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사라진 왕국의 성(2015)

진실과열정 2020. 1. 9. 13:43

미야베 미유키, 사라진 왕국의 성(2015)

 

0.

가장 첫장에 들어있는 짧은 한 문장은, 대개 (작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독자들은 알지못하는 작가에게서 가져오곤 한다. 그것이 출판사에서 건져낸 전략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찾아낸 정신적 뿌리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제대로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깊이 묵상하고 읽는 부분이 바로 이 한줄의 문장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하지. 얼마나 무서운 게 많을까.”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셜리 잭슨) 

 

이 한문장의 인용으로 소설은 대문 앞에 선 독자를 들어오라고 강권한다. 성에 대한 이야기. 성 앞에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쌍한 감정과 무서운 감정에 대한 이야기. 그렇다. 이 이야기는 '성'으로 구현된 사람들의 심리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이야기는, 현대 미스테리 환타지 장르로, 흡입력을 가진 성 그림이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중학교를 막 졸업하려는 남여 주인공을,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 상 속도가 떨어질 법한 중반부에 등장하는 작화도우미 아저씨, 그리고 마지막 스퍼트에 가속도를 넣어주는 성탑 속의 소녀, 이렇게 세개의 이야기 흐름으로 진행된다.

 

소극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남주는 우연히 성이 그려진 그림을 발견하다. 그림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접촉을 하면 이 세상에서 '그림 안의 세계'로 순간이동을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설정이다. 그림이 주된 소재이기에, 남주는 그림에 재질이 있으나 삶과 학교에서 불만족(왕따와 가정의 문제)을 가지고 있는 여주를 찾아내고, 그에게 그림을 보여준다. 그 둘은 그림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서 제 3의 인물, 즉 그 둘보다 먼저 그림을 접촉했던 유명 만화가의 어시스트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이제 삼위일체가 되었으니,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야만 한다. 즉, 그림은 왜 흡입력을 가지는 것일까? 

 

“인간이 마음속에 그리는 게, 형태를 얻는 경우도 있어.”(175)

 

무슨 일엔가 정말 집중한 적이 있었는가? 옆에 누가 와서 헛기침을 했는데도 그걸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던 일 말이다. 훗! 나는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그게 공부여서, 그리고 그게 단 한번뿐이어서 씁쓸할 뿐이다). 아무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물론 환타지이지만, 우리가 통상 경험하듯이 무슨 일에 정말 집중하게 되면, 자기는 현실에 없어지고 자기가 집중하는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그런 부류라고. 그럴 정도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접촉만으로 또 하나의 세계로 흡입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집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번 사건은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가미카쿠시(예로부터 사람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지면 덴구나 산신이 한 일이라고 여겨 이렇게 불렀다)'다. 마치 신이 소매로 숨겨 버린 것처럼 어린아이나 젊은 여성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는 현상은 옛날부터 존재했다. 또한 그렇게 모습을 감춘 사람이 몇 년 후에 돌아오는 일도 있고,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고 사라진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 억측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나의 태도는 모순되어 있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울림의 이름을 가진 이온은 특별히 신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이번에도 그 신의 그늘로 은밀히 초대받아 간 것은 아닐까?” (294)

 

이야기는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현재 상처를 도저히 치유해 나갈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런 상황에서 과거를 바꿀 수 있다 라는, 일종의 '도태 혹은 회귀'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은 치유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사실, 남주는 딱 중간자적인 입장이다. 이익도 없고 손해도 없다. 그냥 현실 그대로가 좋은 안정적 선택주의자이다. 그런데 과반수가 넘게, 즉 여주와 제3의 아저씨는 과거를 바꾸고 싶은 그런 상처와 아픔이 있다. 상실이다. 지금 무엇인가 없기 때문에, 현재가 아프고 도피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과거를 바꾸고 싶다. 

 

2.

미야베 미유키는 전작들에서 강력하게 활용했던 '실종'이란 카드를 배후에 두고, 이번에는 표면적인 혹은 현상적인 실종 사건 자체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실종 즉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주체의 실종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관계의 상실에서 초래한 상처였다. 흡입력을 가진 그림은, 상처받은 한 인간이 자신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었던 최선의 선물로, 자기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성 안에 가둔 선택이었던 것이다. 독은 독으로 푼다고 했던가. 역시 상처 받은 인간들이, 자신의 상처를 풀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닮은 상처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야기는 비교적 짧지만, 그래서 군더더기가 없고 오히려 지리하게 끌지 않아서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아이의 '뒤바뀐' 현실을 보았다는 것이고, 자신들의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무엇인가 바꾸려고 하는 선택을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020.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