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요드>
소설 1Q84에서 아주 흥미로웠던 소재는, '달이 두개로 보인다'라는 프레임이었다. 존재가 현상태를 부정하는 순간, 그 존재는 현재의 굴레를 벗어날수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소설의 프레임과 똑같지는 않지만, 달이 두개로 보이는 것처럼, 특이점이 발생하는 순간은 어렵지 않게 생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라는 로마서의 놀라운 탄식에 대해서, N.T. Wright가 죄로 인해 죽을 몸을 가리키며 "피조물 아담의 인간됨"(Adamic humanity)라고 언급했는데(PFG, 1018), 사실 이러한 통찰은 바울만의 해석적 독특성에 기인하지 않았고, 유대교의 '예상치 않은' 기록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었다.
많은 은혜로운 글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야훼의 창조는 수작업이 주를 이루는 '매우 공을 들인 작업'으로 나타난다(창 2:4b이후). 특별히 창 2:7에서 '야짜르'를 언급하면서, 토기장이의 장인정신이 절정을 이루어 사람(the human)을 '빚어냈음'이 강조되곤 한다(C. Westermann 1994:203ff; N. Sarna1989:17). 그런데 여기에서 MT는 '(히브리어, 요드)를 하나 더 표기한다(그림의 왼쪽). 통상적으로는 그림의 오른쪽과 같은 표기가 맞다(창 2:19). 이것은 서기관의 실수가 아니라, 단지 "예외적"이라고 설명할수밖에 없을 것이다(GKC p.192; Jouon&Muraoka p.185).
James Kugel을 읽고 나서 유대인의 미드라쉬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문제해결의 특출난 DNA가 내재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히브리어 '(요드)가 두개나 사용된 것에 대해서, 그것도 히브리성서의 제일 처음에, 그것도 아담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예외적으로 사용된 것에 대해서,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예외적 표기를 설명해야만 했고, 그러한 설명작업/미드라쉬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이해였다고 하겠다.
중세의 유대랍비였던 라쉬는 창 2:7의 두개의 요드를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개나 돼지처럼 무책임한 존재로 만드셨던 것이 아니라, 두개의 영역, 곧 ‘사라질 먼지’와 ‘성스러운 것’으로 합해서, 책임있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했다(A.G. Zornberg, Genesis: 16f).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선한 예쩨르’와 ‘악한 예쩨르’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M.E. Boring 2012:56f). 한편, R.E. Friedman은 두개의 요드를 설명하지 않지만, 더 나아가 한쌍의 신을 보편적으로 경험했던 고대이스라엘을 무시하지 않고 지적한다(2001: 16f). 위대한 학자 M. Fishbane이 말하는 것처럼(Biblical Myth & Rabbinic Mythmaking, 313f), 히브리성서가 고대서아시아의 신화적 토대를 소재적으로 재활용하여 하나의 거룩한 텍스트가 되었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석의 과정을 거쳐 또 하나의 신비적인 내재적 시스템으로 생명력을 확장함으로써, 어쩌면 기독교세계관이 외적인 내러티브(혹은 신적 드라마)에 머물고 있으면서 스스로 해석의 한계속에서 개별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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