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N.P.Lemche_Old Testament b/w Theology and HIstory

진실과열정 2010. 4. 14. 11:15

Niels Peter Lemche, The Old Testament between Theology and History: A Critical Surve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닐스 피터 렘케(1945- )는 이 책을 자신의 전우들(comrades in arms)에게 헌정하였다. 바로 필립 R. 데이비스(Philip R. Davies)와 토마스 L. 톰슨(Thomas L. Thompson)이다. 전자는 "'고대' 이스라엘을 찾아서(in search of 'ancient' Israel)"로, 그리고 후자는 "신화적 과거(Mythich Past)"를 대표작으로 소개한 성서학자이다. 이들의 '전장(war zone)'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바, 바로 이스라엘 역사이다. '역사?' 역사가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본문해석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바로 이 역사야말로 해석해야만하는 일차원적 대상이라는 것이 소위 삼총사들의 주장인 셈이다. 역사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스스로를 '최소주의자(minimalist)'라고 공언하고 있듯이, 이들은 성서 내러티브를 역사로 환원하는 패러프레이즈(보수적입장 혹은 더 나아가 근본주의)뿐만 아니라, 고고학을 장착하여 타협을 모색하는 중도적 견해까지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얼핏보면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이라고 뛰어 넘어가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이것은 신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어떻게 세워야하는가에 대한 '필요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인' 연구라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바로 '모던적 읽기'이다.

 

렘케는 이 책을 통해서 성서 연구의 흐름을 되돌려놓고자 한다. 저자가 가장 중점으로 삼고 있는 주제는 역사이다. 성서가 신학적인 내러티브로 하나의 이야기를 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이후 낭만주의 역사관이 서구를 지배하면서 소위 성서의 역사 읽기가 충실한 방법인양 오용되어 왔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책에서 근본주의적인 문자적 읽기는 무시해버리며(토끼의 반추동물 여부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오히려 역사비평 학계를 주된 타겟으로 놓고 있다. 난 여기에서 엄청 놀랐다. 내가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서 메시지의 일차적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사야 9장에서 언급된 '한 아기'가 (문법적으로도 과거형이므로) 우선은 히스기야라고 생각하며, 기독교 전통에서 결국 메시야 예수로 이해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징검다리를 밟고 지나가야 하며, 각 징검다리의 본래적 의미도 중요하게 여겨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학적 비평보다는 역사적 비평이 내게는 선호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내 생각에는 합리적으로 보였으며,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다른 비평방법도 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역사비평적인 해석가이다.

 

그러한 나에게, 혹은 신학계의 수많은 역사비평학자들에게, 렘케는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그건 순환논리이다!" 사실 이러한 공격은 문학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역사비평을 곱지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 언제나 던질 수 있는 비수였다. 그러한 공격을 다른 사람도 아닌, 렘케가 하다니! 나는 렘케가 역사비평 노선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스펙트럼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렘케는 역사를 초월한, 혹은 (이 책을 읽고나서야 느끼게 되는) 역사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에 대한 '포스트모던적인' 입장을 전파하는, 최소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현재 구약학계의 학문적 논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저자의 말로 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인 것이다). 기존의 논쟁은 보수와 중도의 싸움이었다. 다시 말해서 연대의 상한선 혹은 하한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전장에서, 저자는 '그 선' 자체를 지워버린다. 선 자체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 텍스트에서 가져온 주제를 가지고 (혹은 증명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고) 그 텍스트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순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오류를 품에 안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현시대에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왜 그러한 오류에 빠졌던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핵심적인 문제를 집기로 결심했다. 그 핵심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데, 구약을 신학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역사로 보려했던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 사회의 '만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만용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저자는 확실히 치밀한데, 부제로 비평적 개관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4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From Theology to History)에서 구약학이 신학에서 역사학으로 이동되는 과정을 되집어본다.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실증주의는 역사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100% 신봉하게 만들었다. 신학적 텍스트가 역사적 자료로 이해되는 좋은 예로 저자는 민수기 24:23-24를 들고 있는데, 루터는 로마의 공격을 예언한 문서로, 2세기 후의 일겐이란 (독일!) 학자는 알렉산더 정복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해석의 '역사화작업'을 보여준다(p.38). 그러한 과정에서 성서학이 소위 고등비평의 도구를 통해서 얼마나 더 완벽하게 '역사적인 작업'이 되어가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비록 (독일 학계를 중심으로) 비평적인 입장에서 족장사를 역사에서 배제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성서학은 신명기적 역사 또는 역대기적 역사 등을 발명하게 되는 역사학이 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비평의 결과물은 정당한 것인가?

