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출애굽기 3장 연구

진실과열정 2005. 9. 23. 23:06

출애굽기 3장(1, 4b, 6, 9-15절) 연구노트

“나는 너와 함께 있다!” - 야웨의 자기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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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1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 4b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3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15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2. 형식(form/structure)

     본문은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신현현과 소명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덜헴은 이 부분이야말로 구약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인 시내산계약(19:1-20:20; 24:1-11)의 서광을 비취는 부분으로서, 이후의 이스라엘의 모든 중요한 신앙행위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Durham, 30). 특별히, 9-15절은 전형적인 소명 설화의 요소를 보여준다(Coats, 36): 임무고지, 거절, 재확신.

     특별히 3장은 자료비평에 있어서 J와 E가 촘촘히 짜 맞추어져있는데, J자료로는 3:2-4a, 5, 7-8, 16-22이며(7-8절은 16-17절과 매우 유사하다), 그 나머지가 E자료이다. 다루고자 하는 본문인 E자료에 따르면, 소명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나누어볼 수 있다(Coats, 37).

I. 서론 

II. 소명대화

    A. 임무고지

    B. 거절

    C. 재확신

        1. 임재의 약속

        2. 표적

    D. 거절: 질문

    E. 재확신

3:1, 4b, 6

3:9-15

9-10

11

12

12a

12b

13

14-15

     한편, 야웨의 이름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각각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J에 따르면, 창 4:26에서 즉, 아담의 3대손(에노스)에서부터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P는 철저하게 출애굽기의 맥락에 따라서, 족장들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만 나타났다고 힘을 더한다(출 6:2-3). E에 따르면, 바로 본문인 출 3장에서 모세에게 야웨의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다.



3. 주석(Comment)

1절: 

     출애굽기 3장은 새로운 시작을 향해서 나아간다. 처음 시작하는 ‘모세가’라는 말에서 일반적인 시작(waw-접속사)과는 다르게 분리접속사(wu)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네러티브의 시작임을 암시한다(Propp, 197).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서막이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구원의 시작에 있어서 모세의 위치는 매우 초라하다. 3:1에서 소개하고 있는 모세는 ‘양 무리를 치는’ 목자로, 장인의 소유인 양을 관리할 뿐이다. 한편, 여기서 장인 ‘이드로’는 E의 용어이며, J는 ‘르우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2:18). ‘이드로’라는 이름은 확실히 미디안적이며, 셈족어의 이름과 연관시킨다면 ‘엄청나다’라는 신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Propp, 197). 말 그대로, 모세는 ‘대단한 미디안 사람’ 밑에 있었던 것이다.

     모세의 임무는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었고, 그는 그 일에 충실했던 것 같다. 목초지를 위해서 어디든지 갔을 뉘앙스를 ‘탈굼 옹켈로스’(히브리어 구약에 대한 아람어 번역본)는 전한다. 양 무리를 치는 것은 고대근동이란 맥락에서 의미있는 표현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리더쉽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Propp, 221). 다윗도 양을 치다가 왕이 되지 않았는가(삼상 16:11-13; 17:34-37; 삼하 7:8; 시 78:70-72)! 이것은 사울(삼상 9)과 엘리사(왕상 19:19)에게서도 유사한 내용이다. 이것이 야웨에게 적용될 때에는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발전하기도 한다(시 23). 그러나, 다른 사람의 양을 위해서 목자의 일을 할 때에는 낮아짐과 순종의 이미지로 극변하기 때문에(Propp, 222), 모세의 양이 ‘이드로의 것’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모세의 상황이 고대근동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고기 잡는 베드로를 실제적인 모델로 삼을 수 없듯이, 사울과 다윗의 일화를 소명의 표준으로 삼을 순 없다.

