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the decisive question is whether the meaning of the Old Testament to the Christian Congregation is exhausted in being a book of oracles. Insofar as it is understood in that way, it furnished the Church a means--an effective one in that day--of polemic and defense in the battle against and the competition for Jews and Gentiles, and hence is at the same time a means of strengthening its own security. But does that not shift the real basis for the power of the gospel message and for the Christian's own security by putting a faith in the letter in place of the genuine faith which seizes the word of God's grace addressed to one's conscience and self-understanding--seizes it on the basis of having been inwardly conquered by it and not on the basis of rational proofs?"
R.Bultmann, TNT I: 117
히브리성서 예언서의 아이러니는, 그게 신명기적역사서와 기능적으로 맥을 같이하는 측면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영역을 넓힐 수 있는데, 바로 "신탁/신경험의 현장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첫신탁을 리얼타임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 성취가 되고 나서 신적 권위를 얻게 되자 왕실의 서기관들이 기억된 신탁들을 수집하고 편집했다는 것이다. 신탁의 아이러니는,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거봐! 내말이 맞았잖아"(예언자 아모스의 묘비명). 이러한 신탁/신경험의 현장성을 '배제시키는' 신앙전통은, 그러므로 신명기적역사가에게 필요한 전략이었고, 우리는 신 18:22나 렘 28:8f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트만은 시종일관 역사가의 입장에서 초기기독교의 전승들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그는 19세기의 마인드와 메소드로 재구성을 시도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던의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정보들과 상식 안에서 매우 합리적으로 재구성을 시도한다(21세기적 재구성은 Gerd Theissen, The New Testament: A Literary History가 합리적이다). 그가 위의 인용한 대목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는 발견한 점이 주목된다. 신약 그자체의 저작방법론이 예언의 성취라는 프레임이었는데, 그 해석적 프레임이 초기기독교자체의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즉, 헬라문화권 안에서 고대로부터 호머의 옛신화를 자신의 시대에 현재화하려는 스토아학파의 해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신탁/신경험이라는 종교본연의 아이덴티티를 '문자'로 회귀하려했다는 생각자체에서, 초기기독교의 빈약한 정체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다수의 학자들이나, 불트만의 지적과 같이, 다른 집단과의 논쟁적이며 변증적인 시대요구에 대한 '고대 교계지성인들'의 합리적인 반응일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나머지 절반은, 종교의 이성주의에 치우친 프레임을 반이성주의의 신경험으로 생생하게 채워가야한다. 비록 그러한 신경험이 현장을 급속하게 바꾸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부활이 텍스트로 남아 지적동의 차원에서 믿음을 결정하는 기능으로 작용한다면, 예수는 다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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