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2008-2] 성문서 세미나-시편 57편 연구

진실과열정 2008. 9. 30. 18:29

 

성문서의 문학적 연구 세미나(2008.9.30)

담당교수: 이형원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2학기)


“인생의 심연에서 기도로 새벽을 맞이한 다윗의 시편”:

시편 57편에 나타난 비유적 언어와 신학적 메시지의 상호작용에 대한 탐구



1. 서론

    주일 아침마다 지상파 방송(KBS, SBS)에서는 ‘노래’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노래 앞에서 일주일의 고단함을 풀곤 한다. 한때, 월드컵 응원가였던 ‘오! 필승 코리아’는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열정을 드높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놀라운 소녀들’이 불렀던 ‘텔미’라는 노래가, 삶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얼마나 통쾌하게 풀어주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어린 아이들은 흥이 나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콧노래를 부르며, 학생들은 귀찮을 정도로 말려도 귀가 멍할 정도로 이어폰을 꼽고 살며,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세상을 안주 삼아 삶이 묻어있는 노래로 과거를 붙잡는다. 이렇게 노래는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성서는 노래의 기원을 원역사에서부터 언급한다. 음악의 조상이 가인의 후손으로 그려지고는 있지만(창 4:21), 오히려 최초의 인간이 처음으로 발화한 것이 다름 아닌 노래였다(창 2:23)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성서의 통찰이라고 하겠다.[1] 노래는 이스라엘과 함께 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이끌었던 야웨의 위대한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서 불렀던 바다의 노래(출 15:1-18)에서부터, 드보라(삿 5:1-31)와 한나(삼상 2:1-10)가 불렀던 섬세한 아낙네의 노래와, 다윗(삼하 22:2-51)과 히스기야(사 38:9-20)가 올렸던 감사의 노래, 그리고 예언자 하박국(합 3:2-19)과 예레미야(렘 18:19-23)의 하늘을 움직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2] 노래는 이스라엘과 함께 했다. 이스라엘의 노래, 그것은 구원이었고 신앙이었으며 불신이었고 회복이었다.

    우리는 시편에서 그 노래들의 집대성을 본다. 시편은 성서를 대표한다.[3] 누구라도 시편은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시편은 가장 쉽게 열린다. 교회의 예식에 사용되는 찬송에도 시편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주로 학생․청년들을 대상으로 편집된 「많은물소리.org」라는 찬양집에는 759곡이 수록되어 있는데,[4] 그 중에서 직/간접적으로 시편을 배경으로 하는 찬양이 무려 229곡에 이른다. 이것은 30%에 해당하는 수치로, 성서 66권 중에 한 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1.5%), 시편의 영향력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시편을 단지 노래로만 제한해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시편은 노래와 함께, 더 나아가 신앙인의 ‘삶’(psalms)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5] 시편은 다양하고 복잡하며, 화려하고 치밀하다. 시편을 단지 예배의 교독문이나 음조를 붙인 기도로 여기는 것은, 마치 삶을 구속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6] 그러므로 이러한 시편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 소논문에서 시편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을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7] 그러나 필자는, 토마스 롱(Thomas Long)의 주장과 같이,[8] 시편 이해의 가장 근본적인 열쇠인 “그 장르에 맞게 읽어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시편만의 효과적인 수사 형식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시편의 비유적 언어 이해가 신학적 메시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볼 것이며, 그 대상으로 시편 57편을 본문으로 삼고자한다. 연구방법으로는 (1) 본문의 배경을 설정하고, (2) 주석적 접근으로 본문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를 구하며(내용이 무엇인가?), (3) 본문에 나타난 비유적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심층적 의미를 찾아보고(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 (4) 본문의 내용과 전달 방법의 분석이 어떠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 그러한 이해가 결국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의 신앙에 있어서 어떠한 적용이 되어야 하는지를 제안하도록 하겠다.