     모세는 일상적인 발걸음과는 달리 움직였다. ‘광야 서편으로’ 갔다는 말은 이드로의 영역을 넘어간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NASB는 ‘사막을 지나서’[across the desert]로, NRSV는 ‘광야 저 넘어’[beyond the wilderness]로 번역한다). 본문은 모세가 도착한 장소를 ‘하나님의 산 호렙(har ha'elohim horebah)’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덜헴은 LXX은 ‘하나님’을 빼서 읽고 있으며, 호렙(horebah)의 접미어 ah는 ‘~를 향하여’라는 ‘방향 접미사’로 읽을 수 있음을 지적하는데(Durham, 28), 아마도 그는 구체적인 장소보다는 신학적인 관점을 강조하려는 듯하다(Durham, 30). 확실히 구약성서는 호렙산의 지리적인 정보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오늘날의 어디’라는 서기관의 첨가가 없다). 따라서, 호렙산은 많은 성서연구가에게 있어서 끝없는 질문의 대상으로 남겨져 왔다. 프롭은 산의 거대한 크기를 묘사하는 개념으로,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Propp, 183). 이 호렙산에 대하여 콜은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Cole, 62-3): ‘호렙’이라는 명칭과 ‘시내’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점에 대해서, 호렙을 (거대하기 때문에) 시내산의 일부로 보면서 해결을 시도하거나, 호렙은 셈어로, ‘광야, (사람이 없는) 황폐한 곳’을 의미하고, 시나이는 비셈어로 보다 더 오래된 ‘신광야’에서 그 유례가 있을 것으로 서로 구별하기도 한다. 한편, 히브리어로 ‘가시나무’를 의미하는 seneh(‘스네’로 발음)와 아카드 달 신인 Sin과의 관련성도 제기된다(이는 시내산과 그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비록 호렙산의 지리적 위치는 구체적으로 지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벨 무사’(Yebel Musa, 모세의 산)로 의견을 모은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호렙산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일까? 콜은 포로이후의 상황을 상정한다: 아마도 바벨론 유수의 기억으로 과거의 모든 것들을 잊어버렸을 것이며, 그렇지만 바란 혹은 세일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러 오실 것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신 33:2)을 근거로, 희미하게나마 남쪽일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다는 것이다(Cole, 63). 이것은 신이 북쪽 산에 있을 것이라는 가나안 사람들의 일반 통념과 대치된다. 한편,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으로 ‘역동적으로’ 점점 인식되어져가고 있는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인데, 나바티안 비문에 의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시내산은 거룩한 장소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이다(Cole, 63). 하지만, 본문은 모세가 어떠한 종교적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단지 당시의 사람들이 범상치 않게 생각했던 산으로 양들을 이끌고 갔다는 측면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신앙의 눈으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다: 모세는 이드로의 양을 끌고 여기에 왔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이끌고 여기에 올 것이다.


4b:

     하나님은 누가 오고 있는지 이미 아셨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나, 모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몰랐다. 모세는 단지 한마디로 대답할 뿐이다: hinneni. 다른 영역본은 한결같이 ‘Here I am’으로 표현하여,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LXX은 ‘What is it?’으로 번역하면서, 자신을 부른 소리에 모세가 당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LXX이 문맥상 사건의 진행을 잘 보여주는 해석을 하고 있다.

     떨기나무는 J문서에서 ‘불붙지만 타지않는’ 신비한 현상으로 나타났다(2절). 프롭은 이 떨기나무를 주의 ‘사자’와 언급하면서, 불에 대한 다양한 신적인 해석들 가운데서 나중에 있을 시내산/호렙산에서의 불꽃에 대한 전조라고 보았다(Propp, 222). 이렇게 불붙은 가시나무의 현상은, 자연스럽지 않은 ‘옷’을 입힘으로써 자연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Fretheim, 55)? 이러한 신비적인 현상에 대해서 E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모세를 알고 있지만, 모세는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정체(자기소개)가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는데 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모세의 자기발견의 순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떨기나무에서의 만남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정체성을 돌이키시기 때문이다. ‘모세’야말로, 그 이름의 뜻이 ‘건져낸 자’가 아닌가(BDB, 602)! 그는 더 이상 양의 목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수천년 후에 베드로가 들었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사람을 낚는 어부이다! 호렙산은 모세의 진정한 자기 발견의 장소이며, 역시 하나님의 진정한 자기 계시의 장소가 된다.


6절: 

     소리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신다: “나는(’anoki) 네 조상(MT는 아비)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히브리어 순서로도 하나님의 적극성이 나타난다. 한편, ‘네 조상’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래 MT(=LXX)에서 단수형으로 되어있는데(Durham, 28), 창세기 46장 3절의 표현(‘네 아비’)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단수형의 표현은 매우 흔치 않은 경우이기 때문에, 덜헴은 모세가 애굽에 있었을 때, 그의 가족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았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주장하기도 한다(Durham, 31).

