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분노(막 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개역개정)
예수 더 알기 원함은 More about Jesus would I know
크고도 넓은 은혜와 More of His grace to others show
대속해 주신 사랑을 More of His saving fullness see
간절히 알기 원하네 More of His love who died for me
내 평생의 소원 More, more about Jesus
내 평생의 소원 More, more about Jesus
대속해 주신 사랑을 More of His saving fullness
간절히 알기 원하네 More of His love who died for me
모든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소망이 바로 예수로 모아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미 만들어진 찬송가의 가사 때문인가?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벧후 3:18), 이러한 찬송가의 가사가 생겨난 것일까? 헤윗(E. E. Hewitt, 1887)은 예수에게서 ‘더’ 알고 싶은 것이 ‘날 위해 죽기까지 사랑했던, 그의 사랑’이라고 남겼다. 이것은 아마도 ‘그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일 것이며(exegesis), ‘그 사랑’의 개인적인 의미일 것이다(hermeneutics).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헤윗은 왜 ‘더’ 예수를 알지 못했을까?”1)
예수를 ‘더’ 알아간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정보’(data)의 양을 늘리는 작업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서점에서 예수에 대한 정보는 가득 넘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예수를 ‘더’ 알아간다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date)이 보다 자주 그리고 깊이 일어나는 차원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와의 ‘만남’을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경험한다. 비상한 꿈은 주변의 선배 신앙인들에게서 ‘예수의 계시’로 해석되기도 하며, 강단의 설교는 청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부드럽게 감싸주는 멜로디에 몸을 맡기면 찬양은 어느새 천상의 축제로 변하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그 분은 나의 의식속에서 뚜렷해져 둘만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진다. 예수를 알아가는 ‘신앙’은 영적인 차원이 포함된(!) 세계이므로 개인적이며 표준화할 수 없는 다양성을 반드시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위대한 선배들의 다양한 신앙의 정서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신명기적 역사가와 역대기적 역사가의 차이, 왕정의 지혜신학과 욥기의 차이, 공관복음서의 차이),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Text)로 주어진 성서는 다양성 속에서 공동체의 합당한 표준으로 정경화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더’ 이상은 없다.2)
예수를 ‘더’ 알아가는데 개인적 차원의 다양성을 나열하는 것보다(또는 그것들을 하나씩 검증하는 것보다), 성서로 눈을 돌리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다. 구약에서부터 예수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3) 복음서에서 시작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가복음에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 시도해보자. 왜냐하면 ‘마가우선설’은 거의 모든 학자들에게 공인된 가설이기 때문이다.4) 물론 마가복음 자체가 소위 ‘역사적 예수’의 사실성을 완전하게 보장해주지는 못한다.5) 그러나 언어적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마가복음의 1차 독자들은 익숙치 못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을 것이고,6) 흐름을 깨트릴 정도로 빈번한 ‘그리고’(και)의 등장은 마가복음이 치밀한 문학적 노작의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청중(!)을 위한 구전 낭독문의 결합이었음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마가복음 역시 다른 복음서와 마찬 가지로 저작배경과 저작의도가 (어쩌면 심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7) 그럼에도 비교적 후대에 쓰여진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를 통해서 ‘더’ 가까운 예수를 찾아볼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8)
마가공동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이전에, 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예수’와 짝을 이루는 수식어로 인정되기 이전에(롬 1:1),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웠다(1:24). ‘나사렛 예수’는 당시에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했던 ‘사회적 코드’였던 것이다.9)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증언했던 제자들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예수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했으며(행 3:6), 이와 발을 맞추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복음서의 원자료가 되었을 구전은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면, 바울의 문서화된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바울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세워진 교회를 견고하게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제자들의 죽음은 구전의 문서화를 이끌었고, 경험된 구전은 ‘나사렛 예수’의 행적을 중심으로 세밀한 기억으로 거듭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특유한 언어소통의 방식을 가지고 있듯이, 마가 역시 특유한 표현 방식으로 마가복음을 작성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쌍이 되도록 묶는 방식인데, 특별히 본문과 관련해서, 듀이(Joanna Dewey)가 잘 지적해낸바 있다.10) 즉 본문은 2:1-3:6의 하나의 이야기 단락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A 2:1-12 중풍병자 치유: 죄 - 서기관
B 2:13-17 세리와의 식사: 죄 - 바리새인의 서기관
C 2:18-22 금식: 옛것과 새것 - 바리새인
B' 2:23-28 식사: 안식일 - 바리새인
A' 3:1-6 손마른자 치유: 안식일 - 바리새인과 헤롯당
이러한 교차대구 아래에서 A와 A'은 치유의 소재로, B와 B'은 식사의 소재로 묶이며, A와 B는 죄사함이 갈등의 원인으로, B'와 A'는 안식일이 갈등의 원인으로 묶인다. 예수와 갈등하는 대상 역시 서기관-바리새인의 서기관-바리새인-바리새인과 헤롯당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매우 복잡한 구성 안에서 듀이는 2:20의 예수의 죽음 암시가 이야기 단락의 핵심 메시지라고 제안하고 있다.11)
결국 3:1-6의 본문 자체도 마가의 표현방식 안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을 통한 ‘나사렛 예수’를 찾는 것에 제한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와의 비교를 통해서, 그리고 마가복음의 표현방식 밖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성격 표현 구절을 조사해 볼 때, 마가의 문학적 기교 속에 숨어있는 ‘나사렛 예수’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는 것과 치유를 베푸는 것이 마가공동체의 논쟁거리였다기보다는 예수의 논쟁이었다는 위더링턴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12) 마가복음과 평행본문인 마 12:9-14과 눅 6:6-11에는 예수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차이점을 보인다.
