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것입니다.
본문: 열왕기상 18:42; 19:18
0. 말씀 앞에서
먼저 오늘의 배경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합시다:
왕상 18:42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표준새번역)
왕상 19: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표준새번역)
오늘 설교 제목을 같이 읽어볼까요?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것입니다.” 제목 어떻습니까? 제목을 보자마자 느낌이 오시죠?
좋은 설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좋은 설교일수록, 말씀에서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이 마지막에 새생명처럼 잉태됩니다. 반대로, 제일 먼저 제목이 나오게 된다면, 성경에서 뽑아진 메시지보다 설교자의 의도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의 설교는 그리 좋은 설교가 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엘리야가 도망을 가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기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아니, 딱 하나 나오긴 합니다: 19장 4절에, 엘리야가 기도(히, 샤알)하는데, “하나님, 저를 죽여주소서~”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실래요? “하나님, 저를 죽여주소서~”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은 아무래도 기도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더더욱 ‘기도’라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제목과 같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릎이 아닌,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말씀 안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말씀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1) 기도는 무지개입니다.
이 말은 처음에 아리송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면, 의외로 쉽게 풀어집니다: “기도”가 뭘까요? 한번 쉬운 말로 말해보시겠어요?
좋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엘리야가 등장하는 17, 18, 19장을 중심으로 기도와 관계된 표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대충 7개가 나옵니다: 하나씩 볼까요?
(1) 부르짖는 것(카라&아마르, 17:20);
(2) 하나님을 만나자고 부르는 것(카라, 18:24);
(3) 가까이 나아가 말하는 것(나가쉬&아마르, 18:36);
(4)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것(가하르&심, 18:42);
(5) 구하는 것(샤알, 19:4);
(6) 묻고 대답하는 것(아마르&아마르, 19:9-10);
(7) 듣는 것(샤마, 19:13).
그래서? 기도는 무지개입니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기도가 7개이다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로지 이거다!’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빨간색이 아닙니다. 노란색도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여러 가지 색깔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 색깔이 막 섞여 있지 않는 것처럼, 기도도 핵심이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나와 하나님 그리고 관계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기도할 때, 나만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일방적 자기 욕심이지요. 반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만 계셔도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귀를 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드린 엘리야의 기도를 살펴보면, 어떠한 방향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부르짖는 것에서 시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하고, 그 분께 엎드리며, 묻고 대답하고, 마지막에는 듣습니다.
물론, 이게 정확한 순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기도에 대해서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 하는가?” 반대로, 듣지 않는 이유는 무었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것이 오늘의 설교가 더욱 핵심으로 잡는 제목입니다.
2)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것입니다.
함께 잃어 볼까요: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기도의 성숙한 관계를 뜻합니다. 바로 (7)번째 기도의 모습입니다: 듣는 기도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뭔지 아십니까? 듣는 겁니다. (새힘이, 무슨 말만 하려면, ‘오케이~’ ‘오케이~’합니다. 무슨 말을 못해)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뭘까요? 내가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듣는 것이 힘든지 아십니까? 나의 경험으로 그 말이 틀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1)번부터 엘리야의 기도의 모습을 살펴보면, 엘리야가 걸어왔던 신앙의 경험들이 나옵니다. 공격적이었고,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불의 역사였고, 또 폭우의 역사였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경험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금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십주 사십야(왕상 19:7) | 출 24:18 |
하나님의 산 호렙(19:8) | 출 19:2 (시내산) |
그곳 굴 (19:9) | 출 33:22 |
언약을 말함 (19:10) | 출 24:7-8 |
강한 바람과 불 (19:11,12) | 출 19:16 |
“여호와가 계시지 않는다”(3번 반복) | 하나님의 큰 음성이 있었다(출 19:19) |
어떻습니까? 지금 이 장면은 성경에서 새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히려 모세를 떠오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의 내용과 너무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금 이 장면은 마치 “개천절”과 같습니다. “개천절”이란 뜻이, 하늘이 열리고, 최초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똑같은 겁니다. 출애굽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의 수많은 거짓 신들을 물리쳤습니다. 종되었던 백성들을 이끌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클라이맥스가 시내산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백성 사이에 집을 짓고 함께 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kingdom)”가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출애굽의 모습은 한마디로 왕의 대관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레와 같은 큰 소리가 울려퍼지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엘리야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갈멜산의 850대 1의 기도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소망하게 됩니다. 무엇을요? 가짜 왕인 아합과 이세벨이 판치고 있는 지금, 하나님이 진짜 왕이지 않습니까!! 출애굽때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처럼, 지금 내게 나타나주세요!! (show me the GLORY!) 제가 강력하게 기도했을 때에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 지금 그렇게 능력으로 내게 나타나주세요!! (show me the POWER!) 제가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을 때, 하늘에서 불벼락에 떨어져 제물을 태우셨던 것처럼, 하나님 지금 그렇게 놀라운 일을 보여주세요!! (show me the MIRACLE!) 제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마른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폭우가 쏟아졌던 것처럼, 하나님 지금 그렇게 역사를 이루어주세요!! (show me the HISTORY!) “그때처럼!” “그때처럼!” “그때처럼!”
