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성서 연구 개론

나는 사실 '거대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진실과열정 2019. 10. 21. 12:50

나는 사실 '거대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신학'이란 이름으로 깊은 성찰은 필요하지만, '무엇인가를 위한/향하는' 신학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순간을 놓치는 통찰에는 편중된 힘의 무게만이 느껴진다. '연속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오히려 궤적의 변화를 이끌었던 일종의 '미분 dx'를 찾는 것이 내겐 우선적이며 바람직하다. 


거대서사는 역사의 시작점이 가지고 있던 (결국 문학적으로밖에 남을 수 없지만) 원초적 '단순명료함'을 포장하고 이용한다: 예를 들면 미리암의 노래(출 15:21)나 예수의 기도(눅 22:40-42,45-46)의 확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왕실의 노래로 만들거나(출 15; J.J.Collins 2004:116) 누가의 신학으로 색칠한다(눅 22:43-44; B.Ehrman 2005: 139ff).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의 또는 지금도) 대중들이 거대서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농사를 지으며 아침해와 저녁노을을 지켰던 시골민들에게 왕조의 변화 혹은 계약신학이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회과학은 고대사회를 철저한 계층사회로 규정한다. 고대사회 3%의 엘리트의 세계관이 여전히 현대를 두려움으로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야훼께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기 이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다양성을 즐겼다(창 17:1; 31:53; 49:24). 


신앙의 표준은, 신앙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유기체와 같다. 그것은 모순까지도 포함하는 신비이다(삼하 12:21-23; 시 18:2). '역대기'를 볼 때마다, 거대서사는 '만들어진 환영'이라고 가끔씩 느낀다(대상 17:14).