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후기예언서의 희극과 비극적 요소(Norman K. Gottwald)

진실과열정 2005. 11. 4. 16:33
 

Norman K. Gottwald, “Tragedy and Comedy in the Latter Prophets,” J. Cheryl Exum (ed.) Tragedy and Comedy in the Bible. Semeia 32 (1985): 83-95.


     예언을 비극과 희극으로 접근할 때에, 단순히 네러티브 형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네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언의 기록은 내포 네러티브에 대한 ‘경우에 따른 주석(occasion-oriented commentary)’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이미 지나간 일들과 되어지는 일들 사이에 연결점을 찾기 위해서, (전통의) ‘사이읽기(interreading)’를 시도한다.

     예언자의 ‘영감’은 전통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사회역사적 지평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전통은 다양하게 이해되어지고, 그러므로 갈등의 요소가 필수적이다. 해석자에게 어려운 점은 예언자가 어떤 전통을 관여하고 있는가를 확정하는 일이다. 사실, 예언문학은 ‘선집(anthological occasional literature)’이기에 더더욱 확정이 어렵다. 결국, 예언서의 네러티브는 비극과 희극이라는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면이 내재한다. (문학비평에 대한 비평?)


1. 플롯

     프라이(Northrop Frye)의 ∪-모양(희극), ∩-모양(비극)이 예언서에도 해당된다. 예외없이 현재의 ‘악’으로 인해 깊은 타락에 떨어지지만, 이스라엘(혹은 열방)은 회복된다. 몇몇 예언문학은 그 상황을 추측하기에 충분한 네러티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몇몇 특정 본문은 내포 네러티브가 매우 모호해서 그 배경을 구성하기 어렵다. 요나서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한편, 이스라엘 예언의 희극적 플롯은 (1) 비극과 희극 요소의 혼합, (2) 비극/희극의 균형이 미치는 영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진정한 희극이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비극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편집과정에서 편집자의 희극/비극적 추가/삭제는 매우 강력한 결과를 이끌어 낸다(쿠트의 아모스 연구는 지지된다). 그러나, 역시 예언문학은 희극/비극을 규정하기에 기록 연대가 너무 길다. 이는 경험에 따라서 끝없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언서는 비극으로 시작해서 희극으로 끝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소망의 반영인가? 내포된 네러티브에 역사적 위치가 있듯이, 모든 예언서가 희극인 것은 이스라엘의 ‘대가를 치룬 희극’이 그대로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500-250BCE).


2. 주제와 문체의 형식

     이스라엘이 난처하게 된 이유는 지도자들 때문인데, 예언문학은 죄의 책임을 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 동시에 예언 문체는 시문에서 상당한 풍성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도자를 죽이는 날카로운 비판이다.


3. 영웅 혹은 주인공

     간단하지 않으며, 모든 층들을 고려해본다면 심지어 다중적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예언 구도에서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다. 이는 집단일 수 있고, 개인일 수 있다. 혹은 외국이 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과 관련하고 있다. 예언자 자신이 주인공이기도 하다(특별히, 예레미야). 예언적 네러티브는 불성실한 청자들에 대하여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상의 역사(virtural history)이다. 세가지 큰 단위를 예로 들어보자: 사 6-8는 아하스의 불신과 이사야 집단의 신앙이 대조되며, 36-39는 히스기야를 소재로 다른 방향이다. 렘 26-45는 예레미야가 홀로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네러티브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수긍했던 중앙의 세력들이 있었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국가와 제의의 붕궤라는 비극은 동시에 인간의 속임수와 가식을 향한 하나님의 웃음이 되기도한다(렘 1:10). 이렇게 예레미야서에서 보이는 비극에 의해서 강화된 희극이란 요소는 기본적으로는 신실한 포로기의 유대인 편집자(Dtr/ 혹은 예레미야에게 속한 자들)에게 기인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주인공은 안될까?

 

4. 이중 플롯과 사회적 맥락

     예언이 일반적인 희극/비극과 같지는 않지만, 이중 플롯(비극/희극)의 희비극의 한 양태라는 것은 사실이다. 비극은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해당되는데, 이들은 반사회적인 행위로 인해서 무신론적인 삶을 살았다. 희극적 요소는 이스라엘의 비열한 역사를 흡수함으로 극복된다. 죽음보다는 삶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의지는 무엇보다도 놀랄만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비극적 타락이 발생했던 바로 그곳에서 희극적 구원이 달성될 것이라는 점이다. 설득을 위한 예언자의 수사법은 경멸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는데, 특별히 우리가 희극적 분위기를 희망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하다. 심판예언의 ‘단면’은 예언자가 그것만을 고려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예언의 섬세한 결론이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통해서, 공동체가 하나님 아래서 동등한 전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에언자가 과거를 읽었던 파라메타는 부족적 평등성에 기초한 것이다. 예언자적 열정은 단순한 표준적 직관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온전한 삶의 평등과 풍성함을 실현시키려는 강렬한 헌신에서 나온다. 비극에서의 주인공은 지도자들이며, 희극에서의 주인공은 선을 갈망하는 이스라엘이다(물론, 계층적 역할에 저항하는 지도자라면 희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예언에서 비극/희극적 특징을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서는, 고대근동의 정치경제적 역동성과 깊이 관련이 있는 내포 네러티브에 대한, 예언자의 상상력 넘치는 주석과 옹호를 고려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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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월드(Gottwald)는 사회과학적 접근에 있어서 뿌리와 같은 사람이다. 1979년에 발표한 [야웨의 부족]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성서 자체가 하나의 문학양식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사실'을 놓쳐버린다면, 그리고 우리는 문학양식화된 성서를 읽는 신앙공동체라는 '의미'를 놓쳐버린다면, 그 어떤 접근도 반쪽의 성공 밖에 이룰 수 없다. 갓월드는 그의 [히브리성서]에서 이미 그 작업을 이루었다. 예언문학에 있어서 희,비극적 요소를 찾음과 동시에 사회적 역학을 접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진실과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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