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D. Cuinan, The Pentateuch
1장. Introductory Matters
1. Title
- Pentateuch: (헬) "Five Scrolls", Genesis,Exodus,Leviticus,Numbers,Deuteronomy
- Torah: "teaching","instruction", Pentateuch와 관련하여 "the Law"
- 토라는 율법군(이스라엘이 반드시 해야할 것)도 제공하지만, 이야기(하나님이 행하신 일들)도 제공한다. 결국,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2. Content
- 오경은 광대하며, 우주적인 문맥하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오경의 중심은 야훼와 계약을 맺고 토라를 받는 시내산에서의 일년이다(출 19장 - 민 10장).
- 창세기: 창조 이야기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이 선택된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며, 그의 자손인 이삭, 야곱, 요셉은 가나안을 소유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동, 정착한다.
- 출애굽기: 드라마틱하게 시작은 극적이다. 압박과 고통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야훼'라는 약속의 이름으로 알려진다. 야훼는 모세를 통해 노예상태의 백성들을 탈출시키시며, 시내광야로 이끌어낸다. 그곳에서 계약을 받게된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의 상징으로 회막과 법궤가 제작된다.
- 레위기: 출애굽기에서 시작한 계약법이 계속된다. 그렇지만 희생제사, 절기, 제사장제도, 거룩함의 책임을 다루는 더 많은 부분의 규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 민수기: 12부족의 인구를 세고 있으며, 그들의 행진시의 조직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선택된 지도자인 모세에 반역한 대가로 광야를 40년동안 방황하게 된다.
- 신명기: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회상시키며, 모세는 토라에 대한 신실한 순종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 "고별설교"를 끝으로 모세는 죽는다.
3. The Pentateuch: Product of History
- 모세의 기록
- 모세가 오경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부분만이 모세가 썼다고 말한다(출 17:14[아말렉과의 전쟁]; 24:4[여호와의 모든 말씀]; 34:27-28[언약의 말씀 곧 십계]; 민 33:2[여행기록-33장]; 신 31:9,24[율법의 책])
- 문제점:
- 모세의 죽음(신 34장)
- 정치적 오류(창 21:34; 26:1): 블레셋은 모세 시대 이후에 등장한다.
- 지형적 오류(창 14:14): 단 지명은 삿 18:29에 의하면, 단지파가 모세 사후 그 지역을 차지했다.
- 야훼의 이름: 고대 조상들이 불렀는가?(창 4:26; 12:8) 출애굽기에서 처음 나오는가(출 6:2)?
- 노아의 방주: 몇 마리가 들어갔는가(창 6:19-20; 7:2-3)?
- 유월절 양: 끓여 먹어라(신 16:7, לשׁב), 끓여 먹지말고, 구워 먹어라(출 12:9, ילצ)
- Four Source Theory: 네 개의 더미가 있다.
- 두개는 이스라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체이다.
- 두개는 율법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 통일왕조인 BC 950년에서부터 포로기후기인 BC 587-538년사이에 기록되었다.
- 저자, 저작권
- 오늘날로 본다면, 모세가 저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모든 것의 배경을 이루는 저작권을 소유한다.
4. The Pentateuch: Source of History
- 오경의 역사성
- 오경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 역사로 보는 쪽이 있고(근본주의자), 오경으로부터 아무런 역사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쪽이 있다(회의론자).
- 양 극단 사이에서 진실은 존재한다. 역사적 기억은 보존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첫 목적은 문자적 역사를 제공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경은 신앙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상황속에서 쓰여진 신앙의 문서이다.
2장. Genesis: Fortunes and Misfortunes of Imagehood
1. Creation(1:1-2:4a)
- At the beginning:
- the world: disordered chaos, dark, watery, formless and void
-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은 정복하시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신다.
- the First panel: separating-divided and conquered
- 첫째날: 빛을 어둠에서부터 나누다. 혼돈의 일부로서의 어둠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빛 앞에서 물러난다(시 31:16; 44:3)
- 둘째날: 하나님은 바다를 이루는 아래 물로부터 하늘에 비를 내리는 근원으로서의 윗물을 나누고 사이에 궁창을 만드셨다. 숨을 쉴 수 있는 천막이 생긴 것이다.
- 셋째날: 물로부터 마른 땅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 땅으로부터 채소와 식물이 자라났다.
- the Second panel: filling the spases of the first panel with moving things
- 넷째날: 해와 달과 별들이 채워졌다. 이것들은 움직이며 시간의 경과와 절기를 나타낸다.
- 다섯째날: 새와 물고기가 채워졌다.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제공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 여섯째날: 땅위에서 생존하는 피조물이 채워졌다.
- 안식하심
- 1:1-2:4의 창조의 윤곽
- 하나님은 말로써만 창조가 가능한 지배자로 나타난다(신 8:3; 암 8:11).
- 창조의 종결은 2:4a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대략"을 말하는 תודלות은 족보의 뜻이다.
- 해석하기:
- 창조는 신앙적 기술이다. 과학적 언급은 없다.
-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하는가?
- 이 세계는 하나님과 관련된 존재이다. 창조는 일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에 해당된다.
참고. Image of God
- Within the World
- 인간은 모든 창조물처럼 창조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의 절정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주 앞에서의 인간의 이해를 제공한다.