     고대사회에 있어서 ‘조상의 하나님’은 씨족의 신적 보호자(patron) 개념(창 26:24; 31:5; 43:23; 46:3; 50:17)과 유사하지만(Propp, 201), 본문에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모세에게 전혀 관계없는 신의 등장이 아니라, 가장 밀접한 신의 등장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 하나님’(haelohim)’이라는 정관사가 붙은 명확한 대상을 인식했기 때문이다(Durham, 28). 이는 모세의 지각의 변화를 뜻한다.

     

9-10절: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J와는 달리) 비교적 아주 간단히 표현하신다: “억압을 보고,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을 인도하리라.” 사명은 매우 간단하다. 9절의 등장인물(이스라엘 자손, 애굽 사람, 하나님)이 10절에는 하나 늘었다(하나님, 바로, 이스라엘 백성, 모세). 9, 10절 모두 그 시작은 we‘atah로 한글개역은 ‘이제’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 사역의 위대한 출발로 받아들일 수 있다.


11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다. 모세는 부정(“나는 할 수 없소”)의 주장을 하면서 두 번의 관계사(ki-영어로 that)를 쓰고 있다. “내가(’anoki) 누구라고, (that) 바로에게 가며, (that)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내리이까?”

     ‘가라’라는 명령에는 ‘내가 그리 하겠나이다’(hinneni)가 맞을 것이다(창 37:13). 그런데, 이건(mi ’anoki) 어떤 뉘앙스인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드온(삿 6:15)과 같이 불신앙의 표현인가(Cole, 68)? 다윗(삼상 18:18; 삼하 7:18)과 솔로몬(대하 2:5)과 같이 겸손한 동의인가(Propp, 202)? 아무튼 자신의 40년전의 모습과 대조적임에는 틀림없다(출 2:11-13). 우리는 여기에서 성급하게 모세의 심리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자제해야만 한다. 모세는 자신에게도, 그리고 결국은 신앞에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12절:

     모세의 주저함앞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왜냐하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ki-’ehyeh ‘immak).” 하나님의 수사법은 모세의 불신의 표현(ki, ’anoki)을 교묘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즉, 12절에서 하나님은 긍정의 주장을 하면서 똑같이 두 번의 접속사(ki-왜냐하면)와 ‘내가(’anoki)’라는 강조어를 사용하고 있다(Durham, 29): “그리고 왜냐하면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12b절에서 정관사로 지정된 하나님(haelohim)을 섬기는(‘abad) 것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새롭게 정한다: “(이어서) 이 산에서 ‘그 하나님’을 섬길 것이기 때문이다.”

     11절의 모세의 질문(내가 누구입니까? 즉, 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에, 왜 하나님은 이런 대답을 했는가? 모세와 ‘함께 계심’의 확증을 위해서인가(Cole, 68)? 무엇보다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것은 11절의 두 번이나 반복되는 모세의 ki(여기에는 관계대명사, that)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Propp, 203). “모세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누구와 함께(‘im)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Durham, 33). 즉, “중요한 것은 ‘네가 누구냐’에 있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즉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데 있다.” 이 말은 족장사에 있어서 무소부재의 신적 특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던 개념이다(창 26:3; 28:15; 31:3).

     한편,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에서,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의 말인, 장차 되어질 해방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언약) 형성인가(18:12; 24:4-5)? 아니면, 모세 홀로에게만 해당되는 증거로서, 지금 타지않는 불붙은 가시나무(하지만 E문서에서 배제된다)인가(Propp, 203)? 아니면, ‘신명(’ehyeh)’ 그 자체인가(Freedman)? 혹은 서기관의 실수로 빠진 것인가(Noth, Fohrer)? 여러 가지가 나름대로 제시될 수 있지만, 문맥에 따르면, 프리드만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즉, 신명)를 고려해봄직하다. 중요한 것은, 모세의 부정적 ‘나’(’anoki)가 하나님의 강조된 ‘나’(’anoki)로 대치되는가에 있다(Durham, 33).


