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Rainer Albertz, "Monotheism and Violence" (2009)

진실과열정 2011. 9. 3. 05:17

 

Rainer Albertz, “Monotheism and Violence: How to Handle a Dangerous Biblical Tradition,” Jacques Van Ruiten and J. Cornelis de Vos eds, The Land of Israel in Bible, History, and Theology: Studies in Honour of Ed Noort (Leiden: Brill, 2009): 373-87.

 

*독일 뮌스터 대학의 석좌교수인 (현재 은퇴) 라이너 알베르츠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종교적 대립 현상 - 특별히 9/11을 기점으로 재주목을 받게 되는 폭력적 유일신주의 - 을 성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저술한 [이스라엘 종교사]의 주된 흐름과 유사하게 진행하면서, 고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그 발전 과정을 역사비평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일신종교의 폭력성에 대한 성서적 인과관계와 신학적 비평을 통해서, 현대에 발생한 성서 전승의 오남용에 대하여 신학적인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The Origin of Israelite Monotheism

l  학자들의 최근견해들: 성서적 유일신신앙은 모세부터 시작하지만( 20:2-4), 성서전승에 대하여 도전하는 최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포로 전기는 종교적 환경에 주목할만한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았던 다신론적 종교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왕조 후기의 일부 과격한 소수집단이 유일신주의를 이끌었지만, 포로기 전후에서조차 이러한 유일신신앙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   고고학: 야훼와 함께 다양한 ()신들의 숭배 – kuntillet Ajrud, Khirbet el-Qom

(2)   오경의 연대변화: J의 후대설정, 십계명(7-6세기), 계약법전(8-7세기)

(3)   종교에 대한 벨하우젠 재임용:

è  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 유일신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유독 이스라엘만의 예외적인 발전이 있다. 포로 전기의 이스라엘은 다신론적 경향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와는 다른 다신론신앙이었다. 두가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특성:

(1)   야훼: 북아랍 사막산에서 나온 신으로, 가족력(만신전 무소속)이 없다; 가나안의 엘과 동일시되면서, 아세라와 가나안 만신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야훼의 천상회의는 이름이 없고 단지 만군(Zebaoth)”으로 불려짐( 6:5); 이는 야훼가 신들의 특성을 흡수한 것처럼 보임; 따라서 만신전의 신들은 야훼의 아들들이 아니라, “/엘룐의 아들들로 남겨진다( 29:1; 82:6); 야훼는 무자식이다(effective solitaire position of the earlier periods); 이러한 사항이 이후에 야훼 유일신 종교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376-77);

(2)   독특한 관계설정: 야훼는 대규모그룹과 인격적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엘로헤 이스라엘은 삿 5:3,5에서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202번이나 등장한다; 고대근동에서는 신은 소규모(개인이나 가문, )에 제한되었다(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 신은 국가신이기도 하다; 모압석비와 민 11:1,11 비교); 한편,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는, 혁신적인 해방 사건에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사건은 그룹의 내-외적인 정체성을 부여한다); 일단, 국가이전에 야훼는 부족을 돕고 권력화를 억제하는 신으로 활동한다( 5; 8:22-23).

 

2.     Syncretistic Extensions of the Yhwh-Religion and Violent Counteractions

l  왕권은 야훼신앙을 혼합시켰다; 사회의 계층화는 만신전의 야훼를 만들었다; 야훼는 백성의 신이 아닌, 왕의 신이 되었다( 2; 삼하 7); 또한 다른 곳이 배제된 예루살렘이 부각되었다( 46; 48); “Yhwh’s elevation to the king of gods (Ps 47:5; 95:3) became – although a syncretistic element – an important prerequisite of monotheism.”(378) 왕들의 정략결혼으로 인한 외교적인 혼합주의는 요시야 전까지는(왕하 23:12) 크게 문제화되지 않았다(왕상 16:32); 한가지 예외라면, 야훼-바알 혼합주의에 대한 폭력적 반응이 있었다는 점이다.

l  오므리가 북왕국의 왕위를 찬탈하고 사마리아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며(왕상 16:24), 이웃나라들과 정략결혼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한다(31); 카르카르전투의 기록은 북왕국의 국력을 보여준다(853); 사마리아 왕궁에 므깃도, 이스르엘, 하솔과 같은 성채를 세웠다; 군사적 경제적 변화는 곧 사회적 변화를 일으킨다; 대지주현상(왕하 4:1), 토지찬탈(왕상 21:1-20); 아합이 야훼 신앙을 핍박한 것은 아니다 – dyotheism (왕상 18:21); 결국 사회적으로는 이방 여인의 종교 때문으로 평가받는다(왕하 9:22);

