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의 개혁의 시발점이 된 '언약책'에 대하여(왕하 23:2), 고대전승집을 제안하기도 하지만(출 24:7; Schniedewind 2004: 126),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명기로 제한하고 있지요(신 6:4-28:68; Van der Toorn 2007: 152,223).... 아마 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아귀 맞진 않지만, 요시야의 개혁은 신명기가 요구하는 방향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서 '신명기적 역사(DH)'라는, 성서학의 '유레카'를 외치기도 하였지요.
이 요시야가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왕하 23:29). 그 배경은 복잡하지만, 재미있는 점으로, 그 장소가 '므깃도'인데, 신약 묵시록의 최후의 장소인 '아마겟돈(하르[산]+므깃도]'(계 16:16)이죠. DH의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해서, '역대기적 역사가(CH)'는 자신들의 미드라쉬를 붙이지만(대하 35:21), CH이야말로 '수정주의적 역사가'이기 때문에(Coogan 2005:454), 아무래도 요시야의 죽음은 '조상의 죄'로밖엔 달리 설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왕하 23:26f).
요시야가 죽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즉위하였지만, 3개월만에 폐위되고 애굽으로 잡혀갑니다. 애굽은 (역시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11년간 꼭둑각시 정권을 만듭니다(이름의 부여를 통해서 주종관계를 분명히 한것이죠).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바통을 이어받았으나, 그도 역시 3개월만에 폐위되어 바벨론에 잡혀갑니다. 이번엔 바벨론이 (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해서 11년을 다스리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유다왕국은 멸망하고 말죠.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고 또 회복을 예언했)던 예레미야는 유독 왕권의 변화에 민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왕으로 시드기야가 세워진 후에, 세번에 걸친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야훼의 말씀'(렘 21:11; 22:1; 22:6)은 분명 의도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첫째로 '살룸'을 언급합니다(22:11). 이는 여호아하스의 다른 이름입니다. 두번째로 '화있을 자'가 나오는데(22:13) 나중에서야 '여호야김'인줄 알게됩니다(18절). 세번째로 '고니야'를 언급합니다(24절). 이는 여호야긴의 다른 이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여호야긴이 다윗왕가의 줄기이지만, 이제는 그 줄기가 잘렸다는 선언입니다(30절). 이후로,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를 언급할 것입니다. 비록 이름을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살룸'처럼 혹은 '고니야'처럼, 우리가 아닌 그들이 들었을 때에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언급했을 것입니다. 렘 23장 6절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마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이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대번에 눈치 채게 됩니다: "야훼 찌드케누" 그건 시드기야의 다른 이름이지요. 본래 바벨론이 내린(바꿔준) 이름이지만, 예레미야는 하늘의 이름으로 새롭게 부른 겁니다. 줄기가 잘렸지만, 새로운 '의로운 가지'가 생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어렵지 않게 시드기야를 생각해냅니다(M. Fishbane 1985: 472; J.J. Collins 2004: 340).
시드기야는 여호아하스(살룸)의 친형제였습니다(왕하 23:31; 24:18). 여호야김(과 여호야긴)과는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지요. 실제적인 권력은 여호야김에게 있었고, 역시 그 아들 여호야긴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볼때, 여호야긴의 배후에 있는 외척세력은 '예루살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막강파워 그 자체였던 겁니다(왕하 24:8). 자연히 백성들과 소위 예언자라는 사람들은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의 '컴백홈'을 기대하였죠(렘 28:2). 시드기야는 말 그대로 바늘방석에서 좌불안석이었습니다(렘 38:19).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레미야와 시드기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렘 18:18). 의지할 자 아무도 없는, 고립.
그러나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아버지가 이루고자했던 야훼 신앙의 실천(신 15:12)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8). 놀랍게도(!) 성서에 기록된 처음이자 마지막 '노예해방' 사건은, 다른 왕이 아닌 시드기야에게서 실천됩니다(렘 34:8). "의로운 가지가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처럼(렘 23:5), 시드기야는 고대근동의 왕들(과 오늘날의 대통령들)이 즉위하면서 시행했던 해방을, 다름아닌 야훼신앙으로(렘 34:15,18)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결국, 시드기야는 세상의 흐름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뜻을 돌이켰고, 다시 노예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이 사건으로 야훼의 이름엔 더러운 먹이 칠해지게 되었습니다(16절).
역사에 if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소명에서 이미 예루살렘이 "뽑히고 파괴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게" 될 줄 알았습니다(렘 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야훼의 진짜 속을 알았기에, "새벽부터 부지런히"(7:13) 이스라엘의 돌아옴을 외쳤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 인생이, 그 존재적 한계로 인한 나약함으로 인해서, 꿈이 꺾이고 빛이 사그라지며 한없이 초라하게 추락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이 주는 소망이 있음을 믿으며,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도하고 또 기대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