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viously, the story of the siege of Jerusalem in 2 Kgs 18-19 utilizes some of the same religious impositional structures as in the literary emplotment of the Ekron episode in Sennacherib's Annals. The religious overtones with the issue of 'trust in the deity' playing a significant role in each demonstrate the inherent religious or theological flavor of all ancient Near Eastern history writing."
K. Lawson Younger Jr., "Assyrian Involvement in the Southern Levant," 2003: 252f.
영거는 라삼 실린더에 나와있는 산헤립의 3차 원정 기록문을 분석하며, 그것이 역사 '보고서'가 아니라, 종교적이며 이데올로기적 문학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상대적인 차원이지만, 산헤립 이후 상당히 종교적으로 극단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아마 선왕 사르곤의 죽음에 대한 해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영거의 주장은, 일종의 보편적인 당대 왕실의 기록문화에 대한 문학적 고려가, 택스트는 곧 역사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열왕기서의 히스기야와 산헤립에 대한 부분 역시,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가의 종교성에 함몰된 이데올로기(신학)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으론, 예루살렘 왕실과 성전 사이의 실무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배경의 차이'가 보다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즉, 아시리아의 강력한 보수적 종교 이대올로기에 일종의 패러디를 보여주었던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성전 그룹이었다면, 오랫 동안 이집트 유학파들에 의해서 추구되었던 지혜 측면의 실무자들이 왕실에서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만약 아시리아가 이집트에 패배했더라면, 히브리성서의 '신명기적 역사'는 완전 다른 내용으로 꾸며졌을 것이다. (그러한 두 그룹들 사이에서, 예언자들의 독자적인 활동이 세대를 거쳐 지속되었다는 점은, 비록 최종 기록자들에 의해서 다소간 윤색되기는 했다지만, 신앙의 실존적 위치를 보여주는 좋은 웅변이라고 생각한다.)
'Bible Study > 구약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손, "우리들의 일그러진 두번째 영웅" (0) | 2020.05.23 |
---|---|
사사기, 영웅전승 (0) | 2020.05.22 |
남유다의 붕괴 (0) | 2020.05.13 |
5평의 휴식처에 살았던 고대이스라엘 (0) | 2020.05.02 |
욥기 42장 6절 (0) | 2020.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