2. 본론

 1) 시편의 배경은 무엇인가: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건을 중심으로

    시편은 이야기와 같은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학자들은 바늘귀와 같은 공간에도 낙타를 통과시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시편을 어떤 정형화된 삶의 자리로 놓았으니, 이는 결국 시편의 자유로운 날개를 꺾고 그 발을 땅에 묻은 것이라고 하겠다. 시편 57편은 ‘개인탄식시’라는 이름표를 부여받았고,[9] 같은 이름표를 단 날개 잃은 시편들과 함께 분류되어 폴더에 들어가 정리되고 말았다. 규격 봉투 안에 들어간 삶은 곧 생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양식비평의 한계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반대로, 여기 저기 흩어진 자료조각들을 놓고 골머리를 앓거나, 지나치게 비평이전의 태도(무조건적인 기독론적 읽기[10])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양식비평은 시편 이해에 있어 ‘최소한의 조언’ 정도로 여길 대상이라고 하겠다.[11]

    그렇다면, 시편 57편의 배경은 무엇인가? 본문 자체가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는 상황에서 배경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사실 “포로기 이전과 이후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다”는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의 지적처럼,[12] 본문의 내용은 시대를 초월한 삶의 보편성을 닮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57편의 제목은 해석자에게 그럴듯한 재구성을 가능하게 도와준다. 히브리어 본문 [1b]절에는 “, 다윗의 믹담으로, 사울을 피해 동굴 안에 숨었을 때”라는 표현이 있다. 시편에는 여섯 번 ‘믹담’이 나오는데(16; 56; 57; 58; 59; 60편), 그 내용이 한 결 같이 절망의 위기와 확신에 찬 찬양으로 되어있는바, ‘본래는 개인적인 기도였다가 후에 대중적 목적으로 편집된 시편 소모음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13] 한편, 많은 주석가들은 시편 57편의 배경으로 사무엘상 22장과 24장 모두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14] 그런데 삼상 22장의 ‘아둘람’은(1절),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25 킬로미터 떨어진 유다 도시 근방의 성채로(수 15:35), 바로 이곳에 도망자 다윗을 따라서 400 명의 지지자들이 함께 했다고 말하는바, 본문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삼상 23:19 이후의 계속되는 추적 상황의 결과로, 더 이상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는 분위기를 그려내는, 삼상 24장이 더 어울린다고 하겠다. 데이비드 토시오 쭈무라(David Toshio Tsumura)는 삼상 24장을 주석하면서, 1절의 ‘엔게디’(En-gedi, 어린 염소의 샘)가 사해 서부해안 지대로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32 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아인 지디’(‘Ain Jidi)이며, 여기에는 여러 굴이 있어서 오랫동안 일시적인 은둔지로 여겨진 바 있다고 지적한다.[15] 이는 고고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로,[16]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삼상 24장이 시편 57편의 배경으로 잡기에 큰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17]

    보다 자세하게 풀어보자. 질투에 눈이 먼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보이고자,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던 일”은 도망자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삼상 21:13). 비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지만(400명[삼상 22:2]에서 600명[삼상 23:13]으로), 그럴수록 사울의 추격은 집요해만 갔다. 노만 갓월드(Norman K. Gottwald)는 삼상 23:23의 “유다 몇 천 명”(베콜 알레페 예후다)을 유다 지파의 씨족으로 보면서, 대략 70 개 이상의 씨족이 있었을 것이라면서 다윗이 숨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18] 만약 그의 제안이 맞다면, 사울은 말 그대로 ‘이 잡듯이’ 방방곡곡을 뒤진 셈이 된다. 정말 그러했다. 다윗을 죄어오는 사울의 포위망은 점점 좁아졌다. 만약 블레셋 사람의 침략이 없었다면, 삼상 23:24-26의 절체절명의 상황은 ‘다윗의 생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엔게디에 머물게 된 것이다(삼상 23:29).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계속해서 도망했던 다윗이었지만(삼상 23:26), 엔게디에서는 더 이상 도망하지 않고 단지 “굴 깊은 곳”에 숨고 말았는데(삼상 24:3),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절망적이며 자포자기의 상황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사방이 막혔고, 이제는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었다. 그 인생에 깊은 밤이 온 것이다.


 2) 시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석적 이해를 중심으로

    무엇보다도 내용 이해가 우선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논의된 사항을 배경으로, 여기에서는 시편 57편의 본문을 주석적으로 설명해보도록 한다. 우선, 히브리어 본문으로 BHS를 선택했고, 한글성서로는 개역개정판과 필자의 사역을 소개한다. 우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개역개정 성서의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개역개정 성서의 본문은 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침표나 느낌표와 같이 문장을 효율적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기본적인 장치도 없으며, 원문 상에 없는 단어의 경우에 아래첨자로 기록해놓았을 뿐인데 그것도 사실 ‘시적허용’을 무시한 처사라고 하겠다. 시편의 특성을 잘 살려놓은 공동번역 판본이나 새번역 판본이, 성서가 조금 두꺼워지더라도, ‘형식에 있어서’ 보다 낫다고 하겠다.

