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신명기적 역사(T.E.Fretheim, Deuteronomic History: Introduction)

진실과열정 2005. 9. 25. 09:23
개요

  제    목: T.E.Fretheim, Deuteronomic History(Introduction)



1. 내용요약

신앙, 비평, 그리고 “적용”

성서는 역사적인 자료로 기록되었다. 즉, 성서가 기록되었던 특정한 역사적인 기간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비평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일컫는 용어로, 문학비평과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본문에 접근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비평방법을 통해서 본문의 본래의 모습(integrity)을 지킬 수 있으며,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도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본문을 본문되게 한다.

누구나 성서에 대해서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현대 해석방법들 조차 중립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본문의 원뜻과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가능한 본문의 역사적 문맥 아래서 해석작업은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의미”는 본문의 원래적 의미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오면서 결합된 모든 의미들을 말한다.

우리는 본문에 헌신할수록(즉, 신앙의 눈이라는 선이해로만 본문을 대할 때), 마치 본문의 현장에 와있는듯한 일체감같은, 완전한 의미를 얻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보면 주관주의자가 되어버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다음의 주의가 필요하다: 1) 역사적 비평을 통해서 정경 연구에 도움이 된다. 이는 신앙공동체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다. 2) 우리의 신학적 위치, 관점을 알고, 그 영역을 넓히는 훈련을 해야한다. 본문의 현장화, 곧 “적용”에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이는 첫째로 역사적(객관적)인 방법에서 시작해서, 다음으로 본문의 현재 상황으로의 적용을 말한다.

이렇게 될 때에 본문과 해석자는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본문과 전통, 비평과 현대 경험들이 빈번히 상호관계를 맺을 때, 본문의 중요한 의미들은 나타난다. 본문과 우리의 삶이 쉽게 교차될 수 있는 어떤 본문은(시 23편), 배우자의 죽음과 같은 긴박한 상황같은 때에, 특별한 해석의 작업이 없이 본문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신명기적 역사

신명기적 역사(이하 DH)는 신명기를 서론으로 보고 전기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일컫는 말이다.

1) 저작, 작자, 그리고 연대

전통적으로는 개별적인 책들로 접근했었는데, 지난 200년 동안 두개의 중요한 이론이 등장했다. 첫 번째는 전기예언서를 오경(Pentateuch)과 묶으려는 시도이다. 즉, JEDP라는 자료들이 오경 이후에도 나타난다는 것인데, 특별히 약속된 땅의 정복이라는 여호수아를 포함시켜 육경(Hexateuch)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자료들이 통일되지 않고, 신명기적 형식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두 번째는 신명기사가의 흔적을 강조한 것으로, 신명기서가 서론의 역할을 하고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서까지 하나의 독립된 역사적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오경은 사경(Tetrateuch)이 된다. 신명기서와 전기예언서와의 문학적이며 신학적인 연결점뿐 아니라, 신명기서 안에 있는 두 번의 서론(1:1-4:43; 4:44ff)도 설명할 수 있다.

노트는 포로기 시대(587-539 B.C.)의 한명의 저자가 DH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1943). 이후의 연구는 노트의 견해에 문제점을 제시했는데, 즉 열왕기하 종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전형적인 신학적 반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이중편집이론이 제안된 것이다. 이는 요시야 시대(620 B.C.)에 개혁의 옹호자가 중요 작업을 진행했고, 포로기 시대(561 B.C.)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주제로 작은 부분 개정한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은 없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 전역사가 포로기 시대의 백성들에게 어떤 기능을 했느냐이다. 즉, 편집자의 최종편집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 편집자는 전체적인 역사를 창조한 것은 아니고, 많은 장르의 전승이라는 유산을 이어받았다(야살의 책[수 10:13],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 유다왕 역대지략[왕하 16:19]). 그리고 문맥상 고립되는 부분은(법궤 설화[삼상 4-6장], 영토배분 목록[수 13-21장]) 편집자의 손을 거친 것이라는 것을 분명케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양성이 있다. 즉, 다양한 편집자들이 서로 다른 원칙으로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편집이론 역시 너무나 단순하다. 대안으로, 히스기야 이래(715-687 B.C.) 세대를 거쳐 내려온학파의 존재를 들 수 있다.

