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연구(6) 본문 6:9-9:29
0. 성경읽기와 개인적 분석작업
1) 내용요약
노아의 사적에 대하여 시작하며(셈,함,야벳), 온 땅에 가득한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가운데 노아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 노아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으며, 명하신 대로 혈육있는 모든 생물(둘씩? 일곱씩?)을 취한다.
방주에 들어간지 7일 후(600. 2. 17.)에 홍수가 덮여서, 40일동안 비가 쏟아졌다. 산을 덮을 만한 많은 비로 모든 생물은 죽임을 당하였고, 오직 노아와 함께 있던 자들만이 남았다. 물은 150일동안 땅에 창일했으며, 하나님의 권념으로 바람이 불어 물은 150일 후에 감해졌다. 7월 17일에 아라랏산에 머물었고, 10월 1일에 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40일이 지나서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놓았다. 601년 1월 1일에 지면의 물이 걷히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다.
나온 생명체에게 하나님은 생육과 번성의 복을 주시고,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다. 하나님은 더 이상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노아(모든 생물)와 언약을 맺는데, 땅을 침몰할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며,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신다.
농업을 시작한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있다가, 함의 발견과 고발이 이어진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노아를 감싸준다. 결국, 가나안은 노아의 저주를 받으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
2) 질문
-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가?
- 노아의 의로움은 무엇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은혜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의 은혜인가?
- 노아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 J와 P 문서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현대과학은 홍수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 고대근동의 홍수설화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 홍수의 문학적 구조표는 어떤 기여가 있으며, 어떠한 한계가 있는가?
- 노아의 언약은 이후로의 언약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 특별히, 땅이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땅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는가(8:21)?
- 노아에게 내리신 복은 창세기 1장의 복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 술취한 노아와 가나안의 저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묵상
- 노아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배경설명은 주어져있지 않다. 단지, ‘의롭다’(6:1; 7:1)라는 평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다. 의로움의 기준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의로움이 있다.
- 노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붙잡는다(6:18).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다. 신앙의 투지와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약을 세우기 위한 끝없는 노력을 한 것이다.
- 구조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권념하심은 독특하게 두드러진다. 150일동안 물이 창일했을 때, 노아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하나님은 노아와 그 모든 육축을 권념하시는 분으로 나오신다. 한편, 바람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 신자와 불신자와의 최후는 명확하다. 셋의 자손들 중에서 유독 노아만이 신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아니면, 6:1-8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셋의 자손들이 타락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불신자의 최후는 분명하며, 한번 닫힌 구원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홍수 이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예배로 시작된 새로운 질서는, 하나님의 복이 제시됨으로써, 이제 나아가야할 비전을 붙잡을 수 있게 된다. 특별히, 무지개의 증표는 적극적인 삶의 반영을 재촉한다.
- 노아의 술취함과 가나안의 저주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다. 무엇보다도 의로운 노아의 모습은 완전히 깨어지며(이렇게 취하여 벌거벗은 것이 나쁜 것인가?), 함의 작게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하여 엄청난 심판의 저주는 우리의 삶에 경고한다.
1. 본문 연구
ה וֹתּאּ ר ה־ל־ת ה־ל ת ־ת םי ר 8:1
׃ם וּכּ ץאָ־ל וּר םי ר
2. 형식/구조/배열
1) 개요
- toledot으로 시작한다(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한편 6:1-8은 이어지는 단락의 서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9:17로 단락을 정하는 제안도 있는데(노아의 술취함이 홍수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편집자의 의도를 보면(에덴이야기에서 가인가 아벨/ 아담의 족보에서 신-인결혼), 반드시 홍수와 노아의 술취함이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별히, 다음의 이야기 단락에 근거가 되는 실마리를 제시한다는 면(9:18-19)에서 볼 때, 오히려 술취한 사건은 6-9장에 들어가야 옳다.
- 홍수의 주제는 세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님이 노아와 가족들을 방주에 태우심으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의 나머지에게 홍수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다시는 그러한 홍수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2) 구조와 관련하여
- 구조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들이 제안되고 있다.