    이제 BHS 본문과 필자의 사역을 읽어보자. 앞으로 자세하게 논의하겠지만, 사역의 경우엔 MT 본문의 순정성을 인정하고, 본문비평장치의 내용을 가급적 수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시편이라는 장르상의 특성 때문에, ‘시적 허용’(artistic license)이라는 측면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19] 히브리어 본문의 경우에도, 5절과 9절의 경우에서와 같이(한글성서는 4, 8절), 시적인 운율을 위해서 배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소논문에서 본문에 대한 다양하고 세밀한 주석을 나열하는 것은 무리이며 목적에 맞지 않기 때문에,[20] 여기에서는 앞서 언급한 시편의 배경을 이어받아서 삼상 22-24장에 나오는 다윗의 자리에서 본문 이해를 시도하도록 하겠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기도자로 등장한다.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며, 그 결과로 구원하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제목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21] 시의 분위기에 따르면, ‘알다스뎃’은 절망적인 상황에 맞는 장엄한 음악을 뜻하는 용어였을 것이다.[22]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 ‘SOS’(Save Our Soul)를 한 것이라고 하겠다. 1절[23]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나난ןנח은 ‘연민을 느끼다/긍휼을 품다’와 같은 뜻으로,[24] 특별히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의 죽음을 계획한 다윗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 결과로 아이가 죽을병에 걸리게 되자, 다윗이 기도했던 바를 표현하고 있는 삼하 12:22에서도 나난ןנח이 사용되고 있는데(한글성서에서는 “불쌍히 여기사”), 이렇게 표현된 극단의 감정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여러 곳을 피해 다녔다.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인 자신의 가족과(삼상 20:6) 제사장에게도 피해보았다(삼상 21:1). 심지어는 적국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쳤고(삼상 21:10), 아예 천예의 자연적 은신처를 선택하기도 했다(삼상 22:1). 그러나 그 어떤 피난처도 다윗을 보호할 수 없었다. 다윗에게 마지막 남은 곳은, 그가 가장 우선적으로 신뢰했어야만 했던 곳이 되고 말았다(삼상 17:37). 그는 출발점으로 돌아갔고 그곳은 하나님이었다. 시인은 평행법을 사용하면서(아래를 보라), “날개 아래”(베쩰_케나페이카)에 숨는다고 말한다. 다윗에게 있어서 ‘날개’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추측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수준 내에 있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임에 분명하다(이후에 이미지를 다루면서 언급하겠다). 그러나 리처드 E. 프리드만(Richard E. Friedman)은 다윗에게 있어서만큼은 실제적인 면이 강했다고 주장한다. 즉, 다윗에게 있어서 날개란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위협적인 대상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성소였다는 것이다(시 26:8; 27:5; 61:5; 74:7).[25] 물론 이 부분은 역사적인 측면에 있어서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상징의 개인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면이 부각된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다윗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을 후흐הוּה로 불렀다. 이는 ‘파괴/재앙/위협’을 의미하는데(욥 30:13; 시 5:10),[26] 시편에서는 통상적으로 복수형으로 쓰이면서 추상명사로 여겨진다.[27] 그러나 필자는 앞에서 ‘날개’가 그러하듯이, 후호트תוֹוּה 역시 다윗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후호트תוֹוּה에 사용되는 동사가 아바르רבע 즉 ‘지나가다’로 의미를 전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28] 그리고 무엇보다도 2절에 나오는 가마르רמג의 목적어로 잘 들어맞는다.[29] 그러므로 필자는 이를 ‘폭풍’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는 다른 번역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공동번역(‘태풍’)과 JB, NRSV(‘the destroying storms’)가 그러하다. 한편,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는 사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삼천 명의 군사들’이 일으키는 흙먼지 바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삼상 24:1). 두 번째로는 고대 가나안의 신화적인 면에 관한 것으로, 당시에 폭풍 신으로 알려졌던 바알에 대한 은유적 암시를 가리킨다고 하겠다.[30] 이는 후에 ‘영광’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지만, 사울 왕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신뢰했던 ‘바알’에 대한 거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참조 삼하 9:6; 대상 8:34; 9:40).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적은 표면적으로는 사울 왕의 칼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도전했던 ‘폭풍 신’ 바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참 신이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2절, 에케라). 여기에서 다윗은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게’(레엘로힘 엘욘)라고 하며, 곧 ‘(참) 하나님에게’(라엘)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부분에서 다윗은 가나안의 전통적인 신앙의 대상인 바알종교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야웨만이 높으신 참 하나님이라는 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31] 바알이 하늘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의 주인이다. 그 분은 출애굽의 기적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인자와 진리’를 보여주신 것처럼(출 34:6), 다윗에게도 그러하실 것이다(3절).[32] 비록 다윗 자신의 현실은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나타낸다(4절). 자신은 사자의 입 안에 있으며, 타오르는 불꽃(로하팀)이 그를 위협한다. 사실, 이 구절은 상당히 난해해서, 번역본들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앞선 구절인 사자와 연관시켜서 보거나(공동번역, 표준새번역, JB, NRSV) 혹은 뒤 이어 나오는 사람들과 그들의 무기와 연관시키고 있다(개역개정, NIV, NKJV). 필자는 후자의 해석을 선택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다윗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사자와 불꽃 그리고 사람이라는 삼중적인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참고. 시 62:9).