- 형상에 대한 성경의 언급
-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한다(출 20:4; 신 5:8)
- 이유: 우상은 죽었다(렘 10:1-11; 사 40:18-20; 44:9-20; 46:1-7; 단 5:23; 시 135:15-18). 하나님만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어떤 것도 있을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 의미①: 우리는 우리가 형상(image)임을 인정해야 한다. 즉, 관계성이다. 우리는 창조주앞에서 피조물이다.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인 의존이 있어야 한다.
- 의미②: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존재처럼 살아야 한다. 땅에 충만함, 땅을 정복함.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1-3날에 주권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땅을 정복하고, 주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4-6날에 생명을 부여한 것처럼, 우리도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 다.
- 하나님의 통치
- 시편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묘사하고 있다: 8, 93, 96-99편
- 이런 시편은 제왕시(royal context) 형태로, 의(sedaqa)와 평화(shalom)를 나타낸다. 이는 통합, 전체성, 조화이며, 혼돈과 반대이다(사 9:5-6; 11:1-9; 시 72).
- 그런데, 우리 인간은 혼돈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믿음(to accept imagehood)과 자비(charity, to live it out)는 동전의 양면이다.
2. The Failure of Imagehood(2:4b-11:26)
- 원역사(primeval history)로 알려진 부분은, 오늘의 역사적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앞에서 우리 신앙의 위치를 예증적인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 구성: ①아담과 이브(2:4b-3:24), ②가인과 아벨(4:1-26), ③노아와 홍수(6:1-9:29), ④바벨탑(11:1-9)
- 이 사이에 족보가 끼어있다: 5; 10; 11:10-26
- 모든 이야기는 다음의 공통된 부분으로 요약된다: 인간의 범죄, 대응하는 대가,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범죄
① 아담과 이브의 금지된 열매를 먹음(2:16-17; 3:1-7)
② 가인의 살해(4:8)
③ 죄악이 관영하고 강포(סמה는 사회적 불의를 뜻함: 미 6:10-12)가 땅에 충만한 세상(6:5,11)
④ 시날 사람들의 자수성가의 욕구(11:4)
- 그 양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즉, 인간은 인간의 인간됨(imagehood)을 거역한 것이다. #1이 되려는 것(You will become gods!, 3:5)!
형벌
① 아담과 이브: 죽음(2:17; 3:19)
② 가인: 땅위에 홀로 떠돌이가 됨(4:12)
③ 홍수: 지상에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음(7:22-23)
④ 바벨탑: 흩어지고, 언어는 혼란해짐(11:7-9)
- 형벌은 하나이다(2:17): 죽음이다. 이는 호흡의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안에서의 모든 관계의 붕괴이다. 이는 최종적인 사건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감염시킨다.
- 그러나, 아담은 930세에 죽었다(5:5). 그가 거역한 순간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는 깨달았으며(3:7), 숨었고(3:8), 서로를 비방했다(3:9-12).
- 이제 죽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아벨의 죽음은 수명이 다한 죽음이 아니라, 극악의 죄로 살해되었다. 인간 사회의 부정(סמה)은 사회구조를 붕괴시킨다. 우주의 구조도 역시 붕괴된다. 생명과 창조물은 다시 혼돈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창조시에 나누었던 혼돈의 최초의 물이 돌아온 것이다(7:11). 바벨의 이야기는 죽음과 분열의 전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이 사이에 들어있는 족보의 이야기는, 비록 긴 인생을 살고 있지만, 생명의 소멸을 보여준다. 죽음의 힘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형벌은 외부적이며,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형벌은 죄의 본성에서 창조된다. 하나님이 생명을 만드셨고, 생명의 기운을 주셨는데, 그 하나님께 거역한다는 것은 생명에서 돌아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죽음은 단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죄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창조되었건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고 반대된 행위를 일삼았다.
하나님의 은혜
-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가? No! 하나님의 생명과 복되심은 더 우월하다!
① 아담과 이브: 죽음의 선포 직후, 이브는 '산자의 어미(3:20)'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주었다(3:21).
② 가인: 표시를 주어, 보호가 되었다(4:15).
③ 노아: 살아남아,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8:21-22).
④ 바벨: 명확하게 없으나,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따라온다는 점에서 볼때, 더 큰 은혜가 비로소 시작한다.
3. Abraham: Model of Faith(11:27-25:18)
- Turning poiont: "네 소유한 너의 땅과 가족을, 현재를 떠나라! 내가 너에게 줄 새로운 땅과 새로운 가족을, 미래를 소유하라! 이는 나와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된다(12:1-4)"
-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Dominion)이 재개된다: 땅(זרא)은 개인적인 땅이 되지만(12:1), 지평선은 우주로 확장된다(12:2).
-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신앙은 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기근으로 애굽으로 피난을 갈때에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의지했다(12:10-20).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했다(15:1-6). 아내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아들-이스마엘을 얻었다(16-17). 그리고, 결국, 이삭을 얻고 최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22:1-19). 이 모든 때마다, 하나님은 개입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재차 약속의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12:1-3; 15:5; 17:5-8; 22:17-18).
- 아브라함은 결국, 믿음과 의심의 혼합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단조롭고 이성적으로 표현되는 개념이 아니다. "Faith is a loving, trusting commitmemt of the whole self to God, a holding on securely to God in spite of everything" 인간은 의심하지만(15:2-3), 결국은 웃는다(17:17).