...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막 3:4-5)
...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하시니... (마 12:12-13)
...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눅 6:9-10)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분노를 의도적으로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막 10:13-16의 평행본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마 19:14; 눅 18:16). 어만은, 탁월한 사본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현상을 초기 기독교 사회의 예수 신성화 작업의 결과라고 분석한다.13) 어만의 지적이 맞다면, 예수의 ‘반-신성화’ 모습이야말로 ‘나사렛 예수’의 그것이 아닐까?
막 14:34에서 예수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또한 막 15:34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단 한번 말한 것으로 나오는데, 역시 다른 복음서에서(특별히 누가복음과 비교해서) 찾을 수 없는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막 3:1-6은 어떠한 측면에서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분노했다’는 표현만으로 예수의 인간스러움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것일까?
예수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에 비추어볼 때,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는 고대법전이 허락하지 않은 사람을 고쳤다(레 21:19). 더군다나 허락하지 않은 시간에 고쳤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예수의 분노에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는 종교인의 굳어버린 마음에 분노했다. 종교인은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완벽하게 지켜지는 가의 여부로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사람이다. 이에 예수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의 근간까지 포기하시면서(그렇게 모두가 보았고, 그래서 예수를 죽일 음모는 시작된다) 자신의 세계를 나타낸다. ‘나사렛 예수’는 사람 사랑이 없어져 버린 조직 사회에 분노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바울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보다 사랑의 가치를 높임에 있어서 원리적이었다면(고전 13:2), 나사렛 예수는 그 사랑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실제적이었다. 나사렛 예수를 ‘더’ 알아가는 것은 교리화된(신화화된) 예수를 넘어서게 하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14)
끝
1) 물론 헤윗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쓴 것이다. ‘시적 표현’이기 때문에, 위의 질문은 차원이 다른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질문은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2)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경화 선언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즉, 90년 얌니아 회의에서의 히브리 성서의 정경 목록 선언,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의 신약의 정경 목록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V. George Shillington, Reading the Sacred Text: An Introduction to Biblical Studies (New York: T&T Clark Ltd, 2002), 123-35를 보라.
3) 클라우스 베스터만 편, 「구약해석학」,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본서는 독일학자들간에 이루어진 신-구약의 첨예한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4) Hans-Herbert Stoldt, History and Criticism of the Marcan Hypothesis, tr. Donald L. Niewyk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0); H. C. Kee, 「신약성서이해」, 서중석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0), 124; 키트 F. 니클, 「공관복음서 이해」, 이형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4), 100ff.
5)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서는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라, ‘권위있는 저자’임이 제시되고 있다.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복음서에 대한 사회-수사학적 접근」, 류호성․김학철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유지미, 「성전과 경제: 마가공동체의 사회경제 전략」 (서울: 한들출판사, 2004)는 최근의 복음서 연구 방향을 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6) 간간히 등장하는 라틴어와 설명이 필요한 히브리 사고의 예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3:17; 5:41; 6:27, 37; 7:3, 11, 34; 12:42; 15:16, 34, 44).
7) 데이빗 로즈, 조안나 듀이, 도널드 미키 공저, 「이야기 마가: 복음서 내러티브 개론」, 양재훈 역 (서울: 이레서원, 2003), 24-34.
8)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바대로, 예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제자들까지!) 예수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어만(Bart D. Ehrman, The New Testament: A Historical Introduction to the Early Christian Writings, 3th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82.)의 지적은 마가공동체의 ‘진정한 제자도’를 위한 일종의 작업으로 해석하려 했던 랄프 마틴(「마가신학」, 이상원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3, 299-378.])보다 현재성이 더 뛰어난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몰이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스스로가 예수에 대해서 느꼈던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제 그러한 솔직한 고백들이 1:1의 제목 아래에서 하나의 메시지로 형상화되었다.
9) Bruce J. Malina and Richard L.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2nd e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3), 150.
10) “The Literary Structure of the Controversy Stories in Mark 2:1-3:6,” in William R. Telford(ed.), The Interpretation of Mark (Scotland: T&T Clark Ltd, 1995), 141-53.
11) Ibid., 146. 한편 듀이는 3:1-6이 교차대구를 위해서 첨가된 내용이라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충분치 못한 것 같다.
12) Ben Witherington III, The Gospel of Mark: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2001), 133.
13) 바트 어만, 「성경: 왜곡의 역사」, 민경식 역 (서울: 청림출판, 2006), 252.
14)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서울: 책세상, 2005),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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