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2008-2] Did God Have a Wife? (1장: 종교를 정의하고 상황화하다)

진실과열정 2008. 9. 22. 13:46


제 1 장



종교를 정의하고 상황화하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 접근하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가 “종교”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 놀랍게도, 이 분야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글들에서는, 이것들 중에 대부분은 앞으로 제 2장에서 다룰 예정인데, 간단하게 종교를 정의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지오니 제비트(Ziony Zevit)의 「고대 이스라엘 종교: 비교분석적 접근」(The Religions of Ancient Israel: A Synthesis of Parallactic Approaches 2001)이 있는데, 저자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흔쾌히 인정하는 학자로, 이 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보다도 훨씬 “실제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종교라는 현상


만약 종교가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인간 경험의 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차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과연 종교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도저히 셀 수 없는 관념들만 남게 될 것이다. 현대인들 가운데, 인류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의 고전적인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보다 뚜렷한 형태가 드러났다. 이들은 타일러(E.B. Tylor 1871); 로버트슨 스미스(W. Robertson Smith 1894); 프레이저(James G. Frazer 1925); 뒤르켐(Emile Durkheim 1915); 에반스-프리챠드(E.E. Evans-Pritchard 1951); 더글라스(Mary Douglas 1969; 1975); 그리고 기어츠(Clifford Geertz 1966)였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의를 시도했는데, 이들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985) 그리고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1967)와 같은 철학자 혹은 종교철학자였다. 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종교학자”들에 의한 다른 정의들도 내려졌는데, 이들은 마르시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69; 1979); 카바나흐(R.R. Cavanagh 1978); 스미스(Jonathan Z. Smith 1987; 1990); 펜너(Hans H. Penner 1989); 그리고 스미스(Wilfrid Cantwell Smith 1997)이다.

    이들이 주장한 종교관들 가운데 몇은 제비트(2001: 11-22)가 정리했는데, 그 자신은 종교를 지금 여기에 우리와 관련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종교는 신과 능력에 대한 다양하고 상징적인 표현들이며, 적합한 반응으로, 이러한 신과 능력에 대하여 그룹이나 공동체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무제한적인 가치를 매긴 존재라고 심사숙고하면서 확언하는 대상이다(2001:15).


    여기에서 중요한 용어들은 “세계관,” “공동체,” “가치,” “신성,” “반응,” 그리고 “상징”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종교에 대한 다른 설명에 대해서도 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초점이라면, 당연하게도, 신 즉 “초자연적”에 대한 것이며, 그 추진력이라면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ultimate concern)”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개념들을 요약하고 있는 최근의 정의는, 너무나 단순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한스 H. 페너(Hans H. Penner)가 주장한 것이다: “종교는 ‘초인적인 것(들)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언어적이며 비언어적인 구조’이다” (1989:7,8). 페너는 이러한 정의가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것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고로 여기에서 이것을 채택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관련해야 할까? 덧없는 것 이상의 그 어떤 것, 다시 말해서 “궁극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나? 그리고 과연 누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의 종교


“민간 종교”라는 것을 논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보편적인 민중들이 관심을 가졌던 몇 가지 부분들을 좀 더 분명히 해보도록 하겠다. 이들 중 몇은 다소 단조롭게 보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복잡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멋 옛날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1) 생존에 대한 관심. 이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기본적인 관심으로,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긴급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생존”이라고 한다면, 비록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생명에 대한 동물적인 본능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고대인들이 동물들보다 훨씬 더 “철학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그들이 우리가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감정들을 항상 분석하거나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계에 도달해버린 수입에서와 같이,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생존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으며 위험  천만의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존재적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불안정과 불안의 극한에서, 그들은 궁극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멸종이다. 이것은 기근이나 질병 혹은 자연 재해나 인재(人災) 같은 것에 의해서 상당수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의 뿌리와 후손이 완전하게 말소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비-존재의 위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바로 어느 누구라도 아무 때나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쇄랜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말한 “심연”인 셈이다. 고대인들에겐 그것이 세상은 “우호적이지” 않는다는 인식을 통해서 감지한 위협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무질서이고, 혼돈이며, 비록 악하지는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신들조차도 그들을 죽일 수 있었으니, 종종 아무 이유 없는데도 말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영혼 불멸”이라는 매우 후대의 (그리고 비-셈어적) 개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사람(body)이 죽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무엇보다도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냉엄하면서도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2) 자신을 세계와 조화시키는 것. 만약 문자 그대로 모든 상황 속에서, 개인들의 생존이 위협에 처해있게 된다면, 세상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신령한 힘들을 “의인화해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은 “타자,” 즉 신성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거룩에 대한 관념”라고 말하면서 염두 했던 것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신성함”과 “세속”(혹은 불경) 사이의 이분법이 현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전반적인 고대 세계에서 그러한 이분법은 완전히 이질적이고 참으로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개념이다. 종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어서, 예를 들자면, 성서 히브리어에서는 “종교”라는 단어가 없을 정도이다. 인간의 삶은 “종교적인” 관념들과 경험들로 가득 찼으며, 이는 당연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성서는 참으로 다양한 용어를 보여준다. 그러나 종교는 추상화되거나 분석될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고대에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존재가 되는 것인데, 이는 내가 이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자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난해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에 질서와 지혜, 악을 물리치는 힘과 존엄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의미와 목적을 제공할 수 있는 신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잘사는 것이, 단순히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궁극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3) 어떻게 신을 달래주고 그들의 호의를 얻을 것인가. 만약 실제로 신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떻게 개별적인 행위를 통해서 신의 노여움을 피하고 복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영위할 수 있을까? 비록 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해놓지는 않았지만(당신이라면 초월적 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특별한 방식들을 통해서 “신을 돌보고 먹였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a) 신들에 대한 신화를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힘이 있는 그들의 실재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또한 (b) 신들의 초월성이라는 면에 대해서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부지런히 탐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c) 신에게 순종하고, 두려워하며, 더 나아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선물, 제물, 희생제사, 제의, 성소에서의 예배, 기도 그리고 서원의 형식이 요구된다. 그리고 (d) 어떤 경우에서는 경건한 삶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이는 윤리적인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을 뜻한다. 보다 이론적이며 도덕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모든 종교적인 활동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 즉 충심으로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적인 질서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차원과 같이 보다 평범하게 본다면, 이스라엘과 다른 어떤 곳이든지 거의 모든 고대 종교는 신(과 악한 영)을 달래고, 악령의 세력을 피하며, 자신들만의 특별한 축복을 확실히 하는데 직결된다.



“신을 돌보고 먹이다”


물론, 축복은 위에서 암시했던 바와 같이, 생존과 번영과 관련된, 실제적인 유익들에 대한 용어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자신과 자손들의 건강; 물질적 풍요; 재난으로부터의 안전; 가족과 씨족 그리고 민족의 가업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데,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중동 지역 사람들의 생각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는 신분과 명예라는 것. 신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그 이상을 허락한다. 그러나 반대로 전부를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들을 달랜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이것은 추상적으로 신학적 공식화 작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순수한 마음만의” 헌신을 약속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훨씬 더 실제적이며 유효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신들이 아낌없이 주었던 것의 아주 작은 부분을 되돌려 주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희생제사의 의미이다: 음식과 재산 그리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치게 된다. 그러면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 혹은 일들이 잘 풀리게 될 때면 그렇게 보이게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제 4장을 보라.)