è  결국 (발전의 음지에 의한) 사회적 갈등과 명백한 이방의 종교 유입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엘리야-엘리사가 이 운동의 시초이며(북왕국의 동부에서 출현, 이곳은 덜 발달된 야훼 신앙이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던 지역이다: “Here, Yhwh’s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people and his original solitaire position was probably remembered more lively than in the capital” (380)): 결국 야훼 만을 위한 전쟁이 불의와 이방의 침투라는 문제와 결합해서 나타난다: 이후 예후의 등장으로 피비린내 나는 오므리 왕조와 바알 종교 정화 작업이 진행된다(왕하 9-10): 이는 야훼와의 관계가 종교적 광신주의와 연결된 최초의 장면이다; 한편, 이는 국제적 고립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예후는 더 거대한 왕국인 아시리아에 복속되고(Black Obelisk of Salmaneser III), 결국 아람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3.     Exclusive Veneration of Yhwh as Re-Education (8-7세기)

l  덜 폭력적; 문서예언자들의 등장;

l  호세아-역사에 기초를 둔 사랑의 관계(exclusive)로 구체화함; 따라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신실한 관계를 깨뜨리는 것(“ungrateful unfaithfulness and undignified whoring,” 381)으로 해석함( 1:2; 2:4-15; 3:1-4; 5:4); 바알이란 단어를 비하함; “drawing the ideal picture of a distinctive monolatric Yhwh religion, Hosea offered his contemporaries the possibility for defining Israel’s identity by religious means facing a situation, when Israel’s political identity would have been dissolved.”(382)

l  히스기야-호세아의 예언성취로,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대책마련; “so they initiated the new instrument of a religious legislation in order to carry through a more monolatric shape of Yhwh-religion according to Hosea’s ideal.”(382) 계약법전 기초( 20:23-23:19)로 개혁단행(왕하 18:4)과 종교교육시행( 22:19; 23:13; 20:14) -> 타성소의 멸종과 함께, 유일신주의의 폭력성이 법률화 되었다(the violence of monotheism was sublimated by law and transferred into a form of religious education, 382).

l  므낫세 시대의 시리아-바벨로니아 종교 침투: 천체숭배(왕하 21:5; 23:11-12; 19:13; 32:29; 1:5); 몰렉 제의(왕하 16:3; 17:17,31; 21:6; 23:10; 30:33; 7:31; 19:5; 32:35; 16:20-21; 20:31; 23:37,39); 샤마쉬(왕하 23:11); 아닷-밀키(왕하 17:31); 하늘 황후( 7:18; 44:15-19)

l  요시야: 히스기야와 같이 법률적 근거로 종교개혁 시도( 12-26); 예루살렘 중앙화와 모세의 법률-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았다(왕까지도 [누구에게?] [?] 복속되는 수준이다: “The sanctions introduced in the Josianic reform were mostly directed to the inner enemy” 383); 대대적인 종교개혁(왕하 23:5,7; 23:4,6,11-12; 23:15-18); 13장의 사형에 처하는 벌-내부적 정화운동이었다; 또한 신명기 법률은 교육적 의도가 있었다( 6:4-5; 5:6-21); 국제적인 조약 사항을 야훼화의 친밀한 관계로 국한시킴으로써, 개혁자들은 “created a new instrument of religious self-commitment”(384); 외형적인 개혁뿐만 아니라, 모세의 토라를 준수한다는 내면적인 종교적 성향으로도 얼마 정도 기여하게 됨;

è  예후 개혁 => , 교육, 자기헌신의 차원으로 내면화: => 유일신운동

 

4.     The Breakthrough of Monotheism

l  왕조 멸망 이후 유일신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방에 맞서 신앙전승은 유일한 세력자로서 야훼를 높인다( 41:1-5,21-29; 43:8-13; 44:6-8; 4:35,39; 삼하 7:22; 왕상 8:60); 그러나 이러한 우주적 유일신신앙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국력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운영하는 야훼로 인식이 전환된다( 46:1-2; 47); “The confession of universal monotheism did not abolish Israel’s specific relationship to Yhwh, but it obliged Israel to take a serving and helping task for the benefit of all nations [Isa 42:1-4; 49:1-6]. Thus the confession of monotheism, rightly understood, did not include violence against idolatry, but the resistance against the self-idolizing political power.” (385)

 

5.     Responsible Use of the Monotheistic Confession

l  The monotheistic aggression was turned to the inner enemy. (386)

(1)   야훼 숭배 강조에 무게가 있지(“the undivided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one God,”), 다른 종교의 거부에 있지 않다. 부정적 접근보다 긍정적 접근을 강조하는 해석

(2)   폭력적 수단은 특정 기간에 국한되었다; 즉 사회적 정치적 이익이 점철된 시간이었다; 또한 폭력은 외부적인 방향이 아니라, 내부적인 숙청이었다. 이후에 폭력적 방법보다는 법률, 교육, 종교적 헌신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3)   포로기 이후에 미력한 존재 속에서 그들은 야훼 유일신을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패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선포되는 야훼 유일신과 차원이 다르다;

“Therefore we should never give it(monotheism) up but control it.”(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