 

2부(The Crisis for History)에서 저자는 역사비평을 공격한다. 저자는 역사비평이 카드로 만든 집과 같다고 말하면서, 성서 내러티브가 말하고 있는 각 시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역사비평의 '카드로 만든 집'을 무너뜨리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은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핵물리학과 사회과학을 손꼽고 있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깎아 내리고 있다'(p.101). 성서로 국한시켜본다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역사비평의 궁극적 약점인 '순환논리'는 더 이상 합리적인 해석방법이 될 수 없음을 단언한다: "If it is impossible to provide any evidence supporting a certain hypothesis, it is impossible to decide whether it is correct or false, and so it is a false argument."(p.112). 카드로 지은 집, 역사비평이다. 그동안 비평적인 연구서들을 통해서 성서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고고학적 유물들에 대해서도, 저자는 역시 냉소적인 자세를 견지한다(p.122). 그 어떤 것이라도 증명할 수 없는 차원-막무가내 주장같이 들리겠지만-이라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자세이다. 예를 들면, 텔 단 비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the house of David"란 표현은, 다윗이라는 개인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며하지 못한다(p.115). 구약은 바벨론에 의해 두번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바벨론 연대기는 597년의 사건만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외부적인 자료로 구약의 정보를 보충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p.117). 이렇게 볼 때, 저자가 고고학에 대하여 일관된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해석되어진 팩트(fact)에 대한 불신'이라고 하겠다("The results of archaeology are always results that have been interpreted; they are never das Ding-an-sich, in Kant's famous expression.", p.122). 이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역사비평으로 이해되어진 역사적 이스라엘의 헛점들을, 각 시대별로 해체시킨다. 올브라이트와 브라이트를 통해서 확고하게 세워졌던 족장시대의 역사성에 대해서, 반 시터스의 문학적 분석과 토마스 톰슨의 역사적 분석을 예롤 들면서, "족장 내러티브에 나오는 종교와 사회에 관한 정보들을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후 200년까지 어디에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시대로 자리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톰슨의 말과 같이) 정리한다(p.127). 한편, 톰슨의 Mythic Past를 읽으면서, 서문에서 저자가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솔직하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신학계의 지계석이라고 할 수 있는, (올)브라이트의 족장 시대를 해체했기 때문이었음을, 렘케에게서 비로소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p.302). 저자는 출애굽과 광야 사건 역시 역사비평이 잘못 만들어놓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역사비평은 람세스 2세 시대로 확정하고 있지만, 저자의 말과 같이, 그의 무덤은 사해바닥에 있지 않고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p.130). 단적으로 말해서, 출애굽은 일종의 전설로, 구약의 역사가가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 건립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창안해낸 것이다(p.131). 이제 많은 학자들은 정복으로 눈을 돌렸다. 특별히 독일학자들을 위시한 복잡한 전승의 궤적과 미국학자들의 고고학적 유물의 해석이라는 복잡한 이해의 터널을 저자는 비교적 단순하게 해체한다. 일단 외부세력에 의한 무력정복설은 무너진지 오래이며, 후기청동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주거지들은 이전 도시문명에 의한 연속적인 주거문화 양식(retribalization)일 뿐이라고 일축한다(저자는 부록에서 이러한 '장기지속' 역사를 설명한다, p.424). 또한 역사비평에서 내세우는 '하비루'에 대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으며, 단지 아마르나 서신에서 자신의 주인들에게 반역한 사람들의 별칭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역시 부록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만, p.432), 아마르나 시대는 '이집트의 평화 시대'에 속한다는 주장이다(p.139). 독일학계의 대표적인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사사시대 분석, 즉 소위 암픽티오니도 공격의 대상이다. 역사비평이 분석해놓은 중앙성소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너무 많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암픽티오니는 외부의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났다기 보다는 오히려 내분 처리용으로 사용된 적이, 성서본문 자체가 말하고 있다(p.142). 다윗 왕국 역시 찾아볼 수 없다(invisible, p.144). 저자는 핑켈스타인과 실버만의 최근작을 언급하면서, "옛날에" 유다 산지에 돌아다던 추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할 뿐이다(p.146). 분열왕국 역시, 다윗의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분열할 것' 자체가 없었다고 말한다. 비교적 다수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언급하면서(메샤석비 등), 중요한 것은 기록자들이 만들어 놓은 의미, 다시 말해서 역사편찬의 본질적 의도를 간파해야한다고 주장한다(p.151). 포로기는, 내가 볼 땐 추론과 의심만 있을 뿐 결정적인 논증은 없는 것 같다. 페르시아 시대의 주요한 이슈인 고레스 칙령은, Amelie Kuhrt(1983)의 연구를 뒷받침하면서, 구약역사가의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p.158). 중요한 점은 고고학적인 조사결과 인구변화도 발생하지 않으며, 바벨론 문화양식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p.160). 한편, 과연 성전 재건이 516년인가 416년인가하는 가에 대해서 성서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렇게 역사비평 학자들이 자신 있게 만들어 놓은 이스라엘은, 필립 데이비스의 말대로, '고대' 이스라엘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성서를 역사로 읽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혼동시켜놓았는지를 고발한 셈이다.