4. Jacob: Conflict and Reconciliation
- Isaac: colorless character, transition figure.
- 출생에서부터 야곱은 투쟁의 인생을 걸었다(25:19-26). 그 첫 대상은 에서였다(25:27-34). 에서는 후에 에돔이 되며, 이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적국이 된다.
- 야곱은 아브라함의 도시로 피난을 갔고(11:31-32), 그곳에서 라반을 만나 노력하고 속임은 시작된다(29:15-30:43).
- 가나안으로의 귀향길에서 그는 또 다시 투쟁한다(32:25).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이 된다(32:29).
☞ 두가지면: ①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은 순전히 선물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조건이 없다. 장자권을 예를 들면, 이삭이 그러하고 야곱이 그러하다. 모든 것(28:10-22; 29:31-30:24; 31:1-3)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② 야곱은 화해를 해야만 했다. 라반과(31:22-32:3) 에서와(33:3-4)의 화해는 완전하지 못했다. 야곱은 라반과 에서를 멀리한다. 대신 그는 하나님과 가까이한다.
5. Joseph: Faith and Reconciliation
- 요셉의 일대기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없다: 형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려가고(37:1-20), 애굽의 종에서(37:2-36), 감옥에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41:1-57)
- 요셉은 삶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했다(39:9; 41:16,25,28,32; 41:51-52; 42:18; 45:5,7-9; 50:19).
-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두가지일을 완성했다: ①생명을 주는 것(45:5-8; 50:20), ②형들과의 화해이다(50:19).
☞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다가(3:5) 실패했고, 죽음과 단절만이 남았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 아래있으므로 생명과 화해를 이루었다. 그에겐 미혹됨이 없었다(39:9).
* 결론
- 우리는 세상을 혼돈으로 돌려놓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생명과 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들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 첫 주기: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 것이다. 이는 바울의 논제의 근간이며(롬 4:13-16), 복음서의 소명기사의 모델이다(마 4:18-22).
- 두 번째 주기: 하나님을 의지한 야곱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삶에서 뿌려지는 투쟁의 씨앗에 대하여 화해와 평화를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 주기: 요셉은 위 두사람을 결합시켰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믿음의 사람이다.
- 창세기는 하나님과 인간,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의 그들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며, 그것에 우리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준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행운과 불행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다.
3장. Exodus: Freedom From and Freedom For
-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성했지만(출 1:7), 땅에 대한 약속은 지연되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의 숫적 우위에 억압정책을 펼쳤고, 출애굽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는가를 보여준다. 'exodus'는 문자적으로 '길 밖으로'이다.
1. 그들은 신음하고(groan) 울부짖었다.
- 잔인한 노예화는 이스라엘의 삶을 위협했고(1:13-14), 그들은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2:23).
- 성경의 탄식의 기도: 시편의 약 1/3(시 31:11; 102:6; 142:2,6), 애가(1:4,8,11; 3:8), 예레미야(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 욥(3-31)
- 애가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자발적이며, 신앙적인 반응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기에 죽음과 붕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생각하게 한다(시 22:2).
☞ 우리의 기도 가운데, 통곡을 할 수 있는 것은 필요하며, 건강한 영성이다.
2. I Am With You...
-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다(출 2:24).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우고를 아시는 분이시다(3:7). 모세는 이 하나님을 누구라고 말해야 하나?
- 하나님의 이름: 자음으로 밖에 소개되지 않는다(YHWH). 이는 "Yahweh"일 가능성이 높다. 후대의 유대인들은 'the Lord'로 불렀으며, 영역성경은 이를 따르고 있다. 더 이후의 유대인들은 'the Lord'의 모음을 YHWH에 적용시켜 'Jehovah'로 불리게 되었다.
- 야훼는 하나님의 이름이다(출 20:2; 레 22:31-33; 신 13:6). 출 3:11-15과 6:2-8의 말씀은 야훼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선조들은 야훼를 부르지 않았는가(창 4:26; 12:8; 27:7 등). 이는 역사적인 진술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진술일 것이다. 즉, 자신들의 조상들이 불렀던 야훼와 똑같은 분이었지만, 그들이 출애굽을 통해서 경험했던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야훼의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때로는, 과학적인 대답보다, 민간설화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다가왔던 정보들을 제공해주므로 좀더 존재적인 대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세(Mosheh) 역시 이집트 말로 태어나다(begotten-of)의 뜻이다[Ra-mses: begotten of the god Ra; Tut-moses[begotten of the god Tut]. 즉, 모세는 신의 이름의 생략된 형태의 이름이다. 그리고 모세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비롯된 이름이 많다. 그러나, 출 2:5-10의 말씀은 다르다. 바로의 딸은 그를 '건져내었기' 때문에 mashah(to draw out)라고 불렀다[한편, 모세의 이야기는 후에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야기-홍해사건-의 전조가 된다]. 비록, 모세의 이름이 비과학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세의 이름이 실제로 의미했던 것이 중요한 것이다.)
