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Hanson은, 포로후기에 예언자들이 사회적으로 주변인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이 땅에서 신정론의 가능성을 1도 예견할 수 없기에,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존재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을 고대하는 열망 때문에 "묵시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사회학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므로 예언과 묵시의 연속성을 유의해서 보았다.
그런 측면에서, 에스겔은 상당히 선구자적인데, 비록 보다 완성적인 묵시의 요소들이 포함되어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원시적인 소재들은 부인할 수 없다. 무엇이 에스겔을 묵시와 연결시켰는가? 핸슨의 '사회적 배타주의'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에스겔은 여러곳을 이동한 예언자에 속한다.
페르시아 시대부터 동전을 통한 경제활동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이후 헬라 시대에 들어서는 각 통치자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의 얼굴을 찍어 대며, 자신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사실, 시골의 농사꾼들은 누가 왕인지 알지도 못했고,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때가되면 어느정도의 농산물과 가내수공업물건들을 아쉬움을 뒤로한채 바침으로 안전을 보장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상상속의 통치자'는 귀하게 여겨졌던 주화속의 얼굴뿐이었다(분명히 주화에 새겨진 글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보여주듯이, 상황은 악화되었다. 유다왕조가 사라진지 오래이며, 제국의 행정구역으로서도 그 수장이 하나둘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민간에 전해지는 것은 이름모를 얼굴들에 대한 집단 기억이 아니었을까? 사실, 에스겔의 야훼 이미지는 도상학적으로 페르시아의 것과 상당히 유사함을 킬과 울링허의 연구에서 제시된 바 있다.
집단의 역사적 통찰은, 일단 집단 기억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을 신학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 단계로 어렵지 않게 진행한다.
<페르시아 경제권 아래에서 묵시의 물질적 씨앗은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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