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세기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역사에 있어서 정점을 찍는 시기였습니다. 가장 주목할 점은 건축물인데, 크기면에서 확장되고 품질면에서도 고급화되었지요. (물론 시골의 가옥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지만,) 전략적인 도심지의 고고학 연구를 통해서 볼때, 여전히 '기둥과 뜰이 복합된' 전통적인 가옥의 원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확장되고 고급화 되면서 일반 사람이 살기에는 벅찰 정도로 큰 규모의 집들이 도시의 성벽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위 관리들이 거주하는 집들과 함께, (특별히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공공건물에서는 세금으로 바쳐진 농작물들의 물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엄청난 도편들(Ostraca)이 발굴되면서 사회구조의 변화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화는 사회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보다 더 계층화되면서 상향식 피라미드의 꼭지점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게 됩니다. 사회의 엘리트들은 자연스럽게 이웃나라의 사치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시골의 민간인들이 바친 농작물(과 특용작물들)을 아낌없이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세계관'과 접촉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셈족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그들을 우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닌, 지극히 보편적인 인류사회학적 연구에 의하면) 복잡한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심지어 왕이라고 할지라도 본인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세계관'에 비판적일 수 있는 기본소양을 갖기엔 무리였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보다는 실리를 추구한다는 계산 아래에서 이것 저것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정체성의 좋은 예가 '이름'이 되겠는데, 많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이름 가운데 1/3에서 '바알'이 들어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2/3가 '야훼'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야훼'의 축약형인 '야(-yaw)'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완성형인 '야후[-yah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었던 야훼 신앙이 어느 순간 '촌스럽게' 보일 때, 자신의 세계관이 더 이상 '넓은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남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당시에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인장(seal)'의 경우, (과거에는 필요하지 않았으나, 사회가 변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고위관리의 정책운영을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페니키아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함께 위나 아래에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그림들을 새겨넣으면서 좀 더 '뽀대나게' 만들었습니다("왕의 신하, 야자니아"를 넣고 아래에 그림을 넣습니다).
그러므로, 8세기에 '야훼 신앙'을 지키려했던 '개혁적 움직임' 역시 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주목해야할 반응임을 알게 됩니다. 앞서 언급된 '그림이 포함된' 인장이 있는가 하면, 그림이 없이 글자만 들어있는 인장들도 있는데, 이것들 (8세기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하난,' 그리고 (7세기의) '느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이란 인장입니다. (선별적인 것이기는 해도,) 이를 통해 '야훼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역시, 특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종교공동체에서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와 함께 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예언운동(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사야)에도 '신앙'과 함께 '삶의 개혁' 역시 주장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도시화의 폐혜를 꾸짖고 농경사회의 이상을 꿈꾸었지요: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미 4:3-4). 사실 '도시화'는 어쩔 수 없는 사회의 변화과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지키는 사람들이기에, 현상 깊이 숨어있는 본질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8세기 이후로 등장한 '고전예언자' 혹은 '문서화된 기록을 남긴' 예언자들의 개혁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예언자적 뿌리에 기반으로 요시야는 신명기적 개혁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언자는 9세기에 들어 그 뿌리를 '엘리야-엘리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엘리야의 배경을 찾아낼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은 상당히 신비한 존재들임에 분명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보여준 '야훼 신앙'의 내용인데, 이들은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처럼 '문헌'을 남기지 않았고, 일종의 '전설'을 남겼다는 점입니다(엘리트들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기억'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하나님의 왕되심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여러 기적들을 통해서 보여주었고, 대중들에게 뿌리 깊이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운동의 흐름과도 유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화") 사건 이후 제자들의 사역 그리고 문서화 작업까지. (엄밀하게 말해서 왕실문서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겉모양의 차이가 있지만, 각각의 핵심이 말하는 야훼신앙의 이데올로기를 보면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어느덧 나 스스로 '문서'에 집작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문서를 남기는 것과 문서를 잘 읽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생생함이 결여된 느낌은 정말 지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 성서의 경우, 엄청나게 다양하게 읽어왔던 전승을 생각할 때면, 문서의 생생함 역시 찾아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러한 생생함은 현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겠지요. 사단에 눌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현장. 자녀가 없어서 남 모를 고민을 하고 있는 노부부에게 엘리사를 통해서 귀한 자녀를 주시며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며,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하는 그러한 신앙의 생생함이 있네요.
요즘 열왕기를 읽고 있는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한 나라의 왕국의 역사이건만 사실 '깨어진 두 나라'의 역사이며, 왕국이건만 왕들의 업적보다는 '예언자들의 복음 활동'이 더 자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왕'이 무엇을 이룩했다더라 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에 지친 몸뚱아리를 누이며 '어떤 예언자'가 누구를 도왔다더라를 되뇌이며 잠들었겠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길'을 고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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