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이것은 족보를 말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창세기 2장 4절의 헬라어번역본의 표현과 같습니다. 아무래도 마태는 예수님과 관련되어 오경의 혁신적인 재해석을 표방하려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G. Theissen 2012: 139f). 어찌되었건 유명한 임마누엘 선언이 있기 전까지, 많은 독자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깊은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1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짧지 않은 족보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치밀하게 들어있음을, 바로 시작절과 마지막절이 '예수 그리스도'로 제시되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다윗(dwd)과 관련하여 그 이름의 숫자(게마트리아)가 14이기 때문에, 14대로 나누었다고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대하여, 레이먼드 ...브라운은 당시 쿰란문헌에서는 '24' 다윗(dwyd)으로 표기되었다고 말하면서 무조건적 다윗연관성에 조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R.E. Brown 1993:80). 이러한 견해를 끌고나가서 에드윈 프리드라는 학자는 제2성전시대 당시에 묵시적으로 '유행했던' 세계관을 언급합니다(E.D. Freed 2004:28f): 바로 에녹1서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야의 시대를 기다리며 7세대 혹은 14세대로 이루어진 시대구분을 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마태가 제시하는 족보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다윗'도 생각해내지만,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메시야의 시대의 도래 역시 받아들이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프리드에 따르면, 마태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혹은 '유행했던' 생각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던 것이 됩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7 혹은 14세대로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메시야라는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 14를 만들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14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이며, 두번째 14대는 [다윗]부터 [요시야]이며, 세번째 14대는 [여고냐]부터 [예수]입니다. 다윗이 두번 반복되고 있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첫째('왕조이전')는 13으로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꼼꼼해야할 '세리' 마태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만약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예수를 만난 이후의, '세리' 마태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의미는 '정확하며,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완벽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이 유대교가 오해하는 '의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아닐까요? 유대교는 마땅히 결혼전 임신한 여인을 돌로 치거나 혹은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이 '의로운' 처사였을 것이지만, 마태의 의로움은 비록 겉으로는 율법(과학적 정확성?)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포용하는 태도가 진정한 '의로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1:19). 한낯 사람이었던 침례 요한이 '신발을 들을 수도 없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마땅히 침례를 받아야 '합당한/의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에게 침례를 받는 것이 진정한 '의로움'일 것입니다(3:15). 유대교가 제시하는 정확무오한 의로움은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5:20; 6:1),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새로운 목표가 됩니다(6:33).
세상의 의로움, 혹은 유대교의 정확무오한 의로움에서 자유한 마태는, 자신의 꼼꼼함보다는 당시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메시야 시대 개념(7, 14세대)에 마음을 열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마태에게서 무엇이 본질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완벽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만약 우주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혹은 정확무오한 정보들'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브리테니커바이블'을 들고 날마다 낑낑대야만 할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비과학적 언어로 '진리'를 나타내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통해서, 정확하신 하나님은 마태를 감동하셔서 정확하게 족보를 기록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보다 그 족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네요.
1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짧지 않은 족보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치밀하게 들어있음을, 바로 시작절과 마지막절이 '예수 그리스도'로 제시되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다윗(dwd)과 관련하여 그 이름의 숫자(게마트리아)가 14이기 때문에, 14대로 나누었다고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대하여, 레이먼드 ...브라운은 당시 쿰란문헌에서는 '24' 다윗(dwyd)으로 표기되었다고 말하면서 무조건적 다윗연관성에 조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R.E. Brown 1993:80). 이러한 견해를 끌고나가서 에드윈 프리드라는 학자는 제2성전시대 당시에 묵시적으로 '유행했던' 세계관을 언급합니다(E.D. Freed 2004:28f): 바로 에녹1서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야의 시대를 기다리며 7세대 혹은 14세대로 이루어진 시대구분을 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마태가 제시하는 족보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다윗'도 생각해내지만,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메시야의 시대의 도래 역시 받아들이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프리드에 따르면, 마태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혹은 '유행했던' 생각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던 것이 됩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7 혹은 14세대로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메시야라는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 14를 만들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14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이며, 두번째 14대는 [다윗]부터 [요시야]이며, 세번째 14대는 [여고냐]부터 [예수]입니다. 다윗이 두번 반복되고 있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첫째('왕조이전')는 13으로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꼼꼼해야할 '세리' 마태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만약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예수를 만난 이후의, '세리' 마태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의미는 '정확하며,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완벽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이 유대교가 오해하는 '의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아닐까요? 유대교는 마땅히 결혼전 임신한 여인을 돌로 치거나 혹은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이 '의로운' 처사였을 것이지만, 마태의 의로움은 비록 겉으로는 율법(과학적 정확성?)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포용하는 태도가 진정한 '의로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1:19). 한낯 사람이었던 침례 요한이 '신발을 들을 수도 없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마땅히 침례를 받아야 '합당한/의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에게 침례를 받는 것이 진정한 '의로움'일 것입니다(3:15). 유대교가 제시하는 정확무오한 의로움은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5:20; 6:1),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새로운 목표가 됩니다(6:33).
세상의 의로움, 혹은 유대교의 정확무오한 의로움에서 자유한 마태는, 자신의 꼼꼼함보다는 당시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메시야 시대 개념(7, 14세대)에 마음을 열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마태에게서 무엇이 본질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완벽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만약 우주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혹은 정확무오한 정보들'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브리테니커바이블'을 들고 날마다 낑낑대야만 할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비과학적 언어로 '진리'를 나타내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통해서, 정확하신 하나님은 마태를 감동하셔서 정확하게 족보를 기록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보다 그 족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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