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Bart D. Ehrman, Forgery and Conterforgery, 52-55.

진실과열정 2019. 5. 2. 01:51

Bart D. Ehrman, Forgery and Conterforgery, 52-55.

 

표절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표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종종 말들 한다. 예수세미나에서 내 놓은 유명한 책[[The Five Gospels]]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표절이란 개념은 고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대로만 보자면, 이 말은 전혀 옳지 않다. 고대의 자료들을 볼 때, 표절은 알려진 바이며, 언급되기도 했고, 비난을 받았다.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르나르 르그라(Bernard Legras)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가 가진 자료들이 드러내놓고 있지 않고 심지어는 용인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문학작품의 표절(plagiarism)과 위조(forgery)가 범죄로 여겨지고 형벌을 받아 마땅했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르그라는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덧붙인다: 표절과 위조는 국가적인 관심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법적 처벌을 받았다. [[엄밀하게 말해서]그 어느 때나 어느 장소라도, 일반적 차원에서 저작물을 보호하거나, 함부로 가져가는 것을 방지하거나, 혹은 고대인들이 표현했던 것처럼 훔치는 것으로부터 제재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저작권법률이란 것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단지 그러한 현상이 우리가 가진 자료들을 볼 때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에 따르면,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쿠스(Heraclides Ponticus)는 자기 자신의 저술을 엄청나게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다른 사람들의 저술도 출간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그가 그 책들을 썼던 것처럼 만들었다: “시인 카멜레온은 호머와 헤시오도스에 대한 헤라클레이데스의 논문이 사실은 자신의 것을 표절했다고 불평했다.” 이것은 사실, 매우 놀랍게도, <덕에 관하여>(‘페리 아레테스)라는 두개의 논문을 썼던 사람에 의해 자행된 표절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시대의 아테네 사람으로 아이스키네스(Aeschines)를 생각해보겠는데, 그는 소크라테스라는 대단한 사람이 죽고난 후에 그의 대화록을 훔쳐서 그것의 이곳 저곳을 뜯어 고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레트리아의 메네데모스(Menedemus)는 주장하기를, “아이스키데스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남긴 대화록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는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에게서 얻어낸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이었다. 더 나아가 아이스키데스는 다른 이들의 대화록 뿐만 아니라,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의 Little Cyrus, Lesser Heracles, Alcibiades를 (사기를 쳐서: ‘에스큐오레타이’) 이용해 먹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철학자들의 생애:Lives>, 2.60).

 

        경우에 따라 저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표절했던 작가들 때문에 불평이 끊이지 않았는데, 마르티알리아스(Martial)의 지적은 기억할만 하다: “너 실수했어! 내 것을 가져간 탐욕스러운 도둑같으니라구! 너는 달랑 한푼도 들이지 않고 시인이 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고작 돈 몇 푼가지고 명성이란 것을 살 순 없다고!”(경구집 1, 66).

 

        고대에서 표절이 발각되었을 때, 그것은 종종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건축가인]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자신이 만든 유명한 도서관 헌정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버가몬의 왕이 주최한 문예대회의 심사위원들 중에 한 사람인, 비잔틴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도서관에서 모든 책들을 읽었고,” 이제 자신들의 저술을 제출했던 작가들을 심사하게 되자, 오직 한 작품 만이 상을 받을 만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 사건으로 다른 심사위원들과 왕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주목할 점은, 아리스토파네스는 한 작품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작품들이 배껴낸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심사위원들은 표절작이 아니라 원작품에 신경을 기울어야만 한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왕은 그 주장을 미심쩍스럽게 여겼고, 아스리토파네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도서관의 책들을 가지고 와서 배껴낸 부분들을 일일이 낭독했다. 결국엔, 비트루비우스가 알려주기를, 표절자들은 끌려나와 그들이 훔쳐낸 것이 무엇인지 자백해야만 했고, 왕은 그들에게 절도죄목으로 재판을 받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불명예라는 비난을 받았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높은 직위를 받아 도서관장이 되었다”(Book 7, Preface 7). 

