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Bart D. Ehrman, God's Problem

진실과열정 2012. 6. 3. 03:40

 

Bart D. Ehrman, God's Problem: How the Bible Fails to Answer Our Most Important Question - Why We Suffer (New York: HarperOne, 2008)

 

언제나 문제의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기존의 체제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데, '이건 아니다!'라고 멈춰선 사람들을,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들을 특이한 사람들('the idiosyncratic')이라고 부른다. 저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난체를 하는 것일까? 일종의 동굴우상의 사명감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철이 덜 든 것일까?

 

바트 어만은 탁월한 성서학자이다. 최소한 신약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있는 개론서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고, 학문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놓은지 오래이다. 지금은 오래된 책이 되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제목으로 어만은 성서의 메시지 혹은 '그 이데올로기'에 정면 대결을 펼친다. 쉽게 말해서, 어만의 입장에서, 성서가 말하는 내용이 처음부터(창세기) 끝까지(요한계시록) 전혀 가당치도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저자는 토라부터 묵시문학까지, 성서의 주된 목소리를 추적하면서, 그 목소리가 다름아닌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에 대한 '소위 신적 메시지'로, 그 흐름을 비교적 냉소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원역사),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족장설화), 형벌적인 고통(신명기적 역사서-예언서), 풀어낼 수 없는 신비(지혜문학), 악 그 자체 대한 종말론적 인내(역사적 예수) 등으로, 어찌 보면 고통이라는 문제를 두고 나름대로 '신학적 진술'의 맥을 잘 짚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성서 메시지의 이해는 괜찮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같은 읽기를 결과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만은 그 메시지를 혹은 더 나아가 그 메시지의 기원(the God)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 일례를 들면, 신앙인들이 말하는 바 'Out of something bad, God makes something good'(p.151)에 대하여, 여기엔 공평과 정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p.155f, 199): 그래서 하룻밤새 화산의 재앙으로 한 마을의 수천명이 몰살 당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가?

 

그래서 저자의 입장은 인간의 편에 선 비판자이다. 마치 하박국이라고 할까? 하박국에는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답을 하셨지만(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어만에게는 그런 대답이 없었나보다. (혹은 그가 인식하지 못했거나: 그렇다면, 그의 책임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견해와 지금 오늘날 세계의 현재 사이에는 서로간의 간격이 너무 심하다(the two-the views of God and the realities of this world- are at odd's with each other, p.270).

 

저자가 이 주제에 관심을 준 것은, 그가 막장까지 가보자는 신학자의 투정부림이 아니다. 그는 일찌기 80년대부터 이러한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기어코 들고 일어선 것이다(p.230). 세계와 자연의 불합리를 보고? 신을 연구하는 신학자가, 신을 믿고 가르치는 목사가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 신 앞에서 돌아선 것이다.

 

저자는 그 학문적 출발점이, Brill에서 출간된 Theodicy란 주제로 출간된 논문집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나도 한번 엿본적이 있는데, 아주 두꺼운 책으로, 세계의 유수한 학자들이 성서 각권의 신정론을 다루는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책이다. 그 앞에서 저자는 반론을 편 것이다. 어쩌면, 성서는 끊임없는 인간문제에 대한 신학적 견해의 진술집이다(p.256) 라는 주장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성서를 냉소적으로 읽으면서(그렇게 느껴진다), 성서 내러티브 안에 들어있는 아이러니를 명쾌하게 발견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성서의 목회적 목적을 기가막히게 간파한 성서학자의 결과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부분에서는 D.A.Clines의 이데올로기적 성서 읽기의 또 다른 경우도 될 수 있다(나사로의 죽음을 다루면서, p.136f).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클라인즈의 접근방향이 확실히 학문적으로 보인다. (반대로 어만의 책은 너무나 양심선언적 선언같다.)

 

저자는 결론에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언급한다. 알료사와 이반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상당수의 신앙인들이 나이브(naivete)한 알료사에 가깝다고 말하며, 자신은 용감하게 티켙을 환불한(return him[God] the ticket, 269f) 이반이라고 한다. 결국, 저자는 실존주의자라고 남고 싶은 것 같다. 소설 '페스트'와 '분노의 포도'가 전달하는 인간의 실존과 그 실존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태도만이 합당하다고 선언하는 그런 실존주의자. 자신은 최소한 전도서의 지혜자가 삶에 달관한 것처럼, 자신 역시 그런 편에서, 성서의 메시지에 가깝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어만은 기독교를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을 한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성서를 연구한 학자의 결과가 상당히 씁쓸하다. 성서를 관통하는 혜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관통하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한편, 그가 제시한 현실의 문제는 정말 심각함 그 자체임에 분명하다. 여기에 현재 신학계가 더 이상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 점에서는 분명, 리차드 도킨스의 God Delusion과 공명한다).

 

한편, 책을 읽으면서, 성서의 메시지를 과연 '잘' 읽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고 싶다. 저자가 집어낸 부분은 확실히 성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전부인가 혹은 중심적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성서가 고통에 대하여 마치 진화론적으로 혹은 발전론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곧 시대정신에 따른 세상 문제의 해결서로서의 성서 이해는, 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성서내러티브의 이야기와 성서 자체의 생성역사와의 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히브리서를 강해하면서, 당시의 유대교기독교인들이 핍박의 이유로 기독교를 저버리는 상황에서 '돌이키지 말라'는 히브리서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어만의 책을 읽으면서, 현대는 이러한 이유로 '돌이키는' 자들이 나오는가 라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당해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기존의 승리주의나 기복적신앙, 소위 내가 잘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값싼 신앙에 대하여, 진정 당신이 신앙인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유는, 신앙이라는 '보험' 때문은 아니었는지, 이 책은 솔직하고 담담하게 묻고 있다.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9)

 

 

p.s. 이 책은 성서학자답게 곳곳에 성서에 대하여 배울 부분들이, 매우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소개되고 있다(특별히 묵시적인 예수상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