2) 기본 관심사

기본적인 목적은 권고에 있다. 그러나, 이것만 다가 아니라 공동체의 복잡성과 맞물려 다양한 주제들도 함께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하며, 전체로서 하나의 신학적 방향을 제공하게 된다.

비관적인 입장으로 노트를 들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하나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며, 과거 역사는 단지 오늘을 설명하기 위함일 뿐 미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고려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DH에는 어두운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노트의 냉혹한 견해는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완화된 측면에서 폰라드와 볼프가 등장했다. 폰라드는 DH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작용했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다. 즉, 야웨의 말씀은 율법-심판-파괴라는 측면과 구원과 용서라는 다윗 언약 측면이 있다. 전자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했던 자들에게 심판이 실제적인 것이었음을 말하며, 후자의 다윗에 대한 약속은 “메시야적 희망”으로 모든 고난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두 측면은 서로 융합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간단한 메시지가 된 것이다. 이러한 폰라드의 미래를 향한 희망은 오늘날 전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볼프는 회개에 무게를 두었다(왕상 8:46-53). 다윗 언약이 순종을 근거로 한 조건적인 것이라고 보면서(왕상 2:3-4; 9:5-7), 왕들의 불순종 때문에 다윗 언약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석했다(그러므로, 왕하 25:27-30에는 다윗 언약에 대한 암시가 없다). 특정한 희망은 없으며,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해서 하나님은 들으시고 용서하실 것이다(왕상 8:34ff). 한편, 백성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회개할 수 있다(신 4:29-31; 30:1-10; 왕상 8:58). 이렇게 볼프는 언약에 대하여 충분한 강조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언약이 조건적이라는 견해는 입지가 좁아지고,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 누구에게나 조건적이지 않다(신 4:31; 삿 2:1; 삼상 12:22; 삼하 7:16).

Fretheim: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십계명의 처음 두계명(신 5:7-10)이 Dtr에게 있어서 관심의 핵심이었다. 포로민이 제기했던 핵심질문이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이고(왕상 9:8; 신 29:24ff),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함-특별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이지,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차원은 아닌 것이다. Dtr에게 있어서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하나님앞에 불충성하게 되는 징조일 뿐이었다(왕하 17:7-18의 초점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또한 요시야의 개혁 역시 그러하다(왕하 23:4-25). 예루살렘의 제의 집중화는 관료적 율법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우상의 유혹을 물리치려는 신앙적 행위였던 것이다.

한편, (십계명) 첫계명은 언약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종주권 형식으로 볼 수 있으나, Dtr에게 하나님은 율법 이전에 개인적인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다. 언약을 버린다는 말은 첫계명(우상숭배)과 관련이 있다(신 29:25-26; 수 23:16; 신 17:2-3; 31:16,20; 삿 2:20; 왕상 11:9-11; 왕하 17:15). 그렇기 때문에, 모세언약과 다윗언약과의 새로운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Dtr에게, 동전의 양면처럼, 관점이 다를 뿐 하나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약속에 초점이 있고, 사람의 입자에서는 첫 번째 계명, 즉 한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이다. 그러므로, ‘조건’이라는 것은 결국 신앙과 신뢰와 관련된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강조점(신 4:31; 29:12-13; 왕하 13:23)과 신앙과 신뢰라는 인간의 반응의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결국, Dtr은 원신명기(5-28장)을 한 단계 뛰어넘어서, 신적 약속(아브라함-다윗계약)과 인간적 반응(시내산 계약)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

신명기는 ‘명령(단수)’과 ‘규례들’과 ‘법도들’로 구분을 짓고 있다(신 5:31; 6:1; 17:20; 30:11). 명령이란 첫계명을 말한다(5:7-10; 6:5). 이것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것이다. 반대로 ‘규례들’은 매일의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들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가변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것인 개별적인 계명들을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하지 못함이며,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요구되는 것은 계명들의 준수가 아니라 다른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옴בוּשׁ’이다. DH에는 다양한 언어로 이러한 사상들이 들어있다: “섬김”과 “경외”(수 24:14ff; 삼상 7:3; 12:20,20), “하나님 앞에서 행함”과 “그를 따라감”(왕상 2:4; 3:6; 8:23-25; 11:4-5). 여호수아 1장의 구절도, 복은 소소한 계명들의 순종 이전에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관계를 생성하기 위한 순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순종은 관계를 유지시키거나 보존시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음만이 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지속되는 것이다. 바로 왕상 8장이 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15-26절), 용서가 회개하는 공동체에게 가능하다(27-53절). 여기에는 계명들에 대한 준수가 용서와 관계회복을 위한 조건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한편, ‘계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신 4:40; 수 1:8-9; 왕상 2:3). 계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할 ‘생명-더 나은 삶’을 위해 주신 것이지, 결코 형통이라는 상급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다. 순종에 대한 단순한 결과로서 성공과 번영은 약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신에 대해 하나님의 참을성없고 변덕스러움이 느껴질 수 있다(삿 2).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며, 사람들의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신 9:4-5). 언제나 부정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주도권을 가지신다. 즉, 예언자를 통해서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심판은 정결케하는 도구이지(신 4:26-31), 최종적인 멸망은 없다. 이러한 영구적인 약속․성취의 패턴이 포로민들에게 하나님만이 희망이라는 도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유일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해석의 열쇄가 된다.

