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Gary M. Burge, The Anointed Community, 150-224

진실과열정 2008. 8. 30. 10:04

요한복음 세미나(2008.3.24)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Gary M. Burge, The Anointed Community: The Holy Spirit in the Johannine Tradition, 150-224.

  


※ 저자는 2장에서 계시의 주체자로 말씀(로고스) 자체가 성령이라는 기독론을 말하고, 3장에서 지상의 예수가 십자가 희생의 결과로 내려진 성령에 의한 현재화된 종말론을 말한다. 2장과 3장은 예수와 성령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자의 서술은 상당히 관념적이다. 과연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이제 저자는 4장과 5장에서 실제로 예수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간다.



4장. 성령과 성례전

 1) 성례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 성례전으로 의심되는 본문에는 3:5과 6:63이 있으며, 이러한 본문을 접근하면서 ① 성례전적 본문이라는 주장과, 반대로 ② 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 ① 성례전적 본문이다: Cullmann: 역사적인 뼈대가 있으며, 초대교회는 기독교 예배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삶을 연결시키려 했다. ⇔ 그러나 2세기 자료를 가나 잔치에 투영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더구나 요한의 의도를 미리 짐작해내는 것은 자기해석(eisegesis)이다. ② 명백한 근거 없다: Bultmann: 요한은 성례전에 흥미 없었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가현설에 반대하려고 은밀한 지식으로 전수된 편집물이다. ⇔ 그러나 요한은 무시하지 않았으며, 편집물로 보이지 않는 본문의 고대성이 있으며(6:51), 상징과 성례전에 심오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성례전 기록 이유를 찾아보자: ①남용을 경고, ②이단에 대처, ③(내용은 없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건을 성례전적으로 풀어가려고 했다. 결국, 예수의 사역이 성례전적이었고 그러한 행위에 참여함이 궁극적 신앙이었기에, 요한도 성례전에 접근했다.


 2) 3장과 6장에 접근하면서: 확실히 요한은 비밀적인 언어로 성례전을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성례전은 신비로운 결합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이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요한은 성례를 역사적 드라마(historical drama)의 차원에서 재정의하는데, 성례전이 성령과 연결되면서 경험의 차원을 말한다.


 3) 요 3장와 침례의 문제(“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저자는 물(υδατος)을 중성형(υδωρ)로 접근하면서(Dunn), 육체와 영의 순서로 보지 말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구약(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물과 성령은 병행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맥락(3:22ff → 4:1f)을 같이 본다면, 3:5는 예수가 받았던 침례의 물은 이제 영으로 상징화되었다는 것이다.

        - 한편, 다시 난다는 것은 신적인 탄생과 함께 영적인 기름부음이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물과 성령은 선-후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물이 전적으로 성령으로 재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은 부각되는데, 특별히 3:3과 3:5의 비교를 통해서 볼 때, 3절의 ‘거듭’은 ‘위에’ 즉 성령으로 볼 수 있다. 이제 3:6-8에 와서는 성령이 물을 완전히 대치한다. 즉, 침례요한의 물과 땅과 육이 요한의 교회에서는 신학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던 것인데, 이는 그 배경에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다.

        - 침례의 거듭남이 십자가의 인자를 믿음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은 믿음을 의식(ritual)보다 중요하게 격상시킨다. 이렇게 요한은 성례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문자적 성례전을 경계한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 요한일서는 중요한 관점을 던져준다. 즉,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상황적 배경을 추측해볼 때, 공동체의 심각한 논쟁의 맥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서로가 주장하는 관계에서 영적 경험이 진정성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가 성령과 동거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요일 3:24; 4:13). 요한은 ‘기름부음’(요일 2:20,27)과 ‘씨’(요일 3:9)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요한은 침례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고 있다.


 4) 요 6장과 성례전의 문제: 6장 전체가 성례전적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저자는 포인트는 예수라고 하면서 반박하고, 51b-58절만이 성례전적 본문이라고 제한한다. 그렇지만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는 그냥 ‘살’(σαρξ)이라고 하지 않고, 성육신된 존재로서의 살을 말한다. 이는 가현설에 반대하는 의도이다. 이렇게 요한은 성례전이 의도하지 않았던 내재적 문제들을 교정하고 있다.


 5)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문제(4:20-24): 본문은 갑작스러운 복수형이 등장하고 있는데(3:11f; 4:22), 이는 결국 독자를 염두하고 있는 이야기로 봐야한다. ‘지금’ 성령을 경험한 공동체에게 있어서(4:23),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존재적인 문제는 성령을 경험함으로 해결되는데, 이는 내적 감정도 아니고 외적 능력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을 받은(εν πνευματι) 예배자 자기 자신이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이다. 또한 진리란 실제적이며 기독론적인 주장으로, 결국 4:23의 신령과 진정은 다름 아닌 예수 중심의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장소(사마리아, 예루살렘)는 예수 앞에서 와해된다. 여기에서 사마리아와 스데반 집사(행 7)의 문제가 걸리게 되는데, 이는 요한복음 내에서 예수가 지속적으로 종교/예식/성전을 대체하는 모습의 큰 그림 안에서 볼 때, 예수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요한의 메시지가 된다.


