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신명기적 역사서 연구

진실과열정 2006. 2. 4. 16:24
 

신명기적 역사서 연구

(기원론, 저자론, 편집이론, 신학사상 및 역사관 연구)

 

양지웅(KBTUS, M.Div)

1. 서론


구약은 각기 다른 역사적인 작품들이, 선택된 백성과 다양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보여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선택된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내력을 서술한 오경과 아울러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까지의 ‘전기 예언서(the Former Prophets)’, 아담에서 고레스(Cyrus) 원년(B.C. 538)까지의 ‘역대기 역사서’, 그리고 포로 후기의 유대 공동체의 개혁을 다룬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구약의 역사를 이룬다.

그런데, 1943년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전기 예언서들은 모두 자신이 ‘신명기적 역사’라고 불렀던 하나의 통일된 역사서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포로기 시절에 상당히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저자는 신명기 초기 형태를 토대로 권두에 신명기적 서문(신 1:1-4:43)을 첨가하고, 그리고 초기 전승들을 이용하고 편집해서 신명기에서 열왕기하에 이르는 책들을 하나의 통일된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적 역사서’이다.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 북부 왕국을 점령하고 몇년후, 남부 다윗 왕조의 통치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넘어서자 점차 누그러진다. 유대의 요시아 왕은 앗수르의 세력의 쇠퇴를 틈타 자신의 왕국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결국엔 솔로몬 왕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 것이다. 요시아의 국가주의의 부흥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은 종교와 정치적 부흥으로 이루어졌다. 다윗 왕조의 힘의 중심이었던 성전의 제사가 다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결국, 이 성전과 연계함으로써 요시아는 위대한 볍률집들과 역사서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신명기적 역사서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군주국 역사에 대한 자료로서 신명기적 역사서는 요약적 개관, 담화 및 기도문 등의 문구들을 통해서 군주국 역사를 결정적인 몇개의 단계들로 구분되며, 이는 곧 신명기적 역사가가 이스라엘의 왕정 실험의 성쇠와 종국적인 실패 이유로 제시한 설명들을 강조하게 된다.

본 연구조사는 신명기적 역사서의 기원론과 저자론, 편집이론과 신학사상, 그리고 역사관에 대하여 조사하고 설명한다.



2. 기원론


기원론은 신명기적 역사서가 어디에서 편집되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즉, 신명기 사학파가 독자로 삼은 이들의 ‘삶의 자리’가 팔레스틴인가 바벨론인가 아니면 그 어떤 곳인가하는 문제이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적 역사서의 팔레스틴 기원론을 주장한다. 노트(Noth)는 세가지 이유를 들어 팔레스틴을 그 기원으로 보고있다: 첫째, 역사서에 인용된 자료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관리들과 함께 한 고문서에 있다기보다 팔레스틴에서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벧엘과 미스바지역의 지방전승이 강조되었다. 셋째, 노트는 신명기적 역사서 작품에 이스라엘 회복의 희망이 적게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얀센(Jansen) 역시 팔레스틴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의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가나안 풍요제의를 언급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그 배경이 팔레스틴이다. 둘째, 기도의 장소로 묘사된 솔로몬 성전 봉헌 기도는 파괴된 예루살렘의 모습에 더 가깝다. 셋째, 열왕기하 마지막 부분의 초점이 포로로 잡혀간 사람보다는 파괴된 유다에 있다. 아이스펠트도 신명기적 역사서가 기원전 550년 유다에서 집대성 되었다고 말하며, 니콜슨은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리드만(Friedman)은 예레미야와의 관련성을 들어 신명기적 역사서가 이집트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했다. 즉, 열왕기하 25장 26절을 이집트로 피난갔다는 예레미야 43장 4-7절의 요약으로 보고, 여호야긴 석방기사는 후일 첨부된 것으로 보았다.

