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David Rensberger, 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 87-154

진실과열정 2008. 8. 30. 10:06

요한복음 세미나(2008.3.31)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David Rensberger, 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1988), 87-154.

 


※저자인 David Rensberger는 Atlanta의 Interdenominational Theological Center의 신약교수로 본서는 그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는 요한서신에 있어서 공동체와 사회사 사이의 상호관련성에 집중을 두고 연구하고 있는데,[1] 본서는 그 열매라고 볼 수 있겠다.


1. 다시 쓴 5, 6, 7장

 1) 지금까지(2-4장) 저자는 3, 6, 9장을 중심으로 세상과 경계선상 위에 서있는 요한공동체를 분석했다. 이러한 경계 상황에서 3, 6, 9장은 요한공동체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해주는 도전적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저자는 논의의 방향을 반대로 돌린다. 즉, 지금까지 요한공동체만을 집중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눈을 돌려 요한공동체가 상대하는 세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상대를 아는 것이 바로 요한공동체를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5장이 써내려가는 방향이다. 5장은 예수의 재판과 이를 통한 요한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가 재판을 받는 본문인 18:1부터 19:16까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2) 70년의 성전파괴 이전에 예수가 팔레스타인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주장이다. 이러한 요한복음만의 독특성은 계속된다: 예수를 잡고 재판하는 것은 전적으로 로마의 군대였고, 반대로 산헤드린은 생략되고 있다. 예수는 “왕(basileus)”이며(6:14f; 12:13; 18:39; 19:19), 이는 곧 정치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로마의 책임을 무효화하며, 자신의 교회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며 친(親)로마 태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은 재판 사건을 통해서 로마의 역할을 분명하게 남겨 두었다. 한편, 70년 이후 바리새인이 로마를 등에 업고 로마의 ‘단독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유대인들을 다스렸다면, 이와는 반대로 (마카비 이후) 다윗 가문의 회복을 소망하며 유대와 디아스포라에서 움직였던 반(反)로마 세력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팔레스타인이라는 배경 아래에서,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것이 과연 요한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3) 요한이 기록한 일곱 개의 장면(18:23-32; 18:33-38a; 18:38b-40; 19:1-3; 19:4-8; 19:9-11; 19:12-16a)[2]은 극적 아이러니를 위한 요한의 의도적인 배열이며, 그러므로 빌라도, “유대인” 그리고 예수라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요한의 정치학을 살펴볼 수 있다. ①빌라도는 중립의 자리에서 공정한 판결을 못 내리는, 어둠에 속한 자로 나타난다. 빌라도에게 우선적인 목표는 유대인들을 깔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판결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조롱한다(mock-king, 93). 빌라도는 유대인에게 처참한 예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19:8(mallon: not more but instead, 94)에서 보듯이 이제 빌라도의 태도는 바뀌었다. 절대무적 로마의 상징이었던 빌라도는 이제 복음서 안에서 비겁자가 된다. 이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19:14). ②유대인은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왕임을 선언하는 유월절에 시저를 칭송하는 태도에서 유대인은 스스로 자멸한다. 진정한 비난의 대상은 바로 유대인인 것이다. ③예수는 로마의 공권력을 해결하는데 있어 하나의 모델로 요한공동체에게 의미가 된다. 예수는 당당하다. 예수의 왕 되심은 지역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방식의 차원이다. 빌라도가 로마에게서(‘위에서ανωθεν’) 권위를 받고, 요한공동체도 ‘위로부터’ 권위를 받는다(3:3-8). 그러나 요한에게는 존재방식이 다르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속한 자들이므로, 이곳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된다.

 4) 이렇게 볼 때, 4장에서 요한은 공동체가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만 하는 로마라는 권력에 대해서, 그들을 “세상”으로 표기한 다음에 자신들은 (요한복음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를 선포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상대를 통해서 요한공동체는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로 인해서 진리 안에 거하며, 그래서 비록 위험하지만 결국 우리는 세상을 이긴다(16:33, νενικηκα).” 이것은 요한공동체를 전사(戰士)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당(유대인)과 제국(빌라도) 앞에서 진리의 증인으로써 갈등의 승화를 경험하는, 요한공동체만의 세상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5) 6장에 들어오면, 저자의 태도는 돌변한다. (이는 서문에서 밝히듯이, 본서는 저자의 소논문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편집의 영향만은 아니다. 5장까지 저자는 철저하게 요한공동체의 맥락을 연구했다. 그러므로 1장에서 제기되었던 “영적복음서”라는 꼬리표에 대해서 과감한 칼을 댈 시기가 온 것이다. 저자는 요한복음에 ‘해방신학’이라는 메스를 댄다. 사실 저자는 상당히 주저하고 있다. 학계와 교계는 ‘해방신학’이라는 메스에 된통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저자는 결정한다. 왜냐하면, 요한공동체 스스로가 자신을 억압받은 공동체라고 여겼다는 점은 재론의 가치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111). 저자는 이렇게 요한복음서에서 “해방신학”을 발견하고, 또 집어넣으려 한다.