 

3부(From History and Back to Theology)에서, 저자는 실제 역사 재구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역사비평을 포기하고, 새로운 비평(renewed critical)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저자 혹은 수집가라는 인물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p.170).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세익스피어의 글을 통해서 그를 알 수 있듯이(정말 그러한가?), 본문을 통해서 성서 기록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는 것이다(p.172). 아마도 역사비평의 순환논리의 오류를 인식한 주장인 것 같은데, 그 미묘한 차이를 아직은 실감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역사 재구성을 포기하고, 본문을 통한 저자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개진한다. 일단 저자는 고대사회의 글쓰기의 보편화를, 카렐 반 데 툰(2007)이 들으며 반론하겠지만, 현대의 억측이라고 주장하며(p.176), 특별히 요시야 시기에 신명기적 운동이 발생하면서 글쓰기가 활발했다는 주장들(대표적으로, 슈니더윈드를 들 수 있겠다)에 대해서도 물질적인 증거 뿐만 아니라 구약본문에서도 논거가 전무한 '카드로 만든 집'이라고 혹평한다(p.185). 어찌되었건 렘케는 후대의 성서 역사가가 만들어낸 구조물로 성서 내러티브를 보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고로 역사란 언제나 실패한 이후 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원하고 있다"는 보편적 상황을 역설하면서(p.188), 그러한 차원에서 족장 내러티브가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경에서 저자는 새로운 인류로서 제시하고 있는 성서작가의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고 말한다(p.195). 이렇게 볼 때, 저자는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의 내러티브에서 통일성을 읽어낸다(p.199,206). 특별히 이 통일된 내러티브에서 '가나안 청소'라는 핵심문제가 드러나게 되며, 이는 저자의 위치를 발견하는 단서로 기능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창-열왕기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던 역사가가 사용가능했던 자료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며, 또한 그 작가의 삶의 자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고 주장한다(p.211). 이후로 렘케는 예언문학도 새로운 읽기를 시도한다. 역사비평학자들이 예언서에서 역사적 재구성을 활발하게 이루어놓았던 것을 '카드집'으로 비평하면서, 저자는 오히려 (예레미야 주석을 남겼던) 로버트 케롤의 선구자적인 활동을 높인다. 토라와 신명기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예언서도 같은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데, 바로 모두 '우상숭배'를 초점으로 삼으며 같은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분석한다(p.228). 저자는 이렇게 이들 모두의 작품군들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것으로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p.234). 마지막으로 저자는 성문서를 읽어내고 있는데, 내 생각엔 성문서라기 보다는 시편을 중심으로한 '역사비평 학계의 이스라엘의 종교의 독특성을 벗겨내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저자는 역사비평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종적 분류표'를 제거한다(p.249,251). 오히려 고고학의 증거들은 다신교적인 상황을 반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문서를 중심으로, 종교를 통한 역사적 이스라엘 재구성이라는 논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p.252). 역사비평학자들이 소위 종교진화론을 이용해서 점차 야웨유일신 운동으로 만들어 놓은 주장들에 대해서, 저자는 통찰력 있는 주장을 소개하는데, 바로 그 당시에 고대근동에서 보편적으로 '유일신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p.253). 이렇게 해서 저자는 성서를 새롭게 읽어내려고 시도하였다. 주요한 의도는 역사비평의 '카드집'을 허무는 것이며, 오히려 역사를 정당하게 적용하게 된다면 얻어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들을 제시할 뿐이다.

