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은 어느분야에서든 '건강한 혹은 정상적인 사회인'의 필수요소이다. (특별히 학문분야에서 논문의 시작은 해당과제의 '연구사' 제시로 시작한다.)
한편, 구약(그러나 히브리성서는 순서배열상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더욱 그렇고, '뚜렷한 신앙전통'이라는 역사의식은 점차 지나친 미래에의 불확실로 인한 '무역사적 현재화'로 퇴색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전히 성서학의 거인이라고 할 수 있는) 폰라트는 이스라엘의 역사의식이 신 26:5-9에서 비롯된 '역사적 신조'에 뿌리박혀 있다고 주장했다: "The oldest form of the history of the patriarchs which has come down to us is the opening sentence of the old Credo in Deut. XXVI. 5."(Gerhard von Rad,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Vol 1. [1961; 2001 ed.], 166). 폰라트의 신학에 무수한 댓글이 붙지만(B. Anderson이 적극 수용한바와 달리, M. Weinfeld는 해당본문을 Dtr편집으로 보아, 그 고대성을 부인한다[1992:34]), 어찌되었건 히브리성서의 첫부분인 토라의 제작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의식은 (족장전승과 출애굽을 중심으로)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예언서로 들어가면서, 전기예언서의 네러티브 패턴이 후기예언서의 예언자발화모음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못해서, 어쩌면 결국 나라의 멸망과 함께 거대네러티브의 실종을 우리는 성문서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에스라서 그리고 느헤미야서, 그리고 역대기서의 등장은 시간을 초월했던 시가서나 지혜서 혹은 특정 종교적 명절에 낭독되었던 임시적 역사로서의 메길롯의 신학방향을 새로이 '역사'라는 쪽으로 틀었다는 점에 주목할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히브리성서'는 역사의식으로 시작하여, 비록 왕국의 멸망으로 잠시 역사를 잊었지만(후기예언서일부/시가서/지혜서/메길롯), 최종적으로는 역사적 위치를 다시 찾으려는 고뇌로 돌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여기엔 정치적[에스라, 느헤미야], 제의적[역대기], 묵시적[다니엘] 이라는 '축소된' 역사의식으로 볼 여지가 많다.)
그러했던 신학은, 동방이 아닌 헬라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구약'이란 이름 아래, 그 책들의 순서가 변경되면서, 새로운 의식을 만들게 된다: 바로 '모호해진 혹은 절반의 역사'가 그것이다. 오경과 역사서라는 타이틀로 인해,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역대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후대에 기록된 일종의 '통찰적 역사'가 아니라, 여호수아의 가나안정복에서부터 사건이 끊임없이 진행된 것처럼 읽히도록 된 일종의 '대하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결국 패망한 역사는 그들을 이끌 수 없는 지도자를 보여주며(예언서), 이는 본래 소예언서의 결론으로의 말라기를(van der Toorn 2007: 253), 구약의 마지막 말씀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진술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이 예루살렘을 떠났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헬라의 중심지로 옮겨갔다는 시대인식이 바로 '구약'의 세계관의 열매라고 볼 수 있다.)
신약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가졌던 뚜렷한 '종말론적' 역사의식 역시, (자세히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평행한다고 하겠다. 예수님이 외치셨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말씀은(막 1:15), 요즘--그리고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벧후 3:4)--은 통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안정적인 폐쇠적 시스템이며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보다는 지식의 고수가 선호된다. 어만(B. Ehrman 2013: 228)의 통찰이 그래서 빛이 난다: "It was the nonapocalyptic view that eventually came to dominate within broader Christendom."
고로 현대인들이 '무역사'로 사는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건강한 혹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려면, 필수적인 역사의식을 갖추도록 개인과 사회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 고대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초대교회가 주일에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찬양하고 떡을 떼며 교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Bible Study > 성서 연구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복의 기법' 해석하기 (0) | 2020.06.14 |
---|---|
새로운 '95개 반박문' (0) | 2020.06.08 |
<인터럽트에 대처하는 인류학> (0) | 2020.05.10 |
역사연구 (0) | 2020.03.31 |
게스트 혹은 호스트 (0) | 2020.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