 

        경우에 따라서, 표절에 대한 비난은 더 심한 차원으로까지 나타났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피타고라스 문파에서 파문된 일에서 알 수 있는데, 표절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티마이오스(Timaeus)는 자신의 책 <역사>의 제9권에서 말하기를, 그[엠페도클레스]가 피타고라스의 학생이었으며, 거기에 더하여, 그 시절에 피타고라스의 강연집을 훔쳤다고 선고를 받았다. 그는, 플라톤과 같이, 학교의 수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르, Lives, 8.54).

 

        다른 곳에서 비트루비우스 자신은 표절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서 엄한 심판을 선고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즉, 과거의 사건들과 철학들의 기록물을 남겼던 사람들]]이 우리의 존경을 받지만, 그와는 반대로 남의 작품을 노략질하고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려내야만 한다”(Book 7, Preface 3). 이러한 태도는 그러한 행습에 대한 다른 고대인의 가르침과도 일치하는데, “족보, 신화, 정복사업, 도시 건설과 친족관계를 논하는 작가들에 대한 폴리비우스(Polybius)의 즉흥적인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폴리비우스는 안타까와 하기를, 그러한 것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상당 부분 기록되었는데, 그것을 기록했던 동시대의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언급했던 바를 재탕해버리거나 혹은 더 나쁜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자기의 것인양 보여주고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러한 방법을 가장 불명예스러운 작업이라고 칭했다.

 

        동일하게 강경한 입장을 대(大)플리니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책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에서 자신의 인용 관습과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비교하고 있는데, 다른 이들 중에 그릇된 마음과 악한 기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자신의 것인양 속이고 있는 사람을 대조하였다(자연의 역사, 서문 20-23):

나는 나의 방식이 예의 바르며 또한 숨김이 없는 겸손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도움을 받는 자료의 출처를 지각하고 있어야 하며, 내가 주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반드시 일러둘 것이 있는데, 다양한 작가들을 서로 비교해볼 때, 가장 심각한 것은 가장 마지막의 작가들이 이전 작가의 작품을 그 어떠한 언급도 없이 한 마디도 틀리지 않게 배껴내고 있다는 점이다; … 이것이야말로 그릇된 마음과 악한 기질의 증표라고 할 수 있기에, 이들은 자기들이 빌어다 쓴 것을 되돌려주기보다 차라리 현행범으로 잡히는 것을 더 낫게 여긴다.

 

        표절에 대한 고대인들의 논의가 초기 기독교 문헌 전반에서 발견되는 무의식적인 차용과 과연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합당한 질문일 것이다. 두자료 가설을 고려할 때, 마태와 누가는 모두 상당 수준까지 그들의 자료를, 종종 축어적으로, 마가와 Q자료에서 얻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만약 표절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가져다 쓰는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문제가 되는 이들 기록물들[[즉, 마태와 누가라고 불려진 기록물]]은 익명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경우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그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바가 없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는 (위경인) 야고보 원시복음(Protevangelium Jacobi)이 광범위한 수준을 넘어 심지어 종종 말 그대로 배껴져서 이후에 위(pseudo)-마태복음에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후대의 저자는, 사실상 가명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옛 작품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비교할만한 경우가 4세기에 만들어진 사도법전(Apostolic Constitutions)인데, 이것은 사실 <사도계율>(Didascalia Apostolorum), <디다케>, 그리고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s)들을 대대적으로 합쳐 놓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황은 좀더 복잡해진다. 이들 초기 작품들 중에 두개는 익명의 것들로, 과연 그러한 익명의 것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도계율>은, 다른 차원에서, 위조된 것-그것은 사도들이 기록했다고 나온다-이며, 그것 자체가 역시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또 다른 위작과 섞여 있다. 무엇 때문에 위조자는 (사실 자기가 한 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썼다고 했던 옛작품을 신뢰했던 것일까? 차라리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경우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베드로후서가 정체불명의 극악한 대적을 향한 논쟁의 상황에서 유다서의 상당부분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그러나 논쟁을 다루는 자료[[즉, 유다서]]는 사실 위작이며, 그 자료를 사용했던 작품도[[즉, 베드로후서]역시 위작이다. ‘위조자가 표절을 했다는 말인가? 한편으로 그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명백하게 배꼈다. 혹은 고대자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조자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훔쳤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볼 때, ‘위조자는 사실 자신의 작품을 자기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훔쳐온 자료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신뢰를 주려는 목적으로 그 자신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서 볼 때,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주 복합하게 걸려 있는 사기행각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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