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에베소서 강해-2] "바울의 인사"(1:1b-2)

진실과열정 2010. 6. 18. 12:52

꼼꼼하게 읽는 에베소서(3)-찬송가 495장 


 

바울의 인사말(1:1b-2)

“신앙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바울 사도’라는 아주 짧은 자기소개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인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편지는 상대방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에베소 교회입니다. 오늘은 1b-2절을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도록 합시다.

 

1. 성도들(동그라미)

1b절:“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일단, “성도들”에 동그라미를 합시다. 그리고 “에베소”와 “신실한”에 밑줄을 쳐봅시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하노니”엔 괄호()를 하시기 바랍니다. 괄호를 치는 것은 원어에는 나와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볼 땐 이상하겠지만, 사실 “편지하노니”란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쓰고 있는 사람도 편지라는 것을 알고, 받아서 읽는 사람도 그것이 편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고 있다’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통상적이기 때문에 원어에는 없지만, 우리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말 성경은 ‘편지하노니’를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을 보면 이 말이 작게 나와 있습니다. 작게 나온 것은 원어성경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기 이전에, 먼저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더욱 깊은 내용까지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 시간은 그런 일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일종의 전문 요리사입니다. 얼마전 복요리를 먹다가 사경을 헤맨 연기자 소식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복요리 전문가가 요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요리 전문가는 다른 누구보다 피와 땀을 흘려 그 요리를 배우고 익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요리한 음식은 믿고 먹을 수 있는 겁니다. 복을 어떻게 손질하고 다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도 됩니다. 단지 믿고 먹으면 됩니다. 복요리에 대한 비유가 설교에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목회자가 가이드하는 대로 말씀을 꼼꼼하게 읽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피가 되고 살이 되면 되는 겁니다. (언젠가는 ‘성서연구반’도 만들어서 깊이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성도들’에 동그라미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아무래도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 이 두 개에 동그라미를 쳐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이렇게 둘을 생각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서로 돌려볼 수 있는 편지, 다시 말해서 ‘회람서신’을 종종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나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은 둘로 나누어서 편지를 씁니다. 즉 주된 대상은 고린도교회이지만, 주변도시의 성도들도 돌아가며 읽으라고 말합니다(고전 1:2; 고후 1:1). 그래서 에베소서도 그렇게 둘로 나눠서 보는 거죠.

   물론 똑같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꼼꼼하게 말씀을 읽는다고 할 때, 이것을 잘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위대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헬라어와 같은 전문적인 내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헬라어를 보다 정확하게 읽어내면,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에베소 교회에게만 보내진 것입니다. 많은 유력한 영어성경과 우리말로된 쉬운성경이 바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신실한]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쉬운성경이 정확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틀렸네! 그건 아닙니다. 쉬운성경에도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도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그리스도를 믿는’은 반대로 정확하지 못합니다]. 어렵지요? 쉽게 생각해봅시다: Good morning을 어떻게 번역하시겠습니까? 굶었니/좋은아침/안녕? 번역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글자자체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태도는 위험합니다. ‘말씀보존학회’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경자체가 번역된 것인데도 킹제임스버전만이 유일한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옆으로 샜는데, 다시 돌아옵시다. 그래요.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성도가 무엇을 말할까요? 왜 교회라고 하지 않고 ‘성도’라고 했을까요? 사실 바울 사도가 쓴 서신중에 비교적 초반부에 해당하는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가전서의 경우엔 ‘교회’라고 쓰고 있습니다. 처음엔 교회라고 썼다가 언제부터인가 바울은 ‘성도’로 불렀다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목회철학이며, 그를 감동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성도’가 무슨 뜻입니까?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분들에게 뭐라 부를 것이 없으니, ‘성도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도’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성도’라고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성스러운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에 성령님이 나오는데, 원어로는 거룩한 영입니다(holy spirit). 그 거룩함이 바로 ‘성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도님 대신에 ‘거룩하신 분’이라고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열에 열 모두, ‘아! 왜 이러세요’할 것입니다. 바울이 어느 순간부터 편지를 쓰면서, ‘어느 어느 교회’ 대신에 ‘성도들이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이들이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의 사람들이 정말로 ‘거룩한’ 것일까요? 우리가 다른 서신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바울이 ‘성도들이여!’하고 불렀던 모든 교회는 한 마디로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엔 음란이 있었습니다(고전 5:1). 그래도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보교회엔 분열이 있었습니다(빌 4:2). 그래도 역시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우상숭배(5:5)와 방종한 삶(5:18)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성도’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신앙의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처음엔 ‘교회’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썼다는 말은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이유라는 것이 순전히 칭찬을 하기보다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교리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겼든지, 윤리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겼든지, 어찌되었건 교회가 교회로써 잘 굴러가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대상을 ‘문제투성이’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극존칭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발견될수록, 바울은 그들에게 대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이런 문제투성이들!” “도대체 뭘 배웠어?” “정말 믿음이 있기나 한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성도/거룩한 이들이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냐면,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보시면서, ‘게바’ 곧 반석이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보십시오. 언제나 감정적이며 즉흥적이고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반석이 되어서 외친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행 3:6)

