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다윗에 대한 두개의 시선(DH, CH)

진실과열정 2013. 7. 17. 22:41

다윗에 대한 두개의 시선(DH, CH)

(* Walter Brueggemann의 David's Truth [2002]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을 잘 소개하는 의미 심장한 구절로 삼상 16:18을 잡았는데, 실상 신명기적 역사가(사무엘서)와 이후의 역대기적 역사가(역대기)의 평가는 조금 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출발점은 그냥 지나칠 수 있을 한 사건에 주목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사건은 이렇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목이 마른 다윗이 무심코 고향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는 혼잣말에, 충성된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한 바가지 생수'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충성 앞에 다윗은 깨닫고 그 물을 야훼께 바치는 장면이죠. 사무엘서는 이 장면을 다윗에 대한 기록 '후반부'에 놓았지만(삼하 23:14-17), 역대기는 이 장면을 '전반부'에 놓았습니다(대상 11:15-19). 어느 증언이 옳고 그르냐의 차원이 아니라, (사무엘서 자체가 삼하 5:18,25; 8:1에서 이미 블레셋에 대한 완승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이 신앙의 눈으로 증언한 다윗 혹은 다윗에게 투영된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에 의하면, (어쩌면 역대기적 역사가에 의해서[대상 11:15-19] 더욱 두드러졌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윗의 신앙적 평가는 삼하 23:14-17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다른 편으로 역대기적 역사에 의하면, 다윗의 신앙적 평가는 역대기에 기록된 다윗의 말년을 조사해볼 때, 대상 29:14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신명기적 역사가가 다윗을 묘사할 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그렸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그 반대(혹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평치 못하)였는지, 충신 우리야의 사건을 통해서[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삼하 11:25], 그리고 역적 압살롬의 사건을 통해서[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죠, 삼하 19:6], 신명기적 역사가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역사가의 다윗'은 사람을 사랑하는 성군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어쩌면, 신명기적 역사가의 삶의 자리에서도 유효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합니다. 유독 신명기적 개혁의 법이 '사람의 사람다움'을 지향하고 있으며, (특별히 8세기 예언자들을 시작으로) 비인격화되어버린 도시화현상의 폐혜를 지적하고 그 극복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의 다윗은, 그러므로 다윗으로 대표된 이스라엘의 신앙적 개조를 위한 재구성으로 충분히 기능합니다.

역대기적 역사가는, 신명기적 역사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윗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으려는 예배자'로 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삼하 7장의 사건이 '인자와 진실'(헤세드 베에메트) 구절과 연관을 맺으면서, 역대기적 역사가에게 중요한 이슈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는 구절,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대상 29:14b), 그의 겸손한 신앙을 최초의 전승에서부터 고스란히 이어받은 역사가의 기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카톤' 곧 '막내/작다'라는 중요한 신앙적 의미가 지속적으로 다윗의(삼상 16:11; 삼하 7:18-22),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대상 17:16f) 흐르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겠지요. 포로 시기를 마치고 허허벌판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찬란했던 광명은 자신들의 업적이 아니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다윗의 입에서 고백했고 이스라엘은 기도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스라엘의 큰 두개의 역사적 기록물(신명기적 역사, 역대기적 역사)은 입체적인 다윗 혹은 이스라엘의 신앙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