- 간략구조(B.W.Anderson):
과도기적 서론(6:9-10)
1. 피조물에서의 폭력(6:11-12)
2.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 파멸을 결심(6:13-22)
3.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 “방주로 들어가라”(7:1-10)
4. 홍수의 시작(7:11-16)
5. 홍수로 상승함(7:17-24)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다
6. 홍수가 하강함(8:1-5)
7. 지면이 마름(8:6-14)
8.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 “방주에서 나오라”(8:15-19)
9. 하나님이 질서를 보존하실 것을 결심함(8:20-22)
10. 네 번째 하나님의 말씀: 언약(9:1-17)
과도기적 결론(9:18-19)
- 또다른 견해(Walsh): 장면분석(등장인물을 중심으로)
1. 노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노아와 인류의 행위에 대한 반영이 앞서있다(6:9b-21)
2. 네러티브: 노아가 주연(6:22)
3. 노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7:1-4)
4. 네러티브: 노아와 동물이 주연, 하나님은 조연(7:5-16)
5. 네러티브: 떠오르는 물이 주연, 노아는 수동적(7:17-24)
6. 네러티브: 가라앉는 물이 주연, 하나님이 조연(8:1-5)
7. 네러티브: 노아와 새들이 주연(8:6-14)
8. 노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8:15-17)
9. 네러티브: 노아가 주연(8:18-19)
10. 노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노아와 인류의 행위에 대한 반영이 앞서있다(8:20-9:17)
(해설)
*1-10: 어휘에서도 특징적이다: “멸절하다”, “언약을 세우다”, “땅에 차다”, “먹다”는 여기에서만 등장한다.
모두 피흘리는 것이 나온다: 폭력(6:11,13), 피흘림(9:5-6)
파괴의 심판에서 보존이 보증된다.
*2-9: 전술한 명령에 순종하는 노아: 방주를 지으라, 방주에서 나오라.
*3-8: 노아에게 전해진 명령: “동물들과 함께 들어가라”, “나오라”
*4-7: 등장인물, 긴 시간등이 대구이다.
*5-6: 홍수와 방주가 주연이다. 앞에서는 מ의 반복으로 홍수가 강조되고, 뒤에서는 ו연결형으로 간략화된다.
- 심화구조: 창세기 6-9장의 노아 홍수를 문학적(구조적) 분석으로 볼때, 노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가 아닐까?
a. 노아(6:9) b. 셈, 함, 야벳(10) c. 방주(14) d. 홍수(17) e. 언약(18) f. 식물(21) g. 방주로 들어가라(7:6) h. 칠과 사십주야(4) i. 칠일후에 홍수가 땅에 덮였다(10) j. 방주로 들어감(15) k. 문을 닫음(17) l. 사십일을 있다.(17) m. 물이 더 많아(18) n. 산이 다 덮임(20) o. 물이 백오십일동안 있었다(24) p.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했다(8:1) o'. 백오십일 후에 (8:3) n'. 산의 봉우리가 보임(5) m'. 물이 점점 감하여(5) l'. 사십일이 지나서(6) k'. 창을 열고(6) j'. 방주로 돌아와(9) i'. 또 칠일을 기다려(10) h'. 또 칠일을 기다려(12) g'. 방주에서 나와라(16) f'. 무릇 산동물은 너의 식물이 되라(9:3) e'. 언약을 세우심(9) d'. 홍수를 안하심(11) c'. 방주에서 나옴(18) b'. 셈, 함, 야벳(18) a'. 노아(19) |
- 숫자의 대구: 홍수이야기는 창조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HCS, 105).