    종교에 대한 이러한 실용적인 정의가 우리에게는 원시적이거나 심지어는 격이 낮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종교라는 것이 단순히 “마법”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종교에 대한 정의 자체이다. 혹은 최소한은 그랬다. 그게 얼마나 현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종교가 “멋지기를” 원한다: 아름답고, 미학적으로도 흥미를 끄며, 의식을 고취시키고, 고상하며, “영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깔끔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 종교는, 인류학자인 에일버그-슈바르츠(Eilberg-Schwartz 1990)가 말했던 바와 같이, 다소 지저분하다. 그것은 사실 “야만적”이었다. 잔인하고, 종종 유혈이 낭자하며, 죽기 살기로 임해야하고, 그 결과도 절대로 확실치 않은 것이다. 현대의, 이상적이며, 낭만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그렸던 것들은 팔자 좋은 망상일 뿐이며, 실제를 흐릿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진짜 이스라엘의 종교를 탐구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이다.



“민간 종교”에 관하여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에 대해서 어떤 독자들은 단지 또 하나의 현대 미술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적인 삶에 대하여 물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선입견을 가지고, 이로 인해서 그 유물들의 영적인 측면은 간과하고 있는, 편견에 사로잡힌 고고학자라고 말이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실제로 두 개의 종교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두 개 이상인가?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한 쪽 편만을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나는 이 책이 “민간 종교”만을 주로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바있다. 이 말은 우리가 “공인 종교” 혹은 “국가 종교” 더 잘 말하자면 “책의 종교”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는 정반대의 대상을 다룬다는 뜻이다. 제 2장과 제 3장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구별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이해와 표현에 영향을 끼쳐 왔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이제 나는 “두 개의 차원에서 본 종교”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펼쳐봄으로써 이 논의를 본격화하도록 하겠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소 억지스러운데,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그러한 구별을 인식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인 대조표로서 유용하며, 이로부터 하나의 종합의 차원까지 발전시킬 수도 있다. 내가 몇 년 전(1995)에 임시적으로 제안했던 몇 몇 특성들과 초점들을 여기에 도표의 형식으로 나타내 보이겠다.


“국가 종교”

“민간 종교”

박식한

본문

일반적 규범

신앙

신화

문자적

신학

이념

지성

교의

합리적

정규적 의식

공적인

사회적인

국가적인

국가

윤리

정치적 명령

“성스러움”

정통성

대중적

유물

즉흥성

행습

마법

상징적

종교의식

행동

감성

실습

신비적

관습적 의식

사사로운

개별적인

지역적인

가족

경건

정당한 관계

“속됨”

통상적인 관습

        

    이렇게 극단적인 대조를 나열하는 것에 어떠한 정당성이라고 있을까? 각각의 열이 이스라엘 종교의 서로 다른 해석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규범적일까? 이것들은 어떠한 전체 안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는가? 실질적으로 모든 학자들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을 인정한다. 비록 용어상에 있어서 엄청난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국가 혹은 공인 종교를 한 편에 놓고, “민간” 종교를 다른 쪽에 두고 있다. (아래에서 나는 전자를 위해서 “책의 종교”라는 용어를 차용하려고 한다.)

    나의 주된 관심인, 오른편 열에 나열된 현상들을 명시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용어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 전에 다른 학자들은 어떠한 용어를 사용했는지 간단하게 언급해보겠다. 선택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약간의 비평적인 언급과 함께 말이다. 존 S. 할러데이(John S. Holladay)는 독창적이면서도 널리 인용되고 있는 1987년의 소논문에서, 한편에는 “제정되고, 체제순응적이며, 국가적” 종교가 있고, 다른 편에는 “널리 퍼져있고, 체제와 관계없으며, 지역적인” 종교가 있다고 구분했다. 수잔 애커만(Susan Ackerman)의 선구적인 책(1992)에서는 “대중 종교”라는 용어가 전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을 주로 “야웨 신앙에 있어서 비-제사장적, 비-신명기적, 비-예언자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대안” 정도로 규정했다(1992:216). 신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 정작 그것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부족했다고 하겠다(비록 전반적으로 애커만은 보다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말이다. 제 2, 6, 7장을 보라.).

    라이너 알베르츠(Rainer Albertz)는 이스라엘 종교사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그는 “공인 종교” 혹은 “공인 혼합종교”와 “가족 종교,” “개인적 경건,” “국내의 종교적 다원주의” 그리고 “다(多) 야웨신앙”을 구분하고 있다(1994:19,83).

    케럴 반 데 툰(Karel van der Toorn)의 초기 연구는 “대중적 종교 그룹”을 다루었다가(1994), 후에 내가 가장 유용하게 여기는 “책의 종교”라는 용어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다시 말해서 히브리 성서에 보존된 문자 전승의 차원에서의 정경적인 종교를 뜻한다(1997).

    자크 베르리너블라우(Jacques Berlinerblau 1996)는 지금까지 나온 것들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설득적인 분석을 내놓았는데, 지금껏 진행되어왔던 용어사용에 정확성이 결여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도 “공인”과 “대중” 종교라는 이분법을 수용하고 말았다. 비록 그가 후자(그는 “그룹들”이란 용어를 쓴다; 1996:22)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다양성까지도 강조했지만 말이다.

    오트마르 킬과 크리스토프 울링허(Othmar Keel and Christoph Uehlinger)는 이스라엘인들의 도상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민간 종교 연구에 절대적인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국가 제의”라고 부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가족,” “지역,” 그리고 “국가적” 종교의 차원으로까지 불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연구를 넓히지 못했다(1998:406).

    페트릭 밀러(Patrick Miller)의 획기적인 연구인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The Religion of Ancient Israel 2000)는 “국가 종교”-정통, 이단 그리고 혼합 야웨신앙-와 “가족 종교” 그리고 “지방과 국지적인 제의들”로 대조하고 있다. 마크 스미스(Mark Smith)의 다양한 신들에 대한 개관에서는(2002a) 전체적으로 “대중 종교”를 다루고 있다. 지오니 제비트(Ziony Zevit)의 역작은 다원적인 차원을 간단하게 다루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선택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많은 저자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문제가 없지 않다. 한편으로, “국가” 혹은 “공인”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비록 상호간에 동맹관계에 있지는 않다하더라도, 종교의 설립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국가가 종교적으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제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서적으로 인정되고, 획일적인 형태의 이스라엘 종교가 “규범적”이었다는 지금까지의 모든 주장들은 완전히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대중” 종교로 부른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나 왕궁 안에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지방에서는 널리 퍼졌던 종교적 양태의 한 형식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쪽에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문제의 본질은 이스라엘인들의 “토착” 종교 신앙과 행습이라는 (“혼합주의”가 아닌; 아래를 보라) 다양한 표현들이, “야웨신앙”이라는 항목 아래에서, 중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때라도 다양한 종교의 결합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스라엘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만족스러운 역사를 쓸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왜 제비트가 자신의 690페이지나 되는 긴 논의를 달랑 한 장짜리의 “환원Reductio”이라는 글로 마쳤던 이유이다. 그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다루었던 서로 다른 형식의 자료들의 결과로 얻어진 이스라엘 종교의 다양성은 우주 안에서 조화롭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구성들의 생물심리학적인 환원주의 아래에서 모두 설명될 수 있다(2001:690).


    여기에서 열거했던 문제들을 가지고, 물론 내가 신중하게 좁혀놓았던 초점을 가지고, 나는 이어지는 내내 “민간 종교”의 다소 독단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민간 종교: 방법론 고찰


나는 제 3장에서 어떤 종류의 역사를 기록하더라도 방법의 선택이야말로 근본적이라는 명제를 발전시켜나려고 한다. 왜냐하면 광범위한 부분에서 그것이 연구의 결과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이 도찰할 곳은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에 따라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민간 종교를 밝혀내려는 나의 목적을 알린 이상, 이제는 어떻게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단 말인가? 특별히, 일반적인 종교 연구에 적합한 것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방법은 어디에 없을까?

