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Paul N. Anderson, The Christology of the Fourth Gospel(1996), 70-109.

진실과열정 2008. 8. 30. 10:07

요한복음 세미나(2008.4.7)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Paul N. Anderson, The Christology of the Fourth Gospel(1996), 70-109.

 


※저자인 Paul Anderson은 Oregon의 Newberg에 소재한 George Fox 대학에서 성서와 퀘이커 학과의 교수로, 요한복음에 대해서 두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본 서(1996년)와 The Fourth Gospel and the Quest for Jesus(2006년)란 책이다. 본 서에서 저자는 복음 전통 연구에 있어서 “인지비평분석(Cognitive Critical Analysis)”을 도입하고 있다.


1. 다시 쓴 4, 5장

 1) 지금까지(1-3장) 저자는 요 6장에 대한 통시적 접근의 뿌리가 불트만에게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해석방법을 지양하고, 기록자 자신의 변증법적(내부적) 접근으로 풀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바로 바레트(Barrett)를 변증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제 II부의 첫 인용구를 바레트의 ‘성 요한의 변증법적 신학’의 한 부분으로 선택하면서, 저자의 작업은 시작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 보다 먼저 불트만의 통시적 접근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했다. 사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나그 함마디, 쿰란) 덕분으로, 요한복음서의 배경에 영지주의가 있다는 불트만의 종교사학파적 견해는 폐기처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트만에 대한 결정타는 없는 것 같기에, 저자는 이제 회심의 결정타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불트만의 핵심 이론인 ‘구성이론(composition theory)’를 요 6장의 통일성을 보여줌으로써 진행된다.


 2) 저자는 불트만의 구성비평을 세 번에 걸쳐서 비판한다. 즉 4장에서는 문체적 분석을 통해서, 5장에서는 문맥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6장에서는 신학적 분석을 통해서 비판한다. 먼저 4장에서는 비교적 가장 객관적인 문체와 언어적인 분석을 다룬다. 우선 불트만이 요 6장을 구성비평한 것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특징(불트만)

문제제기(저자)

대안(저자)

표적자료

①셈어적 헬라어로 유대인 대상(20:31)

②동사시작/ 

  간단연결(δε / ουν)

  셈어적표현(μαθηται αυτου)

 

 

 

①표적이라는 독특한 문체는 없다.

②동사시작의 빈도가 압도적이지 않다.

  간단연결은 표적기사 밖에 더 많다.

  셈어적표현은     〃    (24,60,61,66).

③다른 부분에서도 문체가 같다: 이는 불트만이 미리 ‘마법적 예수’와 ‘실존적 전도자’를 나누고, 넣은 것이다.

요한복음의 문체는 기본적으로 통일되어있다.

(7:53-8:11만 예외)

계시강화

①헬라적 아람어, 영지주의 제의용

②마디가 있고, 운율감이 있다.

③이를 위해서 재배열(27.35.33.48.45.37)

 

 

②불트만의 자료선정이 불공평하다.

③재배열은 주관적인 논리의 반영이다.

 -주제적/언어적으로 더 이상하다.

 -요한만의 오해소재를 Ⓑ는 오해했다.

마디와 운율을

요 6장에서 찾기는 어렵다.

전도자

①자료를 예수사역의 존재론적 의미화

②문장명확화(산문/설명적/접속삽입)

 -역사적으로 자세한 부분 삽입

 

 -직설적(표적)보다 설명적이다

 -때때로 자료를 곡해한다

 -문체변화가 다른자료임을 증명못함

  막/마-눅에서 막의 역사적인 사례 有

 -저자 자신이 주석자일 수 있다

 -곡해가 오히려 막6장과 같아졌다!

공관전승으로부터 독립적인 복음내러티브를 해석했을 뿐이다.