7일: 홍수를 기다림(7:4)
7일: 홍수를 기다림(7:10)
40일: 홍수의 기간(7:17a)
150일: 물이 승리한 시간(7:24)
150일: 물이 힘없는 시간(8:3)
40일: 기다림(8:6)
7일: 기다림(8:10)
7일: 기다림(8:12)
- 이러한 대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홍수의 본질과 불의 상승과 하강,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노아 권념을 비록 분량에서는 아주 작지만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홍수가 일어나는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사건의 심각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우리도 심판 받아 죽어간 사람들에 비해 별로 나은 것이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의 절정으로 창조하셨던 인류를 스스로 파괴해야 하는 괴로운 마음을 슬며시 보여 주는 듯하다.”(HCS, 106)
4) 고대근동과의 관련성
- 메소포타미아 판 홍수이야기에 길가메쉬 서사시 제11판에 등장한다. 최신 개정은 신앗수르 제국(650 B.C.)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초기버전은 2000년 B.C.에 돌판에 새겨졌다. 그런데, 1600년 B.C.에까지는(구바벨로니아 버전) 홍수이야기가 길가메쉬설화와 혼합되지는 않았고, 그 이후에 아트라하시스의 홍수이야기에 포함되어있다. 수메르 홍수설화에도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라스 샤므라(1400 B.C.)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서쪽지역에서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주 자료는 ANET, 93-95(구바벨로니아 버전[1600 B.C.])를 참조할 것. 다른 어떤 것들보다 창세기와 비교가능한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 제 11판이다.
- 홍수설화를 비교할 때,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신학적인 목적을 염두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한편, 창세기 기자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설화를 알고, 차용했을지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생기는데, 최소주의자(minimalist)들은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반면, 최대주의자(maximalist)들은 이스라엘이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배웠을 충분한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1; 4; 5; 6:1-4; 11:1-9).
- 홍수설화의 비교는 17가지의 유사점을 밝혀낸다: 인류멸망이라는 신의 결심, 영웅에게 홍수를 경고함,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함, 영웅의 순종, 들어갈 것을 명령함, 들어감, 문을 닫음, 홍수에 대한 설명, 생명의 파괴, 비가 그침, 산위에서의 방주, 영웅이 창문을 열다, 새들의 정찰, 나옴, 희생제사, 희생제사를 흠양하는 신, 홍수와 관련하여 영웅에게 복을 내림. ⇒ 그러기에 창세기는 신학적인 목적의 책임을 알 수 있다!
- 창세기와 고대근동의 홍수설화의 차이점: 나타난 현상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1) 유일신론적 신학/다신론적 신학: 길가메쉬에서는 하늘의 신들의 회의에서 아누와 엔릴이 번성한 인간으로 인한 소음 때문에 인류를 파멸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장일치가 없었으니, 에아와 엔키가 영웅에게 홍수를 알려준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엔릴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
2) 심판의 이유에 대한 차이: 창세기는 인간의 소음과는 관련이 없다. 단지 지상을 파멸시키는 교정할 수 없는(incorrigible) 악함과 폭력 때문이다.
3) 노아와 관련해서: 길가메쉬에서 모든 인간이 죽음을 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으며, 그의 곤경에 연민을 느낀 고대근동의 상황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라는 영적인 교훈이 들어있다.
4) 홍수와 관련해서: 고대근동의 신들은 변덕스러운 신들로 나타난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약함을 반증한다. 그들은 홍수를 조절하지도 못하는 신들이다. 그들은 겁에 질리며, ‘개들처럼 짖어대는’ 신들이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홍수가 마치 하나님의 철저한 조절안에 들어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전능이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혼동을 다스리시는 바람은 천지창조를 연상시킨다.
5) 제사와 관련해서: “신들이 그 향기를 흠양했다”라는 유사어구가 있지만, 상반되는 장면 역시 등장한다. 즉, 길가메쉬에서는 신들은 ‘번제 주의를 파리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왜냐하면, 고대근동의 신은 인간에 의해서 음식을 제공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엔릴은 생존자로 인해서 매우 놀란다. 엔릴은 전지전능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 창세기는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주적인 질서 부여자로써 그의 자비를 인간에게 배푸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6)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인간적인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시는 분(신인동형동성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근동에서의 신들은 인간의 반영임을 극단적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탐욕스러우며, 공포를 느끼고, 무지하다.
