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비평학 세미나의 첫번째 주제는,
라만 셀던(Raman Selden)의 [현대문학이론개관]입니다.
원제는 A Reader's Guide to Contemporary Literary Theory로, 한글로 번역된 책만 해도 여러 권이 될 정도로, 문학비평이론 분야에서 권위있는 연구서인 것 같습니다. 한글로 4판까지 번역이 되었고(1998년), 원서는 5판까지 출간되었다고 하니(2005년), '현대'이론을 따라가기 위해서 진보는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세번째 책은 교수님이 소개해준 것으로, 이론과 실제를 균형 맞추기 위해서 한국인 학자(이선영)가 편집한 책입니다. 이론분야는 상당 부분 라만 셀던의 책(1985, 3판)에서 의존하고 있으나, 그 이론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면, 구조주의 문학이론에 대해서, 편역자는 조동일의 '<적도>의 작품구조와 사회인식'을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방식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실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도 공헌하고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셀던의 [현대문학이론]에서 여러가지 관점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 부분에서, 내용보다는 본문의 문학적인 '기교'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던 비평가들의 미학정신을 배웠지요. '의미보다는 방식'이 그들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플롯을 짜는데 '낯설게 하는' 전략을 펼쳐서 독자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유도한다든지, 동기부여(motive)를 통해서 실제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배소(dominant)라는 개념을 통해서 어떠한 작품을 다 읽고 나서 크게 남는 그 무엇을 전달하는 최종적인 기법이라든지.. 이러한 점들은 성서와 그 설교에 있어서도 상당 부분 적용이 필요한 기법이기도 합니다. 이미 머리속에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수 있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제법 '낯설게 하는 설교'가 적절히 필요하다고 하겠지요. 이렇게 보면, 예수의 비유(어떤 사마리아인)도 좋은 적용이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 이론"은 러시아 형식주의가 지나치게 미적 유흥을 부각시키는 것에 반발해서 등장합니다. 그들은 문학이 단순한 재미만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책임성 있는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지나치게 음모론에 충실한 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도와 문학 이 모든 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결국 세상의 무지한 대중들은 이러한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러므로 자신들의 해석이론을 통해서 세상의 모순성을 드러내는(게오르그 루카치) 한편, 최종적으로는 깊숙이 정치적 참여를 유도하는 실천적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이러한 마르크스 이론의 기여는, 문학이 세상을 반영해야 하며, 더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는 일종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예언서가 그리스도를 위한 예언의 기능으로 전락한 것을 보면, 다시금 마르크스 이론의 적용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서, 적지 않은 분노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실제 세계에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지며, 토지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세파에 어떻게 쓰러지는지를, 마음 아프게 읽었던 책입니다. 아직도 마지막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아마, 막장에 다다른 가족 일행에게 최후로 닥친 홍수를 겨우 이겨내고, 사생아를 출생한 여인이 음식을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한 노인에게 자신의 모유를 제공하는 장면으로) 마르크스 이론이 제공하는 실제적 파괴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제가 요약 발표하였는데, 마지막에 원문을 소개하도록 하지요.
"독자지향 이론"은, '독자반응비평'으로도 부를 수 있는데, 본문에 대한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읽기를 결정한다는 참신한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이쪽으로 보면 토끼가 보이지만, 저쪽으로 보면 오리가 보이는 모호한 그림과 같이, 텍스트 자체는 아무런 말을 못하고, 독자가 보는 방향에 따라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일 수 있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현상학과 그 이후의 철학자들(후설, 하이데거, 가다머!)의 고민을 거쳐서 숙성된 엄청난 결과물입니다. 이들이 내뱉은 지적이 중요하다고 하겠지요: "의미란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의미를 산출하는 능동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텍스트의 빈틈(gaps)을 메우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볼프강 이저). 사실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지나치게 읽으면, "소설을 쓰네"가 되겠지만, 적당하게 읽어내면 감동이 배가 되기도 합니다(예를 들어, 요한복음 8장에서[사실 이 본문은 비평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예수는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을 처벌하라는 무리들을 뒤로하고 땅에 무엇인가를 씁니다[6,8절]. 그리고는 유명한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7절]. 인클루지오 방식으로 구성된 이 내용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많은 분들이 실제적으로 빈틈을 메우기도 하구요). 