13절: 

     모세는 ‘그 하나님’께 대답한다. 여기서 모세의 첫 단어는 이것이다: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hinneh)!”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인가? 이 말은 모세의 부드러운 부정임에 틀림없다. 아직도 모세는 주저하고 있는 듯하다. ‘조상들의 그 하나님’이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었는지(이는, 모세를 메신저의 역할로 볼 때, 자신이 전하는 분의 정체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Houston, 71]), 모세는 자신의 질문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물음으로 바꾸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내가 누구요?”라는 모세의 첫 번째 질문은(11절), 곧 “그럼, 당신은 누구요?”로 바뀌었다(Durham, 37). 프롭은 이를 모세의 불만족스러운 질문으로 여겼다(Propp, 203). 즉, “그렇다면, 그런 당신은 과연 누구란 말이오?”

     한편,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mah-shemo)’라는 물음은 “그가 누구냐?”라는 것과 약간의 차이를 내포한다. 즉, 단순한 이름보다는, 그의 성격(본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Cole, 69). 혹은, 정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모르면서 자랐을까? 아니면 정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이 맞는지 모세를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Cole, 69)? 이러한 추측에 대하여 본문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출 6:3(P문서)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엘-샫다이’(산신)와 같은 이름으로만 알려졌음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모세는 ‘엘-샫다이’라는 이름을 기대했었어야 했다. 콜은 족장들의 하나님에게 혹시 새로운 이름이라도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을 것으로 성서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데(Cole, 69), 그렇다면, 신의 이름은 종종 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자료비평을 통해서만 합당하게 연구될 수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E 문서는 다양한 신명을 언급하고 있다. 즉, 모세(이스라엘 백성)는 조상신의 신명을 알고는 있었다(Propp, 204): ‘영원한 하나님’(’el ‘olam), ‘벧엘의 하나님’(ha’el bet’el), ‘이삭의 경외하는 이’(pahad yishaq, 창 31:42,53). 한편, J 문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방패’(15:1), ‘야곱의 전능자’(49:24)도 언급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족장사에 있어 다양한 전승의 흐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신명에 대하여 토라의 편집작업시에 본문(모세의 질문과 야웨의 대답)이 재해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대홍수 이전에 야웨의 이름이 알려졌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창 4:26[J]).


14절: 

     14절은 구약성서를 통틀어서 가장 복잡한 절임에 틀림없다(Fretheim, 63; Childs, 61).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최종적 자기 선언에 들어가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한구절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언임에 틀림없다(Cole, 69). 문법적으로 보면, 두 번째 'ehyeh가 하나님의 이름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욱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노트(Noth)는 활동적인 자기계시의 측면을 강조하는 ‘현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존’은 어떤 의미인가? 우상은 없지만, 나는 있다는 유일신론적 의미(I am He who is)인가? 아니면, 나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가(출 33:29)? 나는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나질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떤 대답도 계속된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14절의 번역본은 다양한 신학적 이해를 배경으로 서로 약간은 상이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크게 네가지 접근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중도적 입장: 본문을 그대로 번역하는데, 이는 존재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된다. LXX은 ego eimi ho on, 즉 “I am the existing one”이라는 개념이다. NRSV는 “I AM WHO I AM”라고 했다. 덜헴은 ‘to be’인 hyh의 1인칭 칼미완료 동사형에 ‘지속적인 행위’라는 시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I AM the one Who Always Is”, Durham, 35-9). 프롭은 아퀼라와 데오도시온(esomai (hos) esomai)을 따라서, “I will be who I will be”라고 해석했는데(Propp, 205), ’ehyehhyh의 미완료 동사이기 때문에, 미래와 연관시킨 것이다(Propp, 204). 유대인들은 발음 그 자체를 영역했다: “Ehyeh-Asher-Ehyeh”(JPS) 한글 개역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스스로’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시원자의 어감을 주고 있다. 새번역은 “나는 곧 나다”라고 영어적 표현을 따라했는데, 난외주에 ‘나는 되고자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라는 미완료 동사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2) 수정: 히브리어에 수정을 가하여, 이름의 뜻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이다. ’aser를 해석하면서 “I can be and can do anything”으로 만들기도 한다. 올브라이트는 야웨의 이름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하여, 히필-사역화시키는데, “I cause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라고 제안한다(Haupt, 1909; Albright, 1924). 이것은 억측에 따른 히브리어의 재구성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Propp, 225). (3) 의미의 확대: 단지 14절만의 문법으로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름의 의미를 확대하려는 시도이다. 프레타임은 단순히 현재형보다는 앞으로 신실한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의미로 보면서, “I will be God for you”라고 제안한다(Fretheim, 63). 김이곤은 여기서 이름을 찾는 것은 소득없는 일이라고 보며,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기능에 관심을 두면서, 맥락을 강조한다(김이곤, 53). (4) 거부: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는 것에 거절하신 것일까? 새번역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내 이름을 묻다니! “나는 곧 나다”일까? 야웨가 자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뜸들이시는 걸까(Propp, 225)? 즉, 프롭은 E가 문법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내용까지 기록한 이유는 비슷한 발음의 성격을 보이려는 것일 뿐, 야웨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Propp, 226). 그렇다고, 거부의 상황은(L. Koehler) 될 수 없다: ‘It is not your concern’ 왜냐하면, 이럴 경우, ’ani ’ser ’ani라고 해야지 옳기 때문이다(Childs, 69). 물론, 15절과 다르기 때문에, ‘있다(to be)’의 언어유희적 성격이 있음은 틀림없다. 차일즈는 대답과 거절 모두의 표현이었다고 본다(Childs, 76).