7) 결국, 노아는 영웅이 아닌 것이다. 노아는 영웅적인 모습이 없다. 노아는 ‘안식’일 뿐이다(5:29). 그러나 고대근동에서는 영웅을 만들어낸다. ‘지우수드라’ 즉, ‘우트나피쉬팀’(영생을 찾은 자)과 ‘아트라하시스(초월적인 지혜자)’들이 홍수의 생존자들이다. 홍수와 관련해서 노아는 한마디 말도 없으며, 그 어떤 감정조차 느낄 수 없는, 절대적인 순종자이다. 그러나, 우트나피쉬팀은 매우 활동적인 모습이다. 그는 동물대신에 황금을 실으며, 그 자신이 배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는 여러말로 자신의 감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홍수이후에 고대근동의 영웅들은 왕이 되거나, 영생을 얻는 신들의 반열로 올라간다. 그러나, 노아는 지극히 평범하다. 오히려, 그는 술취해 쓰러지는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영웅적인 위업이나 높여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에 있다”(Wenham, 166)
5) 문서가설 연구
- 본문분석
|
J |
P |
편집자(J 맥락) |
홍수예고/방주건설 방주에 들어가라는 명령 노아의 나이 방주에 들어감 홍수의 시작 문을 닫음 홍수가 계속됨 홍수의 파괴력 홍수가 줄어듦 방주가 산위에 머묾 창문이 열림 새들의 정찰 지면이 마름 방주에서 나옴 희생제사 생명에 대한 언약 |
7:1-5
7:7 7:10,12 7:16b 7:17b 7:22,23a,c 8:2b,3a
8:6 8:7-12 8:13b
8:20-22
|
6:9-22(long!)
7:6 7:13-16a 7:11
7:17a 7:18-21,24 8:1-2a,3b-5 8:4
8:13a,14 8:15-19
9:1-17(long!) |
7:3a
7:8-9
7:2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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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와 P문서의 차이점
J |
P |
야웨: 신명과 언어적인 차이점 7쌍의 정결한 동물, 1쌍의 부정한 동물 (7:2-3) 7일의 기다림이후의 40일동안의 비 (7:4,10,12, 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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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힘: 신명과 언어적인 차이점 모든 동물은 한쌍씩 (6:19-20; 7:15-16) 물이 150일동안 상승하고, 150일동안 하강: 연대기적으로 홍수는 일년을 보여줌 (7:11,24; 8:3,5,13,14) |
- J와 P문서의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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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P |
인간의 타락 파괴의 결심 방주에 실을 것을 명령함 방주에 들어감 홍수의 시작 생명체의 파괴 홍수의 끝 다른 홍수가 없을 것을 약속함 |
6:5 6:7 7:1-3 7:7 7:10 7:22-23 8:2b,3a 8:21b-22 |
6:11-12 6:13 6:18-21 7:13 7:11 7:20-21 8:3b-5 9:11-17 |
- 분석: J가 P에 의해서 보완되었다. 그러나, 서론(6:5-8)과 결론(9:20-27)은 J에 의한 것이다. 결국, J는 P를 다시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편집적 흔적). 그러나, J와 P에는 문제가 있으니, P는 상당부분의 언급이 배제되어있기 때문이다(P + 방주에 들어가라는 명령 + 문을 닫음 + 창문을 열다 + 새들의 정탐 + 희생번제).
6) 방주(6:14-16)
- 규모: 300규빗×50규빗×30규빗(길이 135m, 폭 22m, 높이 13m)로 농구장 20개가 2열로 배열한 규모이다. 총적재량 43,000톤으로 현재 생존하는 생물체 17,600여종의 암수를 실어도 1/3밖에 차지하지 않을 정도로 큰 사이즈이다. 역사적으로 2,500 B.C.에 50m 길이의 배가 발견되었다. 현재의 기술로는 최대의 목선은 90m가 한계이다. 한편, 방주의 규모는 후에 나타나는 성막의 정확한 3배이다(출 27:9-13).
- 하나 밖에 없는 창과 키나 돛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이 배의 목적이 항해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표현이다.
7) 현대과학의 접근
3. 주석
9a절
- 새로운 단락의 제목에 해당한다.