- 야훼는 존재하다(to be)의 삼인칭 사역형 형태를 취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원인자”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고대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출 3:11-15과 6:2-8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I am who I am(Ehyeh asher Ehyeh)"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Ehyeh는 1인칭 동사이다. 그러므로, "I am/am continually/will be who I am/am continually/will be"로 나타나지, 결코 "to be"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야훼의 이름은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며, 목적적이며, 이유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야훼는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며(출 3:12), 현재 우리를 보살피는 분이시다(6:7). 그러기에 호 1:9의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3. To Deliver You
- 야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이야기는 두가지의 구원을 말한다: 이집트의 재앙(7:14-11:10)과 홍해의 사건(12:37-15:22)이다.
1) 이집트의 재앙
-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를 경고한다(7:16). 바로의 거절은 10가지 자연적이거나 인간적인 재앙을 불러 일으킨다. 비록 주저하긴 하지만(10:7-11), 바로는 완악한 마음을 먹는데, 이는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9:12; 10:1). 결국, 장자의 죽음은 히브리인들에게 출애굽을 경험하게 한다.
- 바로는 이집트의 신이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이야기는 신들의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는 노예와 억압을 포함하며, 야훼는 자유와 해방을 포함한다. 이집트는 태양과 나일강으로 대표되는 나라이다. 나일강 때문에 이집트는 존재한다. 태양은 뜨고 진다. 태양이 지면, 죽음과 어둠의 승리이다. 태양이 떠오르면 열과 밝음이 대지를 뒤덮는다. 이는 승리이다. 바로는 태양신과 동일시된다.
- 첫 번째 재앙인 나일강이 피로 뒤덮인 것은(7:14-21), 이집트의 모든 생태환경이 뒤죽박죽이 된 셈이다. 아홉 번째 재앙인 암흑은 태양신 바로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것이 야훼의 조종 아래 있다. 더 나아가 바로는 자신의 마음 조차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 누가 바로를 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우상숭배로 혼란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가 된다.
2) 홍해의 사건
- 하나의 사건이 남아있다. 그들은 히브리 사람들을 풀어준 것이다(14:5). 바로의 군대들은 뒤 쫓아왔다. 죽음의 목전에서 야훼는 생명을 준다. 이는 이후 이스라엘이 백성으로써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야훼의 승리를 노래했으며, 이스라엘의 의미를 발견했다(13-15장).
- 가나안의 고대인들은(해변 거주자) 농사환경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의 힘을 신앙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즉, 농경을 위한 비의 신으로 바알이 있었고, 농경(생명)을 대적하는 Yam(바다: 혼돈과 위험-이는 성경에서 레비아탄과 라합으로 등장한다)신과 Mot(죽음: 건조한 사막)신이 그것이다. 바알은 건조의 시기에 죽는 듯하지만(여름), 곧 바알은 다시 나타난다(가을). 그렇기에 가을은 새해가 시작하는 축제일이다(9-10월). 이러한 배경은 이스라엘의 절기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창세기의 창조설화의 배경을 제공하기도 한다(혼돈속에서 창조함: 창 1:2,6; 시 74:12-15; 69:2-3,15). 특히 시 74편에서는 물가운데 건시셨다는 언급(mashah)이 있는데, 이는 모세의 이름의 뜻이다(출 2:10). 시편에는 여호와의 구원의 언급이 등장한다(시 42:8; 88:8). 이러한 자연에 대한 공포는 현대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점은 분명히 있다: 야훼께서 바다 중앙에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출 3:7; 20:2).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기억은 출애굽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성한 전통가운데, 야훼께서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탈출시킨 이적과 기사를 회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신 6:21-22; 26:8; 출 3:20; 10:1-2; 수 24:17; 렘 32:20; 시 106:21-22; 135:9; 미 7:15).
- 이 홍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을 역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의 개념이 없는 그들이 기적으로 경험했다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자연에 대하여 단일화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은 바다(מי)에서 구원을 받았다(사 51:9-10). 그리고, 고대시인 출 14-15은 폭풍(7-8,10)이 바다(1,4,5,8,10)를 정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새벽’은 애굽의 태양신이 힘을 발휘하는 시작점이다(14:24). 그렇다면 야훼의 승리는 애굽의 신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결국, 홍해의 사건은 중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야훼야 말로 참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 야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혼돈과 파괴의 현장(물, 바다의 표현: 시 18:4,16)에서 안전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 한편, 기적이란 무엇일까? 성경이 말하는 기적은 우리의 관점과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 그들의 반응: 주를 찬양하자!(출 15:20-21) 찬양은 삶(생명)과 본질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반대로 찬양이 없는 곳이 바로 죽음(스올)이다(시 6:5; 30:9; 88:10; 사 38:18). 찬양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언급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서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4. 시내산: 신현현
- 오경의 핵심은 시내산이다(출 19-민 10). 이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이루며, 언약의 율법을 받는다.
- 출애굽시의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이곳에서 등장한다. 폭풍과 어두움, 번개가 등장한다. 백성은 떨고 있다(19:16,18). 하나님은 정말로 폭풍과 어두움과 번개일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해되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주변의 인간의 경험(물론 모든 경험이 비유되어질 수는 없겠지만)들을 이용하셔서 자신을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아닐까?(이것이 예수께서 어린양되심이 이해되는 논리가 아닌가?)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스라엘은 야훼가 ל(구속자) 되심을 깨닫게 된다. 고엘이란 저당물을 찾는 사람, 만회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친족중에서 생명의 구조의 역할을 담당하는 일을 말한다. 이것은 성경속에서 대속(레 25:25; 렘 32:6-7)의 의미이거나, 종이된 친척을 자유케하는 의미(레 25:47-49)로 쓰이고 있다. 재산과도 관련되고 있다(신 25:5-10; 창 38:8; 룻 2:20; 3:12; 4:4). 결국,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엘인 것이다(출 6:6; 15:13).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한가족됨을 말해준다.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한식구됨(제의적 언약행위)을 말하는 것이다(출 24:9-11).