신명기는 고대법 특히 ‘계약의 책’을 신명기 기자 당시 사회와 그 백성들에게 반복 또는 재해석하여 ‘오늘’이란 의식아래 그 백성이 알아야 할 말씀과 지켜야할 율법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의 기원 문제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학자들간에 그 기원 문제에 여러가지 이견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원에 대하여 고려해볼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레스틴이 그 기원인 경우에는 신명기 사학파적 역사의 매우 상이한 여러 부분들에 연관된 자료들의 다양성이나 풍부한 편집과정들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한편, 바벨론일 경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 그리고 어쩌면 매우 다른 기원 장소들을 언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문헌층들에 대한 계속적인 주석적 전승에 상당히 가까운 과정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유다의 개혁을 주도한 요시아 왕 통치 말기(B.C.E. 622-609년)에 첫판이 나오고 포로시대에 두번째 판이 나왔다. B.C.E. 722년에 북왕국이 멸망했을 때, 신명기적 전승은 남왕국의 동조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신명기적 전승은 1세기 후인 B.C.E. 622년에 요시아 왕이 착수한 유다왕국 대개혁의 이념적, 문서적 추진력으로 부각되었다. 요시아의 개혁노력이 실패로 끝났을 때, 신명기 사가들은 계약에 충실했는가 불충실했는가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전제군주들이 겪은 경로를 해석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전승들을 수집했다. 이 전승들은 신명기적 역사서로 표시되는 소의 신명기‘적’ 역사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의 신명기로부터 열왕기에 걸쳐 나타난다.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에, 신명기 사가들은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이 서술한 역사를 개정했다.

유다가 여전히 독립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늘까지’라는 공식구가 종종 사용되고(왕상 8:8; 9:21; 10:12; 왕하 8:22), 선별된 광범위한 혼합 자료들을 신명기적 역사가가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이라는 환경에 의해서 잘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판본이 두 개 있음을 지지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은 절멸 위기에 처한 민족의 운명과 민족의 생존 또는 회복에 대한 기대 사이의 긴장이 신명기적 역사서 내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만일 신명기적 역사서가 쇠퇴해가지만 개혁을 시도한 유다 왕국에 최초로 제시된 작품이고, 유다 멸망후의 국가 없는 유대인 집단들에게는 단지 2차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와 같은 긴장은 아주 납득할 수 있게 설명된다.



3. 저자론


642년 므낫세가 사망했을 당시의 정치적 위기를 요시아(640-609)는 극복해야만 했다. 그는 히브리인 성서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문서로서, 그 사상과 문체가 신명기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흔히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불리는 성전 성서들에 대한 총괄적인 개정판 작업에 착수했다. 622년 성전을 보수하는 동안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모세의 율법이 발견되었다. 북쪽의 제의와 지방의 주민들을 위한 단일 율법의 모범을 따라, 요시야는 E를 모델로 한 자신의 일신된 제의의 율법을 온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공포했다.

E기자 만큼이나 이른 시기에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북왕국의 전승가 집단들은 사회정의와 종교적 신실성에 관한 옛 율법으로 표현된 야훼와의 계약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백성들에게 이해시키는 교육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설교와 권고로 가득찬 것인데,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계약갱신을 축하하는 정기적인 공식 집회에서 계발된 것 같다.