    제 2장에서, 나는 다양한 전통적인 “학파들,” 그러니까 공시적이고 비교분석적인 “종교사학파”와 주제적이고 규범적인 “성경신학운동”과 같은 접근들을 되집어보겠다. 그런 다음에 나는 그 어떤 접근 방법도 만족스럽지 못함을 논의할 것인데, 첫 번째 것은 너무 관대하고, 두 번째 것은 너무 편협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실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특별히 신학이라는 것이 그러한데,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해명하려는 의도로 가득하고, 더 나아가 종교를 실제가 아닌 관념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종교학자들”은 보다 최근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논의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종교라는 현상은 가능한 것인가?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종교 연구 없이 일반적인 “사회 과학” 이론으로 연구가 가능한가? (예를 들면, 젠센[Jensen 1993]을 보라.) 나는 종교에 관한 온전한 “과학”도 의심스럽고, 보편적으로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어떠한 지배적인 이론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현상”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를 문화적 현상에 대한 독특하고 구체적인 예로서 여기기 때문이다.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역사가로서, 나는 철학과 신학이 오히려 혼동만 가중할 뿐이라고 논증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은 그 자체로 매우 적법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고대의 민간 종교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아무 결과도 내놓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이해를 못하도록 방해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후대의, 현대적인 개념들이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인지세계와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서 나타났던 가장 민속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꺼내기보다 집어넣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의 민간 종교를 그 자체의 방식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규정적인” 것보다는 “기술적인” 것으로 불릴 수 있는 접근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여러 학문분야에서 주도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다른 회의론자들이 이것을 유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없는 “사실”이란 것이 있으며, 단지 사회적 건축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대의 글들은 그 어떤 실제를 반영하지도 않으며, 단지 다른 글들이나 이데올로기, 그들이나 우리들과만 관계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포스트모던의 쓸데없는 말들을 무시할 것이며, 내가 탐구하려는 대상이 역사적인 것이며, 결국에는 존재했었던 실제들에 대하여 기술할 것이다.

    종교 현상학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는 회의주의가 아니며, 그 자체로 종교와도 관련이 없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사회 과학이 직면하는 도전에 관련한다: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이라고 알려진 것을 다루면서 어떻게 실제 세계를 “나타내 보이거나”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러한 사실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물론, 언제나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지식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주관적인 지각력에 기초해서 창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수정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것과는 단절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은 가능한 어떤 곳에서든지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지, 이념적인 공상에 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스라엘인들의 (설령 신앙이 아니라 하더라도) 민간 종교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한 경험적이며, 사실적인 기초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고고학적 자료들을 사용할 것이다.



“종교 현상학”


현상학적인 접근은 종종 “기능주의”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거대 사회 이론보다는 그 사회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현상학적” 혹은 “기능주의적” 접근이라고 표현한 바를 더욱 구체화해보도록 하겠다. 그와 같은 접근은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1) 그것은 이론에 기초하기 보다는 실제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한다.

(2) 그것은 억지로 “재구성”하지 않고 오히려 특유의 사례연구를 시도한다.

(3) 그것은 사회를 “내부로부터” 이해하려고 하는데 - 서민들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가 - 문서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4) 그것은 개별적인 독창성을 주목한다. 거대한 “모형론”으로 발전시키려들지 않는다.

(5) 그것의 대상은 거츠(Geertz 1973)가 말한대로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이지, 불필요한 설명이 아니다.

(6) 그것은 “유기체 모델”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회 조직이 마치 (항상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하부조직”이 상호작용한다는 개념으로) 생리학적 조직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7) 그것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귀납적인데, 즉 특별한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법칙화”를 추구하는 연역법이 아니다.

(8) 그것은 이념의 문제를 피하지는 않지만, 신앙 체계의 정확한 내용이라는 것은 복원할 수 없다고 상정한다. 비록 추론을 통해서 관찰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현상학과 기능주의는 인류학과 인종학 분야에서 아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뒤르켐부터 말리노프스키(Malinowski)를 거쳐 래드클리프-브라운(Radcliff-Brown)에게까지 이른다(레이턴[Layton] 1997:18-39). 이러한 접근들에 대하여 아직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확신 같은 것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말해서 두 개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첫째, 소위 “환원주의”의 덫, 다시 말해서 어떠한 사물이란 단지 그것이 행동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가정에 빠져드는 경향이 존재한다(어떤 이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들 하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명백히 지나치게 단순화로, 심지어는 인간 활동에 대한 풍자만화일 정도이다. 이는 종교의 경우에 더욱 그러한데, 왜냐하면 종교의 초월적인 측면-“영적”이라는 것-을 축소시켜서, 사소하고 의미 없는 활동으로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심리학 분야에서 행동주의가 해왔던 것처럼).

    인간 활동을 설명하려던 (혹은 심지어 기술하려던) 모든 환원주의적 계획들의 근본적인 오류들은 다음의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다. 그 하나는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인데, 예를 들면, “오직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다른 동물들의 사체의 일부나 식물들을 꼭꼭 씹어 먹을 수 있으며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음식 문화가 다양한 문화 속에서 엄청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음식과 음료가 주는 대단한 미적 즐거움을 정당화하는 것일까? 유사하게, 환원주의적인 도식은 불명료하고, 과소평가하며, 혹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종교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상직적인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인간 활동에 대해서 단순히 기술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환원주의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있는데 바로 “결정론”이다. 이것에 대해서 나의 정의를 말하자면, 개인의 행위와 사회-문화적 변화라는 “대의(大義)”는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이지, 이념의 결과 즉 인간의 선택과 목적과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이다. 결정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환경 결정론의 경우엔 문화가 오직 비인격적이고 불변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제약된다고 본다. 이 경우에, 종교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 대하여 도전하는, 우주적인 인간의 예측 가능한 반응 정도로만 여겨지는데, 그것도 주로 기술적인 혁신을 통한 것일 뿐이다.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종교는 단지 “대중의 아편”일 뿐으로, 지배자 계급이 프롤레타리아를 조종하고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하는 속임수라고 말한다. 종교가 가장 진부한 형태로 나타난다면 아마도 그 방식대로 기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 이상으로 고귀한 어떤 것이며 또한 그래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는 고정되지 않으며,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에서 탐구할 것이 바로 종교의 자유롭고, 놀라우며, 흥미로운 측면이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전혀 “설명할” 순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가 실제로 작용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며, 또한 그것의 초월적인 측면도 간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 현상학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을 여기에서 언급해야만 하겠다. 그것은, 엄밀한 “과학적” 방법을 포기하면서도, 실제적인 방법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과 관련된 질문이다. 과거에 있었던 대다수의 현상학적인 접근들은, 단지 종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고, 어느 정도 종교의 경험적인 부분에 “감정이입”이나 호의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당연하게 여겨왔었다. 이들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어떠한 종교의 수행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2) 직관적이고 인상에 의존한 접근에 기반하고 있는, 그러한 “관념주의”는 변호해야하는 논쟁이나 진짜 과학적인 토론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가장 비판적인 것을 말하자면, “종교”을 들겠는데, 나는 이것을 “성스러움에 대한 세속적 이해”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혹은 심지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문을 품는다. 종교는 과학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즉, 실증적인 증거; 원리를 검증하는 것; 그리고 예측하는 것 말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과 경험에 있어서 신비롭고 우연적인 차원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불합리하다”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성을 초월한 것에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무수한 종교적인 경험들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초점을 놓치는 일이다. 나는 저명한 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견해와 함께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종교사가는 ‘세상에서 존재하다’라는 인간만의 뚜렷한 존재론적인 상황으로 불리는 그 무엇인가의 영구적인 것을 잡으려는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969:9).