    다윗은 5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영광’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언하는데(케보데카), 이는 11절에서도 다시 반복되는 것으로 시편의 뼈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4절과 6절이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비평적인 학자들은 5절을 후대에 삽입된 ‘후렴구’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33] 필자는 시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기술적으로 조직화되었다고 본다. 즉, 개념적으로는 4절의 위험적인 요소들이 6절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으면서 사상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평행적인 요소들과 반복적인 부분들을 잘 살리기 위해서, 시의 후반부(6절)를 새롭게 시작하는 절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1절부터 4절까지) 간청과 (6절부터 10절까지) 구원/감사’라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5절과 11절의 후렴구이다. 그런데 여기에 ‘셀라’라는 음악적 요소들이 또한 기능한다(3, 6절). ‘셀라’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지만,[34] 본문의 내용에서만 관련해서 볼 때, 유독 적들의 패배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로, 적의 패배만을 놓고 기뻐한다기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신적인 공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35] 그리고 필자는 특별히 6절과 7절의 ןוּכּ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자하는데, 사울이 사람(다윗)을 잡기 위해서 그물을 단단히 설치했다고 한다면(헤키누), 다윗은 하나님을 잡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 때문이다(나콘). 그러므로 4절과 6절은 의미상으로 하나를 이루지만,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는 6절이 새롭게 시작하며 이후에 7절과 연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신뢰한다. 이는 6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그물’(레쉐트)이 앞으로 도치되어서 ‘구덩이’(시하흐)와 의미상 하나의 전체(inclusio)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궤계를 망쳐놓을 것이다! 그것도 곧! (접속사 ו는 생략되고 있다.) 다윗은 날마다 자신을 추적하는 사울과 그 부하들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모래폭풍을 보았을 것이다. 즉, 그의 본능은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시선을 언제나 땅(그물/구덩이)으로 향하게 했지만, 그의 신앙은 하늘을 올려보게 만든다.[36] 그리고 도망자였던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우주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선포하기에 이른다(9절의 ‘만민’[바아밈]과 ‘자연’[발_우밈]).[37]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대변하고(창 15:5), 다윗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성취자임을 다시금 인정한다(시 132:12). 그는 큰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한다(8절의 ‘나의 영광’은 신성모독이 아니다[38]).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다. 그는 처음엔 간청하는 기도로, 그리고 나중엔 영광의 찬양으로, 깊은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했던 것이다.[39]


 3) 시편은 어떻게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 비유적 언어 분석을 중심으로

    이상과 같이 본문의 내용은 다윗의 삶에 비추어서 설명될 수 있다. 이제는 시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 안에서 표현된 ‘비유적 언어’의 기능과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 사상적 비유법을 먼저 다루고, (2) 수사학적 비유법을 다루도록 하겠다.