- 계약에 대하여: 오늘의 관점에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고대 사회에서의 언약의 기능은 상호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상호계약자들이 증인들을 모은다. 말로 혹은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하나됨을 표현한다. 그들은 이 언약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약체결은 새로운 관계를 생성한다. 그들은 ‘형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언약의 최종적인 결과가 םוֹל(peace)이다. 계약을 뜻하는 תי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지만, 성경은 많은 계약을 언급하고 있다. 길르앗에서 야곱과 라반의 계약(창 31:44-51; 그들은 돌을 증인으로 세웠고 음식을 먹는 평화의 행위를 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창 21:22-33[31]; 26:26-32[30]). 그런데, 이러한 계약의 행위는 주변의 국가에서도 행해진 일이었다. 즉,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한편, 피의식(출 24:6-8)은 같은 생명을 나눈다는 ‘하나됨’의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것의 의미를 확인해주신 것이다(마 26:27-28; 막 14:23-24; 눅 22:20). 그리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한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출 24:11). 배신중의 배신이 바로 이것을 어긴 것이다(시 41:9).
- 율법: 계약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 준수가 곧 계약이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형식앞에서 준수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출 24:3). 곧, 그들은 생명을 받고, 언약은 그들이 야훼와 함께하는 생명인 것이다. 이것은 두가지 방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는 점이다. 그들은 야훼의 특별한 소유처럼 살아야 한다(19:4-6).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신실함을 의미한다. 결국, 구원은 어디로부터의 구원(freedom from)이 아니라, 어디로의 구원(freedom for)인 것이다. 어디로의 구원인가? 그것은 섬김으로의 구원이다(4:23; 5:1,3; 7:16,26; 8:16; 9:1,13; 10:3).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를(20:2-3). 그들은 종(hard work)되었던 곳에서 종(worship)으로 인도함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이 약속에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강력하게 등장한다. 엘리야(왕상 18:21), 예레미야(7:6,9), 에스겔(18:5-6).
- 두 번째는 수평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절반에게 고엘이 되는 것이다. 시내산 계약은 하나님의 속성이 사회적 정의에로의 확장됨을 보여준다.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 이방인들을 돌보라는 말씀이다(22:21; 23:9; 레 19:34; 신 10:18; 14:28-29; 15:1-11).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순된 행위를 보이고 말았다. 나봇의 사건(왕상 21), 호세아(4:2), 예레미야(7:5-6,9), 에스겔(18:6-8). 이것은 사회의 법적 체계(사 5:23; 암 2:6-7; 5:12; 미 2:1-3; 3:11) 뿐만아니라 경제 체계(사 3:14; 5:8; 암 8:4-6)에도 실패했다. 예언자들이 예배와 사회적 공의를 하나로 본 것은 수직과 수평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해준다(렘 7:3-7).
- 이러한 두가지 모습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창조의 섭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즉, 창 1:26-28은 첫째, 우리에게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존재를 말하고 있다. 시내산 계약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로서의 피조물을 말하고 있다. 둘째, 피조물로써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시내산 계약이 바로 공존의 삶을 말하고 있다. 결국, 시내산 계약은 우리를 하나님을 닮도록하는 하나님의 교육(섭리)의 또 다른 과정이었던 것이다!
- 한편, 계약의 내용(20-23장[십계명 포함])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농경지에 알맞은 내용이다(22:5-6). 그리고, 레위기의 예식은 너무나 세련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는 후대의 첨가일 수 있다(후대의 상황화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1) 결렬과 회복: 구조적 분석
- 그들의 반응처럼 인생은 쉽지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과 법궤의 가르침을 받고 임마누엘을 실현시키기 전에 백성들은 범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범죄함은 금송아지를 만드는 제의적인 죄-우상숭배의 죄이었다. 백성들은 의시적인 행위를 보였다(32:6).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32:7,10,11).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대답한다.
- 결국, 하나님은 다시 계약하신다(34:5-9). 그리고, 하나님은 제의적인 죄에 대하여 제의적인 율법을 제공하신다. 결렬은 회복되었다. 야훼는 그의 백성 중앙에 거하시게 되었다(40:34-38).
5. 결론
- 출애굽기는 두부분이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1-15), 시내산에서의 언약(19-40). 여기에서 첫째, 은혜와 반응, 둘째, ‘부터의 자유’와 ‘에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은 계약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 6:7; 레 26:12; 신 4:20; 7:6; 렘 31:33; 겔 37:27).
- ‘부터의 자유’와 ‘에로의 자유’는 노동과 노예에서부터(1:13-14) 예배하고 섬기는 자로의(5:1,3) 자유이다. 결국, 이것은 종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종이 되는가를 묻고 있다. 그렇기에 바울이 죄에 대하여 종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선포했다(롬 6:15-23).