이중편집과 관련하여, 문제의 발발은 신학적 긴장 때문이다. 즉, 다윗의 무조건적 언약과 므낫세의 돌이킬 수 없는 정죄(왕하 23:26-27)의 충돌이다. 그러나, 삼하 7장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삿 2-3장의 고난 역시 삶을 위한 일종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왕하의 끝도 최종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므낫세도 일종의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포로기의 백성이 느꼈을 심판과 약속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려야만 한다(애 3:25-31).

다른 주제들도 찾아볼 수 있다: 브루지만은 하나님의 “선함”과 신실하심에, 맥카시(McCarthy)는 “진노”와 리더쉽에 관점을 두었다.


역사편찬: 실제로 일어났는가?

DH는 우화(삿 9:7-15)나 비유(삼하 12:1-6)같은 비역사적인 내용도 들어있다. 따라서 본문의 역사성을 밝혀야 하는데, 성경이 보고하는 사건발생이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본문의 역사성을 다룰 때, 4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1) 자료선정: 성경은 사사건건 기록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을 기록한다는 원리가 있다. 2) 의미: 사건 자체에는 의미가 없고, 여러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가 중요하다. 의미는 생명력이 있어서 이후의 역사들에게 영향을 주며, 기본적인 연속점을 보여준다. 3) 관점: 역사의 재구성에 있어서 자신만의 관점이 드러난다. 즉, 해석된 역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열린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4) 사실: 사실 역사는 사실(fact)만은 아니다. 사실은 단지 의미를 더해주고, 해석자를 열중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특정한 논쟁점이 있다. 1) 목적: 다른 참고자료의 존재는(왕상 1:42; 왕하 17:7) DH가 오늘날처럼 사건을 보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에 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카르카르 전투의 생략, 엘리야-이세벨 관계 포함). 즉, 청중들에게 반응을 일으키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왕하 17:7ff). 따라서, DH는 역사편찬적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한다. 그렇게 되면, 오류나 모순에 대해서는 신경쓸 필요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2) 기록의 동시대성: 밀접해야 진실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가도 가용할 만한 것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다윗이전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구전도 확장/변형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3) 차이점의 기준: 이후의 시대와 다른 내용들을 언급하는 정도를 말한다. 후대의 경험을 가지고 역행해서 읽으면 안된다. 4) 본질적 개연성: 다른 일반적인 역사를 생각해보면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들을 고려한다(나아만의 병 치유[왕하 5], 수면에 떠오른 도끼날[왕하 6:1-7]). 이것의 목적은 단지 독자가 가지고 있을 선입견에 조심성을 가지려는 것이다. 5) 문학 장르: 쉽게 정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삼손(삿 13-16)은 전설로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계승설화(삼하 9-왕하 2)는 역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6) 기원론적: 이름, 관습, 제도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요단도하 사건(수 3-4)에 기록된 12돌은 후대의 제의적 축제(4:21-24)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아골’의 계곡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간사건을 말한다(수 7:26). 이러한 기원론적 요소는 설화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전승에 이차적으로 첨가된 수준이다. 따라서 역사성을 깎아내리는 증거는 아니다. 7) 다중 증명: 한개 이상의 형태가 존재하는 경우이다. 비교를 통해서 본래적 형태를 찾을 수도 있다. 삿 1:1-2:5는 수 21장에서 간략화되어졌는데, 이전의 결과가 없기 때문에(삿 1:19,21, 27-29// 수 21:43) 학자들은 사사기를 옹호하고 있다. 8) 작가의 관점: 작가의 편견의 증거에 대한 문제이다. 북왕국과 남왕국사이에 긴장을 볼 수 있다. 역대기는 포로기 이후의 기록으로 삼무엘하와 열왕기를 재해석하면서 북에 무관심을 나타낸다. 한편, 지역 차이도 있는데, 삼상 8-12장에는 왕정에 대해서 서로다른 견해(남왕국은 찬성, 북왕국은 반대)가 섞여 있다. 9) 외부적 증거와의 조화: 신뢰할만한 외부문서나 유물들과 관련된 문제이다. 수 1-12의 많은 도시들의 고고학적 탐구는 성서연대인 B.C. 13세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여리고와 아이성은 연대와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본문과 고고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정복설화에서 어느 정도 이스라엘의 역할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 기록의 모든 세부적인 부분은 그렇지 않다. 물론, 고고학이 성경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자료의 합일은 발견되는 것이지만, 그 자료의 의미에 대한 외부적 확증은 없는 것이다.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행위는 몇몇 보여주지만, 하나님은 보여주지 않는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의 추적은 매우 복잡한 작업이며, 그렇기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기록들의 “실제적 발생”이 신앙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성서적 사건들에서 차이를 두지 않으려는 해석 경향도 있다(출애굽과 도끼사건을 같이 본다). 이는 성서 기록자들의 접근 방법과 충돌되는 태도이다. 성서 기록자들은 사건들 중에서 차별성을 두었다. 그러므로, 열쇠가 되는 사건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바로 신앙에 중요한 것들이다. 즉,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것이지만(신 26:5-9; 왕상 8:14ff), 도끼사건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왕하 6:1-7). 결국, 공동체가 자주-계속해서 인용했음을 통해서 사건 발생은 신앙에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DH는 B.C. 1200년부터 561년까지 다양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의미들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사적인 대화의 내용들).