  (1) 사상적 비유법(figures of thought)

    사상적 비유법은 ‘직유법,’ ‘은유법’ 등의 문학적 장치로 시의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특별히 시편에서는 직유보다는 은유가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기능으로는 ‘치환,’ ‘상호작용,’ 그리고 ‘맥락이론’이 있다.[40]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은유는 일차적으로 ‘치환’의 기능 즉, A를 설명하기 위해서 B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로서 더 쉽고 더 구체적이며 더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상호작용’의 기능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A가 B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치환), A와 B가 서로 관계하면서 새로운 통찰로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상호작용). 그러나 최근에 학자들은 그러한 이해가 표현된 (문학적이면서 문화적인) 맥락 안에서 드러나게 될 때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맥락이론). 우리는 본문에서도 많은 은유법을 찾을 수 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1절의 ‘날개’는 보편적으로 보호를 상징한다. 이는 주로 ‘방어’(덮을 수 있는 날개의 능력에 기초)나 ‘도피’(새의 날음에 기초), 혹은 ‘영적인 차원’(중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연유)도 해당된다.[41]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었다(신 32:11).[42] 본문에서는 도망에 지친 다윗을 품는 아버지 하나님의 넓은 가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4절에 나오는 ‘사자’라는 은유는 성서에서 풍부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자는 무섭고 두려운 대상으로(암 3:8; 5:19), 열두 개나 될 정도로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서 사용된 라바임םאבל은 실제적인 사자로(겔 19:2f),[43] 통상적인 의미로는 “사자의 입으로부터 구출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상징성을 품고 있다.[44] 이는 본문에서도 잘 들어맞는 은유이다. 다윗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표현을, 당시에 즐겨 사용하던 사자라는 은유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6절의 ‘그물’(레쉐트)과 ‘웅덩이’(시하흐)는 사냥꾼의 도구를 뜻한다. 사냥꾼은 아무 곳에나 덫을 놓지 않는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단어를 제일 앞과 제일 뒤에 위치시키면서, 주도면밀한 사냥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이라면, 그러한 완벽한 덫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헛된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에 7:9f).

    다윗은 하나님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비파’(한네벨)와 ‘수금’(베킨노르)을 들었다. 언급된 악기들은 시편 150편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떠들썩한’(할랄)[45] 소리를 내게 된다. 특별히 필자는 앞서 ‘나의 영광’(케보디)이 신성모독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8a절), 왜냐하면 수금과 비슷한 발음에서 시적인 효과를 더욱 나타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케보디/베키노르). 이를 더욱 확장해 본다면, 단지 악기‘만이’ 흥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흥이 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하늘’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게 하며(창 1:1),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낸다.[46] 그런데 다윗은 최상급의 표현으로 이를 나타낸다. 즉, 하늘 ‘위에’ 그리고 구름 ‘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이 높아지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문은 (1) 다윗의 절체절명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사자, 그물, 웅덩이). 그러나 동시에 (2)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간절히 기다리며 확신하는 기도자의 영성 또한 보여준다(날개, 비파, 수금, 하늘, 구름). 이러한 은유적인 상징을 통해서 독자들은 시인의 세계에 더욱 깊숙이 동참하게 된다.

 

 

 

 

 

 

 

 

 4) 시편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합하면서

    이상과 같이 우리는 시편 57편의 배경과 주된 내용, 그리고 비유적 언어 분석을 통해서 입체적인 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떠한 ‘신적 해결책’을 주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합하면서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① 하나님이 구원자이다: 이는 매우 당연하면서 식상한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본문의 메시지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특별히 본문은 고대 가나안 사회에서 통용했던 ‘바알’ 신앙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1절과 10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람’과 ‘구름’은 바알과 함께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에 반하여 다윗은 자신을 구원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그리고 강조적으로 밝히고 있다. 바로 2절에서 보듯이, 구원자는 “높으신 하나님, 참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리로 특징되고 있는데, 이는 인격적이며 인식 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한다(시 43:8; 85:11-14).[49]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늘과 땅’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은 ‘기도’가 그러한 거리를 없애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50] 결국 본문은 세상에 쫓기던 사람들에게 유일한 피난처요 승리의 조건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② 우리는 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에 유명한 연예인의 자살 뉴스는 온 나라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2008년 상반기 자살자는 총 6,048명으로 하루에 36명꼴로 자살한다는 통계가 나왔다.[51] 많은 사람들이 삶의 극한에서 생을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우리는 그 삶을 아끼고 더욱 가꿀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는 다른 피조물들과 차별되는 특권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려는 사울이라는 대적을 ‘사자’와 ‘불’로 묘사하고 있다(4절). 현대인에게 사자와 불이 의미하는 바와 달리, 고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가리킨다. 6절이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방에서 자신을 포위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선택을 해야 한다.