 6) 결국, 요한은 침례와 주의 만찬 안에서 본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순전히 경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요한1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례전적인 남용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은 스스로가 영적인 공동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5장. 성령과 선교 그리고 회상(anamnesis)

 1) 성령과 선교: 성령은 자체의 원심력이 있기에 선교하는 교회로 이끌었으며,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성령의 독특한 현상인 ‘계시’로 교회 안에 역사했다. 성령이 교회를 이끈 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당연한 논리였다(20:21, καθως ... καγω).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기에, 예수는 제자들을 보낸다. 이를 위해서 요한은 특수한 어휘인 αποστελλειν과 πεμπειν을 사용한다. 이것은 대리인(agency)의 개념으로, 완전한 연합의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혜사는 예수의 대리자로 보내지는데, 예수에게 종속되면서(14:26; 16:13), 요한의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를 엿보게 한다. 어찌되었건, 성령과 제자들은 교회의 선교적 차원에서 하나로 연합한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혜사와 제자들과의 관계이다.

 2) 재판과 계시: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상은 상당히 ‘재판 소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공동체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요 15:18-16:4a는 공관복음(마 10:17-25, 24:9-10; 막 13:9-13; 눅 21:12-17)과 병행하는데, 성령이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역할이다. 여기에서 요한복음의 보혜사(παρακλητος)는 법정적 개념에 너무나 잘 맞는다. 한편 16:8-11은 보혜사의 공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는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공동체가 예수로 인해서 재판을 받고 있다면, 보혜사는 그 판을 뒤집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본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혜사의 정체가 궁금해지는데, ‘기억함(anamnesis)’이라는 단어가 해결의 열쇠가 된다. 즉, 기억하는(μιμνησκομαι) 성령의 기능으로써, 예수를 역사화한 요한공동체의 특별한 역사해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겨진 것이라고는 교회의 산물인 뿐인가? 여기에 대해서, 15:15는 16:12-15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본문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시의 단계로 발전되는 것을 보여준다. 즉, 성령은 단순하게 기억만 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발전적이면서 미래적인 계시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결국 예수 전승(사도적)과 성령의 영감(예언적)이라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거쳐 시간축이 결합되는 차원으로 발전된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배경에 있어서 일종의 종교 전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요일 2:27; 요 14:26).


 3) 결국, 고별강화는 공관복음서의 핍박과 영적 지원을 배경으로 나온 것으로, 예수가 박해를 당하고 재판을 당했던 것처럼, 지금 요한의 교회도 같은 현상을 당연히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이 상황을 해석했다는 것인데, 바로 (예수로 나타난) 보혜사가 법정적으로 기능하면서 교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겠다는 믿음을 얻었던 것이다.




(요약과 평가)

1. 요약: 80년대 들어서 오순절의 영향력은 학계의 반응을 이끌게 되었던 동기가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그동안 가려져있던 요한복음의 성령론 이해가 좋은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정말 저자는 성령론이 요한공동체에게 핵심적인 사항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은 παρακλητος에서 드러난다. 공동체는 파라클레토스를 통해서 성령을 체험했던 초기기독교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변신하게 된다. 거부와 박해를 경험하면서 공동체는 성령이 변호사, 지원자, 계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점이라면, 성령이 기독론에 철저한 역할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부활한 예수였다면, 요한에게는 성령이 지상의 예수로, 결국 이 지상의 예수의 십자가 죽음/영광의 사건으로 성령이 내려졌다는 실제적인 종말론을 말하게 된다(7:37ff; 19:30; 20:22). 요한은 실제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성령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침례와 만찬에 있어서의 성례전적인 남용을 막는 차원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난당한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고 있는 요한공동체는 보혜사로 하여금 계시와 기억의 교회를 만들어가게 해준다. 결국, 요한공동체는 영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차원에서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이다. 한편 주석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요한서신과 다양한 문헌들이 병행되기 때문에 꼼꼼한 재독이 필요한 것 같다.


2. 평가: 저자는 그동안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서 집중되어있던 성령론의 무게추를 요한복음으로 옮겨놓음으로써, (현재 종말론적 차원의) 기독론과 (정통주의적 성령이해 차원의) 교회론에 있어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메시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헬라화된 문화이해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서 벗어나 구약적(유대교적) 문화이해에서 시작함으로써, παρακλητος는 물론 다른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도 탄탄한 기반위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공관복음서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조화주의자적(혹은 보충[61f]적)인 입장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주석적인 논의에 있어서도 약간은 작위적인 면(혹은 반대로 참신한 해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즉 기독론을 다룸에 있어서 물을 성령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나(p.83, 85, 92), 종말론을 다룸에 있어서 20:22을 행 2장의 성령 강림 사건과 동일시하는 것이다(p.123). 성례전을 다루면서 요 3, 6장을 지적했는데, 역사적 드라마라고 하기에는(p.158) 본문이 너무나 간접적인 것 같다(그리고 3:5의 ‘물(υδατος)’을 υδωρ로 바꿔 읽기도 작위적이다, p.160). 마지막으로 전승과 영감의 실제적인 갈등의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전승에 뿌리를 둔 영감의 활동을 강조함으로서 차후의 활발한 성령운동을 열어놓은 것 같다(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