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에 대한 관심들이 대단하다. 문학비평에서 구원의 빛이라고 붙잡고 있다. 아마 이것으로 '거대서사' 혹 '구원사'라는 고속도로를 뚫을수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성서이건 구약외경이건 그리고 신약성서이건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수없다. 무엇보다 히브리 내러티브의 작업실이 왕실서기관의 세계관에 있으며(간단히 예언자의 짧은 신탁들과 비교하면 알수있다), 결국 그들의 역사적 문화적 세계관을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텍스트의 미학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마치 뿌리없는 나무위에 집을 짓는 새와 같다 하겠다. (사실 문학비평의 배경이 뿌리에서 탈출하자 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신약에도 해당될 것이다. 복음서를 '전기'로 보든(버리지), 사해공동체처럼 '공동체 규정문서'로 보든(키), 해당 내러티브 역시 그들을 알지못한채 무조건적으로 기독론으로 읽어내려간다면 그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예언서가 신탁의 형식으로 구성되며, 외경에서 찾을수있는 묵시론적 분위기라든지, 신약서신서에서 드러나는 급진적 사고에서 볼 때, 일반화하기엔 무리겠지만, 특정 장르는 사회 현상을 반영할수있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토대가 분명치못한 격동기였다.
반대로 (언제나 상대적일수있지만) 내러티브를 배태했던 고대이스라엘이나 초대교회는, 물론 태평성대는 아니었으나, 나름의 물리적 환경을 확보할수있었다고 하겠다. 초기 신명기적역사서의 왕실서기관들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르네상스'의 혜택을 누렸다(앗술바니팔의 도서관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J를 솔로몬으로 보건, 페르시아 괴뢰정부아래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건, 최소한 이둘은 서기관의 안전보장을 공통점으로 둔다.
신약 복음서도, 묵시적공동체의 성격을 확연하게 가지고 있으며(마가), 어떤 부분에서는 유대교와 확연하게 분리하여 자신들의 공동체의 특수성을 자신있게 드러내었다는 점에서(요한), 각각의 공동체는 전승을 수집하고 그들의 신앙 이데올로기로 공동체를 이끌어갈 최소의 운영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알수있다. (아마 이것이 영지주의 문헌들과 차이가 아닐까)
그러므로 내러티브 이해는 문학비평만의 사명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학과 인류학을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 고대왕실의 세계관/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잠언이나 서신서와 같이 실용적인 기록물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갔던 이유는, 먼저는 공동체의 정체성 규정에서 찾을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조직이든 그것은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인지라, 결국 확장을 위한 프로파간다로서 어떤 부분에서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후자가 내러티브-DH, 복음서-의 의도가 될수있다. 인간을 단지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모사피엔스로 치부하기엔, 세상은 훨씬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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