신명기 학파의 구성 인원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신명기적 역사서의 설교체를 감안하여 지방 레위인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구성된 제의 집단이라고 보는 견해가 강했다. 왜냐하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이 레위인이었기 때문이며, 레위인의 위치가 부각되는 면을 볼때 레위인이 기록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노트는 포로기때 신명기 역사가가 모세로부터 포로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명기, 여호수아서, 사물엘서, 열왕기서를 통해 정리하여 북왕국의 멸망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노트가 본 저자는 편집자이면서 전승을 추려 체계있는 역사서술을 시행한 역사가이다. 저자는 교육적, 신학적인 목표를 가지고 역사에 대한 평가와 함께 신앙고백이며 참회의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레위인들이 신명기적 역사서의 궁중 역사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겠느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신명기 학파를 예언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신명기적 역사서 자체가 문서 예언자들의 갈등과 직접 관련이 있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예루살렘의 서기관들 즉 ‘지혜자들’이 역사서의 주동 인물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구두 전승의 측면에서 보면 합당치 못하다. 이와는 다르게 신명기 역사학파의 주체자들은 북왕국의 멸망과 함께 남왕국으로 넘어온 야훼 신앙의 신봉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볼프는 아마 예루살렘 왕궁의 지혜학교를 계승한 자들로서, 그곳에 수집되어 있는 자료들을 접촉했던 유대 나라의 베냐민 지파가 썼다고 제시한다. 폰라드는 국가적 재난을 내다볼 수 있었을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보았다. 포러는 ‘내가 너희들에게 지시한 곳에서 예배드려라’는 내용을 보고 바벨론 포로에 있는 사람이 썼다고 주장한다.



4. 편집이론


신명기적 역사의 이야기는 모세가 죽기 바로 직전에 요르단 건너편에서 율법을 ‘회고하는 것’ 즉 ‘재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가나안 정복과 통일왕국 및 분열왕국의 역사를 차례로 말하고 포로기 중간에서 끝이난다. 신명기적 역사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해석적 구절들의 틀 안에 출처가 서로 다른 다음과 같은 여러 자료들을 삽입시키고 있다.


     1. 사무엘,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관한 독립 전승집들.

     2. 통일 군주국의 행정 문서들.

     3. 분단 왕국의 왕실 문서(‘연대기’) 발췌록들

     4. 예루살렘 성전 문서의 발췌록들

     5. 예언담집

위의 해석적 연결 구절들 이외에도 신명기적 역사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승들을 밀도있게 결합시키기 위해 분단 왕국 통치자들의 연대별 대조배열 기법과 예언-성취 도식 기법을 이용했다.

신명기적 역사서의 편집이론은 노트가 처음에 주장했던 단독자의 역사관적 기록에서 크로스(Cross)로 대표되는 이중편집설, 그리고 일부 전승이 심지어 포로기 이후에도 첨가되거나 새롭게 강조되는 과정을 거쳐 재해석된 편집물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노트는 4경설의 이론을 내놓으면서 신명기에서부터 열왕기하까지 단일 저자에 의해서 쓰여진 하나의 역사서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모세로부터 포로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명기, 여호수아서, 사무엘서, 열왕기서를 통해 정리하여 북왕국의 멸망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던 포로 시기의 어느 역사가(Deuteronomist)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단일 저자가 편집자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보았다. 율법서가 몇 개의 문서를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라면, 신명기적 역사서는 저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용어와 문체가 기존의 기록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제시했다. 즉,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저술방식을 노트는 제안했다.

노트는 신명기적 역사서가 예루살렘 파멸 이후 바벨론 포로 기간중에 작성되었으며, 신명기적 역사서의 마지막 부분이 562년 여호야긴의 석방 기사이므로 이 작품은 562년 직후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노트는 신명기적 역사서가 전기 예언서의 네 책을 단지 결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신과 우상숭배의 역사이었으므로 계약 파기에서 오는 질병, 파괴, 포로, 죽음 등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했다는 저자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에 비추어 여러 종류들의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일련의 역사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명기 역사가 소위 ‘요약 연설문’으로 짜여져 있다고 보고, 이러한 작업이 포로 사건의 체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노트는 신명기 사가가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라 자기 민족의 역사전승을 엮어 체계를 형성한 ‘컴파일러’이며, 또 역사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 주는 ‘나레이터’라고 본다. 이러한 노트의 의견에 신명기 역사를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로 로버트 폴진은 찬성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노트의 ‘설익은’ 의견에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옙센(Jepson)은 포로기 이전에 완성된 작품에 포로기 이후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포러(Fohrer)는 요시야 종교개혁(622) 이후와 요시야의 죽음(609) 사이에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스(Cross)는 신명기적 역사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지않고 몇 개의 대단위(blocks)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즉, 그는 두가지 커다란 주제를 제시한다: 여로보암의 죄와 다윗의 진실성. 요시야에게서 극점을 보이는 이 두 주제는 Dtr. 1과 Dtr. 2라는 두개의 큰 편집물로 나타났다. 요시야 시대에 나온 Dtr. 1은 연설문과 기도문 그리고 반성문 등을 삽입했고, 포로기의 편집자인 Dtr. 2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크로스는 포로기의 기록보다는 요시야 시대의 본체적 골격을 중요시했다.