오늘날에 있어서, 저자는 사건의 신앙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관여했음을 주지해야 한다. 자료는 “실제 발생”의 질문과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는, 역사적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자유를 준다. 그들의 방법에는 부정적이지만, 자료는 신앙을 위해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와 구조

햄릿으로 덴마크 역사를 재구성하지 않듯이, 성경에서는 역사적인 것이나 신학적인 정보들을 추려낼 뿐이다. 신문학적 접근이 있는데, 이는 문학비평적 방법으로 본문 자체가 문학적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의 완성물로 본문을 보는 것으로, 온전한 조직체로서 서로 연결되는 부분드을 조사하는 것이다.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접근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나, 문학적 접근이 더욱 효과적인데, 많은 학자들의 활약은 부족하다(Polzin, Gunn). 성서가 문학으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두가지 문학적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자료들을 일컫는 말)와 구조이다.

1) 이야기

여호수아에서 열왕기까지의 자료들은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시[삿 5], 목록[수 15]), 현저하게 설화체이며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는 상상의 인물과 문학적 관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야기”라고만 한다면, 완전히 상상의 허구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문학적인 부분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다양한 부분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역사적이지 않지만,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자료는 역사적 문서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는 “실제 발생”이 신앙에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님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라는 용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첫째는 “실제적 발생”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욥이나 요나의 이야기와 차별성을 없에버린다. 두 번째는, DH를 시간이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문학작품처럼 단일의 원래적인 것으로만 보게 된다. 실상 DH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경험들을 반영하는 살아서 성장해온 것이다. 셋째로, “이야기”는 성서의 자료를 이해하는 법칙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충분치 못하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구체화된 문학 형태인데,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신앙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구현된 삶의 방식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세계에 적을 두게 한다. 이야기는, 역사가 할 수 없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혼합을 나타낸다. 이렇게 이야기는 본문의 삶과 현재 독자와의 간격을 없앤다. 때론 독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다른 부분들도 맞이하며 거부하게 되는데, 대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에게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2) 구조: 전체적인 구조와 개별적인 책들로 접근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 노트의 제안처럼, DH의 관점은 지도자들에 의한 특정한 연설이나 기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권고적 성격으로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즉, 정복기(여호수아의 연설[1,23장])와 사사시대(설화[삿 2:6-3:6], 연설[삼상 12장]), 왕국시대(다윗언약[삼하 7], 솔로몬의 기도[왕상 8], 분열왕국[왕상 11:29-39])이다. 북왕국의 종말(왕하 17), 남왕국의 미래(왕하 21), 요시야의 연설(왕하 23).      편집자의 평가는 특별하게 과도기의 시점에 들어있으며, 설화들의 관심을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개별적인 책들: 특별한 점은 여호수아 이후의 모든 책들이 이전 세대의 끝으로 시작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 약속된 땅의 정착과 관련된 주제들을 말한다. 1장은 선물로 주어질 땅과 인간의 반응의 중요성으로 시작하여, 22-24장은 첫계명과 관련된 합당한 예배를 원주민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미래는 그들의 반응에 달려있는 것이지만(수 24:14),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가능케한다(24:2-13). 