-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자아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누구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우리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4장. 레위기: Be Holy
- 출애굽기는 법궤와 성막을 통해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마쳤다. 고요하고 정적이다. 레위기에 와서는 다양한 축제가 벌어진다. 생명이 솟아나는 그림이다. 레위기는 그 이름 때문에 레위인들(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되는 어려운 말씀으로 오해되곤 했다. 그러나, 실상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글이다. 레위에게는 극히 적으며(25:32-34), 제사장에게만 돌려지는 법도 적다(8-10; 16:1-28; 21:1-22:16). 레위기는 오경에서 가장 짧은 책이지만, 이는 야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이 합당한 반응(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삶속에서)을 하기를 요구하는 목소리이다(레위기는 “그리고 여호와가 부르셨다”로 시작한다). 오늘날 레위기는 너무나 어려운 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두가지만 언급할 수 밖에 없다: 거룩함의 요구와 안식일 의식이다.
1. 거룩함의 요구
- 어느 종교이든지 거룩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진정한 거룩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수식어이다(사 6:4; 시 93:3,5,9). 거룩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라고 부르셨다(레 20:26). 그래서, 출애굽의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나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다(출 19:6; 신 7:6). 이스라엘은 그들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 소속됨으로써 그들은 거룩해진다(레 19:2). 무엇보다도 거룩해야할 부류가 제사장들이다(8:1-10:20). 왜냐하면 그들은 정결과 부정을 구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10:10-11).
- 거룩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적극적인 면으로는 ‘하나님께 붙임-성화(19장)’이고, 수동적인 면으로는 부정한 것들에 분리됨이다(11:1-16:34). 거룩이란 실제적인 개념이다. 창세기의 창조사역(혼돈을 조화스러운 삶의 공간으로 만드신 것과 생명력으로 채우신 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함이다. 창조에 역행하는 것이 바로 부정이다. 그렇기에 두가지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부정하다고 보여주신 것이다(11:10,20). 그리고 피와 관련된 질병(피의 손실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부정된 것이다(12-15).
2. 안식일을 준수함
- 이스라엘은 절기력을 통하여 거룩함을 인식하고 있다. 유월절(23:4-14), 오순절(23:15-23), 새해(23:23-25), 속죄일(23:26-32), 장막절(23:33-43). 그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절기가 바로 안식일이다.
- 안식일은 십계명에서 가장 긴 내용이다(출 20:8-11; 신 5:12-25). 안식일의 이유는 두가지이다. 신명기에서는(5:15)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사역을 기억하기 위함이고(그들은 생명을 선물받은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는(20:11) 창조의 하나님의 안식을 나누기 위함이다. 결국, 우주의 창조주와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날이다. 이것이 주와 구세주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누가 안식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모든 만물이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출 20:10; 23:12; 신 5:14). 모든 것이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구세주되심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3. 결론
- 생명이 피에 있듯이(17:11), 레위기는 오경의 심장과 같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옛것은 새것으로 종합되었다(히 9:11-10:18).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거룩한 나라가 된다(벧전 2:9-10). 안식일의 쉼은 왕국의 쉼을 나누는 것이다(히 4:9-11).
5장. 민수기: Wandering in the Wilderness
① 광야의 삶은 출애굽에서부터 였다(출 12:37; 민 33:3-5). 그런데, 그들은 일년동안 시내산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40년후 그들은 모압평지-여리고를 앞에둔 요단강 주변에 모이게 된다(민 33:48-49).
② 민수기는 광야에서 반복되는 삶,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가 되는 백성들을 보여준다.
(1) 40년
① 13-14장은 운명을 가르는 내용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거역하는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13:31). 야훼 하나님은 노하셨고, 모세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한다(출 34:6-7; 민 14:18-19). 그들은 용서를 받았으나, 형벌은 피할 수 없었다. 40년의 광야가 그것이다.
② 40은 많이 등장한다: 노아 홍수(창 7:4,12,17; 8:6), 시내산에서의 모세(출 24:18), 호렙산(시내산)을 향하는 엘리야의 여정(왕상 19:8), 예수님의 시험(마 4:1-11), 예수님의 승천(행 1:3). 그렇다면, 민수기의 40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③ 긴 기간: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죽일 기간(14:29)이지만, 더 나아가 결집과 갈등, 시련의 시간이었다.
④ 준비 기간: 성경에서 40은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홍수 이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위한 준비가 40이고,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준비가 40이며, 엘리야가 새힘을 받을 준비가 40이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준비함이 40이고, 교회의 탄생이 준비된 기간이 바로 40이다.
(2) 광야
① 광야는 물이 없는 지역이다. 광야는 위험으로 둘려쌓여진 지역이다. 광야는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이 전무한 지역이다. 오직, 광야에서 그들은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배운다.
② 이스라엘은 죽음인 바다를 건넜다. 그런데, 또 다른 죽음인 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죽음의 환경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워야만 한다. “두려움없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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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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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고 나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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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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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인도하다 |
애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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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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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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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
억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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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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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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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 | |||
혼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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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
(3) 광야의 여정
① 그들의 광야의 여정은 목표없는 방황은 아니었다. 애굽에서 시작하여(출 12:37; 민 33:3-5), 모압 평지의 끝이 있다(민 22:1; 33:48-49). “…에서 발행하여 …로 갔다”라는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출 23:37a; 13:20; 14:1-2; 15:22a; 16:1; 17:1a; 19:1-2). 그리고 시내산에서 모압으로의 움직임도 등장한다(민 10:12; 20:1,22; 21:10-11; 22:1).