한편, 로버트 쿠트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신명기적 역사서를 정치적 목적을 돕기 위한 궁중의 백서로 보았다. 다윗 행정부를 지지하고, 중앙행정부의 권력을 증대하는 것을 주로 목적으로 삼은 신명기적 역사서는 결국 잃어버린 땅을 찾기위해 모세의 법을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유다의 개혁을 주도한 요시아 왕 통치 말기(B.C.E. 622-609년)에 첫판이 나오고 포로시대에 두번째 판이 나오는 등 두개의 판본이 나왔다. 유다가 독립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까지’라는 공식구가 종종 사용되고, 선별된 광범위한 혼합 자료들을 신명기적 역사가가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신명기적 역사서안에 나타난 민족의 운명과 회복에 대한 긴장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적 역사서의 주요 취지는 군주국이 통일되었든 분단되었든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첫번째 판에서는 그 율법을 거듭거듭 어겼기 때문에 북왕국을 멸망하고 남왕국 또한 그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요시아판 신명기적 역사서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준수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망할 것이며, 더 나아가 필요한 개혁은 어떻게든 실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조적 권위주의가 부각되었다. 한편, 두번째 판은 요시아 왕의 개혁이 계속 추진되기는커녕 파국적으로 역전된 형세를 보고 요시아의 실패를 해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정이었다. 즉, 포로 시대의 신명기적 역사서 개정판은, 요시아의 충실함보다는 므나세의 죄악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태를 해명하려는 노력과 함께 야훼의 말씀을 여전히 청종하는 남은 유대인들의 엄연한 현실 극복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신명기적 역사서에 대해 국가의 개혁이라는 상황과 국가 상실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의 두가지 배경을 가정함으로써 이 작품 전반에서 들려오는 파멸과 희망의 이중 메시지를 상당한 정도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신명기적 편집을 감식하기 위해서는, 신명기를 나타내는 주요 특징들에 주목해야 한다.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 개념이 신명기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 계약 사상은 앗시리아 제국 아래서 근동지역에 두루 영향을 끼쳤고, 신명기 저자들도 앗시리아의 사상과 제도적인 유형으로 인해 그들의 계약신학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신명기 초기 형태와 동일시되는 D문서는 이 계약 형식을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는 한 백성을 계약 안에서 만나셨고, 약속의 땅(가나안)을 주셨으며, 아울러 이스라엘을 하나의 제의와 (예루살렘으로 이해되는) 한 중앙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포함하는 하나의 율법(신명기 법전)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다. 약속의 땅에서 누릴 복된 생활에 대한 약속은 바로 그 한 율법에 순종하는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대가이지만, 저주와 징계는 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하지 못한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선포되었다. 전기 예언서들에 나오는 명백한 신명기적인 구절들은 이러한 신명기의 전망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여호수아에서 전격적인 가나안 공격과 부족들간의 영토분배를 다루고, 사사기를 통해서 각 부족들들이 재기하는 가나안족들과 다른 적들에 맞서 그들의 점유지를 공고히 하려고 분투하였다는 전승을 배열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명기적 역사서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땅 정복 기사를 작성할 때 J와 E가 아닌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였다고 믿는데, 이것은 엄밀할 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 J와 E의 어휘 및 문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이다. 모세의 엄숙한 명령과 율법으로 역사를 시작하기 원하는 신명기적 역사서는 JE의 옛 정복 전승들을 그 본래 위치에서 옮겨 새로운 구성의 일부로 개정키로 결정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신명기적 역사서는 완전 또는 부분적 승리에 관한 모순된 전승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5. 신학사상