9b-21절: 노아와 패역한 세상, 하나님의 독백(장면 1)
6:9b
- 문자적인 번역에는 강조점이 있다: “Noah, a man righteous, perfect was he among his contemporaries”
- 의로움(קידצ): 구약에서 매우 일반적인 용어이다(206번 등장). 성격이나, 사람에 대하여 ‘사악함(עשׁר)’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동의어로는 ‘무구한’(innocent)와 ‘곧은’(upright)이 있겠고, 법적으로는 무죄의 뜻이다(출 23:7-8; 신 25:1). 의로운 사람은 법을 지키는 사람이다(겔 18:5-9). 시편에서도 많이 등장하는데, 소극적으로 죄를 피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좋다’(בוט)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종종 사용된다.
- 완전한(םימת):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완전함(wholeness/completemess)의 뜻으로, 희생제물(레 1:3,10)에 해당된다. 사람에게 쓰일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거하는 자이며(시 15:1-2),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삼하 22:24; 겔 28:15),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시 119:1). 욥(12:4), 아브라함(창 17:1), 온 이스라엘(신 18:13)이 결백하다고 불리워졌다.
- “하나님과 동행했다(נ־ךלהתה םיהלאה־תא)”: 에녹의 경우와 같이(5:22,24), 이름이 포함되어있다(17:1; 48:15; 왕하 20:3). 이러한 삼중적인 표현을 통해서 노아의 성격이 규정되고 있다: 그는 의롭고,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으며,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인 것이다.
6:10
- 아담과 데라와 같이 세아들의 아버지이며, 역사의 변환기의 사람이다(4:1-2,25; 11:27). 한편, 아들들의 의로움같은 문제는 본문이 언급하는 내용이 아니다(참고: 겔 14:14-20).
6:11
- “땅이 패괴하다”: 11-13절까지 ‘땅’은 6번, ‘파멸(ruin)’은 5번 등장한다. 특별히 12절은 니팔동사(ה)로 망가진 옷을 뜻할 때 사용되며(렘 13:7; 18:4), 12-13절의 히필동사(תי)로 신적 심판으로 인한 급격한 파괴를 말한다(창 18:28,31,32).
- “강포가 땅에 충만하다”: 하나님의 창조의도와는 반대로(1:22,28), ‘폭력’(סמח)이 충만해졌다. 이것은 ‘압제’(דשׁ)와 관련되는 단어이며, 반사회적이고, 부유한자들의 가나한 자들을 향한 것(암 6:1-3), 어리석음(잠 16:29)을 포함한다. 이는 창세기 4장에서 가장 잘 표현되는 현상이다. 한편, 홍수이후에 하나님은 폭력에 제한을 두신다(9:4-6).
-
8:1
-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다”: 하나님은 소돔의 파괴이후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19:29). 하나님은 라헬을 기억하셨다(30:22).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셨다(9:15,16).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사 47:7; 전 11:8).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은 곧 그가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롯을 구하시고, 라헬에게 아이를 주시며,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출 2:24; 6:5). “이 구절이 하나님이 누군가를 기억하시고, 그렇기에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신다는 패러다임을 보여준다.”(Wenham, 184) 하나님의 기억(ר)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로, 행동하기 전 ‘심중의 표현’이며,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이병렬, 185).
-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신 것에 대한 묘사는 출애굽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시해준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사’(출 2:24) 자기 백성앞에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출 14:21) 함으로써 그들이 ‘마른 땅’으로 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출 14:21-22) 홍수 기사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을 ‘기억’하사(8:1) ‘바람’이 물위로 불게 하여(8:1) 자기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나오도록 하셨음을 읽는다(8:13-14).
- 한편, 하나님은 동물들도 기억하신다(욘 4:11; 마 6:26; 10:29).
- 바람은 창조시의 바람을 연상케한다(1:2). 그런데, 바람이 불면 빨리 마를 것 같은데, 본문은 오히려 바람이 5달 동안이나 불어서 땅을 마르게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4. 해설
- 계절의 변화 역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단풍도 복이다!”
- 가나안의 저주의 형평성에 관계없이, 복과 저주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위한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심판은 새출발/회복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분이시다.
- 인간의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 홍수는 역사를 가로지르는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홍수이전의 세계는 풍부한 상징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면, 홍수이후의 세계는 위대한 역사의 구체적 줄기가 되어진다. 함의 죄는 가나안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함의 저주가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기다리게 한다.