    ③ 기도는 문제를 영광으로 바꾼다: 사방에 옭아매는 대적이 다가오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날카롭게 한다. 하나님이 도우리라는 확신이 그를 ‘새로운 자리’(날개 밑)에 쉬게 한다.[52] 기도는 문제를 영광으로 바꾼다. 우리는 8절에서 이것을 확인했다. 이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사자의 입을 닫고, 타오르는 불꽃을 꺼버리는 하늘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이제 예배를 통해서 확인한다. 예배는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기도자는 역동성을 회복하게 되는 전인격적인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된다.[53]


 5) 시편은 교회공동체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일반적으로 시편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배경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한 ‘시’라는 장르상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시편이야말로 실제적인 삶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시적으로 풍부하고 웅장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시편을 단지 목가적인 차원에서만 노래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동시에 문자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초월한 문학적인 상상력에도 의존할 필요가 있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깊은 굴속에서 성소 안에 있는 야웨의 날개 밑을 꿈꾸었다는 측면은 교회가 어떠해야만 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성도들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넓은 품을 기대한다. 교회는 세상의 모진 바람에 지친 성도들을 따뜻하게 품어야한다. 정죄하는 설교,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 삶과 전혀 관계없는 교리적인 설교는 그러한 성도들을 품을 수 없다. 물론 이런 모든 설교는 필요하지만, 성도들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필 수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8절의 본문을 중심으로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잘 따라가 보면, 새벽기도라기보다는 온전한 철야기도가 부각된다고 하겠다. 사실 요즈음의 교회들은 ‘철야기도’가 없고, ‘저녁기도회’로 대체된 지 오래이다. 본문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다시금 야곱의 철야기도를 회복하기를 요구한다(창 24:26,31).



3. 결론

    본 소논문은 시편 57편을 중심으로 그 배경과 본문의 내용을 파악했고, 그리고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표현된 문학적 기교들을 조사했다. 이어서 본문의 메시지와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적용점들을 제시했다. 연구에 따르면 본문은 삼상 22-24장을 배경으로 사울로부터 도망하는 다윗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시로, 기도문과 찬송시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양한 문학적 기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이저(Weiser)는 본문 연구를 통해서 “이미 소유했으나 아직도 기대하는” 신앙의 자세를 제시한 바 있다.[54]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이미 소유했으나 우리의 삶은 아직도 수많은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얻게 될 삶의 구원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두려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삶을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55] 중요한 것은 두려움 자체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자세일 것이다.

    예배는 이 모든 것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한국교회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배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고민해왔다.[56] 한편 한국적 상황에서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57] 이 시편이 부활절 아침에 사용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58] 이와 같이 이제 한국교회는 진정한 노래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영혼을 치유하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시편을 소개해야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존재의미는 2008년 하반기의 자살율의 감소로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각주


1)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BC; Waco: Word Books, 1987), 70.

2) Bernard W. Anderson, 「시편의 깊은 세계」, 노희원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17-8.

3) Tremper Longman III,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 한화룡 역(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9), 65. 저자의 강조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시편이 구약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이 또한 시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4) 기독노래운동뜨인돌 편, 「많은물소리.org」 (서울: 죠이선교회, 2002)

5) 그러므로 지그문트 모빙켈의 위대한 시편 연구서에서 조차, ‘노래’ 자체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장 정도에 그칠 뿐이다(Sigmund Mowinckel, The Psalms in Israel's Worship Vol II, tr. D.R. Ap-Thma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82-4).

6) 이형원, 「구약성서 해석의 원리와 실제: 사회-문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18-25.

7) 시편 연구사로는 David M. Howard Jr., “Recent Trends in Psalms Study,” David W. Baker and Bill T. Arnold eds., The Face of Old Testament Studies: A Survey of Contemporary Approache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9), 329-368을 보라. 이 글에서 저자는 최근의 경향을 (1) 한 권으로서 시편을 읽으며, (2) 보다 구문론적으로 읽으며, (3) 서로 다른 접근들을 통합하면서 읽는다고 정리한다.