   바울 사도 역시 에베소를 대하여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들어보십시오(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할렐루야!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성도’라 부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성도’로 부르신 것이며, 바울이 그들을 믿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거룩한 자여!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격이 개떡 같은 나를 성도라 부르시고, 입술이 더러운 나를 거룩한 자라고 부르십니다. 생각이 되먹지 못한 나를 성도라 부르시며, 행동이 바르지 못한 나를 거룩하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성도’는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들었던 뿌리 깊은 말이었습니다; 출 19:6. 열방의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더 말씀에 집중해봅시다. “에베소에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이란 내용을 봅시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에베소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는 말 그대로 서울의 강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말해서, 우리나라의 중심이 서울이고 또한 서울의 중심의 강남이라고 한다면, 바로 에베소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에베소엔 수만 명이 모일 수 있는 극장도 있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뽑힐 만한 거대한 여신상이 있었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가 모두 에베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인 세력이 강력한 곳이 바로 이곳 에베소입니다(그래서 에베소서는 특별히 영적전쟁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가 바울의 선교전략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란노서원).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먹고 마시는 것, 생활하는 모든 것이 기독교적인 것이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2:2). 바로 이러한 세계 속에서, 믿음을 지켜나가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의 환경은 오늘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나요!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놀라운 비결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입니다. 이것은 원어로 외워둘만합니다: “엔 크리스토스”(in christ)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가져야할 기초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그들은 ‘에베소라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시에 ‘엔 크리스토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환경, 곧 에베소에서 살고 있지만, 바울은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까 쉬운성경이 ‘그리스도를’이라고 번역한 것이 덜 정확하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스)라는 말을 엄청나게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다음에 볼 1:3-14까지만 해도 거의 매 절마다 ‘엔 크리스토스’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표현을 언제나 많이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3개의 서신들 중에서 유독 빌립보서와 에베소서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힌트! 지금 바울이 어디 안에 있지요?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엔 크리스토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4:1) 이것이 바로 거룩한 신앙으로 이끄는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지금 주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이 ‘성도됨’의 일차적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울의 인사를 들어보십시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지하 감옥 안에서 쇠사슬에 메여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거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은혜와 평강’에 동그라미를 칩시다. 이 시간 우리는 신앙인의 멋진 세계관을 배웠으면 합니다. 우리의 인사말은 무엇입니까? 몇 년 전에 히트친 인사가 있었지요: 부자되세요! 대박나세요! 이런 광고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느 누구할 것 없이 다 따라했습니다. 왜요?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사말에 담겨있는 세계관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황금만능주의입니다. 돈이면 만사 오케이라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돈이 생겨난 이후로 인간을 지배했던 사단의 최고의 계략입니다. 오죽하면 히 13:5과 같은 말씀이 생겨났겠습니까? 저는 돈은 잘 모르지만, 한 가지만 알면 된다고 봅니다: 돈은 편리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그 이상으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또 돈이 없으면 불편합니다(좀 더 걸어다니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돈은 편리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돈에 관련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겁니다. (사실 성서를 연구한 학자들이 입을 모아서 동의하는 부분이 바로 이점입니다. 즉 바울은 당시의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인사말과 다르게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은혜와 평강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합니다: 즉 은혜는 죄사함이고, 평강은 관계회복의 결과로 누리는 상태인 것입니다; 2:16)

   은혜가 무엇입니까? 원어로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사실 이 은혜라는 말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례가 깊은 단어입니다. 즉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로 능력이 있고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배려 등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함입니다. 헬라인들도 신들을 알고 믿었습니다. 카리스를 복수형으로 쓰면서 신들이 자신들의 뒤를 책임져준다(후원)는 생각. 그러나 바울은 단수형으로만 쓰면서 오히려 유일한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책임질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카리스는 선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거져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주신 은혜/받은 은혜라고 말합니다(6절).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은혜, 곧 선물은 부족하듯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차고 넘치는/풍족한 은혜로 나온다는 겁니다(7절). 이 은혜가 돈 보다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평강은 또 무엇입니까? 원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평화입니다. 우리가 로마 제국의 표어를 알게 된다면, 이 평강의 도전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제국의 표어는 ‘팍스 로마나’입니다.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 의해서 평화가 주어진다. 그러니 로마에 순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말씀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줍니다. 평화는 강대국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 읽을 때, 천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 말씀은 유독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바울과 함께 로마제국을 선교여행했던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천사의 선포가 말하는 도전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로마 황제가 준다고 믿어졌던 참된 평화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계는 점점 전쟁의 위험으로 연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 그러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발전이 있었던 1900년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목숨이 잃은 시기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학문이 발달할수록 사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져만가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서로에게 누리고 있는 총부리는 더욱 정확해져갑니다. 왜 천안함 사건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북에서 지도체제가 바뀔 텐데, 우리 건드리지 말라 입니다. 왜 우리가 나로호를 발사하는데 열을 냅니까?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니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역사가 발달하면 할수록 지구상에 없어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이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좋은 예가, 창 24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종을 멀리 고향 땅으로 보냅니다. 가는 길에 산적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원하는 며느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대에게 물까지 먹여주는 100점짜리 며느리 리브가를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을 본 종의 고백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평탄한 길을 주시는 하나님”(24:40) 하나님을 섬기니,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이 술술 풀어지는 역사가 바로 평화입니다.

   물론 이러한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밑줄을 ‘좇아’에 치도록 합시다. 이 ‘좇아’라는 말이 애매할 것입니다. 이 말은 ‘부터’(απο/아포)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은혜와 평강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인사말이 이렇게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십시오.

   바로 이것이 찬양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창 49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