에게 있어서 왕은 여호야긴이며, 왕국의 몰락은 B.C.E. 597년에 있었던 1차 강제이주로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Hermann-Josef Stipp, “Zedekiah in the Book of Jeremiah: on the Formation of a Biblical Character,” CBQ 58 [1996], 642).
5) Holladay, Jeremiah: A Fresh Reading, 133.
6)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은, 그는 예레미야를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Hutton, Charisma and Authority, 123).
7) 예레미야서의 편집에 대해서, Albertz, Israel in Exiel, 271-345을 보라.
8) Ahlström,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788; John Applegate, “The Fate of Zedekiah: Redactional Debate in the Book of Jeremiah - Part I,” VT XLVIII (1998), 137-60; idem, “The Fate of Zedekiah: Redactional Debate in the Book of Jeremiah - Part II,” VT XLVIII (1998), 301-8.
9) 스티프는 특별히 렘 32:3-5와 38:9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사본 연구를 통해서 기록자가 의도적으로 시드기야를 나쁘게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Stipp, “Zedekiah in the Book of Jeremiah,” 643-8).
10) de Vaux,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239.
11) 각주 310을 보라.
12) 아마도 살룸은 이집트의 포로가 된 후 곧 죽었을 것이고, 이로 인한 대(對) 이집트 국민 정서는 매우 나빴을 것이다(렘 22:10-12).
13) 각주 317을 보라.
14) Ahlström, The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787.
15) Morton Smith, Palestinian Parties and Politics that Shaped the Old Testament (London: SCM Press, 1987), 34-6; Dutcher-Walls, “The Social Location of the Deuteronomists,” 77-94.
16) Susan Ackerman, Under Every Green Tree: Popular Religion in Sixth-Century Judah (Atlanta: Scholars Press, 1992)
17) Ibid., 70-9.
18) 마르제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우택주, 「8세기 예언서 이해의 새지평」, 216-7): (a) 제의에서 술을 먹는 행위는 약간씩 특정적인 경우와 의미가 다를 수는 있어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b) 죽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나 성소(shrine)를 건립하고 이후의 모든 제의를 이곳에서 실행한다. (c) 제의에 참여하는 자와 고인의 사회적 관계가 확인된다(상속의 동급/권한). (d) 고인의 지위를 이을 후계자와 재산의 상속 문제가 결정된다. (e) 고인은 신(新, 절대자 하나님과는 구별됨)으로 불린다. 제의의 지속적 실행의 필요를 위해 재정 조달책이 마련된다. (f) 제의는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
19) Ibid., 220.
20) Stern, Archaeology, 139.
21) 각주 277을 보라.
22) 그러므로, 10절에 등장하는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은 각 가문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장을 상징할 수도 있다(Mazar, Archaeology, 506-7; Stern, Archaeology, 186).
23) Michael Heltzer, “A Recently Invented ‘Queen’ of Jerusalem,” IEJ 54 (2004), 214-7.
24) Finkelstien and Silberman,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336.
25) Ahlström,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686.
26) N. Wyatt, “Asherah,” DDD, 104.
27) Cushman, “The Politics of the Royal Harem, 330-1.
28) Othmar Keel and Christoph Uehlinger, Gods, Goddesses, and Images of God in Ancient Israel, tr. Thomas H. Trapp (Edinburgh: T & T Clark, 1998), 369-72.
29) Carroll, Jeremiah, 213.
30) H. Niehr, “Host of Heaven,” DDD, 428-30.
31) Albertz, Israel in Exile, 54.
32) Ahlström,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791.
33) Klaus Koch, 「예언자들 2: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79.
34) Robert P. Carroll, From Chaos to Covenant: Uses of Prophecy in the Book of Jeremiah (London: SCM Press, 1981), 183-9.
35) Nahum M. Sarna, “The Abortive Insurrection in Zedekiah's Day (Jer. 27-29),” Studies in Biblical Interpretation, eds. Nahum M. Sarna and Jeffrey Tigay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00), 288.
36) Miller and Hayes,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473.
37) Sharkansky, Israel and Its Bible, 143.
38) Fohrer, 「이스라엘 역사」, 243.
39) Koch, 「예언자들 2」, 91.
40) Carroll, Jeremiah, 446; Lundbom, Jeremiah 21-36, 164-70; Stulman, Jeremiah, 214.
41) C. 벡은 이사야의 종의 노래(사 52:13-53:12)를 시드기야에게로 돌린다(C. Begg, “Zedekiah and the Servant,” ETL LXII [1986], 393-8).