달리 말하자면, 이해하기 위해서 관찰자는 반드시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최소한 스스로를 “이해에 있어서의 거리” 안에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어떠한 종교 전통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경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혹은 우월함을 가지고 접근하면서, 터득하기란 불가능하다(그런 경우엔, 왜 귀찮게 하는 것일까?). 그러나 관찰자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표면적인 가치만으로 어떠한 특별한 종교의 진리 주장을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만도 없겠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서 다음의 것이 필요한데, 바로 공평하게 비평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는 것은 한편으론 공상가가 되거나, 다른 한편으론 냉소주의자가 될 뿐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의 “과학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만약 우리가 잘 훈련된 탐구를 해내기만 한다면 체계적일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객관성”이라는 주제와 연관해서, 나는 제 3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필요한 균형을 만들어 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접근은 가능한 한 고대 이스라엘 민간의 대부분의 사람들-특별히 히브리 성서에서 제외되었던 사람들-이 가졌던 실제적인 종교적 경험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소생”시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을 다른 것에게 종교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거나와 같은 하나의 사례로서 강제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판단을 유보할 것을 부탁하는 바이다. 아마도 앞으로 쭉 그러하길 바란다.

    나의 첫 번째 목적은 사라진 실제-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종교-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바로 살아남은 문화유물들, 그러니까 우리의 최고 단서가 될 수 있는 “제의적 물질 유적들”을 활용해서 말이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곳에 관해서, 나는 신앙에 대한 최소한의 이론적인 증거라는 이유로 성서 본문에 근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 본문들은 이차적인 자료들로 여길 것이다(제 3장을 보라). 내가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 기록된 역사라는 측면에서) “역사도 없는 사람들”의 생생하고도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는 일인데, 이들을 생각할 때면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12:2)가 떠오르곤 한다. 이름 없고 잊혀진 고대의 평민을 되돌리고, 그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진 목소리를 돌려주고,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고고학이다. 오로지 고고학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가부장적 사회가 침묵하게 만들었던 여성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민간 종교의 “상황”


고고학에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상황에 달려있다. 개별적인 사물은,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가 와는 관계없이, 거의 의미 없고, “생명이 없다.” 만약 그것이 상황에서 떼어져 나온 것이라면, 즉 그것(유물)이 한때 기능했고, 그것에 의미를 둘 수 있는, 그러한 보다 거대한 행동과 문화 구조 밖으로 나온다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고고학자들이 발굴과 기록에 절절 매는 지에 대한 명백한 이유이며, 고고학이 “보물찾기”가 아니라 소멸한 사회 조직이나 삶의 방식 전체를 조각모음 해보려는 시도인 이유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중 종교는 한 때 문화 체계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져왔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소멸되고 말았는데, 바로 그 체계로부터 제거되고 추상적으로 연구되어질 때였으니, 마치 여기에서 개괄했던 많은 저작들에서와 같다고 하겠다. 단지 고고학만이, 평범한 민간인들과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집중하고 있는, “실제 삶”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즉 고고학은 종교가 실제로 기능했던 바를 재구성할 수 있으며, 몇 안 되는 몽상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정말로 있을 법한 일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특별히, 매일의 실제적인 삶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과 행습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1) 자연세계. 첫째로, 우리는 이스라엘(고대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지리적이며 지정학적인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요단 강 서부에 위치한, 다시 말해서 뉴저지 주 크기와 맞먹을 정도의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 지역은 기껏해야 길이가 400 킬로미터로, 남방지역 절반은 광활한 광야이다. 넓이는 가변적인데 48 킬로미터에서 112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우리네 서구인들의 상상력으로 인해서, 그 영적인 의미로 인해서, “실물보다 과장되게” 다가오지만, 사실 아주 작은 나라일 뿐이다. 철기 시대에 있어서 전체 인구는 약 150,000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오늘날엔 비슷한 지역에서 몇 천만이 살고 있다). 거대 도시는 몇 되지 않았고, 그것도 대략 3,000명 정도의 인구밖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평균적인 마을은 겨우 500-1,000명의 인구를 보유할 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주지는 시골이었는데,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다.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은 아마도 2,000명 정도 있었는데, 그것도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야 최고점을 찍었고, 평균적으로는 5,000명을 넘지 못했었다.

    이스라엘은 그 크기에 있어서 하찮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적들의 공격에 취약했다. 이스라엘은 풍요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에 구부러진 곳의 작은 해변을 따라가는 길고 좁은 지역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제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앞서 나갔던 문명에 대해서 항상 뒤처지게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이라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육상 다리”로서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이후의 이스라엘은 종종 유린당했고, 정복당했으며, 그리고 오랜 기간을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역사시대 이래 레반트 해안을 따라서 위치했던 이 지역을 무참히 짓밟았던, 오랫동안 꼬리를 물고 나타났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아모리인, 히타이트인, 후리아인, 이집트인, 블레셋인, 아시리아인, 바벨론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모슬렘, 유럽의 십자군, 오스만 제국 (대영제국과 프랑스를 차지하고). 고래로, 그 어떠한 단일 정부가 400년 이상을 다스려본 적이 없는 지역으로,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유약한 이스라엘-유다 왕국이었다(대략 기원전 1,000-600년). 그리고 그 지역이 완전한 통일을 이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기와 위치가 주는 약점에 더해서, 이스라엘은 교역을 하거나 재정적인 독립성을 보장하거나 혹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는, 그 어떠한 천연 자원도 없었다. 그 땅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으로 인해 지리학자들에게는 아주 매혹적인 실험실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가장 열악한 환경이다. 남부의 사막은 복잡한 기술 덕분에 관개가 가능해졌을 아주 잠시 동안만을 제외한다면 거주가 불가능한 지역이다. 바로 로마-나바티안 시대였거나, 혹은 비잔틴 시대에 수도사가 그랬던 것처럼, 광야가 최후의 피난처를 제공해 줄 수 있었던 시대였을 뿐이다. 국토의 중부와 남부지방은 거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대비를 보여주는 땅이다. 이 지역은 거의 해수면에서 거의 390 미터 아래에 위치한 사해의 황량한 해변에서부터, 해수면에서 1,200 미터 위에 있는 갈릴리의 험준한 산림 지역들에 이른다. 국토의 북남을 잇는 중앙의 “뼈대”를 따라서, 이러한 산들은 이동을 제한하는 장벽이 되었으니, 동서를 잇는 몇 안 되는 자연 협곡을 제외하면 말이다. 고지대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살기 전까지는 밀집지역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도 바로 널리 퍼진 계단식 농경과 수조 건설, 그리고 한 해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샘물의 저장 덕분에 가능했다. 해안 평야는 고대로부터 거의가 말라리아가 발생하는 늪지대였다. 토지의 기복이 심한 내륙지방의 작은 언덕들은(성서에서 셰펠라[Shephelah]라고 함) 기름지고 물 공급이 용이했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시대에는 블레셋인들의 손 안에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초점이라면, 이스라엘의 “산산 조각난 지형”은 그 대부분의 시대 동안에 그 사회와 정치적인 구조 역시 “산산 조각났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빈약하고, 메마르며, 돌투성이의 토양에 더해서, 가장 최적의 지역이라고 해도, 물문제가 발생했다. 요단을 제외한다면 어디에도 그럴듯한 강이 없었고, 그 요단강도 수심이 너무 깊은 나머지 물을 끌어다 쓸 수 없고 쓸데없이 사해로 흘러갈 뿐이다. 다른 곳에는 몇 안 되는 샘물들이 있었을 뿐, 원시적인 기술로는 깊은 우물을 팔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은 전적으로 건식 농업에 집중했다. 그것은 다양한 강우량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사막에선 전혀 내리지 않고 갈릴리 상부에서는 대략 100 센티미터 정도로 다양했다. 그러나 언제나 너무 부족하거나 너무 넘치거나 할 뿐이었다. 힘든 시기와 장소들, 전혀 예기치 못하는 세상이었다. 오월에서부터 십 월에 이르는 긴 여름은 뜨겁고도 건조했다. 비는 겨울 몇 달에만 내릴 뿐이다. 그 와중에 몇 년에 걸쳐 가뭄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러면 주요 농경지역에서의 농사는 흉작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대단한 풍년을 맞이하더라도 곡물의 1/3은 적당하게 저장되지 못했으니, 습기와 부패 그리고 작은 동물들에 의해서 손실되고 말았다.