8) Thomas Long, 「성서의 문학유형과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 Hermann Gunkel, An Introduction to the Psalms: the genres of the religious lyric of Israel, tr. James D. Nogalski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98), 121.

10) Augustine, “Christ is Exalted above the heavens,” Quentin F. Wesselschmidt ed., Psalms 51-150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Old Testament 8; Illinois: InterVarsity Press, 2007), 31.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시편 57편 5절의 순수한 문자적 읽기를 통해서, 일종의 어려움에 봉착하고 만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소서.” 어거스틴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낮아지신 적이 있었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야 말로 높아지는 존재라고 설교한다. 점층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어거스틴은 5절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가 낮아지신 적이 있다는 말인가? / 아니오! / 높임을 받으소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가 있던 당신이여! / 당신이 만드신 그 녀 안에서 만들어지는 당신이여! / 매우 당연한 본능을 따라서 젖먹이로 있던 당신이여! / 세상에 속하지 않고 어머니의 품안에 있던 당신이여! / 늙은 시므온에게서 주목을 받고, 과부 안나가 발견한 당신이여! / 우리 대신 굶주리고, 우리 대신 목마르며, / 우리 대신 노중에 지친 당신이여! / 성도들이여! 배고픈 빵, 목마른 샘, 피곤한 길을 들어나 봤는가? / 오, 당신은 우리 때문에 이런 것들을 견뎌냈군요! / 성도들이여! 우리가 잠이 들 때, / 당신은 졸지도 않으며, 이스라엘을 살피십니다! / 결국, / 유다에게 팔리셨고, 유대인들이 샀다고 하지만, 당신은 소유될 수 없나이다. / 잡혀서, 묶이고, 채찍질 당하며, 가시 면류관을 썼고, 나무에 달려, 창에 찔렸고, / 당신은 죽었나이다. 당신은 묻혔나이다. / “하나님이여, 하늘 위에 높임을 받으소서!”

11) 비평이전 읽기의 열정과 비평적 학자들의 통찰을 통합하는 ‘비평이후적’ 읽기의 한 예로 다음을 보라: Walter Brueggeman, 「브루그만의 시편사색」, 조호진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7)

12) John Goldingay, Psalms, vol. 2: Psalms 42-89 (Baker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Wisdom and Psalm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193.

13) Marvin E. Tate, Psalms 51-100 (Word Biblical Commentary 20; Dallas: Word, 1990), 66; D. A. Brueggeman, “Psalms 4: Titles,” Tremper Longman III and Peter Enns eds.,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Wisdom, Poetry and Writings (Downer Grove: InterVarsity Press, 2008), 618.

14) Artur Weiser, The Psalms: A Commentary, tr. Herbert Hartwell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Westminster, 1962), 425; Erhard S. Gerstenberger, Psalms: Part I: with an introduction to cultic poetry (The Forms of the Old Testament Literature; v. 14: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8), 230; Tate, Psalms 51-100, 66; James Luther Mays, Psalms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4), 210; J. Clinton McCann, Jr., “The Book of Psalms,” NIB: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4;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905; Frank-Lothar Hossfeld and Erich Zenger, Psalms 2: A Commentary on Psalms 51-100, tr. Linda M. Malone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70.

15) David Toshio Tsumura, The First Book of Samuel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2007), 563.

16) 다음을 참조하라: William G. Dever, 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2005), 13.

17) 쟁어는 시 57와 삼상 24 사이에 어휘적인 연결점이 있다고 지적한다(Hossfeld and Zenger, Psalms 2, 70).

18) Norman 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1250-1050 BC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9), 277.

19) “Artistic License,” http://en.wikipedia.org/wiki/Artistic_license 2008년 9월 26일 접속. 시적허용은 직접적으로 ‘poetic license’로도 명시되며, 이는 시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 문법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20) 주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각주 12, 13, 14에 나오는 도서들을 기본적으로 참고하도록 한다.

21) 시편에 나오는 음악적 형식을 분류한 연구에 의하면, 11개의 제목 중에서 ‘알다스뎃’에 대한 설명이 가장 부족하다: D. A. Brueggeman, “Psalms 4: Titles,” Tremper Longman III and Peter Enns eds.,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Wisdom, Poetry and Writings (Downer Grove: InterVarsity Press, 2008), 616-8.