     프롭의 말처럼, ’ehyeh 자체가 이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Propp, 226). 이는 다른 용례(호 1:9; 렘 11:4; 30:22)에서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위에서 제시된 세 번째 견해를 본 맥락에서 제시할 수 있다. 즉, 언어유희의 측면에서 12절에서 언급된 ’ehyeh가 14절에서도 동일하게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너와 함께 있다!”


15절:

     이제, 야웨는 6절에서 자신을 처음으로 소개하셨던 것에 더하여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선포하신다(히브리어 성서는 야웨[YHWH]가 바로 첫말로 나온다). 한편, 성서외적으로 YHWH는 모압석비(약 기원전 830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Emerton, 738).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이 YHWH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있다. 한글개역성서는 ‘여호와(Jehovah)’로 되어있는데,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YHWH(15절 ‘여호와’의 히브리어 자음)는 정확히 어떻게 읽어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모음이 없어도 읽는 것이 가능할까? 다음의 예문은 이것이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Brotzman, 25]: a smpl tst 'f ths srt shw ths qut wll => a sample test of this sort show this quite well).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YHWH를 기원전 3세기부터는 발음하지 않았고(Friesen, 343), ‘나의 주’('adonay), 혹은 ‘그 이름’으로 바꾸어 읽었기 때문에,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가 없다. ‘여호와’라고 읽기는 기원후 1518년 갈라티누스 신부가 자음 YHWH에다가 나의 주(adonai)의 모음을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다(이형원, 475). 이렇게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문헌의 영향으로(Propp, 205), 대부분의 번역본은 ‘여호와’를 따르게 된 것이다. 한편, 영어 성서는 ‘나의 주’('adonay)라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LORD라고 기록하고 있다(이는 새번역에서도 동일하다). 그런데, ‘LORD’나 ‘주’라는 번역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름으로 가르쳐주신 것에 ‘직분’으로 변환시켰다는 형식에도 문제가 있으며, 본문의 맥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확언이라는 측면(‘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는 본문과 히브리 사상에서부터 멀리 벗어난 기독교중심의 전통에 메어있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이형원, 483-7).

     조상들에게도 야웨는 다른 어떠한 존재보다 ‘그들과 함께 있던 하나님’이었던 것처럼, 모세도 ‘지금 여기에 있는 분’ 즉 ‘야웨’와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족장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 대하여, 겔 20:5-6은 출애굽기를 더욱 확증해 준다(Seters, 47),


13-15절의 양식비평적 접근(Childs, 64-70):

