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iah Derby, “Who was Jonathan son of Gershom in Judges 18:30?,” JBQ 30, 3 (2002): 191-5.
라이스라는 땅으로 정착하면서, 단 지파는 이름없는 젊은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합류토록 한다. 결국 단 지파는 미가의 우상을 훔치고 자신들이 정착하는 곳에 ‘신전’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17:7의 레위인이 18:30의 요나단과 동일 인물인가? 탈무드에 의하면 동일 인물로 말하고 있지만, 본 논문은 다른 경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단 연대기적으로 문제가 된다. 요나단이 단지파와 동행했던 젊은 레위인이라면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요나단은 광야시대에 출생했을 것이다). 18장의 시대가 사사시대 후반이라고 본다면, 블레셋의 영향(블레셋은 기원전 1187년경에 가나안 남부에 출현해서 북진한다)을 받은 단 지파의 이동은 약 1075년경으로 볼 수 있다.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던 므낫세로 수정했다는 견해에 따르면, 그의 손자는 가장 훌륭한 요시야이다! 또 다른 견해는 요나단을 기원전 3세기로 돌리면서 그리심의 대제사장이었던 므낫세를 의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미가의 레위인이 모세의 손자일 순 없다. 모세의 족보에서 요나단은 어디에도 없다(대상 23:16, 스부엘이 요나단은 아니다). 요나단이 레위인이라면,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단은 여로보암 1세의 가공인물이다. 즉, 솔로몬 사후에 일어난 북왕국의 종교적 자립을 위해서(왕상 12:26-29) 세웠던 신전을 합법화하려는 시도이다. 벧엘은 전통적인 근거가 충분하지만(창 28:19; 35:1,7), 단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요나단을 통해서 200년 정도 앞선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들어있는 종교적 전승들을 능가해야만 할 오랜 투쟁의 과정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공개적(신 12:5) 혹은 암묵적으로 진행되었다. ‘택한 성읍’은 여러 번 등장하며(왕상 11:13,32,36) 여로보암 사후 마지막으로 등장한다(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