신명기적인 전망은 전략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신학적인 프리즘’을 제공하기 위해 구제화 되었다. 다음의 구절들은 신명기적 역사서의 신학적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1. 모압 땅에서 행한 모세의 연설(신 1-4장): 역사적 요약으로 백성의 계속적인 불순종과 애굽을 떠났던 세대의 죽음을 말한다.

     2. 정차 시기에 행한 여호수아의 연설(수 23장): 고별연설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모세의 율법책’인 신명기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것을 강조한다.

     3. 사사들이 다스린 시기들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삿 2:11-23): 왕정 역사를 서술하기에 앞서 미리 이 역사가 전개될 과정을 신학적인 견지에서 바라본다. 그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긴장에서의 끊임없는 주기(cycle)이다.

     4. 왕정을 세울 때 행한 사물엘의 연설(삼상 12장): 사사들의 역사가 끝이나고 왕정이 시작된 것에 큰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5. 나단의 신학과 다윗의 기도(삼상 7장): 이스라엘은 다윗이 나라를 다스리고, 그의 가문이 선택된 영원한 왕조라는 사상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정치․종교적인 차원으로 드러간다. 다윗 왕조의 선택 사상을 따라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성이며 야훼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보는 신학이 나타난다.

     6. 성전을 봉헌할 때 드린 솔로몬의 기도(왕상 8: 22-53): 성전과 그 운명은 다윗왕권에 대한 관심에 못지 않다. 성전을 하나님의 현존 장소로 보는 사상이 하나님 자신보다는 그의 이름(신명)이 성전에 거한다는 신명기 신학에 일치되었다.

     7.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왕상 17:7-23): 사마리아의 멸망은 신학적인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백성들의 근본적인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은 신명기적 역사서의 일관된 신학이다.


한편, 각 책의 신학적 입장은 다음으로 요약해 볼 수도 있겠다:


     여호수아: 가나안 땅 그 전체가 약속된 땅이었고, 이스라엘이 이 땅을 점령한 것은 모든 지파들에게 나누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했다.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할때에는 그들의 대적들을 신의 개입으로 이겨냈으며, 정복된 지역은 신의 통제하에 제비뽑기로 분배되었다고 보았다.

     사사기: 신명기 사가에게 이 ‘구출자’들은 직책을 가진 자로서 평생동안 활동한 사사들로서 이해되었다. 신명기 사가에게 이 백성의 주된 범죄는 야훼를 떠나 배교하는 것과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행위였다. 죄의 고백과 회개는 야훼께서 백성들의 곤경에 응답하는 내용에 나타난 기본적인 요소들로 묘사된다.

     사무엘서: 폰 라트는 왕위 계승 설화와 야휘스트의 역사를 다윗의 지배 아래서 시작된 새롭고 좀더 세속화된 존재 질서가 그들의 잠재력을 인간 생활의 모든 단면을 다루기 위해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활동을 ‘모든 세속적인 사태에 광범위하게 숨겨져 있고, 인간생활의 개별적인 단순한 영역까지도 스며들어 있는 ’지속적이며‘ 폭넓게 포용하는 요소로 보았던 솔모몬의 계몽운동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열왕기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단 상태의 역사에 대해서 ‘이스라엘/유다의 왕들에 대한 연대기’를 자료로 삼은 신명기 사가는 도식적인 표상과 신학적인 편집과정을 거쳤다. 즉, 다윗과 비교평가된 유다와 여러보암의 악에 의해 정죄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중편집을 기반으로 해서 살펴본 신학적인 메시지는, 요시아 판 신명기적 역사서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준수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망할 것이며, 더 나아가 필요한 개혁은 실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조적 권위주의가 전면에 부각되어있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적 역사서 개정판에서는, 요시아의 충실함보다는 므낫세의 죄악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태를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교조적 권위주의 그 자체가, 권위있는 해석자인 신명기적 역사가를 통하여 야훼의 말씀을 여전히 청종하는 남은 유대인들의 엄연한 현실에 의해 극복되고 있다.