     모세의 소명사건에 대하여, 구전전승을 재구성하기는 무리인데, 성서의 자료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평행구절(창 17:1; 26:23; 28:13; 출 3:6)과 달리 모세는 예언자적 소명과 맥을 같이한다. 일종의 중재자(천사)의 등장으로 사람의 질문에 모호한 대답을 하기도 한다(창 32:30; 삿 13:17). 전형적인 소명 패턴으로 본문의 상황이다. 종교적 행습에 대한 질문들도 있다(출 12:26; 13:14; 신 6:20; 수 4:6,21; 22:24). 이렇게 다양한 상황에서 본문은 어떻게 접근이 될까? 13절에서, 일단 모세는 ‘간접적으로’ 신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만약’이 아니라, ‘그렇습니다’로 시작하여 모세의 소명의 증명됨이 신의 이름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는 제의적인 목적과도 맞지 않으며, 예언자에게 있어서의 권위도 맞지 않다(암 7:10ff; 호 9:7). 참예언자를 가르는 방법(신 13:1; 18:20; 렘 2:8; 23:13)도 제시된다. 차일즈는 E 전통의 배경에서 마지막을 선택하면서, 예언자로서의 자격증명이라는 상황을 설정한다. (그러나, E는 모세를 예언자와 연관시키는가? 오히려 D에서 관련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예언자적 소명과 많은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만남, 임무부여, 거절, 재확신, 증표), 모세는 군사적 지도자들에게 필요했던 ‘함께하심’의 확신이 더 해졌다(Houston, 70).



4. 해설

     출애굽의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희미한 과거의 기억들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다(Gottwald, 458).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즉 ‘쓸모없는 황무지’에서 ‘쓸모없이 황량한’ 삶을 살고 있는 모세에게 자기를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종탑 밑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세에게 오늘은 프레타임의 말처럼, 하나님은 종교적 장소가 아닌 곳에(아주 평범한 하루의 삶속에서) 나타나셨다(Fretheim, 54). 바로 여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구원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도권(divine initiative)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구원사역에 감히 참여할 수도 없으며, 그럴 능력(최소한의 자신감)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2:24-25과 3:7-10을 비교해 볼 때(자료비평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어가는지 알게 된다(Fretheim, 59). 하나님의 ‘나의 백성’이라함은,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바로 지금!) 신적선택은 이루어진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에 있다. YHWH의 이름에 대한 세계성서공회연합회(1991)의 발표에 따르면, (1) 대치(‘주’: LXX의 kurios를 따름), (2) 번역(‘스스로 존재하는 분’, ‘창조주’: 사역능동 미완료태, ‘보존자’: 사역능동 분사, ‘영원하신 분’), (3) 음역(‘여호와’, ‘야웨’)의 세가지가 제시되고 있다(이형원, 471-8). 그러나, 수많은 편집의 기간을 상정할 때,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본문의 위치와 그 의미를 조사해야만 한다. 즉, 모세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험차원에서 물었을 수도 있으며(Propp, 223), ‘야웨’라는 이름이 인류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E의 주장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E는 하나님의 이름 계시와 출애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출애굽과 야웨는 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을 아심(3:7,9)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좋은 부분이다(사 53:3). 하나님은 지금 계시는 자(he who is present)이며,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기로 약속한 자(he who has promised to be present with his people)이다(Sailhamer, 45). 야웨는 헬라사상과 같이 철학적인 포장에서 벗어난 분이다. 야웨는 히브리 사상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같은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즉, “I AM with you”이다. 그는 개인적 관계의 하나님이지, 관념적인 분이 아니다(Ashby, 24).

     야웨에 대한 번역본의 다양한 언급에 대하여, 주(Lord)로 번역한 것은 문제가 된다. 이는 후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야웨가 이름이라는 것을 상실하고 직분이나 별명(epithet)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Fretheim, 64). 하나님의 이름은 ‘지금 함께 계시는 야웨’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사형이 능동적인 행동주체로서, 즉 ‘임재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Brueggemann, 213-4).

     구약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야곱(창 32:30), 마노아(삿 13:6,17-18). 하나님은 모세를 이름으로 알았다고 말한다(출 33:12,17). 이것은 ‘서로’ 깊이 아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름을 알려할까? 이름은 ‘자신’이나 ‘본질’을 의미할 수 있지만, (마법의 세계였던) 고대에서는 사물의 이름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ropp, 224). 이것이 바로 아담(창 2:19; 3:20)과 하나님의 방법(창 17:5, 15; 32:29; 35:10)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없는 것이다(출 20:7; 신 5:11; 시 24:4).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야웨를 어떻게 다른 문화(선교)에게 알려주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