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Halpern, “Jerusalem and the Lineages in the seventh Century BCE: Kinship and the Rise of Individual Moral Liability,” in Baruch Halpern and Deborah W. Hobson (eds.), Law and Ideology in Monarchic Israel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1), 11-107.
할펀은 정말 대단한 학자이다!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소논문을 통해서, 할펀은 위대한 작업을 이루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집합적 사회'였다.
그래서, 집단의 책임원리(수 7:10-26; 신 7:25-26)는 자명한 것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진보하면서 이러한 개념은 바뀌게 된다.
바로 6세기에 나타난 현상이다(렘 31:29; 겔 18:1-4).
이는 앞선 8-7세기에 일어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닥쳐진 두개의 엄청난 사건 때문이었다.
첫째는, 히스기야의 개혁이었다.
말이 좋아 개혁이지, 히스기야는 강대국의 엄청난 군사력에 맞서는 방법은 '철벽수비'를 펼쳐놓고, 우방국의 지원을 기다리는 '복지부동'의 전략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서 (1) 성채를 보수하며(예루살렘, 히스기야 터널, Tel Batashi, Azekah, Gath, Maresah, Tell en-Nasbeh[사 22:9-11; 왕하 20:20]), (2) 군수품을 비축하고(징집[대하 32:28-29], 건축[Tell Beit Mirsim, Tell en-Nasbeh, Megiddo, Tell el-Far'ah], lmlk의 토기), (3) 지역주민을 성채로 집중 시킨다.
이 결과로, 고대 이스라엘은 '도시화'라는 것의 내면에 들어있는 깊은 정신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둘째는, 산헤립의 개혁이었다.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방의 도시들(46개 성채)을 황폐화했다. 이를 통해서 약 20만명의 주민들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은 기존의 인구보다 4배나 증가했다(2만 5천명). 이 사건은 '지방성소 심판'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해석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새로운 중심지가 세워졌다(아스돗, 에그론, 가자, 아스켈론). 유다 중심지는 더 이상 고지대농경과 해안평야의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씨족(clan sector)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외각지역의 사회구조(지파당 평균 4-8개의 씨족)는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이렇게 두가지 엄청난 사건이 있고 난 다음, 뒤를 이은 므낫세는 성서의 평가와는 달리 무너진 유다왕국 재건이라는 과업을 실행한다. 므낫세는 앗수르의 관리하에 놀라운 부흥을 이룩한다. 현금작물이 가능한 지역을 특성화하면서(포도주: 기브온, 허브: 사해, 올리브: 에그론), 이집트와의 긴장속에서 영역을 확장했다. 앗수르는 대제국의 안전망을 통해 거대한 시장의 문을 열었고, 므낫세는 이것을 재빠르게 이용했다. 씨족 중심의 확대농업 기반 사회에서 중앙집중화된 현금작물, 산업경제의 사회로 이동하게 된다.
히스기야가 '군사적 차원'의 중앙화를 시도했다면, 므낫세는 '경제적 차원'의 중앙화를 시도했다. 이는 결국 옛 친족구조의 변화를 초래하며, 왕권이 직접 핵가족을 다루는 사회를 의미한다(신 16:18-20; 25:1-3). 이는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음식그릇의 크기가 줄었고, 거주지도 축소되었으며, 매장풍습도 다수의 방구조에서 단일한 방구조로 변화되었다). 조상과의 단절이 선언된 셈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인류애'로 포장된 선언에서 드러난다(전통신앙타파[13; 17:2-7; 14:1; 26;14], 중앙성소신설[12; 16:5-6,16], 중앙법률기구신설[17:8-13; 16:18-20; 25:1-3], 친척관계약화[13:7; 특별히 2인칭 단수는 친척관계를 없애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유다사회는 전례없는 '개인화'의 등장을 맞이하게 된다.
7세기는 요시야의 시대로, 요시야의 엘리트들은 집합체를 완전히 분해시킨다(일종의 클롬웰주의). 이 시기를 통해서, 히스기야에서 부터 시작된 기록물들은 점차 요시야의 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된다. 그 핵심은 엘리트들에 의한 개인주의의 팽창이다. 엘리트들은 야웨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이방화(alienation)한다. 즉 토지, 신들, 친족, 전통이 사라진 셈이다. 이 시점에서 예레미야의 언급(8:8)은 '새로운 법과 기존의 전통(mispat)'이 충돌되는 시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7세기는 엘리트들에 의한 자기-정의(self-identification)의 시기였다. 이것은 역사기록이라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는데(DH), 신명기적 역사가(Dtr) 역시 고대사회의 권력가들의 자연스러운 '영웅 모델화'라는 방법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고대 그리스의 역사패턴과 성서는 유사하다). 이러한 엘리트들의 자기-정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통과의 갈등은 발생하게 되었고, 그들은 과거의 자료들을 수정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한편, 이러한 엘리트들에 의한 의식의 변화라는 개념은 종교개혁 이후 현대 사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히스기야에서 부터 시작된 개인적 정신화라는 대격변은 오늘날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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