어찌되었건, 독자의 중요성은 성서 해석학 분야에서도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스탠리 피시가 특정한 해석 공동체의 독서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에서, 신앙 공동체의 해석 경향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정경성'의 문제까지 분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어설픈 간첩이 억울한 시민을 죽인다"라는 스파이 게임의 유명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 마이클 리파테르의 지적 역시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한편, 신약 분야에서는 독자비평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아직 그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네요. 마지막으로, 독자지향 이론이 전제로 하는 '텍스트 자체가 아무런 말을 못한다"라는 주장에 조금 무리가 있음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짧은 시나 단편일 경우엔 지나친 생략으로 인해서, 그리고 장편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글이던 저자가 '의도한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오리와 토끼' 그림을 독자지향 이론의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사실 텍스트는 그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텍스트는 모호한 오리와 토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은밀히 유도'하고 있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제가 look here라고 써 놓았는데, 우리의 시선의 초점을 그림의 눈쪽이 아니라 부리쪽으로 자꾸만 유도하기 때문에, 점차로 오리로 보이도록 독자는 '훈련됩니다')
"페미니즘 이론"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들은 물론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남성 지배적인 세계관을 해체하기 위해 노력하는 비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Gynocritics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풀이하자면, "여성들의 작품에서 남성과 여성과의 생물학적인 차이점을 찾아내어 여성들의 문학적 재현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여겨지던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인류학의 발전을 통해서 비서구화된 세계를 비교한 결과, 서구사회의 사회적 결과물일 뿐 천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마가렛 미드). 그러므로 더 나아가 정치적인 실제세계에서도 여성들은 하부세계에 억눌려 있지말고, 오히려 '아버지의 법'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줄리엣 미첼). 사실 성서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표면적으로는 남성들의 세계임에 분명합니다. 출애굽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물론 거기에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남자들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 분야에서도 페미니즘 이론은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저 역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특별히 신의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룻기'를 연구하게 됨으로서, 다르게 읽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구약성서 비평학 세미나(2009.9.15)
담당교수: 이 형 원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4학기)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연구
-레이먼 셀던, 「현대문학이론」을 중심으로-
1. 구조주의: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무리한’ 욕망
1) 소쉬르와 대칭구조
구조주의의 출발은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분해서 접근했는데, 여기에서 ‘랑그’란 구체적인 언어행동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적 체계를 말하고, ‘빠롤’이란 실제로 구체화된 언어행동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볼 때, ‘빠롤’은 그 경우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으므로 연구 자체가 불가능한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언어적 체계인 ‘랑그’를 연구하는 것이 당위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기본 체계 대(對) 구체적 용례의 구분법은, ‘랑그’와 ‘빠롤’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소쉬르는 표시적 언어인 기호를 ‘기의’(시니피에) 대(對) ‘기표’(시니피앙)로 나누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서다’라는 의미/개념/언어체계/‘기의’를 위해서 ‘빨강’이라는 표현/표시/구체화/‘기표’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의 가장 낮은 차원으로, 언어사용자에게 인지되는 음을 말하는 ‘음소’에 있어서, 의미를 정하는 중요한/본질적 음소(pin에서 p) 대(對)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음소(spin에서 p)로 나눌 수 있다.
이상에서의 요점은, 언어의 사용은 대립 항들의 짝을 이루고 있다는 구조를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랑그-빠롤; 기의-기표; 중음소-소음소). 그런데 이러한 ‘이항 대립 구조’는 언어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분야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즉,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레위기의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이분법의 규칙을 설명하면서, 복잡한 신화/제의/친족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체계/문법/중음소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2) 구조주의 서술학: 기본 원리를 발견하기 위한 다양한 견해들
이렇게 볼 때, 문학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겉모양보다 기본적인 원리/문법을 지적해낼 수 있는데, 이러한 문장 구성의 규칙을 구조주의적 서술학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어떠한 이야기에서든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연쇄점이 있다고 제시할 수 있다: (1) 프로프식 서술인 (31가지 방식 중에서,) [25]어려운 과제가 주인공에게 주어지다. [26]과제의 해결. [27]인정받은 주인공. [28]가짜 주인공/악당의 폭로. [29]가짜 주인공의 역할변경. [30]악당이 벌을 받다. [31]주인공의 결혼과 왕위등극.