42) 아마도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끝없는 물음표의 연속만 남길 성격의 문제임에 틀림없다(Holladay, Jeremiah 2, 243). 그래서 케롤은 미드라쉬적 읽기를 선호했을지도 모른다(Carroll, Jeremiah, 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다음의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Keown and Scalise and Smothers, Jeremiah 26-52, 187): (a) 경제적인 이유-이것은 먹여 살릴 입의 수를 줄이기 위함이다. 니푸르의 포위에서부터의 문서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최소한 식량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여, 노예소유자들이 그들의 포위공격에서부터 그들의 노예들의 생명을 살리도록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b) 군사적 이유-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가용 인력들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마리 문서(XXVI 363, B.C.E. 1765년)에는 함무라비가 적국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자신의 군대를 강하게 할 목적으로 무역상인들과 종들에게 해방을 선언하기도 했다(Lundbom, Jeremiah 21-36, 559). (c) 종교적인 이유-이것은 야웨의 호의를 얻기 위함이다. 바벨론의 철수는 자신들이 순종하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브라이트는 이를 ‘문제해결용 종교(foxhole religion)’라고 말한다(Bright, Jeremiah, 224).
43) Ahlström,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793.
44) Israel Eph‘al, “Nebuchadnezzar the Warrior: Remarks on his Military Achievements,” IEJ 53 (2003), 178-91; Ahlström, History of Ancient Palestine, 795.
45) Eph‘al, “Nebuchadnezzar the Warrior,” 183.
46) 현재의 연구들로부터의 가정들에 의하면, 신명기 법은 B.C.E. 587년 9/10월에, 즉 ‘해방의 해’, 곧 안식년의 장막절에, 읽혀졌었을 것이다. 또한, B.C.E. 588년의 오순절 동안에 일어났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그 절기는, 늦은 5월이나 6월에 시작하는 것으로, 최소한 포로기 이후나 아마도 그 이전에 계약 갱신과 연결되었다(Holladay, Jeremiah 2, 239). 한편, 희년과의 관련성을 중점으로 치밀하게 분석한 연구로, J. Milgrom의 앵커 바이블 주석에 삽입되어 있는(Leviticus 23-27, 2257-70), Lisbeth S. Fried and David N. Freedman의 “Was the Jubilee Year Observed in Preexilic Judah?”라는 항목을 보라.
47) Bright, Jeremiah, 233.
48) 13-14절은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Dtr에게 있어서 조상들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왕하 21:15; 렘 7:24). 그러므로 (가까운 과거가 되어버린) 동시대인들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렘 17:23).
49) 각주 6을 보라.
50) MT는 ‘-처럼’이 없다. 하지만, ‘-처럼’이 없기 때문에 더욱 비문법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많은 번역본들은(NAB, NJB, REB, NJPS) 단지 히브리어 한글자만을 바꿈으로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자세한 사항은 Barclay M. Newman and Philip C. Stine, A Handbook on Jeremiah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03), 708-9를 보라.
51) NRSV는 18절을 ‘transgressed my covenant’로 번역한다.
52) 각주 345를 보라.
53) Dever, Did God Have a Wife?, 282.
54) Ziony Zevit, The Religions of Ancient Israel: A Synthesis of Parallactic Approaches (New York: Continuum, 2001), 318-25.
55) Collins, The Bible after Babel, 114-5; Dever, Did God Have a Wife?, 164.
56) Olyan, Asherah and the Cult of Yahweh in Israel, 9.
57) 강성열, 「고대 근동 세계와 이스라엘 종교」 (서울: 한들출판사, 2003), 216.
58) Claus Westermann, Genesis 12-36: A Commentary, tr. John J. Scullion S. J.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95), 225.
59)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199.
60) J자료에는 아론이 등장하지 않는다.
61) 특별히, 출 32:27은 신 33:9과 관계가 깊다.
62) Hutton, Charisma and Authority, 152.
63) McNutt, Reconstructing the Society of Ancient Israel, 178-9.
64) Niels Peter Lemche, “What If Zedekiah had remained loyal to his master?” BI 8, 1/2 (2000), 115-28.
65) Marvin L. Chaney, “Debt Easement in Israelite History and Tradition,” The Bible and the Politics of Exegesis: Essays in Honor of Norman K. Gottwald on His Sixty-Fifth Birthday, eds. David Jobling (Cleveland: The Pilgrim Press, 1991), 127-39.
66) Joseph A. Tainter, 「문명의 붕궤」, 이희재 역 (서울: 대원사, 1999)
67) Ibid., 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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