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하나님 나라의 목회적 기법과 예언자적 열망

진실과열정 2020. 7. 6. 03:31

하나님 나라의 목회적 기법과 예언자적 열망

 

종교의 독보적인 기능은 타자의 인식 가능성에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중간세계'의 문법을 사용한다. 옛부터 '문턱'을 밟지 말라는 어른들의 세계에는 그곳이 바로 '안'과 '밖'의 중간세계라는 영험함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를 빌어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화를 풀이했고, 에드먼드 리치는 성서를 풀이했다(둘 다 참신한 세계 읽기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인들'은 중간세계를 신화로 현재화했다. 그들에게는 '반신반인'이 실재였고, 산자들이 밟고 있는 땅이나 죽은자들이 들어가는 스올과 함께 신들의 세계인 '천상'이 사유의 세계가 아닌 인식의 차원으로 존재했다. 성서 고고학자인 윌리엄 데버는 계속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가 그 언어에 있어서도 신화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적인 것들임을 보여주고 있다(2001, 2012). 또한 창세기의 원역사의 세계관은 이스라엘 서기관의 독특한 유일신론이 아니라, 고대 서아시아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비록 오늘과 같은 인터넷은 없었지만, 타자를 인식하는 독보적인 문법이 있었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훨씬 거대한 스펙트럼안에서 생과 사, 인간과 신을 통합할 수 있었다(이것은 제임스 쿠걸[2007]은 'God of Old'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도시국가 중심부에 '은행'이나 '의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G. Roux, Ancient Iraq). 그렇게도 '종교'가 고대인들에게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문헌들은 신전의 의미를 왕실의 업적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며, 비록 고대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정치-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고대 가나안의 성전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포멧으로 '유형/무형'의 모든 것을 배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전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에는 히브리 성서가 확실히 탁월한 면이 있다. (비록 P의 신학이라는 시간적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에서 시작하는 성막의 제작과정은 일찌기 7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엘로힘)과 그 마지막이 안식이라는 측면에서 창세기 1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R.E. Friedman의 성막 재구성 이론인데(1997: 177; ABD에도 '성막'은 그가 완성했다), 그는 문제가 되는 출 26:17을 'overlapping'으로 해석하면서, 성막의 사이즈를 재구성하였다. 그는 (조금 억지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성막이, 오랜 후의 성전 안의 '정육면체' 지성소에 자리하고 있는, 그룹들의 날개 안으로 '숨을 수 있는' 딱 그 크기라고 제안하였다(참고, 시 27:5). 창세기 1장과 출애굽기 25-31장이 말하고 있는 제사장 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하게 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야훼의 세계가 완전함을 말한다. 그것은 보기에 좋은 것이며(창1), 희귀한 좋은 것들을 재료로 한다(출). 창세기가 모든 존재들을 엘로힘의 영역 안에 둠으로써 그것들을 '비신화화'하고 있다면, 출애굽기는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어서 '재신화화'하고 있다. 엘로힘이 자신의 집(성전)으로 이 땅을 선택했기 때문에 창세기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면, 야훼는 자신이 거할(샤칸) 장소로 이스라엘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함을 요구하고 있다(출 29:45f). 이것은 위대한 '플랜'도 아니며 소위 말하는 구속사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신학들 가운데 특정 집단이 보존해왔던 신앙의 궤적을 따름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거하심'의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신-인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관 안에서, 자연과 섭리 혹은 진리와 공의라는 대원리 '안'에서 생활하는 삶을 말한다. 크게 보아, 이집트의 낙천적이며 절대적인 세계관을 만들었던 배경과 달리 고대팔레스타인은 메소포타미아의 배경에 어울린다. 즉, 그들은 비관적이며 상황적인 우주에 가깝다. 성전을 '비트 뭄미bit mummi' 즉, '지식의 집'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신-인'의 통합이었다(G.Roux, Ancient Iraq, 213). 신이 거하는 집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안에서 삶이 의미를 갖는다. "[T]he improper use of knowledge is the antithesis of wisdom and death is the antithesis of life"라고 레위기를 요약한 마빈 스위니의 통찰(2012: 107)에서 '신-인의 통합된 삶'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사실은 일종의 '편가르기'라는 소극적인 차원에 그치고 있다는 관찰까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 땅에 '거주하는' 신을 '자기 편'으로 곡해하게 만드는 정치적 욕구로 변질되기도 한다(삼상 4:4). 변질된 '임마누엘'의 의미는 '시온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예언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신을 특정한 장소(심지어 시온 그 자체까지도!)에 무조건적으로 얽매이는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였다(왕하 25:9; 렘 7:4; 겔 10:18). 시간은 공동체에게 '신이 함께 거하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신앙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될 때, '신의 임재/함께 하심'의 의미는 묵시론적 종말론으로 변화된다. 이 땅위에서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감의 붕궤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제4복음서의 공동체는 일찌기 출애굽의 '샤칸'의 어휘가 가진 신비로움을 간파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고등기독론'의 위대한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의 현실은, 오래전 루이스 마틴이 제안했던 것처럼, 유대인공동체에게 핍박을 받는 약자의 현실이었다. 그러한 공동체가 제시한 묵시의 그림은, 히브리서의 순교자모티프보다, 마치 여기저기에 상처투성인 어린아이를 보듬어 안고있는 어머니의 따스한 위로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 전승을 재사용하면서 그것을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바로 하늘에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인데, 그 모양은 '정육면체'로(계 21:16)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계 21:18//왕상 6:22). 다시 한 번, '편가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 것처럼, 제4복음서의 공동체는, 묵시적 하나님 나라의 효용을 '목회적 코드'로 활용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눈물을 씻겨주는 손수건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묵시론적 종말론이 다른 복음서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현재적이며 전투적이고 예언자적이다. 그것은 예수가 몸 소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를 다룬다. 히브리 성서에서 우주의 왕으로 등장하는 야훼가, 과연 자신의 집이 붕궤되는 대파국을 거치고, 지금 로마라는 제국이 지배하는 플렛폼 속에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N.T. Wright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복음서는 어떻게 예수가 왕이 되어서 '신의 임재'를 확장시켜 가는지를 보여준다. 마가복음을 시작으로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적 열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세의 시작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M. Borg 2001: 194), 그들은 세상의 시간표가 아닌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막 9:1). 섬김을 받는 것은 지난 세대에 완료되었다. 이제는 도리어 섬겨야 한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전투적인 하나님 나라의 열망이다.

'Bible Study > 성서 연구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복의 기법' 해석하기  (0) 2020.06.14
새로운 '95개 반박문'  (0) 2020.06.08
역사의식  (0) 2020.05.15
<인터럽트에 대처하는 인류학>  (0) 2020.05.10
역사연구  (0) 2020.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