22) Hans-Joachim Kraus, Psalms 1-59, tr. Hilton C. Oswald (Continental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529. 다른 견해로 ‘포도원의 노래’(사 65:8)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참조하라(Tate, Psalms 51-100, 73,77).

23) 한글성서를 기준으로 하겠다. BHS는 제목을 1절로 잡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일 경우에는 [ 절]로 표시하겠다.

24) “ןנח,” HALOT, 334.

25) Richard Elliott Friedman, Who Wrote the Bible?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1987[1997]), 182-7.

26) “הוּה,” HALOT, 242.

27) Goldingay, Psalms 42-89, 164.

28) “רבע,” HALOT, 779. 시편의 용례와 같은 구절들을 조사해보면, 물을 건너간다든지(신 3:28; 수 6:7; 삼하 19:37-9), 어떠한 대상물이 지나간다든지(욥 9:11; 시 90:4)와 같이, ‘끝이 나는 것’보다는 ‘지나감(pass over)’의 의미가 부각됨을 알 수 있다.

29) Goldingay, Psalms 42-89, 194. 각주 9번.

30) Frank Moore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1997]), 167, 173, 186.

31) 크라우스는 본래 다윗이 야웨를 언급했지만, 엘로히스트들의 편집의 결과로, 시편의 제 2권이 전반적으로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Kraus, Psalms 1-59, 529).

32) Weiser, The Psalms, 43.

33) Charles A. Brigg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II: Psalms 51-150 (ICC; Edinburgh: T&T Clark, 1907), 37,39; Kraus, Psalms 1-59, 530; Goldingay, Psalms 42-89, 192.

34) “הלס,” HALOT, 756.

35) Walter Brueggemann, 「시편의 기도」, 김선길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89-111.

36) Mays, Psalms, 210.

37) ‘자연’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다른 읽기를 제안하기도 하지만(Hossfeld and Zenger, Psalms 2, 68), 필자는 아래에서 수사학적 비유법(두운법)을 다루면서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이는 시편의 다른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시 36:6).

38) Kraus, Psalms 1-59, 531.

39)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편은 부활절 아침에 사용되기도 했다(Tate, Psalms 51-100, 81). 한편, 여기에서의 ‘새벽’까지도 가나안의 신을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McCann, “The Book of Psalms,” 906)은 지나치게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하겠다.

40) 이영미, “시편의 은유이해,” 김영일 외 17인, 「시편: 우리 영혼의 해부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6), 131-5.

41) Leland Ryken and James C. Wilhoit and Tremper Longman III eds., “날개,” 홍성희 외 3인 역, 「성경 이미지 사전」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247.

42) Tate, Psalms 51-100, 77.

43) Ryken and Wilhoit and Longman III eds., “사자,” 668.

44) William P. Brown, Seeing the Psalms: A Theology of Metaphor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136-9.

45) “ללה,” HALOT, 248f.

46) James L. Mays, Preaching and Teaching the Psalms (Louisville: WJK, 2006), 41-50.

47) Wilfred G.E. Watson, Classical Hebrew Poetry: A Guide to Its Technique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85), 214

48) Ibid., Traditional Techniques in Classical Hebrew Verse (JSOTSup 170;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4), 208.

49) Briggs, Psalms 51-150, 38.

50) Tate, Psalms 51-100, 81.

51) “올 상반기 하루 36명꼴 자살” 연합뉴스 2008년 9월 27일 접속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c%9e%90%ec%82%b4&contents_id=AKR20080926085900001

52) Tate, Psalms 51-100, 81.

53) Patrick D. Miller, “Prayer and Worship,” The Way of the LORD: Essays i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2007), 203-13.

54) Weiser, The Psalms, 428.

55) 그러므로 앞선 바이저의 표현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달리 말한 골딩게이의 자세는(시편 57편의 제목은 “Simultaneously Expecting & Possessing”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하겠다(Goldingay, Psalms 42-89, 191).

56) 「목회와 신학」 2006년 9월호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배”를 주제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57) 조태영, “시편에서 듣는 아리랑,” 「시편: 우리 영혼의 해부학」, 507-33; 손해석․김수연, “잃어버린 3분박을 찾아서,” 「목회와 신학」 (2006, 9), 84-9.

58) 각주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