- 홍수의 끝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에 관심을 맞추기 위해서, 6-9장은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노아의 죽음과 아르팍삿의 탄생은 모두 홍수를 기준으로 기록된다(10:1). 네러티브는 홍수에 대한 매구절을 매우 정확하게 보고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양을 할당하고 있다(창조, 최초인간의 타락, 아벨의 죽음, 바벨탑, 심지어 아브람의 소명과 비교를 해봐도 이렇게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홍수의 이야기는 매우 독특하다. 다섯 번의 특정한 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달의 그날’과 같이 매우 정교하다(7:11; 8:4,5,13,14). 그리고 7일, 40일, 150일 이라는 다른 구절들도 있다. 중요한 점으로는 “바로 그날”이라는 개념이 아브라함의 할례(17:23), 출애굽의 날(출 12:41), 모세의 죽음(신 32:48)에서와 같이 매우 의미있는 사건들에 해당되는 단어라는 것이다.
- 메소포타미아와 관련해서,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고대근동의 종교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고대근동의 신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전혀 신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바벨론의 신들은 도덕적인 면들도 상실하고 있으며,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도 서툴다. 성서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소음이나 무한적인 확장 때문이 아니라, 부패함 때문에 심판을 당한 것이다(6:5,12,13).
- 창세기에서 노아는 의에 대한 상급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우트나피쉬팀은 단지 행운아일 뿐이다. 노아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성서는 ‘의인이고’, ‘비난할 점이 없으며’,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구체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그는 절대적인 순종의 사람인 것이다. 그는 시키는대로 하는 순종파이다(6:22; 7:5,16). 그러나, 우트나피쉬팀은 정력적인 조직가로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노아는 번제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드린다.
- 그러나, 네러티브는 노아의 의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안에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6:18; 9:9,17). 홍수설화의 절정인 8:1에 의하면,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신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가실 것을 암시한다. 노아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것같지만, 홍수에서 목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에 붙잡힌 존재이다(8:21).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노아(사람)에게 복을 주신다(1:28; 9:1).
-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아름다운 첫출발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을 보여준다. 복의 선포가 끝나기도 전에, 인간은 다시한번 넘어진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8:21)이 옳음을 나타낸다. 비록, 함의 범죄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되지만, 여기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홍수는 옛 세계를 파괴시켰다. 하나님의 원래적 창조는 파괴되고, 새로운 세계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편, 홍수와 창조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에 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와 홍수의 세세한 사건들을 비교하면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Wenham, 207). 창조가 주일에 시작되어 금요일에 끝나듯이, 파괴도 그렇하다. 이것은 창조와 파괴 사이에 병행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아담에게 내려진 것과 같다(1:28; 9:1). 그러나, 여기에는 적지않은 차이점이 있다. 즉, 땅은 여전히 저주아래 있으며, 인간과 동물들과의 관계는 변화되었다(9:3).
- 노아는 이스라엘의 모델이다. 의로워야하며, 흠없어야 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이며,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고기를 피채 먹어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그는 제사를 드렸다. 한편, 홍해를 건넌 것은 노아의 방주와의 관련점을 남기고 있다.
- 다른 성서본문에 의하면, 노아의 의는 자신만을 구한 것으로 나오며(겔 14:14,20), 이사야는 하나님의 변치않는 언약과 사랑으로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한다(사 54:9-10). 신약에 와서는 노아가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된다(히 11:7; 벧후 2:5; 벧전 3:20). 한편,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이 노아의 홍수와 같다고 경고하신다(마 24:37-38; 눅 17:26-27).
- 홍수사건 이후로, 성경 본문속에서 ‘홍수’는 종말론적 심판과 동의어가 되었고(사 8:7-8), 노아의 구원은 경건한 자의 구원에 대한 표상이 되었다(마 24:37-39).
- 노아 홍수를 통해서 두가지를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이변적인 파괴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날에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똑같이 임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이다. 두 번째는, 위로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현재적인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신다. 사람들의 잘못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의로운 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을 이기는 영생을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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