그러나 호렙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큰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성경은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세미한 소리”(a still small voice)
“엘리야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니?”
“네? 저 지금 무릎 꿇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야야, 너 마음의 무릎 까지도 꿇어보지 않겠니? 내 말을 들어보지 않겠니?”
엘리야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의 세계에 갇혔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신앙에 묶였던 겁니다. 크고 강력한 현상이 항상 따라다녔던 경험이지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던 경험이지요. 그래서 그것만이 하나님의 방법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는 달랐습니다: “엘리야야, 이제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누구누구를 찾아가서 기름을 부어라. 내가 그를 쓸 것이다.” 이제 엘리야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엘리야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방식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경험 밖에서도 존재하심을 인정할 때, 비로소 마음의 무릎이 꿇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두가지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경험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지 못하는 경험 밖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였습니다. 이 말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 밖에서 메시야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고난 받는” 왕이며, “섬기는” 왕이며, “종이 되는” 왕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메시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경험 밖의 메시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섬기며, 종이 되며, 고난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어허! 뭔 소리를 그렇게 섭하게 하쇼!”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부활의 주를 경험하고 그는 마음의 무릎까지 꿇게 되었습니다. “주는 진짜 그리스도(메시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 밖의 하나님”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이사야 45장 7절).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기 1장 21절; 2장 10절) 사랑하는 여러분, 아멘이십니까?
2. 말씀 아래에서
말씀을 더 이상 풀어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까 고민을 해야겠지요.
아시는 것처럼, 지난달에 저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가다가 미끄러져서, 크게 한 바퀴를 굴렀고 오른쪽 무릎 인대가 부분파열이 되는 사고를 당한 겁니다. 2주 정도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보호대를 차고 다닐 정도로, 그 당시에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심해서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먹어야했고, 일어설 수 없어서 누워만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자꾸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때가 한 새벽 3시쯤이었는데요.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를 쌔게 하고, 눈 딱 감고 일어서면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놀라운 치유를 경험했거든요. 몸에 열이 불같이 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날이 있었는데, 기도를 진짜 쌔게 하고 몸이 온전하게 회복된 일이 있었습니다.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겁니다. “주여! 주여! 주여!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일어나리라!! 흐으윽!!! 그날 밤에 약을 두 개 먹고 잔 거 같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한 달 가량 누워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역자님들께서 저의 빈자리를 얼마나 잘 채워주시는지요. 한 달만에 수요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얼마나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는지요! 너무 예배인도를 잘하시고, 그 은혜로운 예배에 함께 있는 자체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성도님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함께 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고 물질도 아끼지 않으시고, 정말 지난 한 달은 참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했던 시기였습니다.
처음으로 다시 여러분들과 예배를 드릴 때, 이 찬양이 생각났어요: “주 은혜로 이곳에 서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정말 두 발로 서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하나님께서는 저를 가르쳐주셨던 겁니다. “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서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는구나! 그리고 교회는 성도의 사랑으로 함께 서가는 것이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무릎까지도 꿇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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