② 33장에 등장하는 요약정보는 40개의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40년과 관련이 깊다.
③ 여정은 두가지의 유혹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는 정착하려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머물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진행을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가라시면 가야된다(민 9:17-18; 10:11-13). 두 번째는 불만하는 것이다(민 11:4-5; 14:2-3; 20:4-5). 그들은 여행을 멈추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되었다(돌아가려 했다). 그들의 불만은 이전 것을 놓치 못하는 과거의 향수이다(출 14:11-12; 16:3; 17:3; 민 14:2-3; 20:4-5). 그들은 선택적 건망증에 걸린 것이다(출 14:11-12; 2:23). 우상숭배이다. 결국, 여정은 ‘희망’이라는 신앙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희망은 미래로 이끈다.
(4) 광야: 계약의 장소
- 왜 출애굽과 홍해의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로 가게하지 않으셨나? 출애굽의 목적은 가나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목적은 “섬기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피해자는 내일의 가해자가 되는 법, 결국 그들은 “가치체계의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것이 바로 시낸산의 계약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최초로 유일신 신앙고백(하나님의 주권인정)과 당시에 파격적인 사회정의(연합의 창조원리)를 배우게 된다. 결국, 창조의 피조물(하나님의 형상)로 살아가는 출발점이다.
(5) 광야: 시험의 장소
- 광야는 야훼께 대한 성실함을 시험받는 장소이다. 그들은 언제나 실패했다(출 14:11-12). 그런데, 이교도인 이드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18:1-27). 그들은 무엇 때문에 원망했나? 생존권: 물(출 15:22-25; 17:2-7; 민 20:1-13), 음식(만나와 메추라기)이 제공되었다. 대적자들: 애굽(출 13:15), 아말렉(17:8-15); 아랍(민 21:1-3), 시혼과 옥(민 21:21-35), 미디안(민 25:16-18). 내부적 분열: 모세의 리더쉽에 반발함.
- 그들은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으로 점점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기사와 이적 → 홍해앞에서의 울부짖음 홍해에서의 구원 → 물과 음식앞에서 울부짖음 물과 만나를 주심 → 아말렉의 위험 하나님이 승리를 주심 ↓ 시내산에 도착: 위대한 고백(출 24:3) |
- 시내산 이후의 그들의 여정은 이전의 비슷한 위기를 맞이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전의 불신의 모습을 계속하여 보이고 있다. 결국, 광야는 자격시험과 같았고 그들은 탈락했다(민 14:29-30).
(6) 광야: 임재의 장소
- 법궤와 성막의 지시(출 25-27)는 그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출 32-34). 자세한 계획에 따라 두개의 물건은 완성되었다(출 35:4-40:38).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민 10:35-36). 움직이는 시내산이다. 연기와 번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다(출 19:16-19). 이 법궤에는 언약의 법이 들어간다(신 10:1-9; 출 25:16; 40:3). 성막은 회막의 기능이다(출 33:11). 야훼는 이스라엘에게 현존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이시다. 야훼라는 이름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출 3:14).
(7) 회복된 축복
- 미리암(20:1)과 아론(20:22-29)같은 구세대는 사라진다. 여러 지방을 거쳐서 그들은 약속된 땅을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민수기의 마지막은 미래를 보여준다. 이것이 발람의 이야기이다(22:2-24:25). 그는 이교도 예언자였지만 야훼를 위하여 일하려고 했다(23:26). 야훼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는 것이 그의 신탁이었다. 발람의 신탁은 이스라엘에게 언제나 신실하신 야훼 하나님을 보여준다.
(8) 광야는 하나님의 의도이다.
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게 하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6장. 신명기: 들으라! 이스라엘!
① 이스라엘은 모압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들은 이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여기에서 모세는 세 번의 설교를 한다(1:1-4:43; 4:44-28:69; 29-30). 모세는 과거의 기억과 율법에의 준수를 반복하고 있다.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난다(34:5-6).
- 신명기라는 헬라어적 이름은 ‘두번째 율법’이라는 뜻인데, 이는 오역에 기초했다(17:18). 결국, 첫 번째 율법은 시내산의 것(출 19-민 10)으로 보았고, 두 번째 율법은 출 22-23의 부분을 기초로한 신명기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신명기에는 레위기에서 볼 수 있을법한 율법들이 들어있다. 그런데, 설교안에 들어있다. 모세의 격려와 권면인 것이다. 레위인의 절기설교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로 그 배경을 잡는 학자들도 있다.
- 언약에 대한 강조로 인해 “최고의 언약문서”로 알려졌다. 시내산 계약은 원래 가족적인 혈연적 언약이었는데, 사회적 현실속에서 종주권적인(신앗수르의 형식) 형태로 재해석되었다.
(1) 들으라! 이스라엘! (쉐마! 이스라엘!)
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들을 것을 반복하고 있다(5:1; 6:4; 9:1; 27:9).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총회’로 불려진다(5:22; 23:2-4,9). 총회는 ל인데, 어근은 לוֹק(voice)로서, ‘모으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 εκκλεσια가 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사는 공동체”로 정의되고 있다(4:33,36; 5:24,26; 8:3; 출 20:19).