프로프식이 단순한 단점이 있다면, (2) 그레마스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기본 유형을 제시한다: 주체-객체; 송신자-수신자; 조력자-반대자. 또한 (3) 츠베탕 토도로프의 기본 유형도 있다: 균형(평화)-강제(적의침공)-불균형(전쟁)-강제(적의패배)-균형(새로운평화). 보다 복잡한 기본유형으로, (4) 제라드 쥬네뜨는 스토리-담론-서술의 3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한편, 조동일은 현진건의 「적도」를 구조주의 분석을 통해서 제시하는데(이선영 2001:203-36), 기본적인 삼각관계의 연속성, 허위에서 진실로 옮겨가는 구도, 그리고 대칭되는 두 세력의 관계를 통해서, 통속적인 연애소설이 아닌 일제를 거부하고 해방을 지향하는 숨어있는 목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3) 은유와 환유: 수직과 수평, 수평으로 확장하는 것이 문장이고 글이다.
야콥슨은 언어를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 보았다. 수직이란 대체되는 요소(선글라스-안경-돋보기)를 말하며, 수평이란 연결되는 요소(모자-안경-수염)을 말한다. 여기에서 야콥슨은 실어증을 연구하면서, 수직적 차원에서 문제를 보이는 것을 ‘유사성 혼란’으로(안경 외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함), 수평적 차원에서 문제를 보이는 것을 ‘인접성 혼란’으로(안경에 모자와 수염을 연결시키지 못함) 불렀다. 그런데 야콥슨은 이러한 ‘유사성 혼란’과 ‘인접성 혼란’이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던 것이다. 즉, 유사성의 혼란은 환유(A가 B처럼 되다)와 같으며, 인접성의 혼란은 은유(A는 B이다)의 현상과 같다. 이렇게 볼 때, 환유는 때로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을 탄생하기도 한다. 결국,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 중에서 ‘환유’가 문장을 파악하는 양식이 된다고 말했던 것인데, 보다 중요한 것은, ‘문맥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본다면 환유/은유의 관계를 고민할 필요는 없게 된다.
4) 구조주의 시학: 이젠 독자의 언어능력이 중요하다-순수 구조주의에서 탈피하는 분위기
랑그와 빠롤의 이분법 대신에, 노엄 촘스키는 ‘언어능력’과 ‘언어수행’의 구별을 제시하고, 언어능력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을 읽어내는 능력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텍스트보다는 독자에게로). 이러한 촘스키의 주장을 받은, 조나단 컬러는 ‘구조주의 시학’을 제안하는데, 구조라는 것이 ‘텍스트’에 깔려 있는 체계가 아니라, ‘독자의 해석행위’에 깔려 있는 체계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시/문장 이건 독자의 해석 능력에 따라서, 동시도 될 수 있고 서사시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독자의 해석 능력 자체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규칙화할 수 있는가에 물음을 던질 수 있다.
5) 총평: 시대적 야망의 허구성
언어학 연구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는, 그 특징상 엄밀성과 객관성을 주된 무기로 한다. 그러나 빠롤(실제)을 랑그(원리)에 복속시키면서 생생함은 사라지게 되었다. 텍스트의 생생함보다는 ‘만고불변의 흐름의 원칙’만을 찾아내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에, 결국 텍스트 자체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무시간적인 원리를 주장하다보니 역사성 또한 삭제된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실제의 저변에 깔린 약호, 규칙, 체계를 찾아내려는 ‘과학적’ 야심”(이선영 2001:200)은, 인류학 연구를 통해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 서구문명의 시대적 야망의 한계(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2. 후기구조주의:
1) 소쉬르와 대칭구조?: 구조주의의 본질적 문제 발견
소쉬르는 지시어와 지시대상 사이의, 개연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으나(그래서 그러한 기본 틀을 파악하는 것을 구조주의의 임무라고 보았으나), 실상 지시어와 지시대상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바뀌는 관계임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지시어 ‘crib’은 [여물통/침대/오두막 등]의 지시대상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crib>bed’는 또 다시 [잠자는 곳/모판/굴양식장]과 같이 새로운 지시대상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구조주의의 질서정연함이 무너지게 되었다.
2) 롤랑 바르트(다원적 텍스트): 읽지 말고, 즐겨라!
바르트는 문학을 사물의 (완성된) 의미 전달이 아니라 사물의 (과정화 된) 의미화의 전달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대상의 확고한 관계 속에서 제시되는 해석을 권위주의적인 비평이라고 폄하하고는, 오히려 (의미의 올바른 이해라는) 진리의 자리 자체에서부터 자유로울 것을,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즐거움 자체를 누릴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접근하게 될 때, 독자는 닫혀진 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내는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다원적 텍스트가 된다).
3) 줄리아 크리스테바(언어와 혁명), 자크 라캉(언어와 무의식): 언어의 상징적 질서에 대항하자!