 

드디어 저자는 구약의 위치를 다시 규정한다. 제4부(Old Testament and Biblcial Theology)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구약이 역사가 아닌 신학으로 읽어내야 함을 강조하는, 렘케의 최종적 주장이 들어있다. 1987년에 있었던 필립 가블러의 강연으로 촉발된 구약학의 새로운 전기는, 가블러가 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나야함을 강조했던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뭍혀버려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으로 오해받았던 것이라고, 과거의 잘못된 길을 평가한다(p.261,303). 그러므로 앞서 지속적으로 저자가 비평했던 역사 재구성의 구약 읽기가 만들어 놓은 성서학이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최근에 레오 퍼듀가 역설했던 것과 같은, "역사의 붕궤"이다. 저자가 이러한 새로운 랜즈를 소개한 이후, 방대한 '구약신학'의 업적들을 비평적으로 평가한 것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이렇게 위대한 거인들의 작품들을 감상하게 된다는 황홀함에 반하여, 너무나 아쉽게도, 이 책의 부제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존 학계의 (특별히 독일학계의) '구약신학'에 대한 비평적 읽기만으로 그치고 있다. 그들에 대한 비평의 주요한 논거는, 특별히 폰 라트를 위시해서 이후로 '역사적으로' 다루어진 구약신학의 본질적 부당함을 고발하는 것이다(p.339-50). 차일즈와 샌더스에 의한 정경비평적 구약신학 역시, 사실은 '역사비평의 후예'일 뿐이라고 비평한다(p.337). 그러므로 대안은 역사를 넘어가서 읽어내는 신학이어야 한다. 대안적인 것으로 포스트모던적 구약신학의 존재를 언급하고는 있는데, 바로 역사적 관점을 포기한 신학이어야 하며, 대표적인 것으로 브루지만(1997년)을 평가한다. 비평적 리뷰를 감상하게 되면, 남는 것은 '그럼 어떻게 해야된다는 것인가?'라고 묻게되는데, 결과적으로 저자는 아직 준비중인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 간략하게 언급하던, '코펜하겐 학파'의 공헌점만을 내세우고 말았기 때문이다.

 

부록으로 제시된 팔레스타인 역사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기존의 여러 내용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렘케는 자신의 연구가, 그와 상당히 비슷한 마리오 리베라니의 연구서보다 앞서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독창적인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점들은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예를 들면, 아마르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복이 아닌 자연적 선택으로 인한 고지대 정착, 국제화가 아닌 지역화시기로서의 철기시대 이해, 팔레스타인 헬라화의 지역적 편차가 심하다는 점 등).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날 학파의 장기지속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텔아비브 대학의 핑켈스타인을 위시하여, 쿠트와 휘틀렘의 초기 이스라엘 연구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첫 단추가 최종적 논점이 되는데, 요약하면, (톰슨의 표현과 같이) '무한반복'(reiteration)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혹은 (저자의 말과 같이) '주기적 흥망성쇠'(cyclic fluctu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간략하게 정리한 그의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위대한 다윗이나 슬픈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사건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도 그러했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건조하게 보일지 모르는 역사적 자세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만들어진'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는 '아버지 세대를 단절하고 새로운 아들의 세대로 새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실존적 이데올로기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역설일 것이다. 그러므로 렘케의 역사를 '허무주의'(nihilism)이나 '수정주의'(revisionist, 유대인학살을 부정하는 역사접근을 말한다)로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처럼, 새로운 주장이 시원함이 있다. 특별히 변치 않는 확고함을 자랑하는 것 같았던 역사비평이 어떻게 공격을 받게 되는지를 오래동안 읽어나가는 길은 자기반성적인 연구임에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과연 '성서학'이란 정체에 대해서 본질적인 의문이 풀어지지는 않았다는 미련이 남는다. 이 책이 비판적 개관으로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초청장만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독일학계가 이루어놓은 학문적 아성에 도전하려는, 덴마크인들의 '욱'하는 모습을 엿보는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구인들의 학문적 싸움의 자리에 제3자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저자가 탈식민주의(오리엔탈리즘)를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소개하면서도, 언어규정도 없는 '고대근동'이란 표현의 남발 역시 자기 비판을 충실하게 하지 못한 한계도 남긴다.

 

책을 읽으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아직도 모던적인 읽기를 고집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남는다. 동시에 데이비드 클라인즈의 이데올로기적 읽기가 떠올랐고, 아직도 역사를 상실한 메시지의 남발의 허무맹랑함이라는 초조함 역시 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본질을 묻게하는 매우 중요한 책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이제 빌 데버의 반격이 어떠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