신명기적 역사는 변증적인 신정론을 제시한다. 곧, 신학적인 주제는, 야훼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고 땅위의 모든 백성들보다 그가 택한 백성을 더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국가와 왕조 그리고 성전이 파괴되고,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약속받은 백성들이 열국 가운데 흩어지고, 하나님의 선물 그 자체인 이 땅이 외국인들에 의해 짓밟히던 시기,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국가적으로 몰락하는 가운데 기록되었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서의 메시지는 공동체가 현재 처한 포로기 생활을 충실히 살며, 야훼와의 계약안에서 미래를 책임있게 선책하려고 도와주려는 의도속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종용한다.

왕권과 관련하여, 왕권제도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을 있다는 구절은 왕국에 대한 기대와 비판으로 조정된다. 신명기 사가는 솔로몬의 등극, 성전 건축, 다윗 왕조 전체의 영원한 존립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원래의 신탁의 내용들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편집자는 겸손하고 경건하고 신실한 다윗을 모범의 상으로 삼았다. 다윗 왕조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표상은 이스라엘이 왕권 존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영원한 존립을 희망하는 신명기 사가들의 신학의 산물이다.

여러 학자들은 신명기적 역사서의 신학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노트는 ‘누그러지지 않은 심판만을 보여주는 단색 그림’으로 이해하면서, 자명한 심판으로서의 재난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훈이나 희망보다는 오직 ‘심판’이라고 볼 수있다.

폰 라트(von Rad)는 율법에 대한 재헌신과 희망에 강조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는 길은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잊지말고,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야훼께로 돌아가는 길임을 강조했다.

볼프(Wolff)는 회개가 신명기적 역사서의 중심주제이며,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587년 이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이라도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브루지만(Bruggemann)은 신명기 사가가 주전 587년 사건을 기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사실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고 아직 계속되는 만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전에 누리던 ‘선하심’을 다시 맞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프레다임은 신명기적 역사가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민 공동체에게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졌다고 보았다. 윌리엄 두얼리는 신명기적 역사의 공의적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 및 경제 정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신명기적 역사서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은총’도 있다는 것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신명기적 역사 자체가 예루살렘 패망 직후 포로기 앞부분에 나온 작품이기에 예루살렘 멸마을 염두애 두면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하나님이 공의 쪽에 무게감이 실려있지 않는가 한다.



6. 역사관


역사는 후대의 평가의 산물이다. 이것은 또한 신학적 입장에 의해 그 방향이 제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성서의 역사의 평가는 다른 역사와는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그 역사속에 하나님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곧, 신명기적 역사관의 특징은 유일신 신앙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에 있어서 몇가지 특징적인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선택박은 백성으로서 특별한 의무가 지워졌다고 보았는바, 이러한 그들의 ‘의무’는 그들이 역사서 앞에 놓은 신명기 법전에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신명기 사가들은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선택의 관계로 보아 이것을 ‘언약’이란 개념으로 고정시켰다. 셋째, 이들 역사가들에게서는 신명기 법전에서 강조된 중앙성소화 문제 때무에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었다.

신명기 사가의 북왕국과 남왕국, 그리고 포로기 이후의 하나님의 관여는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신명기 사가의 입장은 여로보암의 잘못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므로 요약된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차림(왕상 12:28-30), 산당을 세움(13:32-33), 레위인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삼음(13:32), 제의 달력을 고침(13:32), 자신이 직접 벧엘 제단의 제사를 집행함(13:32). 결국, 신명기 사가는 여로보암을 다윗과 비교했을 때, 여로보암은 야훼가 내세운 왕조 건설의 기본적인 조건을 이행치 않았기 때문에, 왕조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고 할만큼 오므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윗을 본따 사마리아를 자신의 도성으로 구입하여 수도로 정하였고, 바알 신전을 건립하였다. 그 결과 바알 종교가 번창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가나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신명기 사가는 오므리 왕조의 치적을 겨우 13절로 요약하면서 ‘더욱 악을 행하였다’고 폄하했다.