 6) 저자의 스승은 미란다(『존재와 메시야』)였다. 즉, 하나님은 전적으로 갈급한 이웃의 외침 안에 존재하며, 현재란 절대적으로 변화무쌍한 반(反)플라톤적 실제이다. 그러므로 ①니고데모에게는 사회적 자리의 변화까지도 요구되며, 이는 삶의 변화가 없는 신앙고백의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니고데모여! 숨지 말고 이젠 나와라!” 오늘날로 말하자면, 힘없는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힘 있는 그리스도인의 관계라고 하겠다(115, E-Land 사태?). ②예수와 시저의 관계는 자신들이 세운 왕국의 뼈대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바로 사랑에 근간하고 있는 왕국과 폭력에 근간하고 있는 왕국의 차이인 셈이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의식의 개혁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즉 진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며, 결국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의 왕국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질서를 초월해야 하는데, 저자는 십자가라고 제시한다. 십자가는 감상적인 수순이 아니라, 바로 “왕”됨의 선언이며,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로 자신을 억압하는 이에게 ‘그만!’이라고 할 수 있는 선언인 것이다. 예수의 왕권은 “해방의식과 억압의 질서를 변역하는” 것이다(118). ③그러므로 ‘억압받는 자를 위한 예수’라는 요한의 기독론은, 예를 들어 흑인신학과 같은 차원에서도 반영되어야 한다. 이것은 흑인들로 하여금 내세의 위로/보상을 기대하게 하거나 반대로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극한의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해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예수를 “여기 있게 함(contemporization)”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가 천당차표라는 현실도피주의로 빠지거나, 반대로 슈퍼맨이라는 만능주의로 오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 ④한편, 해방신학적 차원에서 ‘사랑’은 이타적인 희생이 아니다. 철저하게 상대적이며, 내부적이며, 심지어 폐쇄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왜냐하면, 단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것이 요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관념적인 차원(요 3:16)을 실제적 차원(요일 3:16)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도 인정하듯이 분명 이는 건강하지 못한 측면으로, 그 상황은 요한공동체의 특수성에 기인했다는 점이 변명이 되겠다.) 아무튼 요한복음은 이런 측면에서 “영적복음서”가 아니다(131).


 7) 마지막장인 7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반성적 차원에서 재고하고 있다. 이젠 요한복음 자체를 비평하는 것이다. 이는 요한공동체의 종파적 성격을 너무나 당연시해왔다는 지적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신비주의적 성향에서 머물러있지 말고,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위로부터 나다’라는 구절을 개인적 차원의 영적 경험과 함께 공공연한 신앙고백이라는 사회적 차원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부분에서도 특별한 사항만을 고집하면 안 된다(사실 요한복음서 자체도 명료하게 조직화할 수 없는 언어로 가득하다, 141). 이렇게 볼 때, 요한공동체의 파벌의식 자체가 교회일치운동에 역행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파벌의식을 그대로 놓지 말고, 파벌의식을 배태했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연구가 요한복음의 선결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139). 역사적 정황 연구를 바탕으로, (그래서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준비가 된다면) 요한공동체의 분파주의는 오히려 현세대를 개혁할 수 있는 건강한 도전이 된다(2007년의 허경영 신드롬?). 그렇기에 이들은 세상을 향한 강력한 참여의식(‘세속화secularization’)을 가지고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하게 된다. 요한공동체의 분파주의는 여성들과 유대인, 헬라인과 영지주의적 요소까지 모두 포함하는 열린 집단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론적 고백을 배경으로 다양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평등주의적 형제단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결국, 이들은 교리나 신조로 세상을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대안사회나 반(反)문화의 성향을 가지고 공동체가 되어가는 진행형에 있다.


 8) 후반부에 오면서 저자의 목소리를 상당히 설교조로 바뀌었다. 요한의 신학인지 저자의 이상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요한의 기독교”라는 소제목을 마지막으로, 저자는 그동안 왼쪽으로 지나치게 쏠린 해석의 추를 다듬질 한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를 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개인의 내적변화도 필요하고, 사회 개혁도 필요하다. 어찌 보면, 요한공동체는 ‘진리’를 강조하기에 일종의 초월적(free, 132)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변혁시킬 책임으로 이 세상에 보내진 예수 DNA라고 하겠다(146).

 

 

 

 

 

[1]

Tom Thatcher (ed.), What We Have Heard From The Beginning: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Johannine studies (Baylor University Press, 2007), 395.

 

[2]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AB29; N.Y.: Doubleday, 1970), 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