    경작 가능한 땅과 가용한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다른 천연 자원들은 아예 눈에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산지에는 큰나무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시대에 와서는 이미 산림이 훼손된 상태였다(그러한 과정은 대략 기원전 8,000년경인 신석기 시대에 살던 최초의 거주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구리와 같은 광물은 3,000년 전부터 남부 네게브 사막과 요단 계곡에 묻혀있었는데, 그러나 녹이기 위해 숱이 필요하다는 것을 차치하고, 무시무시한 사막이라는 환경으로 인해서 광산은 격리되었다. 주석은, 구리와 함께 합금해서 청동을 만들기 위한 필수품으로, 아나톨리아 혹은 아프가니스탄까지 멀리 가야 얻을 수 있었다. 트랜스요르단에는 몇 개의 철 매장 장소가 있었지만, “철기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철기를 이용하는 기술은 원시적이었고 역량 부족이었다. 금이나 은, 값비싼 보석이나 심지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만한 광물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빈약한 천연 자원 환경과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 의존할 수 없는 생존방식과 산산 조각난 사회 구조, 그리고 정치적 불안에 대해서 우리가 언제나 염두 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완전한 변방이었다. 국토는 부유한 이웃과 비교할 때 언제나 가난했고, 언제나 국력은 보잘 것 없었으며, 언제나 소멸이 눈앞에 있었다(결국에 일어났던 바와 같이). 이는 어떤 독자들의 마음을 동요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고대 이스라엘이란 고대 근동 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흐릿한 배수(背水)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점은 아주 오랫동안 잊혀져왔었는데, 바로 이스라엘이 문명에 대한 한 가지 기념할 만한 공헌을 제외하면 말이다: 히브리 성서,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인간 운명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비전에 대한 기억 말이다.

    (2) 사회적 정치적 세계. 자연이라는 거대한 “외부적인” 세계에서부터 눈을 돌린다면, 그러한 세계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특별하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용을 했던 점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리는 산산 조각난 지형도를, 서로 다른 무수한 환경적인 분야들 혹은 작은 세계를,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다양성은 이렇게 작은 국토에 대해 상대적으로 엄청난 다방면의 삶의 양식과 문화적 가치들을 양산하고 마는데, 결국 그 어떠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고 하겠다.

    메소포타미아와 비교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즉 1,600 킬로미터 길이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따라있는 광활하고 균일한 지형으로, 기원전 3,000년부터 대규모의 국가 규모의 통합에 이어, 기원전 3천 년대 후반에는 진정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집트는 960 킬로미터에 이르는 나일강의 운명과 맥을 같이했고, 더 나아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벌써 첫 번째 왕조의 파라오가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대략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이스라엘 통일왕국이라는 왕국 수준으로 도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그것조차도 진정한 “국가”라기보다는 발달한 “추장제도”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는데, 인류학자들이 이들의 정치 체제를 정의한 바에 따르면 그러하다. 심지어는,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초기의 미성숙한 연합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그보다 작은 남왕국 유다로 분열하고 만다. 북부는 보다 번영했는데, 그러나 옛 부족 간의 경쟁으로 인해서 갈가리 찢겨졌고, 그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남부는, 북부와 함께 종종 내전에 끼어들곤 했었는데, 다윗 왕조 아래에서 보다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정치적인 상황은 상당히 통탄할만한 것이어서, 성서의 열왕기상하를 기록했던 사람들은 기껏해야 두 명의 왕들만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왕국의 붕궤를 예견했고, 기원전 596년에 바벨론에 의한 파괴로 그들이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양쪽의 정치사는, 흔히 말하듯이 “추잡하고, 잔인하며, 무엇보다 짧은데” 바로 분쟁, 반역, 부패, 빈번한 유혈 암살,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명력있는 국가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하고야 마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왕권제도 자체는 논란거리이다. 심지어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모든 이스라엘”이라는 희망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종종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근간 자체에 위협을 끼치는 정치적인 불안정과 혼란에 대해서 언제나 지각하고 있어야 했다. 과연 누가 그런 상황에서 내일을 계획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사회는 거친 환경에 의해서 생겨난 엄청난 압박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대부분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농업을 기본적인 생업으로 삼았는데, 작은 땅에서 비참할 정도로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였다. 때때로 그들은 토지를 보유한 자유민이기도 했었는데, 다른 때엔 농노나 계약 노동자보다도 썩 나은 수준도 되지 못했으니, 심지어 이따금씩은 (비록 성서의 이상과는 위배되지만) 노예가 되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촌락과 마을에 상인들과 기능공들이었는데, 그러나 이들 상업적인 마을들은 주변에 농경을 하는 주변지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인 대다수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다. 오직 몇 안 되는 대도시에서만 엄청난 성공을 꿈꿀 수 있었고, 기업가나 상속받은 재산에 기초하여 엘리트 사회 계층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극소수의 진정한 엘리트들은 대토지 소유자들 가운데, 예루살렘과 왕궁 그리고 제사장 집단(이들이 바로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북에서는, 수도인 사마리아에 맞춰졌는데, 궁전 기록물의 발굴에서 찾아낸 기록을 통해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로부터, 즉 본문상의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들로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중산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층이 두텁고, 하위 계층이 우세한 것으로, 이론적으로는 “자유로운 남성과 여성”일 수 있겠지만, 실제적으로는 소수이지만 탐욕스러운 상위 계층의 손안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은 기원전 8-7세기의 위대한 예언자의 메시지와 그들이 사회 정의를 외쳤던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들은 “땅의 가난한 자들”(히브리어로 ʿ������nîyîm haʾ������rets)의 가치를 칭송했다.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로, 종종 억압받고 권한을 박탁달하기도 했다. 아모스는 격분했고 몹시 비난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암 8:4-7)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심판의 소리가 나온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암 6:4-7)


미가도 역시 같이 분노한다; 야웨는 선포한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미 2:1-3)


    (3) 가족의 세계. 더 낮은 곳으로 눈을 돌려서 (그러나 근간을 이루는 측면에서) 시골 지역의 사회-경제적 규모와 일상을 살펴본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첫째로, 그들은 부락, 촌락, 그리고 몇 백 명을 넘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가장 최근에 그리고 가장 정교한 인구통계학적인 측정을 기반으로 할 때, 그것은 전체 인구의 80-90 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여기에서 약 백 년 전에 해당하는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인의 80 퍼센트가 농촌에서 살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오늘날에는 2 퍼센트를 넘지 못한다.) 이러한 촌락들 가운데 몇은 이스라엘 역사의 초반부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만 해도 사회는 거의가 오로지 시골이거나 비도시들뿐이었다. 그러나 왕정 기간 동안에 얼마 안 되는 중심 도시의 위성도시로서 새로운 장소가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인류학자들이 소위 “삼단” 계층 구조라고 부르는 패턴이라고 하겠다. 삼각형처럼, 바닥에는 상당히 많은 작은 장소들이 있고, 중간에는 상당히 적은 수의 중간 크기의 장소들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진정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의 큰 장소들이 있다.