2-12장은 정착의 모습을, 13-21장은 할당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사기서: 이스라엘 역사에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들의 기록이 나와있다. 여호수아의 형식과 같이, 도입구절은(1:1-2:5) 정착의 모습속에 우상숭배가 지속하게 됨도 말한다. 후기는(17-21장) 우상숭배로 인한 재앙을 암시하면서, 문제해결로써 왕정을 예견한다(21:25). 중심부분은(3:6-16:31) 다양한 사사들과 하나님의 구원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단순한 반복(실패, 심판, 회개, 구원)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배교가 심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무엘서: 사무엘은 사사로서 등장하기 보다는 새로운 예언자와 왕적 지도자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왕적 지도권의 설립(사무엘[삼상 1-12장]), 실패(사울[삼상 13-31장]), 성공(다윗[삼하]),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개의 중요한 시구는(삼상 2:1-10; 삼하 22:1-23:7) 야웨의 왕권과 인간의 왕권을 높여준다. 왕권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사울[삼상 8-12]과 다윗[13-16])에 대하여, 거부와 선택이 함께 나타난다(17-31). 법궤는(삼상 4-6; 삼하 6) 인간의 왕권에 대응하는 야웨의 왕권을 나타낸다. 왕실역사(삼하 9-20)는 계승자와 관련된 기록이며, 마지막 부분(21-24)은 다윗왕조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열왕기서: 다윗의 죽음으로 새로운 왕의 시작을 말하며(1-2), 솔로몬의 통치(3-11)가 이어진다. 분열왕국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가 섞여있는데 북왕국의 몰락으로 종결된다(왕상 12-왕하 17). 마지막 부분은(왕하 18-25) 예루살렘의 파괴와 포로기의 시작을 말한다. 예언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현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며(엘리야,엘리사[왕상 17-왕하 9]),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와 심판 모두를 가리킨다.


메시지(Message): 전하려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DH는 특정한 독자들에게 주어졌는데(왕상 8:46-53), 그 대상은 여럿이다. 초기의 독자들이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들었을 부분들도 있으며(법궤 설화), 최종적인 본문은 바빌론의 포로기 공동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메시지”와 관련하여, 문학적․역사적․신학적인 초점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신앙에 대한 것이며, 권고 형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메시지”는 단순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교리적인 진술로 표명될 수 없는 실제적인 현장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초시간적이기보다 현재적인 것이다. 또한, “메시지”는 단순하게 하나의 취지만을 위함도 아니다. 특정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관점이 있는 것이다. 즉, 메시지는 “육화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언어라는 옷을 입고 표현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는 정밀하게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우리는 원래 독자들의 상황과 다른 곳에 서있기 때문에, 본문의 본래적 기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가능한 방법은 그들의 상황과 본문들을 관련지어보는 것이다(병렬 작업). 따라서 포로기와 관련된 질문을 본문에게 던지는 것이 적절한 접근 방법이다: 정체성(하나님은 우리를 버렸느냐?), 죄(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신정론(하나님은 공정한가?), 희망, 신적인 신실함(옛약속은 실현될 것인가?), 신적 실존(성전파괴에 신은 어디에?), 신적 권능(이방신의 손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우상과 혼합주의, 순수함(우리는 이방민족들에게 분리주의자들이어야 하는가?), 항존성과 변화(옛 진리를 어디까지 붙잡아야 하나?), 새로운 시작(포로기 공동체에서 만들어 나가야할 방향은?), 지도력(오늘에 필요한 지도자는?). 모든 포로민들이 이러한 질문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 달려있다. Dtr이면서 제사장인 제 2이사야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 맞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그때’의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낼 수 있다면, ‘오늘’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예민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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