② 그런데, 성서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관은 귀가 아니라, 마음이다(30:2,11,13,17; 13:4; 왕상 3:9). 마음이 굳어지면 말씀을 들을 수 없다(10:16; 30:6; 시 95:8; 렘 4:4). 마음은 인격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을 다해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깊은 자아로 초청하는 것이며, 우리가 변화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2) 기억하라!
①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5:15; 6:12). 그리고 광야에서의 하나님도 기억해야 한다(8:2). 그들은 반역했다(9:7).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되었고(8:19). 언약을 무시하면 안되었다(8:11). 결국, 그들은 언약에 앞에서 행한 그들의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과거의 역사를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4:9,23; 5:15; 6:12; 8:2,11,14,18-19; 9:7,27; 31:21).
② 기억은 우리에게 정체성을 제공한다. 기억만큼 좋은 교육 도구가 없다. 기억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뿐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거룩하지 못한-이것은 비전으로 우리를 채찍질한다) 우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기억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은 새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기억한다(4:9; 6:7,20-25; 30:12-13).
③ 그래서,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를 기억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5:1-3; 26:16-18; 4:4,20,38,40; 7:11; 8:1; 9:3; 11:8,13,32; 27:1,4,9-10). 기억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예배를 통하여 현재화되어진다. 안식일(출 20:8-11; 신 5:15)과 유월절(신 16:3)의 이유는 예식을 통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이것이 신약의 주의 만찬으로 이어진다).
(3) 여호와는 한분이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① 신 6:4이 핵심이다: “주, 야훼시여! 당신은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위협은 우상숭배이다(7:1-5; 13:1-1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인 은혜를 베푸셨다(4:32-34; 7:6; 14:2; 9:4-6). 이스라엘은 오직 조상들의 약속-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기반이 된-에 의해서 선택된 존재일 뿐이다(7:8).
② 여기에 백성들은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다(7:8; 4:37; 10:15). 그들은 사랑으로 반응해야 한다.
(4) 너는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사랑이다(6:5; 10:12; 11:1; 13:4). 율법을 지키는 것도 의무가 아닌 사랑의 반응이다. 그렇기에 우상숭배는 최고의 배반이다(7:2-5,16; 12:29-31; 13:1-12).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신명기의 법조항은 야훼께서 정하신 곳에서의 예배를 강조한다. 번제(12:14), 서원물(12:26), 십일조(14:23), 유월절(16:5-6), 첫열매를 드리는 날(26:1-11). 그들은 즐거워해야 한다(12:7,12,18; 14:26; 16:11,14; 26:11; 27:7).
- 또한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다. 서로를 위하는 법은 무시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15:1-18; 23:19-20; 24:14-15,19-22), 법적 제도의 정의(16:18-20; 19:15-21; 24:17-18), 경제정의(25:13-16), 자연적인 환경(20:19-20; 22:6-7; 25:4). 하나님의 공의가 반영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17:14-18:22). 재판관제도가 세워졌으나(16:18-20; 17:8-13), 그들의 임무는 공의뿐이다(16:20). 그들은 상호간에 존중해야 한다(19:1-25:19).
(5) 복과 저주의 언약
- 고대 언약의 형식과 같이 언약은 결과를 상정한다. 모세는 종종 복과 저주를 포함한 권고를 아끼지 않는다(4:25-28; 6:14-15; 7:12-26; 8:19-20; 11:10-17,22-32; 28:1-68; 29:21-28; 30:15-20).
(6)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
- 죽음의 소식을 들은 모세는 백성들에게 심판과 경고(32:1-43), 족장들을 축복(33:1-29)하는 노래를 남긴다. 모세의 위대한 일들을 뒤로하고, 신명기는 모세에게 ‘예언자’의 호칭을 한다(34:10-12).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18:18; 출 7:1-2). 모세의 소명설화는 예언자의 그것과 유사하다(출 3:12; 렘 1:8).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에게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암 7:1-6; 렘 7:16; 21:1-10; 출 32-34; 신 9:7-29; 10:10-11; 민 14:10b-20). 유독 신명기에서는 백성들의 죄로 인해 가나안 입성이 불가함을 말하고 있다(신 1:37; 3:23-28; 4:21-22)
(7) 결론
① 하나: 한분 하나님의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의 예배를 드린다. 하나의 토라만 주어진다.
- 언약에 충실함은 언약적 축복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이 이후의 성경의 내용이다(신명기적 역사서의 배경을 이룬다). 그런데, 이는 성공주의 영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세 언약에는 분파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구원받는다. 너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신명기는 더 이상 모세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는 토라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움직임이다.
정리
(1) 키워드: 약속, 선택, 언약, 율법
(2) 약속
약속이 필요한 상황 |
약속과 축복(창 12:1-3) | ||
|
자손의 약속 |
신과 인간의 관계형성 |
땅의 약속 |
창 1-11 |
창 12-50 |
출-레 |
민-신 |
(3) Mythos와 Ethos:
- 신화는 공동체가 소유한 네러티브이다. 윤리는 그 이야기속에서 우리의 역할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 오경은 생명과 평화(unity)와 정의를 요구한다(신 30:1-10,19).
(5) 오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5:17; 골 1:15-20).
- 생명(요 11:25)과 정의(고전 1:30), 그리고 평화(엡 2:11-22)가 예수안에서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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