    우리가 “장소 형식과 분포”라고 부르는 이러한 패턴은 - 고고학적인 탐사에 있어서 언제나 필수적인 것으로 - 이스라엘의 인구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고립되고 전통적인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기본적으로 농촌지역의 보수적인 성격은, 친족을 바탕으로 한 사회라는 사실에서 더욱 강화되는데, 이는 타고난 측면이라고 하겠다. 젊은이들은 씨족 내에서 결혼하게 되어있는데, 심지어는 보다 큰 가족 수준에서도 이루어졌다. 종종 친사촌간의 결혼이 선호되기도 했다. 오늘날 100-300명 정도의 아랍 촌락에서와 같이, 모든 구성원은 서로가 혈연으로 맺어있었던 것이다. 오직 도시에서만 친족보다는 개인적인 지위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권력의 중심지, 종교권위의 중심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 국가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부터 배제되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여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히브리 성서에서 소중히 여기고 있는 정통 종교의 이상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낯 설은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역사 대부분에 있어서 그러했고, 역사의 마지막 바로 전이었던 신명기적 개혁이 있을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보라)

    더 나아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은 우리가 “확대가족”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대(二代) 혹은 삼대(三代)로 이루어진 가족 그룹으로 15명에서 20명까지에 이르며, 생존하는 늙은 부모와 고모 혹은 삼촌들 그리고 부부와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다. 다른 그룹들은 얼마 정도의 결혼한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 그리고 자녀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사회조직 형태에 있어서 “시가(媤家) 거주”라고 부르는 것으로, 결혼한 아들들이 자신의 아내를 자신의 집으로, 즉 그들의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으로, 거기에서 거주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게 된다. 조상 집은 확대 가족이 점점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는데, 결국에는 음식 저장과 준비와 같은 용도를 위한 공동의 편의시설을 공유하면서 중앙의 뜰을 둘러싸고 있는 몇 개의 집들로 이루어진 가족이 된다.

    최근까지만 해도 중동의 대부분의 가족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으며(“종족 가족”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작은 마을이나 촌락에서 그렇게 한다. 촌락에서는, 몇 몇의 그러한 확대 가족들과 세대 집단들은, 모두가 혈연관계로 똘똘 뭉쳐있는데, 몇 백 명 정도의 전체 인구를 보유한다. 걸어서 갈만한 거리 내에는, 그러한 촌락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역시 친족을 배경으로 하며, 실제이건 상상에 의한 것이건, 같은 부족 조상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유형은 극단적으로 긴밀한 사회를 만들게 되는데, 가족으로 묶여 있으며,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치들을 공유하고, 국가와 같은 외부적인 권위에 순종하기 보다는 씨족이나 부족의 족장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나는 1967년 전쟁 다음 해에 몇 달 동안은 헤브론 구릉지대의 미개발된 아랍 촌락에서 살았었는데, 그러한 전통적 가족생활의 실제를 피부에 닿을 정도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젠 모두 바뀌었지만, 사십년 전만해도 성서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이 정말 다른 세계였다. 그 단순한 일상과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는 규칙적인 일상들 때문에, 그러한 삶이 낭만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촌락의 모든 사람들은 정말로 힘든 삶을 살아갔다는 점이다.

    민족지학적인 정보만으로 충분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성서 본문 연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1985년에 하버드의 동료이기도한 로렌스 스테이거(Lawrence Stager)는 “초기 이스라엘 가족의 고고학”이라는 제목으로 뛰어한 소논문을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민족지학과 함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정착에 관한 당시엔 새로웠던 고고학적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그리고 사무엘서의 배경이 되는 왕조 이전 이야기들에서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스테이거의 이론에 조금 수정을 가해서 사회 구조의 “계층”을 상향적으로 보여주려고 하겠다. 이러한 구조는 보다 도시화된 왕조 시기 동안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1) “아버지의 집”에서 살거나 그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개인들(gever)

(2) “아버지” 그 자신이거나, 핵가족 혹은 “아버지의 집”(bêt-ʾ������v)과 같은 복합 가족의 가장(ʾ������v)

(3) 확대 가족 혹은 씨족(mishp������ḥ������h)

(4) 보다 큰 혈통 혹은 “지파”(shēvet; maṭṭeh)

(5) 전체 “이스라엘 자손”(bĕnê-yiśrāʾēl)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일상생활에 관한 무수히 많은 성서 이야기들은 이러한 가족을 근간으로 한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7장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자. 아이 전투 패배의 책임으로 아간의 불충성을 심판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집하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유다 지파”(shēvet-yĕhūdāh) 전체를 부른다. 그런 다음에 그는 “유다 가족(개역개정은 족속)” 즉 “씨족”(mishp������ḥ������h-yĕhūdāh)을 소집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간의 “가족”(bêt)을 부르고, “각 남자”(ligvārîm) 즉 아간의 모든 가족인 “그의 아들들과 딸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가족의 연대를 증명하는 극적인 (그리고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아간이 사형선도를 받게 되었을 때, 그의 가족 전체가 그와 함께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는 그의 소유물까지도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다. “집단 형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도덕적으로 꺼려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것은 거대한 “가족”인 “이스라엘 자손”(bĕnê-yiśrāʾēl), 즉 전체 백성들의 완전함을 보존시키는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가족-개인이 아닌-은 사회의 핵심이다.

    (4) 한 세대의 세계.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의 일상의 다양한 일들을 이루어갔던, 즉 한 세대에 있어서 보다 더 밀접한 삶의 환경은 어떠했을까? 전형적인 마을이나 촌락의 가옥은 어떻게 생겼으며,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을까? 물질적인 유물들로부터, 삶의 목적이나 의미와 같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을 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제 우리는 전형적인 철기 시대의 가옥과 그 집기들을 상당히 자세할 정도로 재구성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거의 모든 집들은, 심지어 도시 지역의 것도 포함해서, 초기 정착 시대의 가옥 방식이었던 “사방구조” 혹은 “기둥으로 안마당을 둔” 형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가옥 형식은 농업 경제 사회에서 처음으로 발달했던 것이었는데, 그 자체로 일체가 완비되어 있어서, 우리가 방금까지 논의했던 대가족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옥은 탁 트인 중앙의 안뜰이 있고, 그 뜰을 둘러서 세 개의 방들이 U자 형태로 연결되어있는데, 이층을 받치고 있는 칸막이나 돌기둥들로 분리되어 있다. 안뜰에는 화덕 혹은 가마, 부엌살림 도구들, 그리고 작업장이 있었다. 양쪽에 두 개 혹은 세 개의 방들은 마구간으로, 일반적으로는 자갈을 깔아 놓아서 오물을 청소했으며, 종종 돌로 만든 여물통도 있었다. 뒷방(들)은 전형적으로 저장소로 먹을거리와 예비식량 그리고 도구들을 보관했다. 이층은 다섯에서 여덟 개 정도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졌는데, 대가족이 생활하는 장소와 침실이었다. 편평하고 진흙으로 잘 다져진 지붕은 좋은 날씨에 음식을 말리거나 가공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가옥들은 진흙돌로 된 벽에 돌로 기초를 세워서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비교적 쉬운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좋은 단열 효과를 내었고, 시골이나 도시 모두에서 대가족에게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가옥의 평균 넓이는 16 × 16 미터로, 피트로 바꿔 말하자면 한 층에만 850 평방피트의 삶의 공간이 나오고, 이층까지 총합하면 1,700 평방피트가 나온다. 이는 대가족에게는 상당히 작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족지학적인 평가에서와 같이, 한 사람의 생활공간 전체를 위해서 약 10 평방미터가 필요하듯이, 850 평방피트의 위층 삶의 공간에서는 일곱에서 아홉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평균 가족 구성원인 다섯 혹은 여섯 명과 비교할 때 더 넓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 혹은 두 개의 가옥이 모여서 복합 가족을 만들라치면, 대략 도 다른 몇 십 명의 사람들 혹은 “아버지의 집”이 더해지기 마련인데, 그러므로 총합해서 15 에서 20 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수이다.

    우리는, 여성이 많은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던 반면, 사망률이 특별히 유아들이나 어린이에게 너무 높아서 셋이나 넷 이상의 아이들은 성인으로 생존할 수 없었음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이로 인해서 핵가족의 경우엔 기껏해야 다섯이나 여섯 명의 구성원만 있었을 뿐이었다(초기의 평가였던 여덟 명 보다 훨씬 낮은 수치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늙은 세대들에, 결혼한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더한다면(위를 보라), 총합인 15에서 20명의 수치를 얻게될 것이다.