인간의 성장에 빗대어 제시된 이론으로, 탄생과 유아기적에는 본능으로만 존재하던 생명이 점차 제약과 관리 아래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반화/체계화’ 되어가는 과정이 서구의 문화라고 진단한다. 그러한 일반화를 크리스테바는 ‘질서정연한 구문’, ‘기호학적’ 이라고 부르고, 자크 라캉은 ‘부권적 법칙’ 혹은 ‘초자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통제된 기호 아래에서 그것은 ‘상징’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결코 본질적인 의미는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관(유아가적 본능)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크리스테바는 그러한 주관적 언어를 ‘시어’라고 제시한다. 한편, 라캉은 체계화된 의식세계를 피하는 은유적/환유적 대치들 속에서 무의식을 발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4) 자크 데리다(해체이론): 기성권위가 그렇게 싫었는가!
데리다는 센터의 원리(존재/본질/진리/실체/시작/목적/인간/신)로 작용했던 서구 사상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앞선 혁명가들과 차이가 있다면, 데리다는 또 다른 센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크리스테바의 본능, 라캉의 무의식). 센터에 대한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정신이 데리다의 해체이다. 이렇게 볼 때, 「실락원」에서의 선악의 구별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선은 악이 이후에 오게 되는 읽기가 되는 것이다. 해체적 읽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씌어진 기호는, 특정 문맥에서 주체의 부재상태뿐만 아니라 청취자의 부재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화자와 청자의 세계를 초월한다). (2)씌어진 기호는 저자의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문맥으로 읽힐 수 있다. (3)씌어진 기호는 어디에서건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정현의 ‘바꿔’)
5) 미국의 해체이론들: 쿨Cooool하게 써먹자!
본질상 낭만주의 전문가들이었던 미국의 비평가들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실용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실제적인 활용성에 뛰어난 미국의 학자들은, 수사적 표현을 통해 직선적 의미를 탈피하고 논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차를 드시겠어요? 커피를 드시겠어요?”라는 질문에, “What's the difference?”라고 수사적 질문으로 대답함으로써, ‘무엇이든 상관없어’라는 함축적 의미를 ‘차와 커피의 차이는 무엇이지?’라는 축어적 의미를 내보이게 된다. 이러한 미국의 해체이론가들로 드 만, 해롤드 블룸, 하트만, 힐리스 밀러, 바바라 존슨 등이 있다.
6) 미셀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언술과 권력): 자리가 말을 결정한다.
언어를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자리에 놓고 보면, 결국 ‘누가’ 말하는가?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는 TV의 권력자들의 말에 놀아난다. 절대적인 진리나 객관적인 지식이 아닌 ‘권력에의 의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세계가 푸코가 발견한 언어의 세계였던 것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외침은 그 때에는 통할 수 없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진리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푸코와 사이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세계를 추적한다. 그것은 바로 (푸코에 의하면) 문화의 ‘보관소’라고 말할 수 있고, (사이드에 의하면) 텍스트의 ‘세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진정한 언술이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강력한 언술만 있을 뿐이다.
7) 총평: 도사인가? 돈사람인가?
구조주의자들의 허무맹랑한 도전에 대하여,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결코 정복될 수 없는 세계(무의식적/언어적/역사적 힘)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들은 오히려 구조주의자들의 세계를 깨뜨리면서 대안을 얻었다. 기호와 상징의 연결을 깨뜨리고,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부정했다. 대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선택했다. 그들은 결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일관성을 개진하였다. (이것을 중국적인 또 하나의 센터라고 칭할 수 있다면,)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요약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들의 실패를 암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이선영 2001:277).
이렇게 현대문학이론을 공부하고 나니, 성서를 접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연구들이 상당 부분 기여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인의 어깨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내가 밟는 모든 땅이 거인의 어깨입니다. 성서가 이름 그대로 'holy bible'이기에, 그 어떠한 비평 방법 자체가 필요치 않다는, 지나치게 거룩한 주장은 말 그대로 '분리주의자'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이 전부가 아닐지언정, 이것이 성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보다 건전하고 발전적인 읽기와 해석을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Bible Study > 구약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2] 룻기 세미나 - (1) "룻기의 문학적 특징" (0) | 2009.10.06 |
---|---|
[구약성서 비평학 세미나-2] "구약성서 해석사" (0) | 2009.10.06 |
[2009-2] 룻기 세미나 - (0) (0) | 2009.09.30 |
[구약성서 비평학 세미나] 계획서 (0) | 2009.09.30 |
Ten Top Discoveries (0) | 2009.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