편집자

①신학적인 태도가 분명하다

6장에서 다룸

6장에서 다룸


    이렇게 저자는 불트만의 구성비평을 문체적으로 비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6장에서 보이는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에 대한 지적(6,14,26,34,66)과, 27절이 ‘생명의 떡’이라는 (계시)강화가 시작하는 부분이라는 통찰은 불트만의 기여라고 평가한다.


 3) 제 5장에서 저자는 ‘표적기사’와 ‘계시강화’ 사이의 관계를 집중한다. 즉 불트만은 표적과 강화가 전승에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말하며, ‘먹이심’과 ‘생명의 떡’이 전도자에 의해서 종합되었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트만의 논지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①25절과 26절의 관계가 어색하기 때문에 결국 편집자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②표적을 경험한 다음날, 아무 것도 모른 것처럼 똑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문제로, 불트만은 30f절이 35절 다음으로 본문을 재배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③생명의 떡 강화가 먹이심의 내러티브와 연관이 없다는 문제로, ⓐ불트만은 표적기사는 이후의 사건 해석에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으며, ⓑ26절 이하는 25까지 본문의 반영이므로 전도자의 종합일 뿐, 전혀 내적인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불트만의 주장을 종합하면, 결국 서로 다른 자료이므로 문맥적으로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다.


 4) 이와같은 불트만의 주장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①만약 26절을 편집자의 흔적이라고 본다면 훨씬 부드럽고 멋스럽게 고쳤을 것이며(어려운 읽기일수록 원문에 가깝다!), 요한의 전도자가 언어유희를 사용했다면 더 나아가 25-26절의 아이러니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불트만은 문맥적 아포리아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인 셈이다!). ②무리를 향한 예수의 이상한 반응이나(26절)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30f절) 통시적인 해결일 뿐이고, 오히려 계속되는 아이러니한 질문들과 문장들을 볼 때(25,28,31f,34) 차라리, 요한의 오해소재의 한 형태로 참된 ‘생명의 떡’으로서의 예수 기독론 해석을 위한, 확장된 아이러니로 보는 것이 더 낫다. ③ⓐ공관복음서(막 6, 8장)와의 평행연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록 요한복음이 다분히 해석적이라고 할지라도, 역사적 완결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전도자는 외부의 사건을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주제적 발전으로 나아갔다. 즉 신-인의 변증관계에서 현재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이 요구되고 있다는 주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과 강화는 결국 같은 목적을 가진다.


 5) 결국, 문체(4장)와 문맥(5장)을 다루면서, 저자는 불트만의 통시적인 구분에 대해서, 기준이 없는 인위적 분석이며, 요한의 심오한 문학적 기술을 이해못한 처사일 뿐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2. 평가와 토론을 위한 질문

 1) 4장에서 저자는 불트만의 구성비평을 비평하기 위해서, 불트만이 제안한 요 6장의 4개 자료층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사실 위대한 학자가 제시한 것이라면, 충분한 검토없이 받아들이는 풍토에서, ‘정말 그러한가?’라는 자세로 검토하는 자세가 배울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Peder Borgen은 최근의 글에서 Anderson이 자신의 논지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있다(“The Scriptures and the words and works of Jesus,” Tom Thatcher eds., What We Have Heard From the Beginning: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Johannine Studies [Baylor University Press, 2007], 44). 학자들의 견해를 총괄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불트만의 통시적 읽기에 대한 현재의 신약학계의 반응은 어떠한가를 묻고 싶습니다.


 2) 5장에서 저자는 듀크의 아이러니 연구를 사례로 들면서(사실 6:25f는 언급이 없다), 본문상의 갈등 해소를 위해서 ‘문맥적 아포리아’라는 문학적 장치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해결에 대해서 발표자는 본문에게 무제한적 특권을 씌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5f절의 아이러니라는 문학적 기능으로, 독자들이 분명하게 혼동스럽게 느끼도록 의도되었다라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p.94). 결국, 저자의 논리에 따른다면, 요한복음의 기록자보다도 요한복음의 독자가 최고 수준의 문학비평가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점에서 저자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