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다윗: 헤세드 베에메트

진실과열정 2013. 7. 26. 00:10

신학공부하는 중에, 성서와 씨름하고, 이런저런 책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모토로 삼는 말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헤세드베에메트'를 개인적 의미로 풀어 가지게 되었지요. 성서를 읽다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헤세드, 에메트'라는 단어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만큼 번역하기도 쉽지 않죠. 헤세드는 열정으로, 에메트는 진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인자와 진실', '사랑과 진실'(공동),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새번역)로 번역되었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출 34:6; 그리고 수많은 시편의 고백들에서, 시 25:10; 86:15; 89:14; 117:2).

그렇지만, 이 '헤세트베에메트'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신의 성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창 24장에서, 어쩌면 정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처음 등장하는 '인자와 진실'은 이름없는 늙은 종의 입에서 터져나오게 됩니다(49절). 가장 길고 긴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그 내러티브 안에서 야훼 하나님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 어쩌면 맡겨진 인생길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자와 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금 비평적으로 생각하면, 보다 '인간적인 신학자'였던 J는 이곳과, 역시 인간적인 의리를 비춰주는 창 47:29에서 '인자와 진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보다 '경이적인 신학자'였던 E는 야훼의 속성으로 깊이 염두했지요[출 34:6].)

W. Brueggemann(2002)은 '헤세드'(인자)와 '에메트'(진실)의 만남을 다윗의 역사적 현장에서 찾고 있습니다(p. 90-92). 다윗계약의 '헤세드'가(삼하 7:15-16) 그 이전에 아비가일과의 만남 가운데 '에메트'(진실)로 약속되었다고 보았고(삼상 25:28), 결국 시편 89편에서 '헤세드와 에메트'의 결합으로 제시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최초' 내러티브로 제시되는 J는, Richard E. Friedman의 작업(The Hidden Book in the Bible, 1999)으로 좀 더 문학적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을 중심으로 한 처음 내러티브의 풋풋함은 덜 신학적(less orthodox idea)일순 있으나, 더 실제적인 신앙의 신비로움(more mystical reality)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란 '직통계시'의 단조로움의 연속이 아니라, 고뇌 속에서 선택하고 그 삶의 아이러니와 신비 혹은 '숨겨진 지혜'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프라이드만은 J를 소개합니다.

J 안에서, 다윗은 역시 '사람 사이의 인자와 진실'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보여줍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하루 아침에 도망자의 신세가 된 다윗은,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젠 너의 갈길을 가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합니다(삼하 15:19). 여기에서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쫓겨난 나그네'라구요? 히브리어로 '나크리'라는 이 말은 사회문화적인 단어로 '다른 사람/이방인'을 뜻합니다. 얼굴 생김이 다르고, 의식주 문화가 다르며, 조금이나마 언어도 다르겠죠. 후기문서인 P는 이들을 '이방자손'(벤-네카르)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출 12:43; 겔 44:9). 한편, (사회학적으로 볼 때) 그 당시의 '민족'이란 개념을 집어넣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사실 성서를 면밀하게 읽어보면, 물이 많이 흐려져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B.Halpern 2001: 229-41].)

어찌되었건, 잇대는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블레셋 사람인 거죠. 그들의 이름은 서부셈족어가 아니라, 지중해식 그러니까 헬라식이었습니다(아기스 왕이, 헬라어로 아카이오스, 즉 아카이아[그리스]인을 뜻하는 것이었죠).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고 달려오는 절망적인 판국에, 다윗은 그동안 자신을 따랐던 이들에게 일종의 '자유'를 마지막으로 선사했던 것입니다. "나 때문에, 너희까지 어려움을 줄 수 없다." 이제는 '네가 있어야 할 곳'에 가라는 거죠.

그러면서, 다윗은 '가드' 사람 잇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히브리어로, "임마크 헤세드 베에메트"입니다. 자신을 도와서 어디든지 따랐던, 얼굴색이 다른 사람에게, 다윗은 그런 인사를 했던 겁니다. 사람 사이에서, 비록 실용적인 지혜에 따르면 환경과 인간관계는 정비례하지만(잠 19:4), 다윗이 보여준(어느 면에서는) 초월적인 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드' 사람 잇대가 죽기까지 충성하겠노라고 고백했을때("당신의 종은 나의 주, 왕[The king!]이 있는 곳, 그곳에 있겠습니다!", 삼하 15:21), '헤세드베에메트'는 더 이상 신의 속성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J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인간관계에서도, 비록 그것이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초기 왕정의 역사 저술가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변증적'인 문제들 앞에서, 예를 들면 전사한 사울왕을 중심으로한 베냐민 지파의 인심을 얻기위한 방면으로, 다윗이 그 죽음과 무관함을 보여주어야만 했고, 더 나아가 블레셋과의 관계에서 다윗이 깊이 관여하지 않았음을 설득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짧은 역사의 한 순간에서, 다윗은 거대 정치가 품을 수 밖에 없는 '실용주의'를 과감하게 내던져버립니다. 그리고 '쫓겨난 나그네'를 뜨겁게 안아줍니다. 진실과 열정으로 말입니다.

사람 사이의 진실과 열정은 하나님도 보시는 것 같습니다. 숨겨진 신비로움을 보면, 하나님의 궤는 기브온 지역에서 20년간 머물러 있었다가(삼상 7:2),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 동안 있었습니다(삼하 6:11). 사울왕이 다윗을 찾으려고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을때, 실상 하나님의 궤는 기브온 사람들의 보호 안에 있었습니다(참조 수 9:21,23,27). 그래서였을까요? 하나님은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주시고 사울의 잘못을 후대에게 기억나게 하십니다(삼하 21:1-6; 그리고 대상 13:3!). '가드' 사람 오벧에돔은 역대기에 의하면 레위인의 한계보를 차지하게 됩니다(대상 15:18).

잘 읽어보면, '실용주의 지혜'에는 세속적이면서도 타당한 삶의 지혜 가운데 여전히 신앙인의 선택이 존재함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8:17).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잠 14:22).

마지막으로, '인자와 진리', '진실과 열정' 혹은 '은혜와 진리'로 오신 예수님이, 수직적이고도 수평적인, 신과 인간의 완전한 관계의 '확고한 연결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요 1:14; W.Brueggemann 200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