신명기 사가는 예후에 대하여만은 색다른 해석을 한다. 왜냐하면 예후가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서 제거했기 때문이었고(왕하 10:28), 예후 왕조는 하나님의 은혜로 수명이 제일 긴 왕조로 남게 된다.

남왕국에서는 북왕국보다는 다윗의 뒤를 이어 야훼 보시기에 올바른 길로 걷는 왕들이 많이 나왔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사리아, 요담을 평균으로 잡아서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극찬한다. 그러나,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바로 느고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종교개혁을 벌이 요시아가 갑자기 뚜렷한 신학적 명분없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유다의 역사가 갑자기 급추락을 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제시해야만 했고, 결국 모든 책임은 므낫세에게 떠 맡겨진다(왕하 23:26).

포로기를 바라보는 노트의 견해는 신명기적 역사서가 과거 역사만 설명했을 뿐 미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서의 마지막 부분은 ‘해피앤드’가 아니며, 또 미래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중앙성소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성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이어지며, 지방의 산당이나 이방신들의 산당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종교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가나안 생활의 부정적 평가가 강조되고 있다. 신명기 역사가는 가나안의 물질 문명과 농경문화, 이교 신앙과 왕제도 등이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의 중요성과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랑과 공의의 공동체는 모세의 출애굽시기로의 신앙 회복과 연결되어 있다. 가나안적 정치체제와 종교체재의 영향으로 변질된 계약을 다시 회복시키므로 가난하고 억압된 자에게 사랑과 평등을 주고,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시키는 것은 멸망한 유다가 다시 회복되기 이전에 꼭 이루어져야 할 문제였다. 그러므로 신명기 사가는 무너진 공동체적 연대감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 유일신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7. 결론


바벨론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생산적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파국의 상황을 그들은 한편으로 예언자적 전통에서(예레미야, 에스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신학적 관심에서(신명기 학파)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죄와 그 심판이라는 현실적 파탄에 대한 해답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숨어있는 신명기적 역사서는 특별히 요시아의 종교개혁과 정치개혁의 산물임을 일차적 해답으로 삼고자 한다. 이는 특별히 본 과목을 통해서 살펴본 예언자들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널리 퍼져있던 다양한 예언자들의 위치가 요시아의 개혁의 산물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다양한 생각을 품게했다. 가장 우선시 된 것은 정경이라는 성경에 대하여 더욱 깊은 사고를 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구약개론에서 표면적으로 다루었던 내용들이 상당 부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승사적인 이해속에서 성경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특별히 요시아와 관련하여 어떠한 목적(중앙집권?)이 반영된 느낌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시대 편집되면서 이러저러한 작은 부분들이 모순되게 보이면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음을 또한 깨닫게 되었다.

짧은 조사는 더욱 깊고 넓은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기에 몇가지 의문점을 적어본다. 어떤 학자는 다윗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하고 있다. 즉, 다윗의 양면성이 너무도 모순되기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일치하기 힘든 허구로 보는 점이다. 아직까지 (아마 주님 오시기까지) 다윗은 예수 다음으로 영웅시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신명기적 전승들에 대한 접근이다. 신명기 사가가 전기예언서에 나타난 모든 전승들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야살의 책, 솔로몬의 행장, 유다나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가 그 근거이다. 그렇다면, 비신명기적 전승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가 의문점이다. 마지막으로, 신명기적 역사서와 문서 예언자들과의 관계이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 몇몇 중복되는 부분들에게 대하여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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