    최근까지 발굴된 많은 가옥들이 잘 보전되고 (모순적이게도 그들이 갑작스럽고 무자비하게 파괴되었을 때가 가장 그러했는데) 그래서 그 도면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들의 집기들은 기술하기가 비교적 어렵다. 사실, 탁자나 의자, 침대나 찬장 등과 같이 우리가 가구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날씨에는 야외의 바닥에서 식사를 했거나, 다른 경우엔 실내에서 낮은 탁자 주변에 모이거나 바닥에서 모여서 식사를 했다.

    의자라는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동할 수 있는 긴 의자위에 앉았는데, 거의는 바닥위에 앉곤 했다. 침구는 낮에는 벽을 따라 쌓아 놓은 볏 더미로 보관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옷가지들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위층의 바닥에서 아무렇게 뒤죽박죽해서 잠을 잤고, 그들이 입은 것을 덮어서 따뜻하게 했으며, 아래층 마구간에 있는 동물들이 내는 열에 의지해서 다소간 열을 더할 수 있었다. 동물들은 다른 방식에 있어서도 효과적이었다. 동물들의 배설물은-수거해서, 짚과 섞어서, 작게 나누어 햇볕에 말렸는데-안뜰의 화덕이나 가마에서 요리를 할 때, 주요한 연료가 되기도 했다.

  

 

    도구들과 가정용품들은 상당히 적었다. 전형적인 가옥에서는 기껏해야 조약한 정도의 요리 그릇들과 소량의 사발과 접시들이 있었을 뿐이며, 사람들은 주로 손으로 식사를 했다. 단지와 항아리들은 물이나 우유, 혹은 포도주를 저장하거나 부을 때 사용되었다. 보다 큰 항아리는 수분이 있거나 말린 음식물들을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다. 토기 형태는 이제는 고고학적으로 잘 입증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기원전 8-7 세기에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삶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청동이나 철로 만들어진 칼들을 발굴했는데, 그렇지만 “식기류”라고 여길 만한 것들은 없었다. 이러한 극소수의 가정용품을과는 달리, 전형적인 가옥에서는 밀가루를 제분하기 위한 돌로 된 분쇄도구가 있었고, 반죽과 빻기 그리고 분쇄 돌들이 있었으며, 소량의 단단한 칼이 있었고, 바느질과 가죽을 다루기 위한 뼈로 된 도구들이 있었으며, 소량의 조야한 철기 농경 도구들이 있었다. 가족이 자신들의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그리고 도자기를 생산했다면, 마치 시골의 누군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시설물들은 땅바닥에 있거나 집밖에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단순한 일을 수행했었을 것이다. 위생 시설이라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옥외의 변소”라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수돗물도 없었다. 난방기구라는 것도 역시 없었는데, 인간들과 동물들에게서 나오는 열이나 요리할 때 나오는 미량의 열이 있었을 뿐이었다. 춥고 비가 오는 겨울 몇 달 간, 이러한 집들은 견뎌내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며,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병에 걸려 살았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집들은 숨 막힐 정도로 뜨거워져서, 사람들은 지붕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

 

 

    촌락이건 마을이건 간에, 대가족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상의 다양한 일들은 성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그들은 깨어나 있는 모든 시간을 각각의 성별로, 어른들과 아이들로 나누어서 보내곤 했다. 일상의 계획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집을 밝혔던 방법은, 만약 그럴 일이 생긴다면, 단 하나의 심지로 된 받침 있는 등불에다 연기 나는 올리브기름을 태워서 집을 밝혔는데, 그러므로 그들은 빛이 처음 비추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고 어둑어둑해지면 바로 침대로 갔다. 아침은 빵 한 조각이었는데, 아마도 약간의 올리브, 계란, 그리고 요구르트와 치즈를 곁들였다. 점심은 조금만 먹었는데, 특별히 들에서 일하는 남자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저녁의 식사는 아침과 매우 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가족들이 먹는 형식의 식사로, 아마도 고기를 넣고 찐 것과 같은 요리에, 계절에 나는 채소나 과일, 그리고 심지어는 가끔씩 (이 경우는 진짜 사치스러운 것인데) 닭이나 고기 약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종류라도 음식을 가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딱딱한 치즈 혹은 말린 고기를 만드는 일이라거나 올리브, 대추야자, 그런 것들을 저장하는 것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러므로 식단은 주로 계절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혹은 풍년일 경우에 어떠한 곡식을 산출해 냈는가에 따라서 달랐다. 밀, 보리, 그리고 귀리는 4-5 월에 수확했고, 포도는 늦여름이 지나야 먹을 수 있었으며, 무화과, 석류 그리고 올리브는 8-9 월에 나왔다. 전형적인 이스라엘 농부 가족은 어림잡아 몇 에이커 정도의 농경지를 가졌고, 열 두어 마리 정도의 양과 염소들, 당나귀 한 마리, 암소 한 두 마리, 그리고 몇 마리의 닭을 길렀을 것으로 보인다. 풍년이 오는 해엔, 가족은 자급자족을 할 수 있었으며, 아마 심지어는 약간의 잉여 농산물을 저장하거나 교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흉작이 있던 해에는, 아주 혹독한 고난을 닥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해 이상이 되어버리면 재앙이 되어버린다. 영양실조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고, 불충분한 식사로 인해서 많은 질병들이 발생했다(그러나 당뇨는 없었다).

 

 

    관절염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십대도 그러했는데, 이는 들에서 구부정하게 서서 고된 노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오랜 시간을 웅크리고 앉아서 곡물을 갈았기 때문에, 오늘날 손목에 구멍이 나는 증후군으로 알려있는 질병에 고생했다. 혹은 그들은 칼슘 결핍에 고생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계속되는 수유 때문으로, 이는 아마도 가능한 한 너무 많은 아이들을 임신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모든 사람들은 치아상태가 좋지 못했는데, 돌바닥에서 갈은 밀가루에 잘잘한 모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반적으로 평균수명은 기껏해야 30 년 정도였고, 여자들은 이보다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어떤 여자가 자신의 임신 기간 동안에 살아남을 수만 있었다면, 그 여자는 40 혹은 그 이상도 살아갈 수 있었다. 50 세 이상의 남자는 “장로”로, 현저하게 장수했다는 점과 ,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얻어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현저하게 시골 지역일 경우에는, 남자들의 일은 주로 들에서 이루어지는 고된 것으로-계단식 밭을 만들기, 쟁기질하기, 씨뿌리기, 잡초를 제거하기 그리고 가지치기하기, 추수하기, 밭으로 도구들을 옮기거나 수확물을 다시 마을로 수송하기 등이 있었다. 밭은 거의 1.5 킬로미터나 그 배나 될 정도로 멀었는데, 그러므로 하루는 길었다. 여름은 뜨거웠고 먼지투성이의 날들이었다. 노동은 허리를 휘는 정도였으며, 당나귀나 황소로 쟁기를 끌게할 때도 그러했다.

    여자들의 일은 주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이루어졌다: 추수를 한다거나, 저장하고, 준비하고 음식을 요리한다(이것이 기본적인 일이다). 실을 잣고, 짜며, 가족들이 입을 옷과 이불 그리고 마루를 덮을 가지들을 만들어낸다. 바구니와 도기들을 만들고, 노인들과 집안에 넘쳐나는 아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이는 내가 보여주려던 내용으로, 가족의 성소와 모든 종교적인 제의나 통과의례를 관리한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여자들의 일이다. 이것은 여자들이 젊고 유능할 경우에 충분히 요구될 수 있는 바이기는 하지만, 어떤 형편이더라도 가족이 책임을 졌다. 그리고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힘든 일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농한기 동안 잠시 여유가 있더라도 그러했다. (그들은 마을의 공동주택에 모였을 것으로,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 잡담을 했을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회교 사원이나 다방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들은 오랜 시간을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일들로 보냈을 것인데, 소녀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도와서 물을 길렀고, 소년들은 아버지와 함께 들판에서 보내거나 가축에 풀을 뜯기기 위해 보다 먼 목초지로 나갔을 것이다(때때로 어떤 경우엔 여러 날이 걸리기도 했다). 놀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아이들은 (만약 그들이 생존하기만 한다면) 빨리 자랐다. 그들의 성적인 인식은 굉장히 빨랐는데, 어른들과 가까이 생활했기 때문으로 그들의 행동을 살펴볼 수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소녀들은 일반적으로 13 세 즈음이 되면 약혼해서 그 다음 해에 바로 결혼했다. 그들은 거의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실제적인 선택권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뿐이었다(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도운 셈이었다). 소년들은 집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을 정도였는데(소수의 큰 마을에서는 가정교습이 가능했을지언정 “학교수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나 자신들의 아버지의 생업을 이어받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특별한 경우에, 그들은 가족 전체를 지키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가족의 존경과 자부심을 지켜나가야 했고, 자신들의 딸을 좋은 곳에 혼인시켜야 했으며, 가족의 유산을 보전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경우에,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가족 “유지”에 있어서 상당히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심지어는 그들이 덜 눈에 띄더라도 말이다(아래를 보라).

    지금까지의 그림은 시골과 촌락의 생활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은 소규모의 상업 마을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특별히 여자들과 아이들의 경우에서 그러했다. 분열 왕국 시기에, 대 여섯 정도의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들 도시들이라고 해도 예루살렘은 2,000-3,000 명의 인구를 넘지 못했고, 남부 국경지대의 성읍인 브엘세바는 500 명 정도였으며, 유다의 가장 큰 성읍인 라기쉬는 1,000 명을 넘지 못하는 정도였다. 중요한 상업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인 벧세메스도 그와 같은 정도였다. 이러한 마을에서 소규모의 중간 계층이 활약했는데, 그렇다 해도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상인들, 기능공과 장인들, 건축가들이며, 다양한 전문 직종을 가진 사람들로 교사, 의사, 공무원, 직업 군인이 있었고, 심지어는 종교적 업무를 맡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중간 계층의 존재는, 성서 본문에서는 그렇다고는 하지만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바로 이들의 교육수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계층은, 그것이 얼마나 소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서”를 제작할 만큼 충분히 학식을 갖추었을까? 혹은 단순히 읽기라도 가능했을까?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대중은 거의 모두가 문맹이었다. 심지어 제사장들이나 왕들조차도 읽을 수 없어서 의사소통을 하거나 자신들의 업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소규모의 전문적인 필기사가들을 고용했을 정도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리의 가장 초기 히브리어 비문은 기원전 12-11 세기인 정착 시대 영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발굴된 것들은 매우 적었지만, 여기에는 초보적인 수준의 것도 포함되었고(히브리어 알파벳 문자를 나열한 수준), 학생이 분필로 파종하고 추수하는 시기를 가르쳐주는 (“9 월은 30 일”과 같이) 암기식의 노래를 연습 삼아 썼던 평판 조각도 있었다. 다음으로 10-9 세기 것으로 보이는 기록된 유물 조각들이 소량 출토되었다. 그러나 기록물은 기원전 8 세기 전까지는 널리 퍼지지 못했는데, 기록물이라고 해도 단지 내가 “기능적인 문서능력”이라고 부르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즉,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숫자 그리고 몇 가지의 상품들의 이름을 기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진정한 문학적 소양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경우이다. 즉 우리가 히브리 성서의 어떠한 책을 읽는 것처럼 문학적인 자료들을 읽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로마제국 시대에서 조차 인구의 5 퍼센트 정도 밖에 어느 정도 이상의 읽고 쓸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히브리 성서가 일찍이 기록될 수 있었으며 또한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가졌더라고 한다 해도 과연 그것을 읽을 수나 있었겠는가와 관련해서, 내가 지금까지 제기했던 문제들에 관하여 중요한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5) 보다 “큰” 세계. 어떠한 촌락이나 가족이 살고 있는 인접지역을 넘어서, 그리고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들어는 봤었을법한 예루살렘 수도를 넘어서, 일반적인 민중들이 보다 큰 세계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히브리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인접국가-북쪽의 아람, 해안을 따라서 페니키아와 블레셋, 트랜스요르단의 암몬, 모압 그리고 에돔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다음으로 아주 먼 거리에, 기원전 8 세기 후반에 이스라엘을 그리고 기원전 6 세기 초반에는 유다를 침략했고, 아시리아와 바벨론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처음 민족은 서부 셈족 사람-이스라엘의 “친사촌”-으로 유사한 문질문화를 가지고 있다(심지어는 블레셋인들 조차도 기원전 8-7 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동화되고 만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민족들에 대해서 단지 귀동냥으로만 알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주로 허구적인 대상으로 여겼을 것임에 분명하다. 극소수의 모험가들과 무역업자들은 외국으로 멀리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갔을 것인데,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는 성서의 기록자들 조차도, 기록을 통해서 다양한 민족들을 언급했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그들과 접촉한 적은 거의 없었다(비록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 상당 부분 정확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립시켰던 원인을 격리와 그 결과로 인한 무지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웨가 오직 이스라엘만을 “선택했다”는 성서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개념에 의해서 북돋아진 외국인 혐오에 의해서도 찾을 수 있겠다.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종교와 “좋은 삶”


위에서 그린 고대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삶은 간단하게 나타낸 것이며, 그러므로 킹과 스테이거(King and Stager)가 최근에 출간한 성서 이스라엘의 삶(Life in Biblical Israel 2001; 아래의 참고도서목록을 보라)이라는 책의 도움을 받아 보충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직도 성서학자들이 이스라엘 종교에 관하여 책을 쓰면서(제 2장), 우리 같은 고고학자들이 근본적인 정황이라고 여기고 있는 “실제 삶”의 맥락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이고 있지 않고 있다. 만약 내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지금까지 그려왔던 것들이 정말 실제와 밀접하게 가깝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문제를 삼는 성직자나 개혁가에 의해서 반포된 정통종교나 성서 신학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영위하고자 소망한 “좋은 삶”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시골적인, 농경적인, 그리고 외부적인 존재라는 것을 배경으로 할 때, 그들이 소망했던 “좋은 삶”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성서적인 이상-최소한 예언자들의 그것으로, 이들 중에 몇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것과 매우 비슷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은 분명하다. 주의 날에 이스라엘의 운명이 성취될 것이라는 미가의 환상은 그 소망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미 4:2-4)


성취의 때에 “좋은 삶”에 관한 아모스의 환상 역시 강력하다고 하겠다. 그는 드고아에서 온 마을사람으로,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7:14)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9:13-15)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종교에 대하여 “유물론자”의 접근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이 세속적인 관점이 있는 듯하다. “좋은 삶”은 단순히, 살아있으며 건강하고 안전하며 가족들에 둘려 있는 매일의 즐거움이며, 좋은 일이 생길 때에 느끼는 기쁨인 셈이다. 그러나 미가와 아모스의 환상에는 깊은 영적인 면들 또한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므로 물질적인 현실과 영적인 현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만 갓월드(Norman Gottwald)가 깊이 있게 주목한 점으로, 다시 언급할 가치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완전한 물질성을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했을 때야만, 우리는 그것의 영성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1979:xxv; 강조는 갓월드)


    그런데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절대로 끝나지 않는 사투에 맞닥뜨리면서, “맨 가장자리에” 살아가려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특히 어떻게 물질적인 환경이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환경을 형성하며, 그로 인해서 위에서 언급했던 실제적인 종교적인 행습들을 위한 없어서는 안 될 “정황”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만약 종교가, 위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한다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생존보다 더 근본적이고 긴급한 관심이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종교적인 행습들은 특별히 다른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내가 (제 5장에서) 개관하려고 하는 예식의 물질적인 유물들은 전형적인 행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